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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미래사회포럼21 원문보기 글쓴이: 큰바위와 소나무
성명 |
1310년 |
1320 |
1330 |
1340 |
1350 |
1360 |
1370 |
1380 |
1390 |
1400 |
1410 |
李茂芳 |
1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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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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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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廉興邦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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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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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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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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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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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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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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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益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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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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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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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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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尙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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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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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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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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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夢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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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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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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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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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子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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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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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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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3 |
權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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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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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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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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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震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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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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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文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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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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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啓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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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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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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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합격연도. @장원합격.
朴宜中, 李崇仁, 金九容, 鄭道傳, 鄭復周 등.
그러나 김자수의 경력을 보면, 관직생활이 그다지 평탄한 것은 아니었다.
과거에 합격한 후 그는 德寧府注簿로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1375년(우왕원년)에 左正言으로서 언관직에 있었고,
이때에 목은 이색은 [純仲說]을 지어주어 용두회 멤버 후배로서 김자수를 격려하였다.
언관직에 있으면서 강직한 언론활동을 하다 보면, 권신의 미움을 받아 유배당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김자수도 조민수를 탄핵하다가 오히려 全羅道突山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후 곧 典校寺副令으로 복직되고, 1389년에는 門下府郎舍가 되었으며,
1390년에는 成均祭酒兼世子侍學, 司宰寺判事, 成均大司成兼世子左輔德, 判典校寺事를 역임하였다.
1392년, 고려가 망하기 직전에는 右常侍, 左常侍를 거쳐 6월에 刑曹判書가 되었다.
김자수의 개국후의 官歷에 대하여 조선후기 이래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문집국역 발간이후에는
실록의 기록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신천식교수의 논문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1413년에 졸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와 같이 김자수는 당대의 연혼관계를 통하여 볼 때나
또는 자신의 실력으로 장원급제하여 당대에 촉망받는 신진관료로서 활동하였다는 점에서 볼 때,
고려말 신진사대부의 성격을 그대로 대표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만 새로운 왕조의 개창에 즈음하여 어떠한 행동을 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엇갈린 사료들이 있고 미묘한 문제들이 있어서 문집번역이후의 역사학계의 해설에 따르기로 한다.
상촌 선생은 李穡, 權近 등 당대의 名流들과 깊이 교유하였고,
이들 가문과 통혼하였다는 점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이색 가문의 韓山李氏는 새 왕조 개창에 즈음하여 크게 박해를 받았지만 곧 새로 등용되었고,
안동권씨 등은 새 왕조에서도 새로운 국가건설에 기여한 점을 참고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김자수에 대한 재평가는 17세기에 들어서서 후손인 김홍욱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상촌의 유허와 묘를 推尋하고 先代의 효행과 不事二君의 정신을 높이 기렸다. 그
는 안동 남문 밖의 상촌공의 유허를 살펴보고 감회를 시로 적었다.
<桑村公旌孝碑>(8대조인 고려조의 관찰사공이 안동 남문밖에 살았었는데, 지금도 효자비가 유
허지에 남아있다. 말을 내려 물뿌리고 청소하니 감회가 새로워서 적는다)(金弘郁, ꡔ鶴洲集ꡕ
권3)
先祖聲名冠一時 선조의 높은 이름이 한 시대를 뒤덮으니
凜然松栢雪霜姿 늠름한 소나무요 서리발 같은 기상이네
前朝自盡忠臣節 고려왕조를 위해 자진하니 충신의 절개요
後世猶傳孝子碑 후세에는 아직도 효자비가 전해오네
秋嶺路傍瞻古墓 추령의 길가에서 옛무덤을 바라보고
花山城外問遺基 화산(안동) 성밖에서 살던 터를 찾네
經過此日無窮意 오늘 이곳을 지나는 것 무궁한 뜻 있으니
下馬踟躕涕淚垂 말 내려 머뭇거리며 눈물 떨구네
또한 이 시의 서문에서(ꡔ학주집ꡕ권9 序 先祖桑村公遺墟感述詩序)
8대조인 상촌공이 안동부성 남문 밖에 살았는데, 효행으로 정려가 세워졌고
뒤에 洪武甲寅科(1374, 우왕즉위년)에 장원이 되어 관직이 고려왕조의 관찰사였다가,
조선 태조가 즉위하여 형조판서로 징소하였으나 광주 추령에 이르러 드디어 자결하여
두 姓을 섬기지 않겠다는 의리를 분명히 하였다고 하여, 상촌 김자수의 효행과 충절을 높이 찬양하였다.
물론 自盡에 관련된 상촌의 유언과 金弘郁 자신의 父親이 安奇察訪을 하면서 비각을 지은 사실 등도 상세히 설명하였다.
또한 김홍욱은 先祖桑村公墳山記(ꡔ학주집ꡕ권9 記)에서 상촌공의 분묘를 찾게된 과정과
상촌의 효행과 충절을 다시 한번 기술하면서,
자신이 敬差官으로 안동부에 도착하여 孝行 旌閭를 방문하였을 때에 안동부의 선비 배익겸이 시묘살이를 하면서
꾼 꿈의 詩 이야기와(增開兆宅光新道 改築旌閭賁舊基) 상촌의 안동 故居 金氏洞 이야기,
그리고 상촌공의 묘소를 찾게된 과정을 상세히 서술하였다.
