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0일, 하루에 끝에서 필사모임 ‘하필’ 첫모임 했습니다.
모임시작 30분전, 자리를 정돈하고 입간판에 글씨를 썼습니다.
준비한 간식을 펼쳐놓고 어떤 분들이 오실까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옆 동네, 황남시장에서 ‘베란다스튜디오242’를 운영하시는 김혜선 선생님과 손승석 선생님께서 이번 모임에 참여하셨습니다.
김혜선 선생님께서 직접 만드신 대나무향이 나는 초 선물해주셨습니다.
짧은 인사를 나누고 고소한 대나무 향 맡으며 각자 40분쯤 필사 했지요.
필사 마치고는 옮겨 적은 글 낭독하고 소감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정지용 시인의 시 ‘별2’를 노트에 옮겼습니다.
별2, 정지용
창을 열고 눕다.
창을 열어야 하늘이 들어오기에.
벗었던 안경을 다시 쓰다.
일식이 개이고 난 날 밤 별이 더욱 푸르다.
별을 잔치하는 밤
흰옷과 흰자리로 단속하다.
세상에 안해와 사랑이란
별에서 치면 지저분한 보금자리.
돌아 누워 별에서 별까지
해도海圖 없이 항해하다.
별도 포기 포기 솟았기에
그 중 하나는 더 휙지고
하나는 갓 낳은 양
여릿 여릿 빛나고
하나는 발열하야
붉고 떨고
바람엔 별도 쓰리다
회회 돌아 살아나는 촉불!
찬물에 씻기여
사금을 흘리는 은하!
마스트 알로 섬들이 항시 달려 왔었고
별들은 우리 눈썹 기슭에 아스름 항구가 그립다.
대웅성좌大雄星座가
기웃이 도는데!
청려淸麗한 하늘의 비극에
우리는 숨소리까지 삼가다.
이유는 저 세상에 있을지도 몰라
우리는 제마다 눈감기 싫은 밤이 있다.
잠재기 노래 없이도
잠이 들다.
커피클럽R에서 하는 오픈마이크에 참여해 시낭송을 했었습니다.
그때 시낭송으로 참여했던 다른 분과 뒤풀이 자리에서 잠시 이야기 나누었지요.
‘이해되지 않아도 소리 내어 읽을 때의 느낌이 좋아요.’
그 이야기를 듣고 시를 볼 때면 조그마한 목소리로 웅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직은 낯설지만 친해지고 싶은 ‘시’
손으로 쓰고, 소리 내어 읽으며 가까워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정지용 시인의 ‘별2’ 란 시를 손으로 옮기고 입으로 내뱉었습니다.
아득한 거리에 있는 별을 잠시나마 손에 담고 입에 머금었습니다.
손승석 선생님께선 칼 힐티의 ‘가난한 밤의 산책’ 필사하셨고, 그 가운데 다음의 구절을 나눠주셨습니다.
1월 2일
우리들은 언제나 신(神)의 손 안에 있었고,
이후로도 언제까지나 그러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들이 죽음이라 부르는 체류지는 그 중대성과 두려움을 잃고 만다.
‘가난한 밤의 산책’은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짧은 글귀들이 모여 있는 책입니다.
잠언과 비슷한 느낌의 책이랄까요?
손승석 선생님께선 차례대로 쓰시다 자신에게 의미 있는 날을 찾아 적으려했는데 시간이 다됐다며 아쉬워하셨습니다.
옮겨 쓴 내용 가운데 <1월 2일> 부분이 와 닿았다며 나눠주셨습니다.
선생님께선 작년부터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종종 죽음에 관하여 생각하셨는데, 바빠지고는 그럴 틈이 없으셨다고요.
잠시나마 필사하며 죽음에 관한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고 하셨습니다.
김혜선 선생님께선 복효근 시인의 시집 ‘따뜻한 외면’ 가운데 <스위치> 라는 시를 필사하셨습니다.
