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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시대 5대 사고(史庫)
태백산맥의 한자락인 오대산.
고봉준령이 겹겹히 늘어선 이곳.
이 첩첩산중에 오롯이 들어선 건물이 있다.
조선시대 실록을 보관했던 사고(史庫)다.
굳이 이 깊은 산속에 사고를 만들고, 조선왕조실록을 여기에 두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연산군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대궐에서 쫓겨나셨는지,
무슨 죄를 더 지었길래 그것도 부족하여 사사까지 당하셨는지..."
인수대비(성종의 어머니, 연산군 할머니)
- "폐비의 죄악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폐비를 사사하세요!~"
- 드라마 <왕과 비> 중에서
"연산군이 생모 폐비 윤씨의 일을 알게 되면서
한참 인기를 더해가고 있는 사극 <왕과 비>의 한장면을 보셨습니다.
물론 이 드라마에는 작가의 상상력도 가미가 되어있습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는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 역사를 기록해놓은 책이 바로 <조선왕조실록>입니다.
이 실록에는 조선 왕조 500년의 정치사가 낱낱이 들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사회와 문화 전반, 그리고 서민들의 생활상까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97년 유네스코에서는
세계 여러 나라의 왕조 실록 가운데에서
(명 실록, 청 실록, 일본 삼대실록),
유일하게 이 조선왕조실록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한 바 있습니다.
이제는 세계 보물이 된 셈이지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장소를 '사고(史庫)'라고 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에 전국에 다섯군데 이 사고(史庫)가 있었습니다.
한양 창덕궁내 춘추관에 중앙 사고가,
그리고 강화도에 정족산 사고,
무주에 적상산 사고,
봉화에 태백산 사고,
평창에 오대산 사고 등,
이렇게 지방에도 각각 네군데 사고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한양에 있는 것은 내사고,
또 지방에 있는 것은 외사고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외사고가 전부 산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깊은 산중에 조선왕조실록을 두었던 것일까요?
오늘 역사스페셜에서는 조선 시대 외사고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먼저 외사고가 있었던 현장으로 가 보도록 해보겠습니다."
2. 지방에 있는 외사고의 위치와 구조!~
강원도 평창에 있는 오대산.
이곳엔 신라 때 세워진 명찰 월정사가 있다.
사고(史庫)를 가려면
월정사에서 십 리 길을 더 가야 한다.
포장이 안된 진입로는 좁고 가팔라 눈길에선 아예 다리품을 팔아야 한다.
지금도 이런데 옛날에는 더 험한 길이었을 것이다.
오대산 사고(강원 평창)
사고(史庫)는 구릉에 비탈진 지형에 서 있다.
건물은 단 두 동.
주위엔 낮은 돌담이 둘러져 있고,
남쪽과 동쪽에 각각 출입문이 나 있다.
위쪽 건물은 선원보각(璿源寶閣).
왕실의 족보가 보관되어 있던 곳이다.
그 아래쪽이 실록이 있던 사각(史閣)이다.
이처럼 사고(史庫)는
어느곳이든 선원보각과 사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대산 사고는 옛건물이 아니다.
6.25 때 불타버렸는데
선원보각은 88년에,
사각은 91년에 복원되었다.
1910년대의 오대산 사고.
일제가 발행한 <조선고적도보>엔
당시 남아있던 사고의 사진이 실려 있어서, 옛모습 그대로 복원될 수 있었다.
가장 험준한 곳에 자리 잡았던 사고는 경북 봉화에 있다.
태백산의 준봉에서 약간 빗겨난 각화사.
옛날엔 이곳도 태백산이라고 했는데, 기슭엔 각화사가 있다.
사고(史庫)는
절에서 2킬로미터쯤 더 올라가야 한다.
워낙 험한 산길이라 가는 길은 숨이 턱끝까지 차오른다.
그렇게 오르길 한시간 반가량,
산 정상 가까이 가파른 능선에 빈터가 있다.
태백산 사고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엔 지금 주춧돌의 흔적만 남아있는데
건물이 언제 없어졌는지 정확하지 않다.
태백산 사고지(경북 봉화)
1910년대 태백산 사고 사진.
그래도 그 옛모습을 볼 수 있는 사진이 역시 <조선고적도보>에 실려 있다.
왼쪽에 2층짜리 건물 두 동이 사각과 선원보각이다.
한 울타리안에 지붕이 거의 맞닿을 정도로 나란히 있고, 출입문은 하나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꽤 볼품있게 지어져 있다.
전북 무주에 있는 적상산.
산 정상은 사방이 바위들로 절벽을 이룬다.
그 안에 평탄하고 넓은 분지가 형성되어 있어, 예로부터 천연의 요새로 꼽혔다.
그래서 이곳엔 고려말부터 산성이 축성되어 있었다.
이 적상산성안에 안국사가 있는데
고려말이나 조선초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원래 현 위치보다 훨씬 아래에 있던 것을 최근에 이 자리로 옮겼다.
적상산 사고(전북 무주)
사고(史庫)는
안국사에서 200미터쯤 아랫쪽에 있다.
