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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오장로님가족이세운 이령교회약사
1931년 9월에 금강산 수양관에서 전국 총회가 모일 때 父子장로가 총대로 같이 참석하였다. 1939년 3월 2일 김세민장로님 별세하심에 따라 이 예배당에서 당회장 김응진목사 집례로 3월 6일 장례식 예배를 드리다.
1904년 봄에 이령교회 선교회의 도움으로 경명학교를 설립하여 마산과 인근에서 학생이 모였고 1911년에 첫졸업생으로 李順弼, 金守洪, 金正悟, 金應祚 4명이 나왔으며 이들은 나중에 모두 장로가 되다. 1914년에 본 교회에서 여천순, 김정희, 김하여, 양남수 처녀 4인이 미국 하와이에 이미결혼하여 그곳에서 토지를 개척하고 앞장서서 독립운동에 이승만박사를 협력하고 현재 대부분 자랑스러운 후예를 가지게 되다.
1919년 3월 9일에 이령교회와 경명학교가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이 일어나서 교우 김斗良(김순장로의 부친)씨 외 여러분들의 옥고를 치루게 된 바 해방 30년 기념으로 만세운동기념탑과 장학재단을 추진 중으로 압니다.
경명학교 역대교직원에는 설립자겸 교장인 김세민, 교감 여도선, 교사 곽화서, 김백은, 김주관, 김주현, 구만서, 김정오, 김순, 함태영, 김철부, 황징규 제씨이고 선교사는 로세영, 배위량, 어을빈, 사보담, 심익순, 위철지, 인노절, 라대벽, 손빈련, 맹호은,권부인, 민주부인 외 여러분이었다. 조사와 전도사는 백도명, 김기현, 서초시, 고명우, 김주관, 이현필,이윤기, 이윤종, 장상언, 서성숙, 김길창, 최일형, 함태형 제씨이고 순회목사와 당회장은 선교사 외에 주공삼, 정기정, 심취명, 김응진, 김길창, 박군현, 권남선목사이고 영수는 김세민, 김수갑, 이만응, 여경청, 임경한, 여도선, 손학봉 제씨이고 장로는 김세민, 엄도일, 윤봉수, 여찬송, 여찬식 제씨이고 집사와 권찰은 80년간 많은 분이 수고하다.
이령교회에서 전도되어 설립된 교회는 창원군의 가래골(본포)교회, 갈전교회,남백교회, 상천교회, 밀양반월교회, 창녕군의 오가리(오호리)교회, 장척교회, 남지교회, 영산읍교회, 칠원군에 칠원읍교회, 내내교회, 용동(칠성)교회, 평림교회 등 13처로 기억됩니다.
예배당은 처음에 김성아할머니의 사랑방(현 죽전장 서편방)에서 오동나무 옆에 3간초가, 그후 그터에 새(갈대)로 이은 10간집과 북편에 학교집 그리고 1936년에 이터에 김세민장로가 앞장서서 30평 근대식 건물을 짓고 아래채 사무실로 기와집 4간을 지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새말 동네사람 80%나 예수를 믿고 교세가 좋았는데 일제폭압이 심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종교의 자유를 구속하기 시작하고 소위 대동아전쟁의 시작으로 선교사는 추방되어 교세가 위축되는 현상이 빚어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교세는 복구되었으나 총회로부터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던 이들이 새노회와 총회(현재 고신교단을 가리킴)를 조직함에 따라 본 교회도 이에 찬성하는 신자들이 처음에는 가정에서 후에는 교회사무실에서 따로 모이다가 전에 있던 장소인 관말입구 논가에 예배당을 신축하고 이령제일교회로 모이자 나머지 성도들도 그 부근(현 통합교단 소속의 이령교회가 있는 곳)에 새로 교회당을 지음으로 (너무 가까이 있고 운영상 불편함이 심하여) 근자에 양 교회가 무조건 합하기로 종용하였으나 성립이 안됨으로 본 교회(현 고신교단 소속의 이령제일교회)에서는 (처음 예배당이 있었던) 이곳에 다시 이전하기로 결정하고 성도들이 성심을 다하고 교계유지들의 협조를 받아 김세민장로 유가족들이 할아버지 생시에 세웠던 곳이고 장례식을 가졌던 이 자리에 예배당을 짓게 되었다.
