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1968∼69년 지상·바다·하늘 입체적 도발
■제2의 한국전쟁을 아시나요?
124군부대 청와대 침투 등 무력도발
미 해군 푸에블로호 공해상에서 나포
미 공군 정찰기 EC-121 동해상 격추
‘The Second Korean War’로 명명
16년 만에 살아난 한반도 전운 재수정
문관현
연합뉴스 다국어뉴스부장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3년 동안 한반도 전역에서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400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휴전협정은 분단체제를 관리·감독하는데 태생적 한계를 드러내고 13년 만에 또 다른 한국전쟁으로 이어졌다.
비록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용어이지만, 미국에서는 1966년 10월 5일부터 1969년 12월 3일까지 ‘제2의 한국전쟁(The Second Korean War)’ 또는 ‘한반도 비무장지대 분쟁(The Korean DMZ Conflict)’이라고 부르고 있다.
북한은 1967년을 전쟁준비 완료와 분쟁 조성을 위한 시험의 해로 선정하고 준비에 착수하였다. 1968년과 1969년 대대적인 침투 및 베트남 전쟁과 같은 후방교란 작전을 감행해 전쟁도발 기운을 성숙시키고 1970년을 전후해 속전속결에 들어간다는 계획을 세워놓았다.
북한군은 전쟁을 방불케 하는 무력도발들을 잇따라 감행하였다. 1968년 1월 북한군 124군부대가 청와대 입구까지 침투하였고, 미 해군 푸에블로 호를 원산항 인근 공해상에서 나포하였다. 이듬해 4월 미 공군의 정찰기 EC-121을 동해상에서 격추하는 등 지상·바다·하늘에서 입체적인 북한군 도발이 이어졌다.
주한미군 자료에 따르면 제2의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 299명이 숨지고 550명이 다쳤으며, 미군은 75명이 희생되었고 111명이 부상당하였다. 북한군 역시 사망 397명· 포로 12명· 탈영 33명 그리고 간첩 2462명이 체포당하였다.
비무장지대 수문장 ‘임진 스카우트’ 탄생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미국 해병대 1사단 제1임시민정경찰중대가 비무장지대 수색정찰 임무를 맡았다. 해병 민경중대는 1953년 9월부터 1955년 2월까지 비무장지대 휴전협정 업무를 담당하였고, 미 육군 제24보병사단에게 바통을 넘기고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미24사단은 1957년 10월 제1기병사단으로 교체되었고, 1965년 7월 미2사단이 임무를 이어받았다.
로널드 M. 글레저 준장이 1965년 가을 미2사단 작전 담당부사단장으로 부임하면서 고급전투훈련교육대(ACTA: Advanced Combat Training Academy)를 창설하였다. 미 육군이 본토가 아닌 해외에서 전투훈련 학교를 운영한 사례는 ACTA가 최초였다.
ACTA 교육은 전투병 150여 명을 대상으로 22일 동안 총 262시간의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였다. 전투병들에게 필수적인 산악훈련은 물론 독도법과 지표항법(Land Navigation), 실탄사격을 동반한 무기조작법, 폭파, 통신, 전술, DMZ 규정과 규칙 등에 대한 이론과 실습훈련 등을 숙지하였다. 주로 파주 화석정 인근 절벽에서 암벽 레펠을 실시하였고, 동파리 인근 초평도에서 보트 상륙훈련까지 받았다.
미2사단은 ACTA 출신 가운데 군사분계선(MDL) 이남에서 임진강 이북까지 비무장지대를 수색 정찰하는 전투병을 가리켜 ‘임진 스카우트(Imjin Scouts)’라고 명명하였다. 이들은 군복 상의에 임진 스카우트 패치를 착용하였는데, 비틀즈 존 레논이 뉴욕 공연에서 임진 스카우트 군복을 입어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출처: 임진 스카우트(www.imjinscout.org) 홈페이지
미군부대 내 한국군 별동대 운영
임진 스카우트와 함께 전원 카투사들로 구성된 대간첩중대(CAC: Counter Agent Company)가 미2사단 전투력의 양대 축을 형성하였다. 1967년 1월 31일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백의리 미1군단 포병사령부가 소재한 캠프 바바라에서 윤필용 육군 방첩부대장과 찰스 본스틸 유엔군사령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CAC 창설식을 개최하였다.