이곳 역시 2층 구조인데 윗층이 서책 보관 장소,
아랫층은 훤히 터서 통증이 잘 되도록 했다.
이곳은 작년에 복원되었는데
원래 사고가 있던 자리는 아니다.
"적상산성 사고는
본래 이 저수지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저쪽 섬 같이 생긴 곳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인데,
양수발전소를 건설하게 되면서 수몰 예정지로 되어 저희들이 저쪽 지표조사를 마쳤습니다.
저희들이 저쪽 주춧돌 같은 것을 하나하나 점검을 해가지고
다시 이쪽으로 옮겨 현재의 위치에다가 복원을 완료한 것입니다."
- 김경석, 향토사연구가
강화도 남쪽 바다 인접한 정족산.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니지만 고려때부터 산성이 수축되어 있었고
그 안에 전등사가 있다.
신라때 창건된 고찰이다.
이쪽 경내에서 보면 뒷쪽 수풀 사이로 사고가 눈에 들어온다.
정족산 사고(인천 강화)
정족산 사고 역시 사각과 선원각이 돌담 안에 함께 있는데,
유일하게 단층 건물이다.
해풍이 건물에 직접 닿아 생기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문은 나무로 견고하게 만든 판문을 달았다.
그리고 그 안쪽에 창호문을 하나 더 설치해 덧문으로 달았다.
내부는 하나의 공간이다.
통풍을 위해 창문이 나 있긴 하지만, 이곳엔 또 다른 통풍 시설도 있다.
"이 건물을 보면 낮은 기단위에 있지만
실제 내부는 요 높이에 건물의 마루가 놓이게 되고,
그 아래에는 요 높이만큼 바람이 통할 수 있는 통기구를
상당히 높은 높이까지 만들어서 내부의 습도를 제거할 수 있는 방식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사람 키) 높이까지는 화방전이라 부르는데
화재를 예방할 수 있는 벽으로 쌓았습니다."
- 김동욱 교수, 경기대 건축과
1910년대 정족산 사고
정족산 사고 역시 작년에 복원되었는데, 옛건물은 1930년대쯤 없어졌다.
<조선고적도보>를 보면 옛모양 그대로 복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조선시대 외사고(史庫) 네군데는
지방에 분산되어 있었고
모두가 산속에 자리잡았던 것이다.
3. 임진왜란 이후 사고(史庫)는 산속으로 옮겨졌다!~
"지금 보시는 이것은 1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해동지도(海東地圖)>입니다.
사고(史庫)가 있었던 그 지방의 지도를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시에는 이 지도를 한폭의 풍경화처럼 그리곤 했는데
이 네 장의 지도를 좀더 자세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강화지도인데
남쪽 정족산성(鼎足山城)안에 사고(史庫) 건물과 명칭이 뚜렷하게 표시되어 있고
그 옆에 전등사(傳燈寺)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무주 지도인데
적상산성(赤裳山城)에서 역시 사고가 그려져 있고, 선원각도 따로 되어 있군요.
이건 봉화 지도인데
태백산 산봉우리 줄기 바로 아래 선원각과 실록각이 나란히 묘사되어 있고,
각화사(覺華寺)도 보입니다.
이것은 당시 오대산을 관할했던 강릉 지도입니다.
역시 사고가 그려져 있고, 월정사(月精寺)도 보입니다.
이처럼 옛지도에는
반드시 사고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사고가 있던 장소를 그만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중요하게 여겼다면서 왜 사고를 깊은 산속에 두었던 것일까요?
실록을 보호하자면 사람이 많은 곳, 쉽게 오갈 수 있는 곳이 낫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조선 전기에는 그랬습니다.
임진왜란이 있기 이전에는
한양의 춘추관 이외에 전주, 청주, 또 성주 읍성 안에 있었습니다.
당시 교통의 요지로 아주 큰고을들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임진왜란 이후에 모두 깊은 산속으로 사고를 옮겼던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조선 전기 세조때 양성지는
사고(史庫)를 산속으로 옮기자고 건의한다.
민가 가까이 있어 화재나 전란이 우려된다는 것이었다.
"양성지가 말하기를
'외사고는 읍내에 있어 화재가 우려되고 전쟁이 나면 위험하니 산 속으로 옮겨야 한다."
- 세조 21년 11월
당시 그가 건의한 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가 우려했던 일은 얼마후 현실로 나타났다.
중종때인 1538년,
성주사고에 불이 나 실록이 전부 불타버린 것이다.
그 뒤 다른 사고에 책을 인쇄하여
다시 성주에 사고를 세웠다.
"십일월초 사고에 불이나 전부 불타버렸다." - 중종 33년
하지만 곧 실록이 한꺼번에 수난을 당하게 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다.
왜군의 빠른 진격속에서
성주와 충주, 한양 춘추관에 있던 실록들이 모두 불타버린다.
성주사고(4월 27일 전소)
청주사고(4월 28일 전소)
춘추관(5월 2일 전소)
그리고 그해 6월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도 위험에 처한다.
전주는 조선 왕실의 본관,
태조 이성계의 영정이 조선초부터 모셔진 있었는데
이곳이 경기전이다.
