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덕해와 연변(1949~1967)
(《주덕해평전》 발취)
최국철
주덕해의 하늘
연변은 1945년 10월 20일, 중공중앙 동북국의 비준을 거쳐 중공연변위원회를 설립하였는데 연길(간도)주재 쏘련홍군경비사령부 부사령원의 신분으로 연변의 당조직건립사업과 군대건립사업을 하던 강신태가 서기로 임명되였다.
같은 해 11월 12일, 중공중앙 동북국에서 연변에 파견한 옹문도 등 한패의 간부들이 연길에 도착하였다. 옹문도는 동북국과 길림성사업위원회의 지시에 근거하여 11월 15일에 중공연변위원회를 취소하고 옹문도, 강신태 등 7명으로 중공연변지방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옹문도가 서기를 맡았다. 지방위원회에서는 현위를 내오도록 간부들을 각 현에 파견하였다.
1945년 11월 20일, 지방위원회에서 정권건설사업을 책임지고 주관한 동곤일은 연변인민대표대회를 열었는데 선거에 의하여 연변정무위원회가 구성되였다. 21일, 연변정무위원회는 제1차 회의를 가지고 선거를 통하여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를 내왔는데 관선정(관준언)이 전원으로, 동곤일이 부전원으로 선거되였으며 간도림시정부를 해산하고 간도시를 연길로 고치고 연길현에 귀속시켰다. 11월 23일, 동북인민자치군 연변군분구를 내왔는데 강신태가 사령원으로, 옹문도가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였다.
1946년 1월 하순, 중공중앙 동북국에서는 당천제를 길동에 파견하여 연변지방위원회를 기초로 하여 중공길료성위에 소속된 길동분성위를 설립하게 하였는데 서기에 당천제, 부서기에 옹문도였으며 연길, 화룡, 왕청, 훈춘, 안도, 돈화, 액목, 교하 등 8개 현을 관할하였다. 그리고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를 보류하였다.
1947년 2월, 중공길림성위에서는 길동분성위를 취소하고 중공연변지방위원회와 중공길동지방위원회를 내왔다. 연변지위에서 공원이 서기로,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 전원은 성정부 부비서장 서원천이 겸임하였다. 길동지위에서는 석뢰가 서기로, 류준수가 부서기로 임명되고 지위기관을 돈화에 설치하였는데 돈화, 액목, 안도, 교하 4개 현을 관할하였다. 길동행정독찰전원공서를 설치하였는데 동곤일이 전원으로 임명되였다. 길동군분구를 설치하였는데 사령원에 등극명, 정치위원에 석뢰였다. 1947년 4월 1일, 길동지구를 길돈지구로 개칭하였는데 당정군지도자들은 변동이 없었다.
1947년 9월 25일, 성위에서는 연변과 길돈 두 지구를 길동지구로 합병하여 중공길동지방위원회를 내오기로 결정하고 공원을 서기로, 류준수를 부서기로 임명하였으며 지위기관을 돈화에 두었다. 그리고 길동행정독찰전원공서를 설치하고 서원천을 전원으로 임명하였다. 1948년 3월 9일에 길림이 해방되였다. 10일에 성당정군지도기관은 길림으로 돌아갔다. 3월 27일, 길림성정부에서는 길동지구를 연변지구로 고치고 연길, 화룡, 왕청, 훈춘, 안도 5개 현을 관할하게 하였다. 액목현은 돈화현에 귀속시키고 돈화현과 교하현을 성직할현으로 정하였다. 4월 16일, 성위에서는 길동지위를 취소하고 중공연변지방위원회를 내오기로 결정하고 공원을 서기로, 류준수, 림춘추를 부서기로 임명하였다.
1949년 전국을 향해 진군할데 대한 주덕의 “중국인민해방군총부명령”이 하달되면서 전 중국의 해방은 초읽기에 진입했다.
1949년 3월 20일, 중공길림성위원회에서 중공중앙 동북국의 동의를 거쳐 주덕해를 연변에 파견했다. 기실 주덕해는 부임을 앞두고 3월 1일 연길인민광장에서 열린 “3.1” 30주년 기념집회에 참가했다. 이 집회에 주덕해외에도 림춘추, 최채, 송진정이 참가했다. 이미 배포된 자료에는 주덕해가 3월 20일에 연변으로 나왔다고 기재하고있지만 주덕해를 따라 할빈에서 나온 사람들의 증언과 각종 자료에는 주덕해가 2월말에 연변으로 나온것으로 되여있고 “3.1”활동에 참가했다고 기재했다.
