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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구경 - 전복全鰒 그 후
김 수 영
아니라고 몸이 말을 한다. 머리는 텅 비어서 나를 이끌지 못한다.
아침에 앞산을 쳐다보니 비 그친 하늘 밑이 눈이 아리도록 파랬고 익고 있는 단풍이 불타듯 했다. 오늘은 일이 끝나는 대로 앞산을 다녀와야겠다 했다. 그래서 먹고 마실 것을 몇 가지 배낭에다 챙겼는데 그때야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아니지. 누나가 단풍이 들면 참 곱겠다 했으니 팔조령이나 다녀오자. 어찌 혼자서만 단풍구경을 가겠는가.
하여 운전하기 편한 운동화를 꺼내 신고 혹시 사람이 없을지 모르기 때문에 등산화도 들고 나간다. 나머지는 그대로 나서면 된다.
골목에다 차를 세워놓고 갔더니 민정이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다. 엄마는? 하고 묻자 노인정에 점심 먹으러 갔다는 것이다. 방금 갔는데요 하기에 어서 가보라고 엄마가 단풍 얘기를 해서 가보려 한다고 일러준다.
-약속을 했어예?
-아니, 그때 팔조령 갔을 때 엄마가 단풍이 곱겠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 가보려는 것이다. 얼른 가봐.
몰랐더니 노인정은 차를 세워둔 길가였다. 조금 있더니 누나도 민정 이와 함께 나온다.
-와? 어데 갈라고?
-가창 댐으로 해서 단풍 보러 가자고. 비 오고 나면 또 못 볼지 몰라서.
민정에게 누나가 윗도리 두터운 것을 들고 나오라고 시킨다. 차를 태워서 시동을 거는 사이 민정이가 빨간색 점퍼를 들고 나온다. 같이 갈래? 하고 묻자 손님이 올지 모르니 안 된다고 한다. 그래 갔다 오마 하고 차를 부린다.
-저기 가면 내가 자주 가는 추어탕 집이 있어. 그 집이 청도 추어탕 맛과 똑같아.
배고프냐고 덧붙여 묻는다. 괜찮다고 한다. 집 앞 신천 대로를 지나서 가창으로 진입한다. 가창 댐 길로 길을 꺾는다. 몇 그루 서 있는 교목들 사이로 댐 둑이 보인다. 저기가 가창 댐이라고 말하자 누나가 여게꺼정 나무하러 다녔다고 한다.
-나무하러? 언제 왔어?
-봉덕 파출소 앞에 살 때.
그때라면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용두 방천 옆에 살 때뿐이다. 봉산동인가 하는 동명은 기억나지만 자세한 영상은 없다.
-댐이다. 차를 내려볼래?
길가에다 차를 세우고 누나에게 댐구경을 권할 참이다.
-아이다. 그양 가자.
-가자고?
-그래.
주차된 차를 다시 차도로 밀어 넣는다. 도로가 한산해서 차를 운행하기엔 좋은 날 같다.
-저 봐라. 단풍이 곱지? 비 오기 전에 이곳을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며칠 있으면 단풍이 곱겠다 했더니 아주 좋네.
-설악산이 필요 없다. 와 사람들이 그라는지 몰라. 여게도 좋은데.
-그러게 말이지.
그 생각은 나하고도 같다. 나도 일전에 그런 생각을 했다.
-아이구야. 이런 동네가 있었네. 여게도 집이 많다. 비쌀 끼다.
공기 좋지 시내 가깝지 하고 내가 맞장구를 친다. 그 생각도 나와 통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정작 들어와서 살라고 하면 멈칫거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노인들에게는 노인정만큼 병원도 가까워야 하기 때문이다.
-길도 우째 이러쿰 잘 해놓았겠노. 아이구 참.
누나는 꼬불꼬불 돌고 도는 왕복 2차선길을 두고 놀라워한다. 저 봐라 여기도 단풍이 굉장하지? 하고 나는 창 너머 만산홍엽을 가리킨다.
-우째 이런 길을 닦았겠노 그제?
내 말은 듣지 않고 누나는 연신 골짜기로 연결된 포장도로에만 신경을 쓴다.