상촌에 대한 재평가는 道義를 중시하는 사림 세력이 중앙정계를 장악하면서부터 이루어지지 않나 생각된다.
[東國輿地勝覽] 안동부조에는 金自粹가 새왕조에 仕宦하였다는 것을 기록하였지만,
안동 사림의 기록인 [大東韻府群玉], [永嘉誌]와 族譜, 家乘 등에서 그가 節死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하였으며,
후대 사림들의 기록 즉 [燃黎室記述], [增補文獻備考]와 [慶尙道邑誌], [安東府邑誌] 등에는
안동 사림의 기록을 그대로 遵信하여 다시 수록하였다.
2. 慶州金氏 桑村家系의 名門巨族으로의 성장
고려말 조선초기에 경주김씨는 이미 명문거족으로 성장하여 있었다.
고려후기의 權門勢族은 어떤 특수한 문벌 그 자체로서 큰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초기와는 달리
구체적 정치기구의 구성원으로 권력을 떨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귀족적이지만
또한 새로이 관료적 성향을 지니게 되는 특성을 가지는 것으로 파악되고,
官人으로서의 그 신분세습 방식은 주로 蔭敍에 의하고 科擧의 비중은 아직 낮았던 것으로 지적된다.(閔賢九, 1974 [고려후기의 권문세족] {한국사}8)
전자에서 나타난 관료적 성향이 후자에서 그대로 계승됨은 주지의 사실로서 정비 강화된 신왕조의 집권적 통치체제는 그것을 더 강화시킨 것으로 알려진다.
관료적 성향이란 본질적인 문제에서는 이와 같은 공통점이 발견되지만,
한편 신분세습의 방식에서는 현저한 차이가 찾아진다. 전자는 그것을 주로 蔭敍에 의하여 관직과 권력에 진출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역시 科擧의 비중이 높은 것으로 파악된다.(이태진, 1976 [15세기 후반기의 [鉅族]과 명족의식-{東國輿地勝覽} 인물조의 분석을 통하여] {한국사론}3, 서울대 국사학과)
{東國輿地勝覽} 인물조를 비롯한 제사례(慵齋叢話의 ‘我國鉅族’ 등)는 바로 훈구파의 명족의식의 산물이다.(李泰鎭, 1976 [앞의 논문])
승람 인물조의 거족 씨성과 [용재총화]의 거족 씨성에는 파평윤씨 등 총 75개 씨성이 파악되고 있다.
그 중에는 경주김씨도 포함되어 있다. 성현의 [용재총화]의 ‘아국거족’ 명단은 실제로는 옛 거족은 10여씨성을 드는 것에 그치고 실제는 成俔 당시의 성세에 치우쳐 작성된 것이다.
이처럼 [동국여지승람]의 인물조는 명문거족의 盛勢를 나타내기 위하여 편찬하였다고 파악되는데,
고려말 조선초기의 명문거족은 훈구파의 뿌리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승람에 기재된 당시에 성세를 보였던 주요성씨들 가운데
경주김씨는 <두 개 이상의 친족으로 구분되는 씨성>으로서의 성세를 보여준다.
즉 [동국여지승람] 인물조의 본조항에 나타난 巨族의 仕路․錄功․國婚關係表에서
경주김씨는 登第 2명, 仕路不明 2명, 功臣 1명이 등재되어 있다.
金稛이 開國功臣으로, 金孟誠이 刑曹判書로, 金新民이 登第하여 中樞院使에,
金永濡가 登第하여 刑曹參判에까지 오르는 것으로 나와있다.
이 가운데 앞의 3인은 아래의 系圖와 같이 始祖를 順雄으로 하고 있고, 후의 1인 즉 김영유만이 시조를 仁琯으로 하고 있다.
<경주김씨의 가계와 주요인물>
▷ 金順雄(始祖, 敬順王 後)---因渭---(5대 생략)---光俊---南美/南基---(3대 생략)---稛---孟誠/仲誠/季誠
孟誠---榮富---光粹
仲誠---安民/新民/仁民 安民---文卿 新民---升卿/泰卿
* 稛系---仁民=黃保身의 女(長水黃氏)
▷ 金仁琯(始祖, 憲康王 5代孫)---則麗---匹勻---貞裕---宗誠---裔---英伯---珸---自粹---根---永源/永濡
위의 系圖만을 보면, 順雄系가 더 盛勢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김자수가 신진사대부로 성장하여 있었고,
연혼관계를 볼 때도 당시의 명문거족과 통혼을 하여, 조선초기에는 이미 훈구세력과 상당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경주김씨는 이미 그 명문거족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金永濡가 훈구세력으로 성세를 누리기 2세대 앞인 김자수 대에는, 앞에서도 살핀 바와 같이 신진사대부적인 성격을 가진 가문들과 통혼하였다. 그러나 김자수 대 이후에는 당시의 명문거족들과 통혼하기 시작하였으며, 김영유 대에 이르러 전성을 보인다. 명문거족으로서의 성격을 나타내기 위하여 내외가를 망라하여 편찬하고 서거정이 서문을 쓴 [安東權氏世譜]에서 경주김씨 상촌가계와 관련이 있는 부분을 추출하면 다음과 같다.