전주 경기전 - 조선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신 곳.
경기전과 담 하나를 사이로
사고(史庫)가 있다.
전주사고.
세종때 이곳에 사고가 들어섰는데
현재 이 건물은 9년전에 복원한 것이다.
옛사고는 임진왜란때 불탔다.
하지만 당시 실록은 가까스로 화를 면했다.
거기엔 이 지방 유생들의 힘이 컸다.
정읍엔 그들을 기리는 사당인 남천사(藍川祠, 칠보면)가 있다.
당시 실록을 구해낸 장본인은 손홍록과 안의.
그들은 민간 유생들로
왜구들이 곧 들이닥친다는 소문을 듣고
급히 실록과 태조 영정을 대피시켰다.
안의가 지은 <임계기사>엔
그때의 상황이 날짜별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6월 22일 손홍록과 안의는
실록을 내장산 은봉암으로 옮긴다.
그들은 함께, 또는 번갈아가며 370일간 실록을 지켰다.
그러나 왜군은 전라도로 침입해왔고
실록을 안전하게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자
이들은 급기야 선조가 피신해 있었던 해주까지
천 리 길을 백성들의 도움을 얻어 실록을 옮겼다.
"그나마 전주사고본이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사고를 여러 군데 분산시켜 보관한 조상들의 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주사고본이 임진왜란이라는 국난기에 유일하게 남을 수 있었고
또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직면해서 내장산이라는 깊은 산속에 보관을 했습니다.
이후 전쟁을 통해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본을
다시 인쇄하여 여러 군데 나누어 보관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제시가 되었고
이러한 의견에 따라 방법이 진행이 됩니다."
- 신병주, 규장각 학예연구사
당시 비변사에서는
사고는 반드시 험주한 곳에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논의 끝에
마니산과 묘향산, 태백산과 오대산이 선정되었다.
"비변사에서 청하길
'사고는 반드시 험준한 지역을 택해 인적이 닿지 않는 곳에 설치해야 한다'"
- 선조 27년 9월
사고(史庫)가 완성되고
실록이 모셔진 건 선조39년.
기록엔 이 일이 국가적인 사업으로 포상도 따랐다고 한다.
그만큼 사고 건립은 중차되었던 것이다.
"근래 국가 사업 중 가장 큰 규모였고 일이 완료되자 포상이 따랐다."
- 선조 39년
그뒤 묘향산에 있던 사고는
후금의 위협때문에
인조때 적상산(전북 무주) 사고로 옮겼다.
그리고 마니산 사고는 불이 나서
현종때 정족산(인천 강화)으로 옮겼다.
"험준한 지형은
전쟁이 일어나도 적이 침입할 수 있는 길이 아니고
또 적이 쉽게 위치를 파악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민가로부터 멀리 떨어졌기 때문에
화재와 같은 사고로부터도 훨씬 안전한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당시 사고의 위치는
도서 열람이나 관리에서 훨씬 불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이러한 깊은 산속에 위치하는 것이
자료의 보존이라든가 관리에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기꺼이 그렇게 정했던 것입니다."
- 신병주 학예연구사
산중에 사고를 정하면서도 장소 물색에 신중을 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엔 해당 지역의 관찰사가 직접 장소를 물색했다고 한다.
풍수를 잘 아는 지관과 함께 오대산 일대의 풍수를 살펴봤다.
사방으로 부드러운 산능선이 겹겹히 감싸고 있다.
그리고 그 안쪽 아늑한 곳에 사고가 자리잡고 있다
또한 오대산을 보면
월정사와 사고(史庫), 부처의 사리가 모셔져 있는 적멸보궁은 일직선상에 있다.
사명대사는
이곳을 삼재, 즉 물, 불, 바람의 재앙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꼽았다고 한다.
"우선 산이 이렇게 부드러운 곳은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산사태가 나는 일이 없습니다.
수재(水災)를 면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화재(火災)의 재난을 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산에 혹 불이 난다해서 주변에 타오른다 하더라도
이곳에는 당이 되어 있으니까 이 주위에 이르러서는 불이 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건물엔 불이 오지 않습니다.
세번째는 이곳에 국사 실록을 보존한 자리인데 참 기가 충만한 자리입니다.
그것은 잠풍(潛風)이 되어서 바람이 잠재는 곳입니다.
그래야만 실록이 잘 보존되는 것으로 우리 풍수계에선 보고 있습니다.
이 자리는 정말로 명당 중 명당이라 하겠습니다."
- 김종철 지관
여러가지를 고려해 산중에 자리잡게 된 사고.
그렇다면 산속에 사고가 자리잡은 뒤로 사고가 소실될 위기는 없었을까?
"내사고의 춘추관사고는 궁궐안에 설치가 되었는데요,
이괄의 난이라든가, 정묘, 병자호란 등 잇따른 내우외환으로 인해서 산일된 반면,
인적이 드문 곳에 설치된 외사고의 경우는
한말에까지 잘 보관이 되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 김용곤,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정보실장
실록이 오랜 세월 보존된 산중사고.
여기엔 실록을 후대에 남기려는 당대의 노력이 짙게 베여 있다.