1949년 5월 22일 중공길림성위는 주덕해, 왕록, 문정일, 최채, 림민호 등 9명으로 중공연변지방위원회를 구성하고 주덕해를 중공길림성위원회 위원, 중공연변지방위원회 서기로 정식으로 임명하였다. 현재의 중공연변조선족자치주위원회는 선후로 연변위원회, 중공연변지방위원회(1), 중공길동분성위원회, 중공지방위원회(2), 중공길돈지방위원회, 중공길동지방위원회, 중공연변지방위원회(3)로 명칭을 바꾸었는데 주덕해는 중공연변지방위원회(3, 1948년 4월 16일—1956년 12월)시기에 서기로 임명되였다. 그리고 두달이 지난 7월 13일에 동북국 농림부 비서장으로 전근한 문정일의 뒤를 이어 주덕해를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 전원으로 임명하였다. 광복이 나면서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는 연변정무위원회,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 길동(길돈)행정독찰전원공서, 길동행정전원공서, 연변림시참의회, 다시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로 돌아오는 등 명칭이 주마등같이 개칭되였지만 연변행정을 주관하는 인민정권기능은 변함이 없었다. 선후로 관선정, 동일곤, 서원천, 림춘추, 문정일, 주덕해가 전원으로 임명되였다. 이중에서 임기가 가장 짜른 전원은 림춘추인데 한달도 채 안된다.
주덕해는 연변지구위원회 서기 겸 연변전원공서 전원으로 임명되면서 연변의 전반 사업을 관장하는 연변의 당정지도자 제1인자 반렬에 올랐다. 이것으로 주덕해의 정치적인 립지가 완성되였고 따라서 연변의 제반 사업, 특히 특정지역에서 민족관을 실행할수 있는 정치적지위를 확립하였다.
1949년 6월 15일부터 19일까지 북경에서 중국정치협상준비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는 전국적으로 중국공산당, 각 민주당파, 각 인민단체, 각 지구, 인민해방군, 각 소수민족지구 23곳(지구)에서 134명의 대표가 참가하였는데 이 회의에서 제1기 전국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할 각 성, 시, 지구와 참가인원을 제정해 정치협상회의 조례와 공동강령, 정부방안과 선언을 기초하였다. 그리고 새 중국의 국기, 국가, 국장 도안을 제정했다. 소수민족대표인 주덕해는 134명속의 일원으로 북경에 가서 전국정치협상회의 준비회의에 참석했다.
그리고 그해 9월 21일부터 30일까지 열린 제1기 전국정치협상회의 제1차 전국위원회의에도 참가하였다. 회의에서 중국공산당, 각 민주당파, 각 인민단체, 각 지구, 인민해방군, 각 소수민족지구, 화교와 애국인사 662명이 참가하였다. 이 회의에서 180명의 전국위원회 위원이 탄생하였는데 주덕해도 위원으로 피선되였다. 이 정협회의 개막사에서 모택동은 “인류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중국사람들이 일떠났다.”고 지구촌에 호매롭게 웨쳤다.
중국은 다민족국가로서 합리하고 선진적인 민족정책시스템을 잘 제정하고 국책에 반영하고 장구적으로 운영해나가는것이 필요했다. 중공중앙은 새 중국이 건립되기전부터 민족문제를 정확히 처리할 결책을 제정하였다. “중국인민정치협상회 공동강령”을 제정할 당시 모택동을 비롯한 당중앙은 련방제를 할것인가 아니면 공화국 령도아래 소수민족자치를 실시할것인가를 다방면으로 론증하고 반복적으로 고려한후 민족자치를 실시할것을 결정하였다. 1949년 9월 7일, 주은래총리는 “인민정부의 몇가지 문제에 관하여”라는 보고중에서 민족자치제도에 대한 중공중앙의 구상을 정협위원들에게 설명하였다.
그후 9월 29일에 통과한 “중국인민정치협상회 공동강령”에 의하면 “…각 소수민족거주지역은 꼭 민족자치를 실시하고 민족거주인구대소와 지역의 대소에 따라 분별있게 각종 민족자치기관을 건설한다.”고 밝혔다.
