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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금돌성, 백화산석성(白華山石城):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산98번지
백화산 석성(白華山石城)은 중모현에 있는데, 주(州) 서쪽 51리의 거리다. 【높고 험하며, 둘레가 1천 9백 4보인데, 안에 시내가 하나, 샘이 다섯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
1. 옥천-상주,김천 통로 고대기록
'상주산성'·'백화산성'·'보문성' 등 시대에 따라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동사강목』에서는 금돌성의 위치를 상주 백화산에 비정하고 있다.
1969년 단국대학교에서 백화산성에 대해 학술조사를 실시하여 금돌성으로 추정하였으며, *2000년부터 2001년까지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에 의해 지표조사가 실시되었다.
<동사강목>
660년 하6월 신라 왕이 남천정(南川停)에 나가 주둔하고, 태자 법민(法敏)과 김유신을 보내어 덕물도(德勿島)에서 당나라 군사와 만나게 하였다.
신라 왕이 김유신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남천정에 나가 주둔하고 있다가, 소정방 등이 군사를 이끌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오는데 함선이 천리에 뻗쳤으며 덕물도(지금 인천부 서해 가운데 있다)에 진을 치고 있다는 말을 듣고, 태자 법민(法敏)과 대장군 김유신ㆍ장군 진주(眞珠)ㆍ천존(天存) 등을 보내어 병함(兵艦) 1백 수(艘)를 거느리고 정방(定方)과 합치게 하였다. 정방은 기뻐하며 7월 10일에 왕과 만나기로 기약하고 곧장 의자(義慈 의자왕)의 도성을 무찔렀다. 법민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정방의 군세(軍勢)가 대단히 성대하다.’ 하니 왕이 기뻐하여 다시 법민을 보내어 유신(庾信) 및 장군 품일(品日)ㆍ흠춘(欽春)과 함께 정병(精兵) 5만을 거느리고 응전하게 하고 금돌성(金堗城)(지금의 尙州 白華山)으로 나아가 주둔하였다.
<강한집> 〔唐故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食邑二千戶新羅國上將軍金公神道碑銘 幷序〕 유신 신도비
현경(顯慶) 5년(660)에 크게 군대를 일으켜 장차 백제를 치려고 하는데, 마침 천자가 대장군 소정방에게 조서를 내려 누선군(樓船軍) 13만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 머물게 하고, 사자 문천(文泉)을 보내어 와서 고하게 하였다. 왕이 이에 세자 법민(法敏)과 함께 남천(南川)으로 나가, 공과 진주(眞珠)ㆍ천존(天存)을 장군으로 삼아 배 100척을 갖추어 병사들을 싣고 덕물도에서 소정방의 군대와 만나게 하였다. 소정방이 세자에게 이르기를, “세자께서는 육지로 가시어 7월 10일에 백제성(百濟城)에서 만납시다.” 하였다. 세자가 와서 고하니 왕이 장사들을 거느리고 사라(沙羅)에 이르렀다. 정방의 군대가 기벌포(伎伐浦)로 들어갈 때 해안이 진창이라 갈 수가 없었다. 이에 버들 자리를 깔아서 군대를 나가게 하여 백제성을 포위하였다. 공이 비밀리에 군대를 움직여 부소산(扶蘇山)을 탈취하였다. 백제가 망한 데는 공의 공로가 컸으므로 천자가 조서를 내려 기리며 칭찬하였다. 소정방이 공에게 이르기를,
2. 백화산성의 지리적 중요성 검토
■ 금돌성이 「신라군의 전진기로 활용되었다.」는 기록의 의미
금돌성(백화석성)은 신라와 백제의 전쟁시에는 전초기지, 평화시에는 문화교류의 통로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가정하면 이곳이 라제통로의 신라측 시발점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김천시 추풍령 - 황간-옥천을 이어주는 조선시대 역들과 상주시 공성- 모동 - 백화산 - 영동 용산 - 옥천으로 이어지는 백화산 남쪽길은. 황간에서 합쳐져 전북 무주로 이어지는 교차지점으로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경상도와 충청도 전라도를 연결하는 주요 통행로 역할을 하였던 성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에서 라제통로는 무주에 있는 일제가 개설은 좁은 터널이 아리라, 옥천에서 금강의 물줄기를 따라 영남으로 이어진 교통로 전체로 파악하여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라제통로가 영호남과 충청의 인적물적교류의 통로 역할을 하여왔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이지역의 지명과 문화적 특색, 역사적 사건들을 재해석하는 것에 일차적 연구목표로 설정하고, 이 지역에만 독특한 문화의 혼재 현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 서기 42년 무렵의 낙동강유역(김천 상주지역) 상황 유추
『후한서동이전(後韓書東夷傳)』에는 "馬韓在西 有五十四國. 辰韓在東 十有二國. 弁辰在辰韓之南 亦十有二國. 凡七十八國”
즉 “마한은 서쪽에 있으며 54국, 진한은 동쪽에 있으며 12국, 변한은 진한의 남쪽에 있으며12국, 모두 78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산집 > 이종휘(李種徽, 1731-1797) 본관 전주(全州), 父 李廷喆, 母 大邱徐氏 徐命遇의 女. 祖父 監役 李相伯. 소론(少論) 陽明學者.