4. 사고의 구조는?~
"이곳은 오대산사고로 사고건축물의 전형으로 꼽히는 곳입니다.
실록이 보관되었던 사각을 보면 2층집으로 되어있는데,
얼핏 보면 누각처럼 보이지만
위, 아래 사방을 모두 막아서 창고처럼 지어졌습니다.
지붕은 특이하게도 위 뿐만 아니라 아래쪽에도 나 있고
창문은 벽면 위쪽으로, 처마밑에 바짝 붙어 있습니다.
여기 있는 계단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인 것 같은데 한 번 올라가 볼까요?
내부는 보시는 것처럼 훤히 트인 마루방입니다.
그리고 사방으로 창문이 나 있습니다.
그런데 2층에 있는 창문은 좀 독특하군요.
창호문 밖깥쪽으로
나무로 된 창문이 하나 더 덧되어진 이중창으로 되어있습니다.
얼핏 보아도 이 사고는 우리가 흔히 보는 다른 건물과 다르게 지어져 있습니다.
거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을겁니다."
사고는 규모는 작지만 전체적으로 우람해보인다.
주춧돌은 상당히 크고,
그에 걸맞게 기둥이나 다른 부재들도 크고 건실하다.
여기에 단청을 더하여 화려함까지 더 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지붕.
위, 아래 중층구조로 되어있고 윗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이것은 권위를 상징한다.
그런데 지붕은 건물에 비해 훨씬 크다.
비례에 맞게 지붕을 줄여보면 훨씬 안정되어 보인다.
하지만 지붕을 크게 하고 처마를 길게 늘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자, 이 건물은 지붕 아래가 길게 밖으로 나와 있지요.
지금 여기에 눈발이 날리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건물안으로는 눈발이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렇게 눈발이 내리치는 가운데서도
건물을 보호하기 위해서 지붕을 밖으로 길게 내민 점을 볼 수 있구요,
여름에 비가 들이칠 때에도
실내를 보호할 수 있는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죠."
- 김동욱 교수, 경기대 건축과
<햇빛, 비, 바람, 눈으로부터 안에 들어있는 실록을 보호하기 위해
일반 건물보다 처마가 훨씬 길게 뻗어 있다.
또한 지붕의 무게가 과중함으로 기둥과 주춧돌도 보통 건물보다 훨씬 크고 굵다.>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방지하고 통풍이 잘 되게 하기 위해 사고의 바닥에서 띄웠다.>
<눈비를 막기 위해 창문도 벽면 가까이 처마 위쪽으로 나 있다.
하지만 통풍을 생각해 면적은 크게 했다.
위층 창문은 나무로 된 반창(半窓)이 덧대어져 있다.(반창: 반쪽짜리 창문)>
위쪽은 특히 강렬한 햇빛과 습기가 잘 들어오는데
반창은 이를 제어하는데 효과적이다.
습기야말로 서책 보존에 치명타,
때문에 건물은 지면에서 약간 올려 지었다.
이렇게 지으면 지면에서 올라오는 습기가 제어되는 것이다.
두 개의 출입문 중
동문은 일반인들이 드나들었고
정문인 남문은 의식을 행할 때 사용했을 것이다.
이는 사고의 권위를 강화시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고엔 바깥쪽으로 두른 담 말고,
안쪽에도 또 하나의 담이 있다.
이 담은 위쪽에 있는 선원보각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다.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서 겹겹히 가로막혀 있는데
여기서 제일 걱정되는 게 아마 산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깥쪽에서 산불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고에 담이 이중으로 둘러쳐져 있기 때문에
이 건물에는 화재 위험이 없도록 만든 것이지요."
- 김동욱 교수
사고(1778년, 김홍도 그림)
이것은 단원 김홍도의 오대산사고 그림이다.
그는 정조의 명을 받아 관동지방의 산수화를 그렸는데 그때 제작된 것이다.
이 그림을 컴퓨터를 이용해 입체적으로 바꾸어 보았다.
당시 진입로엔 국가의 중요 건물을 상징하는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두군데 출입문은 모두 이중문이고
담도 선원보각 뿐아니라, 사각에도 이중으로 둘러져 있다.
이처럼 사고는 실록을 보관하는 장소에 걸맞게 위엄을 갖추었다.
그리고 보존효과를 극대화 시키고
안전을 고려해 지은 당대의 과학적인 건축물이었던 것이다.
5. 사고는 어떻게 관리했을까?
"잘 아시다시피 김홍도는 당대 최고의 화가입니다.
그런 그가 이 오대산 깊숙히 있는 사고를 그려서 정조에게 바쳤습니다.
사고는 그만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사고를 산속에 두고 어떻게 관리를 했을까요?
자, 이 그림을 좀더 자세히 보시죠.
사고(史庫)가 그려진 옆에
또 다른 건물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사고의 부속건물로써
바로 여기에 관리자들이 머물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국가의 중요한 기록을 관리하는데 이 정도로 그쳤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앞서 보았듯이 산속에 있는 사고 가까이에는 반드시 거대사찰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강화도 정족산사고옆에는 전등사가 있고
또 적상산사고옆에는 안국사,
태백산사고옆에는 각화사,
또 오대산사고옆에는 월정사가 있었습니다.
