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인천 송도에 사는 동서 집에 찾아 갔다. 처제가 반갑게 맞이하였는데 의원을 운영하는 동서는 토요일에도 오후 2시까지 진료를 해서 아직 퇴근하지 않았다. 아파트에 무료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무심코 창밖을 보니 근처 넓은 공원이 보였다. 공원이라도 산책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밖으로 나서려니 부슬비가 내린다. 맞아도 될 정도라는 생각에 그냥 돌아다녔는데 무지개 색 우산을 쓴 소녀가 지나가다가 보고 묻는다.
“안녕하세요?”
“응, 안녕!”
“이렇게 비가 오는데 비 맞아도 괜찮으세요?”
“어, 괜찮다. 고맙다.”
산수유 꽃이 가득 핀, 비 오는 날 공원 모습과 요즘 세상아이 답지 않게 친절을 베푸는 소녀의 인상이 겹쳐진 봄의 서정이 내 가슴에 실감으로 안기어 전주 집으로 내려온 한참 후에까지 지워지지 않았다.
따스한 아지랑이 기운 속에서 새싹이 돋고 꽃이 만발하는 봄은 공원 소녀의 미소나 가랑비 같이 연하고 선하여 나는 사계절 중에서 봄을 더욱 좋아한다. 모든 생물이 기지개를 틀고 움을 트는 의미도 중요하지만 마른 잔디나 떨어짐이 게을렀던 나뭇잎들이 부슬비에 촉촉이 젖어 진하게 보이는 것도 좋다. 내가 이른 봄, 꽃이나 새싹들을 ‘선한 것’으로 굳이 정하려 하는 것은 원색으로 진하지 않다는 것보다 꾸밈이 덜하면서도 나서려 하지 않는 겸손한 느낌 때문이다. 개나리나 벚꽃의 화사함도 주변에 진한 녹색이 없고 눈부신 햇살에 상쇄되며 애써 자태를 뽐내려 들지 않는다. 특히 바위 뒤에 숨어 피는 진달래며, 마른 상수리나무 잎이나 솔잎 이불을 헤치며 올라온 작은 제비꽃의 보라색이 더 연하게 느껴진다. 그에 더하여 겨우내 내린 폭설이나 살을 에는 바람의 심술에서 잘 견뎌온 의지가 배어 있어 더욱 감동을 준다.
이처럼 연하고 선한 느낌으로 다가 오는 것은 또 얼마든지 있다. 진흙땅을 비벼 틀고 일어난 냉이나 씀바귀, 줄지어 걸어가는 유치원 아동들이 마주보며 재잘거리는 모습, 소녀의 보조개와 화난 손녀의 뾰루퉁한 입술, 연미복의 꼬리와 다소곳한 여인의 치마 매무새, 이른 아침 피어오른 안개, 부는 바람에 살랑이는 마른 억세 꽃,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영화에서 눈물 머금은 잉그릿드 버그만의 미소, 버들강아지 끝에 보석처럼 맺힌 가랑비 물방울, 후리지아 꽃을 선물 받은 아내의 얼굴, 구세군 자선함에 돈을 넣는 해맑은 아동의 웃음 등 헤아릴 수 없다.
낯선 아저씨에게 비 맞는 걱정과 미소를 안겨준 소녀의 생각처럼 우리들 마음은 좀 더 따사롭고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 수 없는 것인지. ‘삶은 전쟁’이며, 그래서 굳은 각오로 싸워야 하고 믿지도 말고.... , 방송시간 끝나 치치치 소리 나는 TV화면처럼 식상되어버린 현실에서도 아껴둔 옷 한 가지, 돼지저금통 들고 기부하는 주름진 손이나 코딱지 소년, 호흡기 꽂은 아이들 때문에 고통 받는 엄마의 모습에 눈물 흘리는 사람들, 오랜 시련기를 거친 노인들의 모습이나 신문배달 소년의 얼굴 등 그들의 진솔한 모습이 나를 울렁이게 한다. 난 아직도 보잘 것 없는 시골뜨기 소년이라는 생각을 지우지 않으려 애쓴다. 또 ‘나의 집’이라 하지 않고 ‘우리 집’이라고 하는 표현을 좋아한다. 사랑의 전제는 희생이라고 하는데 희생은 관심과 배려, 나눔과 배풂이라고 생각하고 산다. 나는 우리 안에서 더불어 살며, 행복과 기쁨은 물론 고통과 슬픔도 얻는다. 문학의 많은 장르가운데 굳이 수필을 선택한 것도 연한 것 이상의 편함이 있기 때문이다.
연하고 선한 것은 진실이나 아름다움, 바름과 기쁨, 두고두고 기억하게 하는 추억들과 이웃한다. 기억나지 않는 ‘책 사이에 꽂아 둔 꽃이며 나뭇잎’, 정리하는 책장 가운데 나온 빛바랜 편지들, 이름이나 사는 곳도 모르게 된 사진속의 옛사람들, 그들이 나를 가슴 저리게 하고 밤을 지새우게 한다. 선한 눈은 선과 마음의 아름다움을 먼저 보게 하며 연함은 겸손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오래전 습작노트에 메모해둔 글, 또 다시 새겨본다. 즐거움이나 슬픔도 엷은 봄 색처럼 저며 오면 좋겠다. 흔히 밟히는 민들레 꽃잎도, 냉이의 연초록 이파리도 좋다. 향이 된장처럼 밀려와도 좋지만 오이처럼 상큼하면 더욱 좋겠다. 지난 긴 시간의 흐름 속에 편린처럼 묻힌 발자국들, 그 아련함이 가슴을 메어오지만, 시나브로 부는 바람이 창을 넘어 낯을 간질이는 지금, 내가 살아있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감사하자. 햇살이 눈부신 연한 이 봄날엔 더욱!
가랑비가 차츰 굵어져 어깨위로 쌓여간다. 많은 생각을 안겨준 소녀와 봄날의 정원이 안개 속으로 묻혀가는 가운데 소녀가 간 길을 따라 아파트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