스위치, 복효근
손끝으로 눌러 죽이는 대신
탁자 밑에 줄줄이 기어가는 개미 때를 향하여
진공청소기를 대고 스위치를 켰다
아우슈비츠에서도 그랬을 것이다
다만 스위치만 눌렀을 뿐이었을 것이다
가자지구를 향하여
미사일을 날린 그들도 그랬을 것이다
눈 질끈 감을 필요도 없이
더구나 아주 멀리서,
딜도의 스위치를 넣듯이
웃음을 흘리며
아무 고통도 없이, 있다면
다만 스위치 탓이라고
나와는 아무 관련도 없다고
태연하게
청소기로 개미를 빨아들이는 일상적인 장면에서 ‘아우슈비츠’ 라는 단어가 나와 단숨에 읽어 내려가셨다고 합니다.
청소기에서 아우슈비츠로 나아가는 시인의 생각에 놀라셨다고요.
나눠주신 덕분에 평범한 일상이 잠시 시처럼 다가왔습니다.
지윤씨는 신영복 선생님의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가운데 <잡초를 뽑으며> 부분을 나누었습니다.
잔디밭의 잡초를 뽑으며 아리안의 영광과 아우슈비츠를 생각한다. …
순화교육 시간에 인내 훈련 대신 잡초를 뽑는다. 잡초가 무슨 나쁜 역할을 하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잔디만 남기고 잡초를 뽑는다. 도시에서 자라 아는 풀이름 몇 개 안 되는 나는 이름도 모르는 풀을 뽑는다.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잡초가 된 풀을 뽑는다. 아무도 심어준 사람 없는 잡초를 뽑으며, 벌써 씨앗까지 예비한 9월의 풀을 뽑으며 나는 생각한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잘 알고 있던 것 같은 것들이 갑자기 뜻을 잃는다. 구령에 따른 동작처럼 생각 없이 풀을 뽑는다. 썩어서 잔디의 거름이 될 풀을 뽑는다. …
‘아우슈비츠’란 단어가 나와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지윤씨는 얼마 전에 읽었다며 카르멘 애그라 디디의 그림책 ‘노란별’ 이야기를 했습니다.
노란별을 달아야 하는 유태인들을 위해 먼저 노란별을 달은 덴마크의 왕.
그리고 그런 왕을 따라 노란별을 달은 덴마크의 국민들.
덕분에 좋은 그림책을 알게 되었습니다.
‘군시절 와 닿은 문장이 있으면 베껴 쓰곤 했는데, 오랜만에 이런 시간을 보내니 좋다.’
‘무언가에 오래도록 집중하니 마음이 편안했다.’
‘읽고, 쓰고, 낭독하니 좀 더 깊게 생각할 수 있었다.’
‘고생한 일들이 기억에 오래 남듯, 손 아파가며 쓴 글이라 기억에 더 오래 갈 것 같다.’
짧은 소감을 끝으로 첫 번째 필사모임 마쳤습니다.
손끝으로 무언가 쓰는 게 몹시 어색해진 요즘입니다.
그럼에도 ‘하필’ 필사모임을 시작했고, 함께해주신 분들 덕분에 느긋한 목요일 밤을 보냈습니다.
고맙습니다.
많고 많은 모임 가운데 ‘하필’ 필사모임은 매월 둘째 주 목요일 밤에 이어집니다.
다음 모임도 기대합니다.
첫댓글 손끝으로 눌러 죽이는 대신
탁자 밑에 줄줄이 기어가는 개미 때를 향하여
진공청소기를 대고 스위치를 켰다
아우슈비츠에서도 그랬을 것이다
다만 스위치만 눌렀을 뿐이었을 것이다
가자지구를 향하여
미사일을 날린 그들도 그랬을 것이다
시를 읽는데 가슴이 먹먹해졌어요.
스위치 하나가 많은 고통을 낳고, 많은 이들을 슬프게 할 수 있는지...
스위치에 무슨 뜻이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