집에 미나리 한 단을 팔고 갔다. 만 원을 달라고 하는데 비싸서 안 살라고 했다가 비도 오고 해서 팔천 원에 한 단 사줬다. 3천 원은 떠라놓고. 여게 미나리가 비싸더라.
-비싸지?
지난해 나도 이 지역 미나리를 사 먹은 적이 있다. 그때는 고모 집 부근에서 샀는데 비닐로 포장된 한 단 값이 7천 원이었다. 전에 살던 곳에서는 2천 원이면 되었다. 그 미나리는 전국적으로도 알려진 청정지역 미나리였다. 양이야 조금씩 다르지만 어째서 가격 차이가 그처럼 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구 참, 길도 잘 닦아 났제. 우째 이러쿰 골골이 잘 닦아났겠노.
-버스가 여기까지 들어온다.
도로에 대한 누나의 감탄은 끝이 없다. 하지만 이런 길은 예전부터 있었던 것이지 근래 와서 닦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지금 말투는 개통일이 엊그제라도 되는 양 신기해한다.
-그러니까 사람이 이러쿰 살지. 집도 참하게 져났네. 이런데다 땅이라도 사났더라면 민정이가 와서 장사를 하마 얼매나 좋겠노. 예전에는 땅값도 안 비쌀 낀데.
-그럼. 고추도 심고 배추도 심고 했더라면 요새는 금값이 됐을 거지.
예전에도 땅은 샀었다. 작은누나에게 모두 일임한 것이 밑 빠진 독이었다. 누나 생각에는 그런 어리석음을 개탄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심 서방은 한 분씩 오더라도 이런 데도 몬 온다. 퍼뜩 왔다가는 아침만 되마 가야되니까.
차는 길을 따라 계속해서 골짜기로 파고든다.
-바쁘니까 그렇지. 일하는 사람이 그럴 여가가 있나. 놀러 왔다면 모르지만.
미안해하는 것 같아서 내가 오히려 심 서방을 이해한다는 뜻으로 말한다.
-아이구 참, 질도 잘 대 있제. 우째 이런 데다 질을 냈겠노.
-누나, 저기 봐. 저 산에도 단풍이 한창이네. 비 오고 바람 한 번 불고 나면 전부 떨어질 것이다.
단풍을 실컷 봤으면 좋겠는데 길에만 신경을 쓰는 것이 나로서는 내심 애가 쓰인다.
-어데고? 여게가 팔조령이가?
-아니, 지금 가는 데는 헐티재다. 넘어가서 점심 먹고 팔조령으로 올라갈 것이다. 여기는 헐티재라는 데다.
-헐티재? 헐떡거리면서 올라갔던 갑다.
-그래. 헐티재. 여기서 길을 꺾어 가면 이제부터는 고갯길로 올라간다.
-저게 팔각정도 있네.
-그래. 여기서부터는 고갯길이다.
아이구 참 길도 잘 닦아났제 라는 말을 누나는 시종 입에 달고 있다. 단풍이 아니라 오히려 길에 관심을 보이는 속내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한다. 잘 닦은 길이라면 호남이나 경부나 중부고속도로를 덮을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 길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은 아닌지, 심 서방은 올 겨를이 없다 했고 설악산 얘기도 나왔으니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나 대꾸를 삼간다. 말문을 트면 책임도 따르기 때문이다.
-이러쿰 가마 팔조령이가?
-팔조령은 점심 먹고 가고 지금 여기는 헐티재란다. 헐떡거리면서 올라온 재.
-아, 그래.
-무슨 재라고 했나? 말해 봐라.
-무슨 재?
-헐티재다. 나도 이사 와서 처음 들었다. 자전거를 타고 두 번인가 올라와 봤다.
-그랬디나?
다시 무슨 재냐고 묻고 싶지만 공부가 아니라 추궁하는 것 같아 침묵한다. 그새 차는 고개 위로 올라선다.
-다 왔다. 좀 쉬었다 가자.
차를 세우고 누나를 차에서 내리게 부축한다. 가방에서 준비했던 고구마와 포도를 담은 그릇을 꺼내 햇빛이 밝은 바깥 의자에 앉힌다.