이 사찰들이 사고를 지키는 데 어떤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요?
이제 당시 사고들이 어떻게 관리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대산사고와 월정사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월정사를 찾았다.
이곳에서 사고와 관련된 옛기록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오대산사적기>
기록엔 '사방 40리의 땅이 모두 사고(史庫)에 속한다'고 되어 있다.
"사방 40리의 땅은 모두 사고에 속하고 인근 마을은 잡역을 감면한다."
그리고 월정사에도 전답을 하사한다고 되어 있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화재를 금하고, 가축방목을 금지하며, 월정사에 전답을 하사한다."
"인적이 드문 곳이었기 때문에 관리할 사람을 특별히 정할 필요가 있었는데요,
그것이 곧 수호사찰이었습니다.
오대산사고의 경우에 있어서는 월정사가 되겠구요,
정족산 경우에는 전등사,
적상산 경우에는 안국사,
태백산 경우에는 각화사가 이에 해당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 수호사찰에는
그 비용을 위해서 위전(位田)을 지급하게 되고
기타 승군들에게는 승료를 지급하게 됩니다."
- 김용곤,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정보실장
위전(位田) : 관청·학교·사원(寺院)·능(陵) 등의 유지경비를 위해 설정된 토지
인근 사찰은 승군을 조직해 사찰을 지켰던 것이다.
그리고 사찰의 주지는 수호총섭인으로 임명되었다.
"제가 전에 월정사 노스님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는
사고를 관리하는 도감이 있기 때문에 그 권력이 이 지방에서 굉장했던 것 같습니다.
이조시대에는 지방 양반이 득세를 해서
특히 숭유억불에 의해
불교 스님들이 양반들 앞에서 숨도 크게 못쉬고 고개를 숙였어야 할 정도였는데,
오히려 월정사 근방에서는
양반들이나 관리들이 이 월정사에 조금 밉보이면 잡아다 벌을 줄 정도로
또 월정사 스님들이 지나가면 인사를 꼭 해야 할 정도로 세력이 굉장했다고 합니다."
- 현해 스님, 월정사 주지
임진왜란때 승병의 활약상은 눈부셨다.
그래서 임란이후 산중에 사고를 지으면서
승병을 활용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던 것이다.
오대산사고 경우에는 월정사와 거리가 있는 까닭에, 지척에 암자를 두기도 했다.
지금은 사고 위쪽에 있는 이곳 영감사다.
"원래 사고 자리가 스님들이 수행하던 곳인데 나라에서 사고를 세우게 되니까
암자를 수호사찰로 저 아래 밭에다가 옮겨 짓게 하고
승려들이 거주하면서 이 사고를 관리, 지키도록 한 것이죠."
- 각수스님, 영감사 주지
영감사가 사고를 관리할 당시 있었던 자리는, 사고(史庫) 조금 아래쪽이다.
지금은 빈터로 남아있고 수직사터라는 비석만 서 있다.
1909년 오대산 사고 평면도에는 영감사가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영감사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 별관도 따로 있었다.
기록엔 사고(史庫)마다 참봉이 두명씩 있고
그들은 사고옆에 거쳐 했다고 한다.
"오대산 사고엔 참봉 2인이 있었다." - 강릉부지
"사고 옆엔 참봉이 거처하는 건물이 있다." - 적상산성조진성책
사고 참봉은 어떤 사람이 임명되었고, 그들의 임무는 무엇이었을까?
수소문끝에 태백산사고 참봉의 후손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4대조의 것이라며 참봉첩지를 내보였다.
1840년 김용호가 받은 사고 참봉 첩지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봉세동)
첩지의 주인공은 김용호,
그는 1800년대 태백산사고의 사고 참봉을 지냈다.
사고 참봉은 종9품에 해당하는 관리다.
1897년의 그의 아들 김상락의 첩지도 있다.
대를 이어 참봉을 지낸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을 사고(史庫)에 보관하면
그것을 맡아 관리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웃대 어른께서 참봉에 제수받아 그런 일을 수행했던 건 무슨 까닭이었을까요?)
저희들이 생각하기에는 사고지에서 가까이 살고 있으면서
지역에서 학문도 좀 하시고, 지역에서 그런 일을 맡길 수 있다는 인정을 받아 하셨던 것 같습니다."
- 김규봉, 봉화군청 기획계장, 김용호 4대손
사고는 이처럼 참봉과 승군이 함께 지켰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수비 인원도 있었다.
"사고를 관리하는 사람은
세 부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최고 관리는 종9품의 참봉이었습니다.
참봉은 두사람이 교대로 한달씩 수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참봉의 관리하에 아래에 수호군과 승군이 수직을 했습니다.
이 수호군에 대해서는
선조39년에 실록을 복인하고 난 다음에
'경외사고수직절목'을 마련했는데,
이 규정에 의하면
사고마다 40명을 두 조로 나누어서
20명씩 수직을 했습니다.