CAC 3소대는 미군 정보부대에 배치되면서 카투사들이 머리를 기르고 민간인 복장으로 첩보를 수집하는 ‘편의대’ 형태로 운영되었다. 요원 2-3명이 임진강 주변에 조성된 파주시 마정리와 운천리, 내포리 등 이장집에 ‘하숙생’으로 위장해 거주하였다.
임진강 반구정 일대에서 첩보활동 중인 편의대 요원이들은 매일 마을 주변 예상 침투로를 점검하였고, 이상 징후가 발견되면 미2사단 상황실(TOC)에 즉각 보고하였다. 신고가 접수되면 추격조가 무장 헬리콥터를 타고 현장에 출동하는 신속대응 시스템을 운영하였다. 미2사단이 서부전선을 대대 단위로 나눠 지켰지만, CAC는 사단 전체 구역을 헤집고 다니면서 ‘올라운드 플레이어’ 역할을 수행하였다.
CAC 부대는 주한미군의 헬리콥터 기동력을 앞세워 적재적소에 투입되었고, 한국의 농촌과 산악 지형, 주민 성향 등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활용해 대간첩 작전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올렸다. 미2사단이 1986년 초 공중강습대대를 편성한 것에 비해 20년 전에 헬기 기동타격대를 운영한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임진 스카우트·CAC 재평가 필요
분단의 현대사는 주한미군 임진 스카우트와 북한군 특수8군단이라는 군사조직 대결구도로 압축된다. 임진 스카우트가 1965년부터 1991년까지 남북한 군사적 격돌에서 한미연합 전투부대의 핵심 전력으로 자리 잡았다.
임진 스카우트보다 4년 늦게 설립된 북한군 특수8군단은 1984년 경보교도지도국에 통합되는 수모를 겪었다. 북한이 의욕적으로 출범시킨 특수8군단이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15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도발자 특수8군단의 ‘창’과 수호자 임진 스카우트의 ‘방패’ 대결에서 임진 스카우트가 판정승을 거뒀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북한군 특수8군단에 비해 임진 스카우트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김신조 일당 침투사건의 경우 가해자의 역사를 부각시킨 나머지 우리 군경, 민간인의 존재와 역할은 사라졌다.
예를 들면 김신조 일당이 철조망을 뚫고 침투한 경기 연천군은 1·21역사공원을 만들었고, 파주시는 김신조 침투루트에 삼림욕장을 조성하였으며, 서울지방경찰청은 북한산 침투로와 암굴을 안보체험 테마루트로 활용하는 등 ‘김신조 부대 띄우기’에 혈안이 되었다. 남침 도발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겠다는 당초 취지는 온데간데없고, 북한군을 찬양·고무하는 부작용만 남았다. 주객(主客)이 전도된 느낌을 지울 수 없어 안타깝다.
북한군 124군 부대원이 31명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국민이 많지만, 당시 우리 군인과 경찰, 민간인 희생자들이 똑같이 31명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다.
임진 스카우트와 콤비를 이뤘던 CAC는 1968년 9월 19일 북한군 침투조 5명을 임진강 갈대밭에 몰아넣고 전원 섬멸한 전과를 올렸다. ‘9·19전투’는 당시 미2사단의 최대 전과로 평가 받지만 우리 국민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역사를 망각한 민족에게 비극은 반복되는 성향을 지닌다. 이제라도 제2의 한국전쟁에서 한미 양국군이 기울였던 노력과 성과에 대해 정당한 평가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 부지불식간에 제3의 한국전쟁, 제4의 한국전쟁이 반복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