-여게가 헐티재가?
맞은편에 보이는 입간판을 보고 누나가 혼잣말처럼 말한다.
-그래.
-저 밑에는 어데고?
-지난번에 갔던 팔조령 아래는 이서면이고 여기는 각북면이다. 청도군 각북면, 들어봤나?
-아니.
도리질한다. 농사가 잘돼서 풍년이 들었음을 노란 들판이 알려주는 것 같다.
-고구마는 먹지 마라. 포도만 입가심해라. 내려가면 잠시 후에 점심 먹을 것이니까.
지난번처럼 고구마 때문에 점심을 못 먹겠다는 핑계가 나오지 않도록 플라스틱 통을 내 앞으로 돌리면서 말한다. 고구마와 포도 말고도 커피며 생수며 떡이며 초콜릿이 있지만 불필요해서 꺼내지 않는다.
-포도가 다네.
-전에 그 포도다.
누나, 생각나? 전에 포도 먹던 날 말이지. 그날 내가 누나한테 큰 충격을 줬었지? 기껏 전복죽을 사줘 놓고는 먹다 말고 집에 가져갈 것이라고 하자 빼앗듯이 내가 먹어치웠잖아.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 오늘 나들이를 하게 된 거야. 섭섭하지 않지? 아니, 지금도 서운하나? 그날은 누나가 너무 잘 못한 것이야. 일부러 잘한다는 집을 찾아서 갔는데 성의도 생각했어야지. 안 그래도 전복에 관련된 누나의 이미지가 안 좋은 나인데 말이지. 그 일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지만 누나가 하기 따라서는 불쑥 꺼낼지도 몰라. 되도록 내가 참고 말겠지만 말이지.
-됐다. 가자. 칩다.
-그럴까? 배고프지?
-아침을 안 묵었다. 오늘 노인정에서 회비를 내면 밥을 주기 때문에 거게서 묵는다고 민정이만 묵고 나는 기다렸다. 그래도 보통 늦게 밥을 묵기 때문에 배는 안 고푸다.
-그럼, 가자. 여기 내려가면 길가에 할매들이 나와서 나물도 팔고 감도 팔고 장사들이 많이 있다.
고갯길을 내려간다. 추워선지 할머니들은 많지 않다. 감 바구니만 몇 개 보인다. 청도가 감 고장이라 온통 길가에 보이는 것은 감뿐이다. 그걸 보자 누나가 헤헤이 헤헤이 하고 놀란다. 서리 맞출라고 안 땄는가배 한다. 그럴 수도 있지만, 일손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벼도 거둬들일 시기이기 때문이다.
-여게는 벚나무가 참 많네.
길가의 가로수들이 느티나무인지 벚나무인지 모르고 지나다녔는데 누나가 먼저 알아보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느티나무이기보다는 벚나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하, 이건 또 누나가 새로운 과제를 주네 싶다. 하지만 이전에 단풍 얘기 때도 그랬듯이 응대를 하지 않는다. 움직여야 움직이는 것이지 미리 언질을 줄 수 없는 까닭이다. 그것은 누나 때문이 아니라 내 사정이 안갯속이기도 해서다. 오늘처럼 마음이 활짝 열린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벚꽃이 오만성 피었다 해도 무용한 설화說花일 뿐인 것이다.
쭉 바로 가면 청도읍이고 옆으로 가면 팔조령이라고 알려준다.
-아이구야. 저 보래. 저게도 전부 감이네. 그런데 여게 감은 우째 씨가 없겠노. 그라마 감나무는 우째 키우겠노.
-그건 깨양나무에다 접을 붙이잖아. 깨양 알지? 손마디만한 크기에 온통 씨만 바글바글한 열매 있잖아.
-그래, 깨양.
표준말은 고욤이다.
-그걸 싹 틔워서 댓줄기만 하면 잘라서 접붙이잖아. 씨 없는 감나무 가지를 꺾어서 맞추는 거야.
동네 어른들이 하는 것을 보면서 몇 번 해본 적은 있다. 성공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아, 깨양하고 그라나.