이러한 수직을 했던 것은
도난이나 변란이나 또는 화재에 대비해서 한 것입니다."
- 배현숙 교수, 계명문화대 문헌정보과
수호군은
해당 지역 관아에 소속된 정규군이었다.
지역이나 시기마다 그 숫자는 조금씩 다른데
가장 많았던 것은 적상산사고다.
고종땐 100명이 넘었다.
물론 이것은 적상산성의 수비도 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1872년 무주부지도.
하지만 옛지도에도 나타나듯 산성내 가장 중요한 건물은 사고였다.
이곳엔 다른 건물도 나타나는데
별장청(別將廳)이나 대별관(大別館)은 군사주둔지다.
그 옆으로 수호사찰이었던 안국사의 당호들(십왕전, 법당, 선당)도 여럿 보인다.
그리고 참봉청과 무기가 있던 군기고(청하루)도 있다.
이렇듯 수비와 관리가 철저했기 때문에
네군데 사고는 어디나 안전했고 실록은 제대로 보존될 수 있었다.
6. 사관의 본분, 직필 보장!~
그것은 부정부패를 막는 역사인식!~
"참봉과 수호군, 그리고 승려들로 조직된 승군,
조선시대에는 이렇게 많은 인력을 동원해서 실록을 지켰습니다.
그렇다면 실록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요?
이것은 사초(史草)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관이 조정에서 그날그날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으로써
실록의 기초 사료가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료로는 <승정원일기>나 <비변사등록>과 같이 관청에서 작성한 공식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을 시정기((時政記)라 합니다.
왕이 죽으면,
그 다음 왕 때
이 기초 사료를 수집을 해서 실록 제작에 착수하게 됩니다.
또 <광해군일기중초본>이라고 있습니다.
이 중초본이라고 하는 것은
기초 사료를 선별해서 초고를 만들고
그것을 수정을 한 것을 말합니다.
이 중초본도 또 한차례 수정을 거치게 되는데요
여기 붉은 글씨로 고친 흔적이 보이시죠.
이렇게 해서 완성본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완성본이 만들어지면 필요한 만큼 필사를 하거나 또는 인쇄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실록 제작은 끝이 나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이 실록을 모셔두는 봉안의식을 치루게 됩니다.
지금 보시는 이 그림은
역대 국왕의 치적을 기록한 국조보감을 봉안하는 그 의식을 당시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입니다.
문무백관이 대거 참석한 성대한 의식입니다.
실록 봉안도 이와 흡사했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이 실록 제작은 국가의 큰 사업이었던 것이죠.
그렇다면 조선실록은 왜 중시되고
당시 역사란 어떤 의미가 있었기에 이를 후대에 남기려고 했을까요?"
여주엔 인조때 사관을 지닌 인물을 모셔둔 무덤이 있다.
그의 이름은 정태제, 호는 국당이다.
지난 87년 이장을 하기 위해 그의 무덤을 열었을 때, 시신은 미이라 상태였다.
그리고 몇 권의 책이 있었는데 거의 훼손이 안 되었다.
그 가운데 정태제가 기록한 사초도 있었다.
"이게 바로 이장할 때 나온 사초인데요,
국당할아버지가 저의 11대조이구요,
족보를 찾아볼 때 처음엔 잘 몰랐는데 22살에 과거에 급제하시고,
또 중간엔 옥사도 치루시고, 나중엔 참의에서 승지까지 오르신 분이셨습니다."
- 정재열, 정태제 11대손
이 사초는
인조15년부터 이듬해까지 5개월간의 기록이다.
그날그날 조정에서 벌어진 일들이 날짜별로 요약되어 있고
때때로 그 뒤에 사신(史臣)의 말로 시작되는 부분이 있다.
이것을 '사론'이라고 하는데
당시 상황에 대해 사관 스스로 논평한 것이다.
'사신왈(史臣曰), 사관왈(史官曰), 근안(謹按)' 등 달리 표현하기도 한다.
이 사론이 정태제의 사초에 57번 등장한다.
"정태제 사초에 나타난 사론은 크게 네가지로 나눠볼 수 있겠습니다.
즉 병자호란 직후 정국 동향이라든가,
당시 국정 시사에 대한 평가, 또는 경제 민생책,
나아가 인물의 평가 및 국왕의 통치 행위 및 자질에 평가를 들 수 있겠습니다."
- 장필기,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정태제는 사론에서
병자호란 직후 백성들의 민생고부터 해결하지 못하는 국정을 꼬집고 있다.
그의 사론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인물평이다.
"백성의 민생고 해결이 급선무하라고
대신들이 아뢰어도 머뭇거리는 것은 왕의 자세가 아니다."
인조정권의 공신세력이자 한때 요직을 맡았던 김자점도 혹독하게 평가했다.
"김자점은 모든 사람들이 욕하는데 석방시키자고 하니 참으로 가증스럽다."
그런가 하면 인조에 대해선 시종일관 비판적이다.
그는 임금의 덕이 부족하다며 그의 자질까지도 비난했다.
"임금의 덕이 옛사람에 미치지 못한다."