大伽倻伊珍阿鼓王者。駕洛首露王之弟也。爲五伽倻之首。以漢光武建武十八年壬寅。立國於高靈郡。四伽倻分據洛東江西。而古寧今咸昌也。星山今星州也。阿羅今咸安也。小伽倻卽甘文小國也。而大伽倻最大。壤接新羅。世相侵伐。互有勝負。婆娑王時襲擊新羅南界。殺其將長世。又圍羅王於黃山江上。幾獲之。其後新羅益侵滅諸小國。而伽倻武力不競。遂服屬於新羅。法興王妻以宗女。後世有嘉悉王者。妙解音律。製十二絃琴。以象十二月。其法。祖中國樂部箏。而以華東方言之各異。而聲音之難一也。命樂師于勒。更造十二曲。一曰下加羅都。二曰上加羅都。三曰寶伎。四曰達己。五曰思勿。六曰勿慧。七曰下奇物。八曰師子伎。九曰居烈。十曰沙八兮。十一曰爾赦。十二曰上奇物。勒弟子泥文所製又三曲。一烏。二鼠。三鶉。後更爲河臨嫰竹二調。調共一百八十五曲。今世所傳伽倻琴是也。後勒等。知國將亂。抱樂器投新羅。陳文帝天嘉三年。道設智王痛國之衰弱。而見凌於新羅。謀侵其國。以復其耻。反爲所攻。新羅將斯多含。以五千騎。馳入奪旃檀門。而立白旗。城中大將異斯夫。率軍繼之。王城驚潰。遂爲所滅。伽倻凡十六世。五百二十年。於五伽倻最後亡。而所傳琴聲。平淡近古。可以推知其治云
대가야 이진아지왕은 가야수로왕의 동생이다. 다섯가야의 우두머리가 되어 한나라 광무건무 18년(서기 42년, 임인년)에 고령군(高靈)에 나라를 세웠다. 4가야는 낙동강 서쪽에 나누어 있었는데, 古寧은 지금의 咸昌, 성산은 지금의 星州, 아라는 지금의 咸安, 소가야는 甘文小國이다. 대가야가 가장 크다.
경계가 신라와 접하여 대대로 서로 침범하여 서로 이기고 졌다. 파사왕(재위 80-112년) 때 신라의 남쪽 경계를 습격하여 그 장수 장세를 죽였고, 또 황산강상에서 신라왕을 포위하여 포로로 하였다.
그 후 신라가 계속 침입하여 여러 소국을 멸하였는데, 가야는 무력으로 다툴 수 없어 신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대가야 이진아지왕은 가야수로왕의 동생이다. 다섯가야의 우두머리가 되어 한나라 광무건무 18년(서기 42년, 임인년)에 고령군(高靈)에 나라를 세웠다. 4가야는 낙동강 서쪽에 나누어 있었는데, 古寧은 지금의 咸昌, 성산은 지금의 星州, 아라는 지금의 咸安, 소가야는 甘文小國이다. 대가야가 가장 크다.
경계가 신라와 접하여 대대로 서로 침범하여 서로 이기고 졌다. 파사왕(재위 80-112년) 때 신라의 남쪽 경계를 습격하여 그 장수 장세를 죽였고, 또 황산강상에서 신라왕을 포위하여 포로로 하였다.
그 후 신라가 계속 침입하여 여러 소국을 멸하였는데, 가야는 무력으로 다툴 수 없어 신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 231년 전후 백화산 주변 기록 (상주시 모동 모서지역에서 석씨 세력 이동)
『삼국사기』에, <助賁王>二年七月, 以伊湌爲大將軍, 出討甘文國破之, 以其地爲郡縣. 四年七月, 倭人來侵, 于老逆戰於沙道, 乘風縱水{火}, 焚賊戰艦, 賊溺死且盡. 十五年正月, 進爲舒弗耶{舒弗邯}兼知兵馬事. 十六年, 冬十月 高句麗侵北邊, 出擊之, 不克, 退保馬頭柵. 至夜, 士卒寒苦, 于老躬行勞問, 手燒薪 {槱}, 暖熱之, 群心感喜, 如夾纊. 沾解王在位, 沙梁伐國舊屬我, 忽背而歸百濟, 于老將兵往討滅之.
신라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 2년 7월 조(231년)에 "신라가 이찬 석우로를 대장으로 삼아 감문국을 토멸하고 그곳을 감문군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 첨해왕 재위시(247-261)에 이전부터 우리에게 속해있던 사량벌국이 갑자기 배반하여 백제로 투항하므로, 우로가 군사를 거느리고 그를 토벌하여 멸해버렸다.