공동강령을 토론할 때 주덕해는 중국에서 민족구역자치를 실시하는것은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는다고 표시했고 중국의 소수민족은 과거에 독립적민족이 아니였기에 쏘련의 민족문제와는 그 상황이 완전히 같지 않다고 천명했다. 회의기간에 주덕해는 연변조선족의 력사와 현 상황을 소개함과 동시에 장래 민족간부를 양성할 문제, 민족지구의 민족관계문제, 민족 경제와 문화 발전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주덕해는 또 연변은 력사적원인으로 말미암아 한족의 교육이 상대적으로 뒤떨어지고있으므로 소수민족도 한족을 도와주어야 할 문제가 나선다고 제기하기도 했다. 주덕해는 또 각 민족의 발전과 단결 문제도 언급하였다. 각 민족이 단결하여야만 경제면에서도 공동히 발전하게 될것이며 경제가 발전되면 국가건설에 대하여서도 공헌이 클수 있다고 하였다.
회의기간에 주덕해는 소수민족소조에 편입되였는데 이 소조에는 회족대표 양정인, 장족대표 천보, 유격평 등이 참가하였다. 형제민족이 한자리에 모여 국가대사를 토론하는 가운데 그들은 모두 주인된 긍지와 책임감을 안고 자신들의 견해를 구김없이 내놓았다. 회의에 참석한 여러 민족의 대표들은 함께 공동강령을 토론한 뒤 중앙민족사무위원회(부급)를 설치하기로 협의하였다.
회의가 끝난 뒤에 류소기, 주덕 등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이 특히 주덕해를 비롯한 10여명의 소수민족대표들을 중남해 회인당으로 불러 좌담형식을 빌어 공동강령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주덕해는 좌담회에서 자기의 견해를 이야기하면서 동북의 120만 조선족을 대표하여 공동강령을 견결히 옹호한다고 표시했다.
정협회의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위원회를 선거하였으며 모택동이 초안을 작성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기 전체회의 선언”을 일치하게 채택하였다. 회의에서는 또 나라의 명칭, 수도, 국기, 국장, 국가(国歌) 등도 결정하였다. 이러한 국가대사를 토론할적마다 주덕해는 조선족인민을 대표하여 자신의 민주권리를 충분하게 행사하였고 공화국 개국의식에도 직접 참가했다.
우리 나라의 고전민족리론에 기초한 민족식별사업은 전후로 30년이란 시간을 거쳤으며 대체로 3개 단계로 구분할수 있다. 제1단계는 새 중국 성립부터 1954년까지인데 이 시기에 주요하게 조사연구하는 동시에 1차적으로 민족성분을 확정지었다. 이중에는 이미 확정된 몽골족, 회족, 장족, 위글족 등 소수민족을 제외하고도 장족, 바이족, 따이족, 리수족, 오르쳔족 등 38개 민족을 이 단계에서 확정지었다. 주덕해의 노력으로 조선민족은 제1단계에서 조선민족(족)이란 족명을 확정지었다.
1949년 10월 16일 소조한 가을날 해볕은 연길역의 낡은 역사우에 내려 따갑게 재글거렸다. 상공에서 가을잠자리떼들이 유유히 날아예고 역사의 북쪽편에 펼쳐진 휘연한 논벌에는 황금의 벼파도가 물결치면서 벼가 익는 매틀한 냄새를 실어왔다.
주덕해가 북경에서 돌아오는 날이다. 연변의 당정지도자들이 모두 마중나갔고 연길시안의 시민들도 마중나가 플래트홈은 립추의 여지도 없이 흥성거렸다.
“온다! 기차가 온다!”
누군가 소리쳤다.
뒤이어 렬차는 흰 김을 뿜으며 서서히 플래트홈에 들어섰다. 때를 같이하여 온 역은 급작스레 끓어번졌다. 악대가 “조선의용군행진곡”을 연주하자 시민들과 학생들이 일제히 색기를 흔들며 환호하였다. 이것은 연길시 각 민족, 각계층 인민들이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기 전국위원회 제1차 회의와 개국의식에 출석하고 돌아오는 주덕해를 맞이하는 환영식행사였다. 기차에서 주덕해가 내리자 선전부 부장 최채를 선두로 조직부 부부장 장보운, 연변대학 상무부교장 림민호, 연길현위서기 송진정이 차례로 주덕해의 손을 잡으면서 진정으로 축하했다. 이날 연길시안의 각계층 군중 5천여명이 역으로 마중나갔다. 연변력사에서 전례 없는 이 이벤트는 주덕해에 대한 연변인민들의 지지였고 나아가서 신중국의 창립을 옹호하는 상징적인 행사이기도 했다.