오늘 헌당식예배를 거행함에 동생인 周悟목사가 부산과 대구에서 큰 교회를 목회하는 중 이곳에 와서 설교를 하게되고 필오동생이 협력 참석하며 어머니께 효도하던 강오동생이 아버지遺跡(남긴 발자취)를 중시하여 이일에 크게 헌신하고 막내 이오동생이 신학에 입학하여 이 교회강단을 맡게되는 이 기쁨을 여러 교우와 일가친척 그리고 귀빈이 모인 이 식에 김세민장로의 맏아들이며 이곳 경명학교에서 65년전에 1회 1호 졸업장을 받은 불초 정오가 80老軀나마 건강한 몸으로 서울서 달려와서 즐거운 마음으로 이 약사를 봉독하게 되는데 멀리 일부러 오신 김길창목사님(현 경성대학교 설립자) 내외분은 90고령에 본교회와 소년시부터 관련이 계시고 동생 강오의 맏동서로 이 자리에 참석하여 앞으로 축도까지 하시게 됨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시편 끝장 끝절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1976년 1월 2일
대구제이교회원로장로 한국장수대학원 원장 김정오 謹奉
한국 초대 기독교의 설립에 관한 중요한 문서인 '조선야소교 장로회 사기'(1928) 등에는 1883년 황해도 장연의 솔내교회가 세워진 후 아펜젤러가 1885년 인천내리교회를 언더우드가 1887년 서울새문안교회를 세웠다고 기록하며 부산경남지역의 초대교회의 설립연도와 설립자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1892년 부산진교회 호주선교사 멘지스 등
1983년 초량교회 메카이와 베어드
1985년 울산병영교회 이희대와 호주선교사들
1896년 영도제일교회 김치몽
1896년 거제도 옥포교회 주금주, 주형찬, 아담슨
1896년 창원월백교회
1897년 함안사촌교회 조동규
1897년 밀양춘화리교회 김응진, 김응삼
1898년 김해읍교회 배성두
1899년 함안이령교회 김세민(김정오장로님부친)
1901년 마산문창교회 아담슨
이상에서 김해읍교회는 우리고향교회인 이령교회보다 1년 앞서 세워진 사실을 알 수 있다.
김해읍교회의 배대위(배동석의 자)고모부가 이령교회의 김복남고모를 데리러 김해에서 이령까지 오면서
배성두장로와 김세민장로가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예배당약국집' 참조).
* 위의 1987은 1897의 오타임
1976년 1월 2일 김정오장로님이 이령교회약사를 낭독하신 날이고 이령제일교회당을 새로 지은 날입니다. 앞줄 왼쪽에서 김이오목사(상식이를 보고 있음), 공화순원장(현 신선어린이집, 얼굴이 흰), 김상신(권용수목사 사모, 김상윤교수 여동생, 얼굴에 그늘짐), 김상식목사(앞에 있는 아이), 김필오아버님, 김상수(김주오목사 3남), 김주오목사, 김정오장로, 김길창목사(경성대학교 설립자, 얼굴에 그늘짐), 김주오목사사모(김주오목사 뒤오른쪽), 김강오장로(김주오목사 사모님 뒤), 김상구(앞에서 볼 때 김강오장로 오른쪽)
김정오장로님의 가족 복음역사
경남 함안군 칠북면 이령리에 살고 있던 김세민의 어머니 김성아는 1839년 남편 김기철(金基哲)을 여의고 외아들 세민만 바라보며 살다가 병까지 자주 생겼다. 2대째 독자를 둔 불안한 마음에 유명한 무당들을 찾아다니며 독자 김세민을 통해 태어날 손자들만큼은 많기를 빌었다. 이를 반복하던 중 김해 김씨 종친회 회비를 받으려고 나타난 조카 김선약(일명 수업)에 의해 복음을 듣게 된다. 그 후 김성아는 자신의 손아랫 동서인 이성근과 동네 그리고 다른 여인 복음노인(福音老人)을 권하여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김세민은 밀양 박씨와의 사이에서 1남 2녀를 낳았는데 이들 중 장녀 김복남이 태어나고 장남 김정오 그리고 차녀 김순남이 태어나게 된다. 삼남매를 낳은 박씨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이후 김세민은 칠원교회의 손종일로부터 재혼을 권유받았다. 세계가 존경하는 순교자 손양원목사의 부친인 손종일은 6살 아래로 형님과 동생사이처럼 잘 지내는 사이였다. 친형과 같았던 김세민이 혼자 사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손종일은 때마침 칠원교회서 하와이로 신부로 가게 될 처자 중 하나를 소개했다. 그 처자는 믿음 때문에 진동의 한 유교집안에서 쫓겨나 칠원교회에서 살고 있던 배씨였다. 어머니 김성아의 기도를 들어 주신 하나님께서 이 가정에 자녀의 복을 허락하시어 둘째 며느리 배씨로 부터 주오, 태오, 평오, 필오, 강오, 칠오, 이오 그리고 주희 주복 등 모두 8남 2녀가 태어났다.