차는 이서면으로 들어와서 대복 오거리로 접어든다. 대복리로 진입하는 좌측에 이서 추어탕이 있다. 점심때여서 들어온 차들이 많다. 점심이 늦지 않을까 했더니 들어가자 바로 안방에서 먹고 있었던 아주머니 여남 명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계 모임 아니면 동창회 정도인 듯하다.
누나는 추어탕 나는 청국장으로 나누어 주문한다. 여기서는 남겨서 접때처럼 사서 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싶으니 안심이 된다. (만일 그런다면 민정이 몫으로 한 그릇 포장해갈 용의는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누나가 절대로 그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난번에 혹독하게 대었기 때문이겠다. 그 점이 나로는 은근히 미안한 부분인 것이고.)
-두부도 먹어볼래? 이 집에서 직접 농사지어서 만든 손두부인데 맛이 고소하다. 저기 구석에 쌓아둔 것이 이번 가을에 타작한 콩자루다.
-비지나 있으마 좀 사가지 머.
아들이 회사가 쉬는 날이라면서 쟁반에다 상을 차려 들고 나온다.
-필요한 거 있으시면 부르세요.
-네.
누나 앞으로도 콩 접시를 비워 청국장을 떠준다.
여게도 비지가 있네 하면서 누나가 비지부터 한 숟가락 떠먹는다.
-국이 뜨겁다. 천천히 식히면서 먹어라.
먹어보니 밥도 잘 되었으면 좋겠는데 물기가 많고 질다. 그러나 청국장은 짜지도 않고 입에 잘 맞는다. 누나보다 내가 먼저 그릇을 비운다. 커피를 뽑으면서 주방에 있는 아들을 부른다. 지난번에 외상값하고 콩비지 둘과 두부 한 모를 새로 주문한다.
-사장님이 외상하셨어요?
-여기 점심 먹으러 온다면서 지갑을 들고 나오지 않았지 뭐예요.
-하하, 그러세요.
계산한 뒤에 커피잔을 들고 돌아가자 누나도 밥술을 놓는다. 밥도 국도 조금씩 남아 있다. 대신 청국장 한 접시와 비지 한 접시는 비웠다. 추어탕이 맛있네 하면서 누나가 손등으로 입술을 문지른다.
-커피 마실래?
-안 묵는다. 지금 묵으마 잠 몬 잔다. 엊저녁에는 꼬박 샜다.
-......
몸이 약한 탓일 게다. 하지만 거기 대해서도 대꾸하지 않는다. 누나의 잔꾀랄까 속내까지 알고 있는 나로서는 대안을 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잘 먹었습니다 하고 주문한 두부와 비지를 받아 식당을 나온다.
-햇빛이 참 좋제. 바람은 찹은데.
-이 바람이 무섭다. 곧 겨울이 온다는 증거다.
-그래 말이제.
누나를 태워서 팔조령을 향해 달린다. 오는 길에 길가에 심어진 감나무를 가리키며 누가 감을 모두 따갔다고 하자 와 그라노, 보기가 좋을 낀데 한다. 휴일도 아닌데다 오래전부터 쉬는 휴게소라 주차장에는 차가 한 대도 없다.
-여게가 팔조령이가? 전에 왔던 데제?
-그래.
-문 닫았네. 장사가 안되는 가베.
-따뜻한데 좀 앉았다가 가자. 저기 누나가 고울 거라던 단풍이 한창 물들고 있다. 며칠 있으면 더 붉어질 것 같다.
-아이구 따시라. 저게는 어데라 캤노?
정작 당신이 곱겠다던 단풍에는 관심 없고 전에도 물었던 아래쪽 들판을 가리키며 묻는다.
-여기는 이서면이고 아까 그 산 밑은 각북면이다.
-매전면은 어데고?
갑자기 누나가 옛 고향을 묻는다.
-거기는 저쪽이다. 왜? 가보고 싶나? 몇 년 전에 뒤실까지 가봤잖아.