“주덕해서기가 렬차에서 내리고 꽃다발을 받고 마중나온 간부들하고 악수하고… 했는데 금방 그렇게 대단한(개국의식) 회의에 참가해서 그런지 주덕해서기는 옷차림도 반듯하고 대단히 씩씩했지요… 그때 역전광장에서 와야— 하고 환호소리와 박수소리가 터져나왔고…‘중화인민공화국 만세!’, ‘모택동주석 만세!’라고 구호를 불렀는데 역전광장과 역사벽에도 숱한 표어들이 나붙었소. 그때 처음으로 ‘동북조선인민대표 주덕해동지 만세!’라는 소리도 터져나왔소. 이런 환호소리거나 구호들은 다 쏘련에서 배운것들인데… 쏘련 사람들과 홍군들이 걸핏하면 우라(만세)— 하는 구호를 많이 웨쳤구… 그래서 연변사람들도 쏘련홍군들한테서 배웠지우. 주덕해서기는 그때 광장에 림시로 만든 연단에 올라서서 연설을 했는데 지금은 무슨 연설을 했는지 많은 내용은 까맣게 헛갈리게 되는구만… 그중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은 탄생되고… 그러니 우리 민족의 오랜 숙원을 풀었다면서 연변에서도 자치구를 건설하고 중국땅에서 주인으로 일하자는 내용만은 기억하고있소… 그날 역전에 마중나온 연길사람들은 모두 격동돼서 박수 치고 환호했는데 지금도 고막을 진동하던 그때가 똑똑히 기억나오. 그때 영순아주머니도 주덕해서기를 마중하러 나갔는데 젖을 뗀 큰딸 영채를 친정어머니에게 업히고 나갔댔소. 친정어머니는 키가 훤칠한분이였소. 이들은 정부인원들이 자기네를 발견하고 앞에 내세울가봐 겁나는지 사람들의 뒤에서 가만히 지켜봤소. 김영순아주머니는 그런 녀자였소. 절대로 남편을 믿고 어디 가서 큰소리치는 일도 몰랐고 늘 말이 적었고 그렇게 조용했소. 그때 처음으로 ‘주덕해동지 만세’가 터졌는데 주덕해서기는 그후 다시 그러지 못하게 엄정하게 단속했지. 하지만 ‘문화대혁명’시기에 ‘만세’사건으로 주덕해서기는 덤터기도 썼고… 마치 주덕해서기가 시켜서 그런것으로 몰아갔지.”
김영만은 그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의식에 참가하고 연변에 돌아온 주덕해는 개국의식에서 울려퍼진 례포소리가 그 어떤 위대한 선언같이 들리는것 같았고 부강한 연변을 건설할 의욕에 온몸이 투척되여있었다. 그 이튿날 연길시안의 천여명 간부들이 “동북조선민족대표 주덕해동지를 환영하는 야회”를 가지기도 했다.
이 회의에 참가하기전 주덕해는《동북조선인민보(연변일보)》 기자의 취재를 접수했는데 8월 29일에 등재된 “동북조선민족의 새 기원”이란 기사에는 주덕해의 당시 심정이 낱낱이 밝혀져있다. 주덕해의 속심뿐이 아니라 당시 동북지구 조선인(족)들의 공동한 심정이기도 했다. 아래에 부분적인 원문을 그대로 발취한다.
“…동북에 있는 백二十만에 달하는 조선인민은 자신의 대표를 선거, 파견하여 동북인민대표회의에 참가시키였다. ‘그들의 흥분과 환희는 전례가 없는것이다. 왜?’라고 동북조선인민대표 연변전원공서 전원 주덕해(朱德海)동지는 자신의 문제를 제출하고 또한 심각히 대답하였다. ‘인민 자신이 대표를 선거, 파견하여 자기의 정권을 조직하고 자기의 령도자를 선거하게 하는 이러한 광범한 고도의 민주정치생활은 우리 동북조선인민으로서는 재래로 없었던것이다. 동북조선민족의 백여년래의 력사는 즉 한책의 피눈물로 물들인 압박받던 력사이다…’라고 하였다.