전술한대로 김세민이 기독신앙을 믿게 된 배경에는 아들 하나만 낳은 한(恨)을 가진 모친 김성아 때문이다. 아들도, 손자도 하나만 남겨진 가문에 대해 지울 수 없는 부담과 애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베어드 선교사를 통해 예수를 믿으면 자손이 번성한다는 말을 듣고 기독신앙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같이 기독신앙을 전달해준 인물이 바로 김해교회의 초대 영수였던 배성두의 친구로 알려진 김선약(金善若)이다. 김선약은 당시 김해에 거주했던 인물로 고을의 풍헌(지금의 면장)을 지낸 인물이며 또 다른 이름은 소설 약방집 예배당에서 전하는 대로 ‘김수업(金守業)’이다. 이때가 1897년 봄으로 수개월을 열심히 기도하고 장녀 김복남도 함께 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다. 그 부친 김세민은 아직 믿지는 않으나 어머니와 숙모를 위하여 전도지와 복음서 하나만 있는 작은 성경인 소위 쪽복음이라는 책을 읽어드리다가 그해 5월 중에 믿기로 결심하고 선교사 노세영목사가 그날부터 영수직을 맡김으로 칠원 연개(蓮浦)교회 즉, 지금의 이령교회가 창립되었다. 1900년 봄에 김정오가 처음 유아세례를 받고 김세민은 영수로 시무한지 20년인 1916년에 경상노회에서 장로에 임직되고 이령교회 당회가 조직되고 1936년에 이령예배당을 근대식으로 신축하고 헌당식과 김세민장로의 제직 40년(영수 20년 포함)의 표창식을 거행하였다. 이날을 기념하여 김정오는 덕촌 성(成)부자의 기와집 4칸을 교회사무실로 옮겨서 짓고 헌납하여 삼안당(三安堂)이라 이름지었다.
아직 생존해 있는 5남 김필오옹의 전언에 따르면 김세민은 당시 만석꾼(소설 ‘약방집 예배당’에는 천석꾼으로 나옴)으로 불려졌으며 고향 칠북 뿐만 아니라, 영산, 진영, 김해에까지 전답이 있어서 일 년에 두어 차례씩 추수 때나 지역 행사 때마다 부친을 따라 다니면 사람마다 허리를 숙여 절을 했고 배에 오르거나 내리면 떠나기까지 허리를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 순사들도 아버지에게는 깎듯 했으며 특히 시장에 다니다가 국밥집에라도 들어서면 3,40명씩 되는 손님들이 전부 일어나 허리를 숙였는데 그런 분이 예수를 믿고 영수 노릇을 하니 이령교회 교인뿐 아니라 각처에 오고가는 사람들 중 교인이라면 아버지 신세를 안진 사람이 없었고 누가 예수 믿는데 장사가 안 되거나 굶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흔쾌히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지역마다 밭과 논을 관리해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머무는 집이 있어서 오가며 그 집에서 하루를 머물고 다녔을 정도로 대단했던 것은 분명하다”고 말한다.
현재 창원시 의창구에 위치하는 본포교회는 1901년 최초의 전도자 김화일 씨의 전도로 이종근 씨 집에서 이현필 씨 등 10명이 모여 첫 예배를 드리게 된다.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김화일이란 여성이 바로 김세민의 누나다. 김화일은 믿는 집안에 시집을 가기위해 혼처를 찾는 중, 본포에 거주했던 이종근을 만나 결혼했는데 동생 김세민의 경제적 도움과 전도로 본포교회를 설립하게 된다. 특기할 만한 것은 본포교회 이종근과 김화일 사이에서 태어난 4형제(이현필, 순필, 윤필, 수필)는 모두가 장로로 섬겼고 이 중 이현필은 이령교회 조사로서, 칠원 교회 조사로서 활동하면서 전도인의 직무를 감당했던 인물이다. 또한 딸 이필임은 당시 마산에서 고무신 공장을 하던 손상호와 결혼했는데 그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 김영삼 전대통령의 부인 손명순여사이다.