-아이라, 지난 수요일에 비가 마이 왔제? 그날 어떤 보험 하는 여자가 왔어. 자기가 매전면에서 장사했는데 그만두고 보험을 한데. 그래서 내가 매전면이 우리 고향이라고 하니까 가보고 싶겠네요 한단 말이지. 그때 나는 와 할매 생각이 났겠노. 할매가 내가 다섯 살인가 그랬는데 어무이를 마당에다 머리채를 잡고 휘둘러서 내던지는 것을 봤어. 뒷집인지 옆집에다 뭘 퍼주었다는 것 같애. 그래서 우리 할매도 매전면 사람인데 와 할매가 그처럼 거센지 그 동네 가서 한 분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데. 그렇다고 하니까 자기하고 같이 가보자는 거야. 그런데 비도 오고 우찌 남의 차를 타고 가노. 가도 사람이나 있겠나? 또 할매 죽은지도 언젠데.
-......
-내가 서른만 돼도 할매를 보고 따져볼 것인데 소용없는 일이제.
할머니랑 큰엄마 사이가 지극히 안 좋았다는 얘기는 여러 입을 통해서 듣고 안다. 반대로 할머니와 사이가 좋았다는 사람은 시골에 있는 두봉이 아지매뿐이다. 그 집으로 자주 놀러 가서 자기 시어머니랑 친하게 지냈다는 얘기를 몇 번인가 들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내가 아는 할머니는 한 마디로 기가 센 여자였다. 그런데 누나가 할머니 얘기를 불쑥 꺼내는 것은 내게 대한 도발이며 반감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약자였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며 참는다.
-나하고 지금 매전면에 가볼래? 간들 할머니를 아는 사람이 있겠나? 없으면 어떻게 알아보겠나?
할머니의 친정이 명대리였다는 것은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난다.
-몬 간다. 어무이가 그렇게 당하던 일이 생각이 나서 가보자길래 그때 그랬다는 얘기다. 하이구 참, 어린 생각에도 할매랑 어무이가 와 그러쿰 싸우나 하고 나도 속이 상해서 얼매나 울었던지 모린다.
-가깝다. 곰티재 넘으면 금방이다. 가보자.
밥만 먹고 돌아가는 것 같으니까 한 바퀴 돌고 들어가면 좋을 것이다.
-마로 가. 니도 피곤하다. 집에 가자.
-나는 괜찮다. 누나가 춥나? 안 갈래?
-안 칩다. 그양 가자.
단풍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다시 차에 오른다. 왜 이전의 관심이 지금 와서 달라진 것일까? 곱겠다던 단풍을 뒤집은 다른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나를 보자 생각이 바뀐 것일까? 아니면 할머니 때문일까?
-자지 마라. 여기가 굽이굽이 팔조령 옛길이다. 이 길을 예전 사람들은 걸어서 다녔다. 올라온 길은 이서면 팔조령이고 지금 가는 길은 대구 팔조령이다.
안전띠를 단단히 매주고 출발한다. 도중에 있는 한 무덤을 보고선 참 잘해놓았다 한다. 그러더니 축대 석을 잔뜩 쌓아두고 공사를 앞둔 무덤을 보고는 씰데 없다, 죽으뿌마 누가 아노, 저들끼리나 알지 한다.
-이 골짜기는 범골이다. 옛날에는 범도 나왔던 곳인가 봐.
그러나 그 말에는 누나가 입을 닫고 있다. 자는가 해서 돌아봤더니 그렇지는 않다.
-다 왔나?
터널 앞에 이르자 누나가 금방이라는 듯이 말한다. 자전거로도 내려오는 길은 6분 이내이고 올라가는 길은 16, 7분이면 되는 거리다.
-그래. 이제 가창으로 들어간다.
-가창이가?
달랑거리며 코다리를 실은 차가 앞으로 추월해간다. 코가 꿰어서 달랑거리는 코다리의 이미지는 늘 봐도 웃음이 난다. 내가 처음 지금과 흡사한 광경을 보고서 찔찔거리면서 한참 웃었던 것은 흑석동에서 잠실로 출퇴근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그 뒤로 나름의 귀동냥을 했었다.
-누나, 조금 전에 지나간 차 봤어? 저기 앞에 가는 차.
-으엉.