…八一五의 벽력소리에 천지가 뒤집혀 동북조선민족의 백년 혈루사(血沥史)는 종결을 짓고 새로운 기원을 열었다. 이로부터 질곡(桎梏)에서 벗어났다. 동북조선인민은 만발하는 봄꽃처럼 전부의 혁명열정과 용감성이 폭발되였다. 三년이래 참군한 청년의 총계는 전 인구의 五% 이상을 차지하였다.
…주덕해동지는 위(우)선 경제생활의 향상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토지개혁중에 있어서 동북조선인민의 九五% 이상을 차지한 농민은 모두 마찬가지로 토지, 마소와 가옥을 나누어가지였다. 二十만 농호 매호에 평균 비옥한 논 한쌍 七무씩 나누었다… 정치건설에 있어서 동북의 조선인민도 이미 자기 운명의 주인공으로 되였다. 전 동북조선인민의 七四%를 차지한 길림 연변지구에 있어서 전원공서로부터 구, 촌에 이르기까지 절대 대부분이 모두 조선인민이 자기절로 선거한 조선간부이다. 조선인(족)수가 적은 지방에 있어서는 구에 민족간사가 있고 현이상에는 민족사무과가 있다. 우리의 민족간부학교에서는 바로 三백여명의 구, 현급간부를 훈련시키고있다. 이미 졸업하고 직장에 간 사람은 二천명을 초과하였다. 문화교육에 있어서 八一五전에는 동북조선민족의 중학이 十七개소이고 학생이 五천여명이였으나 지금은 중학이 七十개소이고 학생이 一만 六천여명이나 된다. 우리는 또 대학교 一개교를 증가하였고 사범학교 四개교를 증가하였는데 거기에서 학습하는 학생이 모두 一천三백여명이나 된다. 이밖에 원래 있던 一천五백개소의 소학교가 있고 소학생이 十八만명이 있다. 이것이 즉 三년 해방력사가운데의 찬란한 한페지를 이룬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특히 주목해야 할것은 이런 학교에서는 완전히 조선글로써 가르치는바 이것은 우리가 몇해를 내려오면서 희망하여도 실현시키지 못하던 희망인것이다. 우리는 五十여 종류 합계 백만부 이상의 각종 조선문교과서를 인쇄하였고 수十종의 번역한 유명한 서적을 인쇄하였다.《동북조선인민보》는 매일 二만부 이상씩 발행되고있고 또《연변문화》,《교육통신》 등 조선문잡지가 있다…’(聂眉初기자)”
공화국개국의식에 참가했던 주덕해는 가슴속에 이미 “민족자치구”란 큼직한 “연변의 정치지도”를 그리고있었다.
주덕해서기의 민족관은 선진적인것이였다. 할빈시기부터 주덕해는 민족리론을 해석하면서 “민족문제는 혁명 전반에 걸쳐 나타난 일부분으로서 중국혁명이 승리하여야만 해결할수 있다… 민족리익은 반드시 무산계급의 전반 리익에 복종해야 한다.’고 수차 언급하였는데 지금 보아도 그 당시 주덕해의 민족관은 중국현실에 부합되였다. 자치구 창립에 관한 주덕해의 구상은 할빈시기부터 무르익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기에 주덕해는 전국정협 제1기 제1차 대표대회에 참가하면서부터 꾸준히 제기했고 그후에도 각종 도경을 빌어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1951년 주덕해와 최채는 북경으로 가서 건국 2돐 경축활동에 참가하게 되였다. 그때 주덕해는 전국정치협상회의에서 “연변은 조선민족자치구를 건립할수 있는 주관조건과 객관조건이 다 구비되였습니다. 때문에 중앙정부에서 우리의 요구를 비준하여줄것을 바랍니다.”고 요구했고 최채도 좌담회에서 역시 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북경의 흔쾌한 대답을 들은 주덕해는 북경에서 돌아오자 바람으로 연변조선민족자치구주비위원회를 건립하고 자치구 창립준비로 바삐 서둘렀다.
주덕해는 연변조선민족자치구를 창립하는 밑그림을 그리면서 자치구의 기본골격을 구상하고 완성에로 이끌었다. 당시 우리 민족 족명은 “조선민족”으로서 국가의 민족식별사업에서 확정된것이다. 그후 1955년 자치구를 자치주로 개명하면서 “조선민족”에서 “조선족”으로 다시 족명을 바꾸었다.
출처: 위챗공식계정 조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