소설가와 출판사
소설은 쓰기도 어렵지만 퇴고하는 과정도 어렵습니다. 고치고 또 고치고, 몇 달, 또는 몇 년의 숙성 기를 두면서까지 읽어보고 또 고치고, 그렇게 정성을 다해서 다듬은 후 출판사에 보내어 책이 나오고, 그 책이 마침내 작가의 손에도 들어옵니다.
이번에 제가 다섯 번째로 장편소설을 냈습니다. 책이 나오면 저는 틀린 곳이 있을까 불안하고 두려워서 거의 읽어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낸 장편소설 ‘나의 살던 고향은’은 청소년 소설이라 온라인 소설처럼 쉽게 읽히고 흡인력이 있어서 한눈에 대여섯 페이지를 읽었습니다.
그러던 저는 오싹 소름이 돋으면서 온몸이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소설이라 ‘해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좀 더 과감하게 표현한다면 ‘해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로 써야할 곳(17페이지 위에서 16번째 줄)이 ‘해줄 수가 없었다.’, 즉 3인칭 전지자 소설로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나의 앞으로의 각오를 말하는 것이기에 ‘할 것이다.’로 써야 할 곳(23페이지)이 ‘했다.’ 즉 과거에는 그렇게 했었다는 뜻으로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망신스러워서 몸이 떨리고 눈앞이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국적으로 망신이다. 왜 이렇게 썼을까? 왜 이것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한 번 더 읽어볼걸.’
두려움 때문에 그 책을 더는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암만 생각해도 그런 엄청난 실수를 하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읽어보고 고치고 했는 데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니 이상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제가 출판사에 보낸 원고를 다시 검토하여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출판사에서 그렇게 고쳐놓았던 것입니다.
'출판사가 작가를 죽이는구나! '
억울하고 울화통이 터져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전화를 걸어서 출판사 사장에게 강력 항의했습니다. 틀린 부분의 증거를 만들어서 이메일로 항의 문자도 보냈습니다. 조금 후 출판사 사장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미안하다.' 잘못을 인정한다는 전화였습니다. 사장의 그런 답에 저는 어떻게 합니까? 괜찮다고, 걱정하지 마시라고 하였습니다.
사실을 알고보니 출판사 측에서는 좋은 뜻으로 수정했던 것입니다. 글을 더욱 좋게 다듬어주려는 호의적인 뜻에서 수고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것이다.’라는 표현이 많이 들어가 있는 글은 주관적이고, 세련미가 떨어지기도 합니다. 출판사 측에서는 그것을 다듬어주려고 손을 댔던 것입니다. 문제라면, 수정할 곳이 발견되면 표시만 해놓고 작가가 고치도록 통보해 주거나 임의로 고쳤으면 즉시 그 사실을 작가에게 알려주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은 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나무도 보고 숲도 보라’는 교훈이 있습니다. 나무만 보고 가지를 자르면 숲 전체의 아름다움이 망가진다는 교훈, 출판사 측도 원고의 단어 하나 고치면 얼마나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지를 새삼 알았을 것입니다. 소설가가 구사한 단어나 문장 부호 하나에는 얼마나 심오한 뜻이 담겨 있으며 얼마나 넓은 세상과 결합되어 있는지도 알았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18. 2. 14 소설가 박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