정태제의 사초와 인조실록을 대조해본 결과,
그의 사론은 실록에 다섯차례 실려 있다.
조선시대엔 이렇게 실록에 사론을 실어,
사관의 기록을 중시하며 보장했다.
또한 왕이나 신료,
그 누구도 사관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사관이란
왕의 좌우에 입시하여 언행과 정사를 기록하는
예문관의 정7품 이하 관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개 문과 출신 중에서도 경사와 문장에 뛰어나고
내외 4조에 걸쳐 흠이 없으며 인품이 공작한 자를 선발하였습니다.
이들의 직분은 편견을 배제한 직필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들의 직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였습니다.
그 한 예로써 정태제의 사초에 나타나는 기록을 보면,
'사관은 붓을 쥐고 있는 신하이기 때문에,
국가 시비의 근본이 사관에게 있다' 하였습니다."
- 장필기,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사관의 올곧은 기록인 직필.
이 직필이 있었기에
실록은 단순히 당대의 기록을 넘어, 시대에 대한 평가이기도 했다.
그것이 실록의 정신이었다.
그리고 직필은 제도적으로 보장되었다.
경북 봉화에 있는 권벌(충재)유물관,
여기엔 그런 제도의 단면을 볼 수 있는 유품이 있다.
바로 이 '연산군 일기 세초도'다.
세초란
실록이 완성된 뒤
사초를 비롯한 자료들을 물에 씻는 걸 말한다.
당시 귀했던 종이를 재생한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실록의 기록이 미연에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이렇듯 세초는
직필로 인해 사관이 후환을 당하는 것을 보호하는 장치였다.
<세초하는 모습>
"십 년만에 비로소 실록 편찬의 일을 마치고
한가한 날 사초 씻는 잔치를 열었네.
저녁에 시냇가에서 밥을 지으니 맛난 음식이요
비 온 뒤의 물소리는 거문고 소리보다 낫네.
지난날 붓을 들었던 것이 이제 꿈결 같은데
완성된 책을 보니 다시금 눈물이 흐르네."
그것은 곧 실록에 담긴 기록의 공정성을 최대한 유지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또한 실록의 내용은 왕조차도 볼 수 없었다.
"태종대왕께서 결국은 변계량의 뜻을 받아들여 실록을 보시지 않으셨습니다."
"자식된 도리로서 선왕의 기록을 보고자 함인데 굳이 그렇게 강경하게 막아야 하오."
"전하 한 나라의 역사이옵니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볼 수 없습니다."
"우상, 정말 너무하오."
- 역사의 라이벌 <왕과 사관> 중에서
성군이었던 세종도 아버지인 태종이 어떻게 기록되었는지 알고 싶어 두차례나 실록을 보고자 했다.
그러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실록에 기록된 역사.
그것은 당대 어떤 의미가 있었기에 이토록 엄격했을까?
"중앙집권체제였기 때문에 권력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권력이 부패할 경우에는 그 체제가 곧 무너지게 됩니다.
이러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부정부패를 철저히 막아야 합니다.
그 권력의 중심에 있는 자들이 부패했을 경우에는
그 나라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권력의 중심에 있는 국왕,
그리고 그 국왕의 권한을 대행하는 관료들의 부패를 막는 장치를 마련해야 됩니다.
그러한 제도로 언론기관을 만든다든지,
바로 이 사관 같은 제도를 두는 이유가 되겠습니다."
- 이성무, 국사편찬 위원장
역사는 왕과 관료를 후대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했고
따라서 올바른 정치를 유도할 수 있었다.
이런 역사인식 때문에 실록은 중시되었고
이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7. 실록은 어떻게 보관되었나?
"보시다시피 실록은 이렇게 궤짝속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궤짝을 한 번 볼까요?
궤짝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고
또 옆에는 봉인이 붙어 있습니다.
이 봉인을 보니까 '성종대왕실록 20책'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아마도 이 안에 성종대왕실록이 20권 들어있는 모양입니다.
궤짝을 한 번 열어볼까요?
궤짝속을 보니까 이렇게 두꺼운 종이가 덮혀 있습니다.
기름을 먹인 종이 같구요.
또 가죽 같은 것으로 한 번 더 덮어뒀네요.
그리고 붉은 보자기에 아주 잘 싸여 있습니다.
여기에 웬 흰주머니가 두 개 있는데요, 한약 냄새가 나는데 한 번 보겠습니다.
한약재 같은 것을 이 봉지안에 넣어두었군요.
보자기를 한 번 풀어보겠습니다.
책위에 아주 얇은 종이를 한 장 덮었구요,
또 책과 책 사이에도 얇은 종이를 덮어두었습니다.
아마 이 실록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서 이렇게 했지 않나 싶습니다.
자, 그럼 당시에 실록을 어떻게 보관했는지 좀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서울대에 있는 규장각.
이곳에는 사고에 있던 궤짝들이 보관되어 있다.
먼저 이들 궤짝이 실록 보존에 어떤 효과가 있는지 알아보도록 했다.
이를 위해 먼저 목재연구가가 파편을 수집했다.
궤짝의 나무 종류과 성분을 분석하게 될 것이다.