<경주김씨>(---: 부자관계, /: 형제관계, =: 부부관계를 의미함)
金英伯---珸(가)(=一直孫洪亮女)/玳(나)(=直提學河陰崔汲女)/戭(다)(=平章事鐵原崔澄女)
(가)金珸---女=朴天錫(ㄱ)(密陽,三司左尹)/女=金宗敬(ㄴ)(永同,右贊成)/子 汀(ㄷ)(=延日鄭氏, 初諱는 晋龍, 延日鄭氏族譜에는 震龍. 工曹典書)/女=洪益壽(ㄹ)(?,左尹)/女=金瑞麟(ㅁ)(安東,郎將)/子 自粹(ㅂ)(=郎將安東權隨女)
(나)金玳---自溫(=金海裵氏監察承漸女. 生員,文科,兵曹正郞)/自恭
(다)金戭---承策(判典校寺令)---自英/禹吉生(---玄寶)/朴守謙
(ㄱ)朴天錫---堧(知中樞府事,文衡,文獻公)
(ㄴ)金宗敬---訓(文,典祀少尹)/諒(兵曹參議)---金守溫(佐理功臣)/金守和
(ㅂ)金自粹---根(1374~1425,贈兵判)=密陽朴氏(檢校漢城府尹天貴女)=牛峰李氏(兵曹參判淳女)/權厚(*權靷(禮判)---
厚(中郞將)---啓經/自經)---永년(a)/永源(b)/永湔(c)/永濡(d)/權摩(e)(---伸/僑)
(d)金永濡(1418~1495)---薰(1437~1501. 進士, 尙衣院僉正)/萱/蓂/林可棟/蓍/萍/柳宗琇/金保秋
=淸州韓氏(1419~1501)中樞院使瑞龍女
金薰---元弼(?)/世弼(1473~1523)/李淑(宗室釜山守)/邊士溫(原州人)
=鎭川宋氏(1435~1517)
金元弼---礪/黃謹/卞承宗/尹彦弘/金安鼎
金世弼---石+肅/石+瞿/楊誼/石+諸(1509~1547)/崔弼臣/李贄
金萱---(繼)洪弼-砥/磁/硎
金蓂---宗弼(-碔)/禹弼(-以道)
金蓍---像弼(-繼天/黃琳/智天)/李顆
金萍---柳應辰/洪弼
<안동권씨>
A)權溥---皐---僖---近(가)/遇(나)
(가)權近---踐(ㄱ)/李種善(ㄴ)/徐彌生(ㄷ)/踶(ㄹ)/跬(ㅁ)/崔宙(ㅂ)/蹲(ㅅ)
(ㄱ)權踐---睫/朴孝諴/鄭衡/瞻/眉/睦
(ㄴ)李種善---季疇/李伯常/季憐/季甸(領院使․韓山君)/季畹(원)/金崇老/季町
(ㄷ)徐彌生---李正己/李倍倫/居廣/李紹生/崔恒/金寬安/居正
(ㄹ)權踶---朴大好/金模/摯/擥/攀/摩(僑/伸)/挈/韓明溍/擎
(ㅁ)權跬-聃/聰
(ㅂ)崔宙-無後
(ㅅ)權蹲-許蔘/崔漢老/惠/念/辛尙調/李頤(鷄林令)/閔自亨
B)權溥---準---適---韓脩---尙桓(가)/尙質(나)/安景儉(다)/金孟誠(라)
(나)韓尙質---尹坤(ㄱ)/起(ㄴ)/成伋(ㄷ)/姜策(ㄹ)
(ㄴ)韓起---明澮(上黨府院君)/明溍(典廐丞)/宋秀琳(생원)
C)權漢功---仲達---李穡---種德/種學/種善
김자수의 사위에 權厚가 있으며 외조카가 文獻公인 朴堧이다.
당조카 사위에는 禹倬의 아들이고 고려말의 권신 禹玄寶의 부친인 禹吉生이다.
물론 사위인 권후는 재지사족적인 성격을 가지지만, 박연이나 우현보는 당대의 명문거족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와 같이 김자수 자신은 신진사대부의 성격을 가지지만, 이후부터는 명문거족들과 통혼을 하면서 조선초기의 훈구적인 성격을 강화해간다고 할 수 있다. 훈척적인 성격은 김영유의 단계에 가면 확연히 드러난다.
김영유는 조선초기의 대표적인 훈척세력인 청주한씨 중추원사 韓瑞龍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權近의 손자인 權摩는 김영유의 妹弟이다. 또한 권마는 훈구세력의 대표인 韓明澮의 동생인 韓明溍의 妻兄이다. 이처럼 김영유 단계에 와서 경주김씨 桑村家系는 훈구적인 성격을 강하게 가진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