안 봤다고 고개를 젓는다.
-내가 얘기해줄게. 명태를 바다에서 막 잡으면 그걸 뭐라는지 알아?
-밍태?
-그래. 명태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어. 들어봐. 다듬잇돌에 올려서 툭툭 두들겨 국 끓여 먹는 명태는 북어, 북어는 알지?
-그래, 북어.
-그것보다 덜 마른 명태가 방금 싣고 가던 것인데 코다리라는 거야. 오징어 덜 마른 것을 반피디기라고 하지? 그처럼 약간 덜 말라서 피득피득한 상태의 명태를 코다리, 코다리 해봐.
언젠가 갔을 때 누나가 내게 곱씹었던 말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람을 사람 같지 않게 만드는 치매란 병을 두고 한 말이었다. 큰엄마가 치매 때문에 오래 신고하시다 돌아가셨음인지 누나도 몹시 그 병을 무서워했다. 본인 고생은 잘 모를 테지만 자신을 대입시켜 곁에 있는 민정이가 고생할 것을 두려워서 했던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고다리?
-아니야. 코다리. 이름 처음 듣나?
-그래.
-명태 반피디기를 코다리라 하고 갓 잡아올린 명태는 생태라 해. 누나가 아는 다른 이름은 뭐야? 생태 말고 명태에 대해서.
-동태라 안 카나.
-그래. 동태는 생태를 냉동시킨 거야. 오래 보관하려고. 저쪽 일본 너머 먼바다에서 잡은 명태를 상하지 않도록 하려고 어창에다 넣어서 꽁꽁 얼리는 거야. 그게 시장에 나오면 바로 동태가 되지. 손도끼로 내려쳐서 자르고 그러잖아.
-그래.
-또 뭐가 있어?
이번에는 황태란 이름을 가르쳐준다. 북어는 통마리로 말린 것이고 황태는 얼리면서 말린 것을 배를 째서 다듬은 것이라고 하자 아 그렇제 한다.
-그런데 또 이름이 있어? 노가리 들어봤어? 손가락 굵기만 한 명태 새끼를 노가리라 해. 그러니까 명태는 이름이 많아. 오늘 들은 것만도 여섯 가지야. 생태 동태 코다리 북어 황태 노가리. 알겠어? 그러니까 명태란 이름까지 합치면 전부 일곱 가지야. 재밌지?
큰길로 접어든 차는 좌우로 가을 들판을 이끌면서 가창 중심가를 향해 진행한다.
-내사 모리겠다. 밍태 동태만 알고 묵었지 그런 기 있는 줄도 몰랐다.
-옛날에 어떤 높은 양반이 명태를 먹어보고는 맛있어서 이름이 뭐냐고 물었더니 모두 모른다고 했어. 그래서 나온 대답이 저기 명천에 사는 어부 태씨가 잡은 고기라고 하자 그게 이름이 돼서 명태가 된 거래.
-그래.
옥분리를 지난다. 용지봉 쪽으로도 단풍이 누렇다. 그렇기도 하거니와 따지 않은 감들이 귀물로 매달려 있어 보는 눈을 감탄케 한다. 저 보래 저 보래 하고 누나가 여전히 단풍보다는 다른 데다 신경을 더 쓴다.
-예전에 이 골짜기에 큰 광산이 있었던가 봐. 대한중석이라고 나도 들었던 이름인데, 아나?
새로운 화제를 꺼낸다. 차라리 사위를 먹이건 누굴 먹이건 상관 말고 전처럼 전복을 한 바구니 사다 안겨주는 것이 낫지 스스로도 안간힘쓴다 싶을 만큼 전에 없이 세심한 신경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게 삼랑진 사는 언니 아부지가 광산 안 했나? 이 산에는 금이 나고 저 산에는 은이 나고 했다. 그러더니 빚을 많이 져서 상해로 도망갔다. 상해서 새로 장가를 가서 살다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린다. 그 아저씨 딸이 삼랑진 사는 언니 아부지 아이가. 90은 넘었을 낀데 죽었을 끼다.
삼랑진 언니는 나도 한두 차례 본 일이 있지만 광산을 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얘기다.