지금 이령교회 옆에 있는 칠북초등학교 이령분교는 한 때 학생수가 12반을 넘을 정도로 상당히 컸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이 학교의 원래 설립자 또한 김세민이다. 학교 연혁에 의하면 1904년에 사립 경명학교로 시작하여 1911년 4월 1일자로 초대교장 직을 맡았다.
1919년 3월 1일에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이 8일 만인 3월 9일 칠북 연개장터에서 일어난 배경에도 김세민과 그 일가친족이 되는 김두량, 김순, 아들 김정오 등이 있었고 무엇보다 이령교회와 경명학교가 주도한 만세운동이었다. 한 동안 경남 최초의 만세운동이 영산의거설과, 밀양의거설이 대립되어 왔지만 실제 영산의거는 3월 11일이며 밀양의거는 3월 13일이다. 이 지역의 만세운동 날짜가 칠북 연개보다 이틀과 나흘 각각 뒤떨어져 있다. 따라서 이령교회가 주도했던 칠북 연개장터 의거가 경남 지방 최초의 만세 운동이 된다. 이 사실이 최근에 와서 학계의 인정을 받게 된 것은 늦게나마 다행한 일이다.
이같이 경남 최초의 만세운동이 부산도 아니고 대구도 아닌 작은 농촌 칠북에서 시작된 이유가 바로 김세민의 아들 김정오와 사위 배동석 때문이다. 서울에서 3.1 만세 계획하면서 경남 대표를 선정하려 경북 대표 이갑성을 2월 23일 마산에 보냈지만 실패하고 다음 날 배동석을 마산으로 파견하였다. 배동석은 이때 처가에서 아내 김복남을 만나 일박을 하고 2월 26일 마산으로 향한다. 그러나 또 다시 대표 추천에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칠북 이령 처가에 다시 들러 장인 김세민에게 3.1 만세운동 계획을 소상히 보고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김세민과 일족 및 칠북 지역의 유지 14명은 고종황제의 인산(因山)과 서울 3.1 운동 참관을 위해 상경했다. 이 일을 마치고 돌아온 것이 칠북 연개 의거의 가장 밑거름이 되었다.
배동석은 3.1 만세운동건으로 유관순 열사와 함께 고난을 받고 출옥 후 바로 세상을 떠났으며 김정오 역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된다. 김정오는 대구 시의회활동을 통해 대구발전에 기여했으며 첫 민선 시의장으로 봉사했다. 교회봉사로는 대구제이교회의 전신인 달남교회 장로(1927년 1월 안수)로 봉사했으며 일장기를 달고 마라톤 우승을 슬퍼했던 손기정에게 당시 송아지 한 마리 값에 해당되는 거금으로 대구우체국 역사상 최초의 국제전보를 축전을 독일 베르린에 보냈고 훗날 두 사람은 서로 만나 그때의 감격을 다시 나누게 된다. 지금도 김세민 장로의 후손들은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 교육계로는 계명대학교 이사장을 지낸 김상열교수, 현재 고신대학교 인문사회복지대학장으로 있는 김상윤교수 등이 있으며 (대구 쪽에 추가할 것) 가 있으며 교회를 섬기는 교역자로는 고신교단의 총회장을 역임한 김주오 목사와 그 동생 김이오 목사 그리고 그 네 손자 상백, 상욱, 상식, 상학 모두가 목사로 섬기고 있고 의료계는 김강오장로 와 그 아들 상훈이 있다. 그리고 많은 손자들 중에서도 장로와 의사들이 나와 모두 20명이 넘게 되었다고 하니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이다.
“당시 장로는 교인들 먹이는 것이 장로였던 때라 장로가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까지 했던 시절이고 또 재산 다 팔아 교회를 위해 섬겼던 시절이요 선친도 그 많던 전답을 교인들 살리는 일에, 교회 세우는 일에,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했으니 이것이 큰 복이 아닌가? 생각할수록 참 감사한 일이지......”
참고문헌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7집』(2006)
이현찬 집필,『칠원교회백년사』(칠원 : design group HAN, 2009)
조규통, “칠원지역에서의 개신교 전래 시기”, 『부산ㆍ경남 기독교역사연구』 제15호, 부산경남기독교 역사연구회, 2008.7.
출처 http://blog.daum.net/sukim/13694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