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북촌리에 대학살이 벌어지던 그날, 아침부터 총소리가 나더니 군인들이 마을 동쪽부터 불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연설이 있으니 학교 운동장으로 집합하라 했습니다. 군인들은 우선 경찰가족, 군인가족들을 따로 분리시키더군요. 낌새가 이상하다 여긴 사람들은 사돈의 팔촌이라도 경찰이 있으면 경찰가족 쪽으로 줄을 섰습니다. 군인들은 우선 민보단 간부를 불러 내 바로 총살했습니다. 사람들이 동요해 흩어지기 시작하자, 군인들이 사람들 머리위로 총을 난사했는데, 그 과정에서 너댓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중엔 한 부인도 있었는데, 업혀있던 아기가 그 죽은 어머니 위에 엎어져 젖을 빨더군요. 그날 그곳에 있었던 북촌리 사람들은 그 장면을 잊지 못할 겁니다.'
증언: 김석보, 1998년 63세, 조천읍 북촌리
그림 : 젖먹이. 강요배 작. 2007년
출처 : 강요배, 김종민 저. 동백꽃지다. 보리출판사. 118-119p.
처음 이 작품을 보았을 때, 나는 4.3을 스스로 공부한 한국 현대사 속의 작은 항쟁정도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마 한 아이의 아비가 된 지 얼마 안되었을 즈음일 것이다. 가슴 한 켠이 짓눌러지는 듯한 아픔에 한동안을 먹먹한 마음으로 지냈던 것은 아마 그 즈음부터 알게 모르게 느껴지던 부성애때문이었을 것이다.
47년 3월 1일, 3.1 시위투쟁 중에 경찰의 발포로 주민들이 희생된 시점을 시작으로 48년 4월 3일 한라산 중턱의 수많은 오름의 봉화를 기점으로 시작된 무장투쟁,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인 54년 9월 21일까지의 공권력에 의해 무고한 주민들의 희생까지, 4.3항쟁은 제주 역사의 커다란 상처였다. 당시 30만 인구의 10분지 1인 3만명이 공권력과 미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했다. 젊은 사람들은 여지없이 죽임을 당해, 최근까지도 제주에는 특정연령층이 희박했고 3월말 4월 초 즈음에는 여기저기서 제사행렬이 이어지는 특이한 현상이 벌어진다. 그렇지만 위의 사진이 말하듯, 대체 누가 반란군이란 말인가, 아이를 업고 밭일을 하던 아낙이 반란을 일으켰단 말인가, 아니면 거동마저도 불편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반란군이란 말인가. 소위 무장대라는 집단은 몇백에 불과한 소수집단이었지만, 그들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반란에 가담할 소지가 있거나 무장대와 연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수많은 인민이 아무런 죄없이 집이 불타 없어지고 돌담낀 검은 흙밭에 수용된 채 집단 학살을 당해야했다. 그 반란이라는 것도 군경과 서청단원에 의한 모진 고문과 탄압끝에 생긴 일 아니던가, 그 시대 공권력이란, 인민의 생명과 자유를 보장하는 집단이 아닌, 이념과 제체유지를 위해 무엇이든 탄압할 수 있는 맹렬히 훈련된 사냥개의 이빨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사냥개들이 자행한 일이란, 모든 전투수칙과 민간인의 생명과 보호를 깡그리 무시한 그들만의 피의 잔치일 따름이었다.
공권력의 원조, 대한민국 건국초기 그들의 만행들. 공권력은 한 마을에서 집단으로 학살당한 이들을 위해 세운 위령비인 '백조일손비'를 5.16이후 앙갚음으로 파괴해 땅에 묻어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2년 전, 우리는 100만의 인민들이 거리로 나와 정부를 성토했던 광화문 앞에서 무차별로 폭행을 가하고 군홧발로 짓밟던 공권력을 기억한다. 공권력의 실체, 특히 반공으로 무장하고 친일파들이 그대로 완장을 이어받은 대한민국 공권력의 근본과 본모습을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국민의 생명과 안위가 아닌, 안정된 권력일 뿐이다. 그들이 국민을 생각한다면 사설업체에 보안과 치안을 맡기는 그런 무책임함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MB정부 이후, 그런 공권력의 후안무치와 뻔뻔한 권력싸움을 자주 목도하고 있다. G20이란 가진자들의 잔치앞에서 공권력이 보여준 모습엔 인민들의 생계와 생활에는 여지없는 무관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저 권력자들의 안전과 호위만이 그들의 관심이었을 뿐이다.
제주에 살게 되면서 4.3은 그저 역사의 한 비극만으로 받아들일 수 없음을 느낀다. 4.3의 상처는 아직도 진행되고 있었고, 그 상처를 마음 한 켠에 받아들고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많이 보게되기 때문이다. 하늘을 나는 까마귀, 무성히 자란 나무들, 검은 흙들은 수많은 영혼이 깃들고 피흘린 육신이 스며든 모습이다. 당장의 현재 제주공항 활주로 아래에는 1950년 8월 19일부터 20일 새벽까지 예비검속자 수백명이 집단학살되어 매장되어 있다. 내 집 바로 옆의 사라봉 앞바다에는 수백명의 예비검속자들이 산채로 수장당한 장소이다. 가끔 이용하여 오고가며 내리는 공항, 차를 타고 다니는 도로 아래, 그리고 마냥 좋다좋다 연발하는 수많은 오름에는 현재를 살아가는 누군가의 상처가 되어버린 영혼이 스며든 장소인 것이다. 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다보면 만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특히 70,80세가 넘은 분들에게 난 그때의 일들을 물어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의 상처를 헤집는 일이 질문받는 이들에게는 얼마나 괴로운 일이던가.
화보와 증언을 읽어가며, 공권력에 대한 근본성에 의문을 품기도 했지만, 제주에서 살아가게 된 입장에서 아픔은 곳곳에 존재함을 느낀다. 이제는 이곳 젊은 사람들에게도 그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들려주던 옛적 이야기로만 치부되고 있는 사건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머지 않았던 시간에 일어나 아직도 그 생생함이 느껴지는데 이 땅의 아픔을 간과하고만 살 수 있을 것인가. 이곳의 역사를 알아가는 한 사람에게, 그것은 더이상 말을 한다는 것을 불가능케 만들어버린 어릴적의 강렬한 심리적 상처와도 같은, 아직도 존재하는 깊은 트라우마로 다가온다. |
출처: 칼을 벼리다. 원문보기 글쓴이: 민욱아빠
첫댓글 가슴아픈 우리 역사의 한 모습입니다...
어디에나 아픔은 존재하지만.. 이 섬의 아픔은 아직도 여전한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