-광산을 했다고? 삼랑진 언니 아버지가?
-그래. 여게는 아들 하나 딸 하나 두고 도망 안 갔나. 그 언니하고 엄마는 참 친했다.
-삼랑진 그 집이 정미소 옆인가 그랬었지?
문득 기억이 내가 어렸을 때로 되돌아간다.
-그래. 인자 죽었을 끼다. 저그도 안 오고 하니 소식을 모린다. 살았으면 엄마 죽었을 때도 왔을 끼고 우째 사는지 기별도 있었을 끼다.
-키도 크고 이야기도 잘 하고 그랬지? 아들 이름이 강정캐고.
-그래. 니는 우째 아노?
-내가 그 집에 갔었잖아. 엄마랑 누나들이 거기 살 때 할아버지가 작은누나를 시집보내야 한다면서 나보고 가서 데리고 오라고 하데. 그래서 가봤지.
-누구…. 어느 고모가? 그때까지도 시집을 안 갔나?
-무슨 말을 하나? 작은누나 얘기다. 작은누나를 할아버지가 시집보내야 한다고 해서 나보고 데리고 오래서 갔다니까. 그때 삼랑진에 가서 정케도 보고 며칠 지내다가 모두 같이 올라왔잖아. 잔칫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잖아. 작은누나는 지암으로 시집을 갔고. 김종성 씨한테 재취로.
-아아.
아니, 누나는 입때껏 그러면 내가 당신들 세 모녀를 데리고 왔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말인가? 싶다. 작은누나를 시집보내는 데 있어선 나도 큰 힘이 된 사람이었지만 생전에 대접은커녕 안중에도 없이 내쳤다는 사실도 알아야 할 것이다.
-알겠어? 그날 할아버지는 병중이어서 남의 집에 계시다가 돌아가셨잖아. -그래, 안다.
고얀 것들, 하고 나는 지금이라도 작은누나 내외를 욕해주고 싶다. 누나가 앞서 할머니께 따지고 싶다 듯이 나도 그만한 감정은 쌓여 있으나 역시 두 사람 모두 망인이 되고 지나간 일이니까 쓸데없는 생각일 뿐이다.
-여기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라.
신천대로 입구에다 차를 세워놓고 찐빵집으로 달려간다. 찐빵과 만두를 사서 돌아온다. 구수한 찐빵 냄새에 멀 또 샀노 하고 누나가 묻는다. 민정에게 줄 찐빵이라고 하자 여게 것이 맛있데이 한다.
-저게가 너그 아파트가?
엉뚱한 곳을 가리키며 모처럼 관심을 보인다.
-아니야. 저 아래. 오른쪽에서 두 번째, 저기 저 집이야.
햇볕이 잔뜩 들어있는 아파트를 가리켰지만 누나의 눈길은 이미 꺾어져 있다. 들어도 못 들은 척하는지 안 들려서 그런지는 알 수가 없다.
차를 대놓고 들어가자 집에는 동네 할머니 한 분과 또 한 여자가 와서 차를 마시고 있다. 할머니는 오랜만에 보는 누나와 친한 노인이었다. 그동안 아파서 고생했다는 말을 누나가 먼저 해준다. 오셨어요? 하고 나도 아는 척 인사한다.
-고마워요, 외삼촌.
-고맙기는 뭘. 나도 갈란다. 엄마가 피곤하신 모양이다.
두 손님에게도 목례를 하고 집을 나온다. 누나가 이거 머꼬 니도 좀 가주고 가거라 한다. 어찌 거기에 내가 손을 대겠는가? 모두 누나 주려고 산 것인데.
-외삼촌 안녕히 가세요.
-어서 들어가라. 바람이 찹다.
차를 주차했을 때라야 오늘 걸음이 잘 됐다 싶다. 그러함에도 왜 배낭을 메고 나가다가 누나 생각을 했던 지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해명이 안 된다. 정말 머리가 비어서 몸이 이끌었던 것일까? 그렇게라도 실행했다는 사실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내 마음의 빚이지 단풍이 곱겠다던 말이 누나의 실언이거나 잘못은 아니다. 나중이라도 그 일이 목에 걸린다면 이때의 실기는 천 냥 빚보다 많은 부담을 갖게 될 일이었다.