『신동국여지승람』에는 "昔于老。奈解王之子,訖解王之父。助賁王時,爲大將軍伐甘文國,以其地爲郡縣。沾解王朝,沙伐國背附百濟,于老將兵討滅之." "석우로가 감문국의 감문국을 정벌하였으며, 이후 사벌국이 배반하여 백제에 붙어 토벌하여 멸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조분이사금 시대의 기록을 살펴보면 석우로가 낙동강 서쪽의 소국(특히 가야계 소국)들을 병합해가는 과정에 대한 기록을 낙동강 상류 지역에 관한 사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낙동강 상류에서 경주지역으로 남하하는 과정으로 해석
230년(조분이사금 1년) 3월 조분 이사금이 즉위하였다. 6월 연충을 이찬으로 삼아 군무와 국정을 맡기다. 7월 시조묘를 배알.
231년(조분이사금 2년) 7월 이찬 우로를 대장군으로 삼아 감문국을 토벌하고 군현으로 삼았다. ▶김천시 개령면 부근의 소국
※이후 소가야는 위 지도에서 처럼 고성부근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됨.
232년(조분이사금 3년) 4월 왜인이 금성에 쳐들어오자 왕이 물리쳤다.
적이 흩어져 도망가자 경기병으로 추격하여 천여명을 죽였다.
▶금성: 상주시 함창읍 혹은 백화산 이라는 비정은?
233년(조분이사금 4년) 5월 왜병이 동쪽 변경을 노략질 하였다. ▶동쪽변경 : 낙동강 물길
7월 이찬 우로가 왜인이 침입하자 사도에서 바람을 타고 물길을 따라가며 화공으로 적선을 불태워 모두 익사 시켰다.
235년(조분이사금 6년) 1월 동쪽으로 순행하다. ▶낙동강 동쪽 길을 따라 남하
237년(조분이사금 7년) 2월 골벌국왕 아음부가 항복해오다. ▶영천시 신령면 부근의 소국으로 추정
237년(조분이사금 8년) 8월 누리(우박)가 곡식을 패치다
240년(조분이사금 11년)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범하다 ▶백화산 부근
242년(조분이사금 13년) 고타군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쳤다. ▶고타국 안동시 부근에 있던 소국으로 추정
244년(조분이사금 15년) 1월 이찬 우로를 서불한으로 삼다. ▶석우로는 조분이사금의 딸 명원부인과 혼인. 왕위계승권 있음
245년(조분이사금 16년) 10월 고구려가 북변을 침입하여 우로가 나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마두책을 지켰다.
※244년 8월 고구려를 침입한 관구검에게 패퇴한 고구려 패잔병이 죽령을 넘었다는 가설에서 마두책은 죽령 부근 비정
246년(조분이사금 17년) 10월 동남쪽에 흰 기운이 일어나다. 11월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
※조분왕의 동생인 첨해 이사금이 비정상적으로 왕위계승을 암시.
247년(조분이사금 18년) 5월 왕이 죽다
247년(첨해왕 1년) ※첨해왕은 왕위계승 순위에서 조분이사금의 딸과 결혼한 석우로나 김미추 보다 후순위
248년(첨해왕 2년) 이찬 장훤(長萱)을 서불한(舒弗限)으로 삼아 국정을 맡겼다
249년(첨해왕 3년) 양부(良夫)를 이찬으로 임명하였다
봄. 사량벌국은 옛날에 우리에게 속해 있었으나 갑자기 배반하여 백제에 붙어 토벌하여 멸하였다.
여름. 왜(倭)가 신라에 침략하여 우로(于老)를 죽였다.
253년(첨해왕 7년) 4월 용이 동쪽 못에 오랫동안 머물다가 날아가고, 金城남쪽에 누었던 버드나무가 스스로 일어났다.
▶석씨 주류가 이동. 금성 남쪽에서 석씨가 다시 부흥
5월부터 7월에 비가 오지 않아 시조사당과 名山에 기우제를 지내니 비가 내렸다. 흉년이 들어서 도적이 많았다.
255년(첨해왕 9년) 9월. 백제가 군사를 일으켜 변방을 침범하여 일벌찬 익종(翊宗)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괴곡(지금의 괴산) 서쪽에서 맞아 싸웠으나 패하고 일벌찬 익종도 전사했다.
10월 백제가 또 봉산성(烽山城 : 榮州市로 추정)을 공격하였으나 성은 점령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 545년 백제-신라 관산성 전투
서기 554년의 <관성성전투>는 옥천분지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던 신라와 백제의 다툼에서 신라의 전초기지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이후 삼국 통일기에는 기록에서 보이듯 신라왕이 주둔하며 전장을 지휘했던 곳이기도 하다.
3. '라제통로' 문화와 민족 통합의 혈맥
호남을 상징하는 길이 황토현 길이라면 당연 영남을 상징하는 길은 문경새제를 연상한다. 그러나 영호남의 연결하는 백화산 동서 남북에 개설된 '라제통로'는 한반도 남반부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민족 통합의 혈맥이었다.
숱하게 이어지는 전쟁을 수행한 통로이자 그 잔상이 남아있는 애환의 길이며, 초기 민족의 통합과 전설이 담긴 역사의 길이다. 그러나 우리는 화려한 역사의 환희 속에서 이 길을 기억 저편으로 밀쳐두고 있느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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