잘했어. 등산은 지금 하자고. 해도 그대로 많고 기운도 남았으니.
다시 신발을 바꾼다. 대신 신었던 신발은 배낭에다 꾸린다. 집으로 바로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가랑잎이 바르락 바스락하는 뒷산 길을 오르자니 지난여름 생각이 난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독버섯을 찾아 사진을 찍었던 일이 ‘행복한 下午’란 이름으로 남은 사진첩이다. 그 열정이 고스란히 남은 길에 가랑잎이 쌓이고 발걸음들이 가랑잎 숫자만큼 포개지는 계절이 온 것이다.
참 괜찮아요, 이 산이. 여름에는 안개도 있지 봄에는 현란한 새들의 울음도 있지 마음이 따라가지 못할 먼먼 오솔길도 열려 있지.
중얼대면서 걸음을 천천히 옮긴다.
그런데 새벽녘 꿈이 말이지.
그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꿈에서도 누나를 봤고 현실에서도 만났다. 그런 것을 현몽이라는지 모르겠다. 한데 객광스런 장면은 당시 내 앞에는 적나라하게 벗어부친 여인이 발칙하게 누워 있었다는 점이다. 포르노에서도 보지 못한 완전체의 여신女身이 팬티 한 장만 끼고 반듯하게 자세를 잡고 있었는데 얼굴을 돌리고 있어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덜컥 이거나 탐해야겠다며 덤비려는 찰나 누나가 곁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안 되지. 작업 중에 적발되면 이건 또도 개도 안 되지.
그래서 팬티를 열려던 손을 거두고 말았다.
오늘 일만 보더라도 누나와 나는 맞지 않는 데가 많은 것 같다. 앞으로 갓 하면 뒤로 돌고 뒤로 봐 하면 옆으로 도는 식이었다.
그 여자가 내가 찾는 순지라는 보장은 없다. 또 누나가 들먹이는 분이도 아닌 나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다만 아직도 선연한 대목은 여인의 신선한 몸매며 탄력 있는 사타구니 주변의 넓적다리였다. 거기를 장악하지 못한 채 누나를 만났으니 아, 지금도 선명하게 각인된 여체의 신비는 가슴이 터질 정도였다.
이건 말이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네. 누나를 만났다는 것은 일전의 전복죽으로 인해 늘 미안하다는 잠재의식 때문일 것이며 현실처럼 여체가 눈앞에 펼쳐졌다는 것도 평소 내재된 의식의 발로가 아닐까 싶네. 손닿지 않는 현실을 감축스럽게도 재현한 셈이지. 다소 민망한 장면이긴 해도 감지덕지하지. 꿈에서나마 청춘을 보았으니 말이지. 그러니까 이건 별개의 두 사람이 서로 잠재의식 안에서 만나서 한 틀의 그림으로 나타난 것일 뿐 꿈에서조차 태클을 건다고는 생각할 건 없어. 있다면 본인의 현실적 요인이겠지. 그러니 미워하지 마. 거기도 외롭잖아. 아셨우? 영감.
둘째 봉이려니 했더니 온 김에 또 셋째 봉까지 넘어간다. 이러면 아침에 예정했던 것만큼은 아닐지라도 평소 다니던 산행만큼은 된다.
반환점에서 길을 돌려가다가 셋째 봉우리에 앉아 다리를 쉰다. 배낭을 열어 간식거리를 일부라도 먹는 데까지가 오늘 산행의 한 과정이었다.
건너다 본 앞산에는 빨간 햇살 아래로 시방도 단풍이 노릇노릇 익고 있다. 결국 혼자 보는 단풍이 됐지만 그 중에는 누나 단풍도 있고 내 단풍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게 어우러져 만산홍엽이 된 거라고.
굴참나무가지에 걸린 해는 여전히 넘어가지 못하고 지상을 기웃거리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더 많은 화해와 고뇌하고 있는 양을 지켜보기라도 하려는 듯. (끝)
첫댓글 좋은 글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