분석에 들어간 것은 임업연구원.
파편을 얇게 잘라 실편을 만든 뒤 목조직의 특성을 파악한다.
시료는 모두 일곱개.
분석 결과 종류는 오동나무와 버드나무, 피나무, 소나무로 밝혀졌다.
"오동나무는 예로부터 귀중 서류, 귀중품, 골동품을 보관하는 함으로 많이 이용되어온 수종입니다.
피나무도 함지박이나 나무밥통, 조각재 등으로 이용되어온 수종입니다.
버드나무는 말안장이나 나막신 등을 제작하는데 이용되어온 수종입니다.
이들 수종의 공통점을 보면 이용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가볍고 내구성이 우수하여
실록을 보관하는데 적합한 수종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궤짝 표면에는 검은칠이 되어있는데
그것은 방수, 방충, 방해 효과가 뛰어난 옻칠로 생각됩니다."
- 박병수, 임업연구원 임산공학부
궤짝속에 들어있는 내용물은 기록에 잘 남아있다.
그것은 붉은 보자기와
얇은 종이인 초주지, 창포와 천궁, 사슴가죽, 그리고 기름종이였다.
그런데 창포와 천궁을 넣은 이유는 무엇일까?
"왕조실록을 보관하는 함 속에 생약 두 종류가 들어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종이를 보호하는 장치일거고,
그 속에 천궁과 창포가 들어있었다고 하는데,
이 천궁은 마치 좀약과 같이 휘발성 물질이 강력한 살충작용,
그리고 곰팡이를 제거하는 작용을 합니다."
- 장일무 교수, 서울대 천연물과학연구소
방부, 방충효과가 있는 창포와 천궁말고도 궤짝속에는 다른 것들도 있었다.
이들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우선 실록이 손상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실록과 실록 사이에는 초주지를 넣고서
이들 실록을 붉은 보자기에 쌓습니다.
이 붉은 보자기는 실록을 잘 보관한다는 그런 의미도 있고
아울러 나쁜 기운을 막는다는 뜻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실록을 담은 붉은 보자기위에 노루가죽을 덮고,
아마도 짐작컨대 그 위에 기름종이를 둘렀을 거라 짐작됩니다.
이 노루가죽과 기름종이는
혹시 위에서 빗물이 떨어지면 실록에 닿지 않도록
막아주는 그런 용도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 배현숙 교수, 계명문헌정보과
<조선왕조실록은 초기부터 명종 때까지 100년 가까이 종이에 밀랍을 발랐다(밀랍본).
그러나 종이가 더 보관에 낫다는 것을 알고 그후 생지본으로 한다.>
실록 보존을 위해 했던 또 다른 기록이 있다.
사고의 문을 열 때마다
그 목적과 진행 상황을 일일이 기록한 이것은 <실록형지안>이라 한다.
이 형지안에 따르면
건물을 수리하거나 실록을 봉안할 때 사고문을 열었고
가장 빈번한 건 포쇄(포灑)의 경우였다.
"포쇄란,
오래 보관하고 있던 서책이
훼손되거나 또는 병충해의 침해를 방지하기 위해
볕에 말리고 바람을 쐬이는 그런 작업을 말합니다.
이런 포쇄 작업은 보통 3년,
과거 식년시험을 치던 해와 같은 해에 벌어졌는데요,
보통 3년에 한번씩 포쇄를 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2년, 또는 5년에 한번씩 포쇄를 했습니다."
- 신병주, 규장각 학예연구사
평창군청의 도움을 받아 포쇄를 해보기로 했다.
방법은 간단하다.
빈터에 차일을 치고 여기에 책을 늘어놓는다.
그늘을 만들어 직접 햇볕을 보지 않도록 하면서 바람을 쏘이는 것이다.
대개 한나절이면 족한데
포쇄가 끝나면 약재 같은 내용물을 새것으로 갈아넣는다.
포쇄를 노래한 한시도 있다.
이 시를 통해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는 임금의 명을 받들고
가을 바람에 말을 달려왔네
두 번 절한 뒤 자물쇠를 열고서
귀한 상자 서른 여섯개를 내놓네
지나는 바람이 때론 책장을 열고
날던 새가 책에 그림자를 남기네
때때론 서적 가운데서
시시비비를 스스로 깨닫네"
이 시를 지은 이는 신정하.
숙종때 태백산사고로 포쇄하러 갔을 때 이 시를 지었다.
그때 그의 직책은 사관이었다.
"이때 포쇄할 수 있는 관리들은 한정적이었습니다.
누구나 사고문을 열 수 없었습니다.
사고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사관에 한정이 되어있습니다.
사고를 관리하는 참봉조차도 사고를 열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실록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고
또 비밀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관의 직필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 배현숙 교수
당시엔 이렇듯 실록 보존에도 정성을 쏟았고
그래서 실록은 오랜 세월을 견딜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각 사고의 실록을 서울로 옮긴다.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경성제대로,
적상산본은 창경궁 장서각으로,
그리고 오대산본은 그냥 두었다가 일본으로 반출한다.
"산속에 있던 실록들은 일제 지배하에 많은 변화를 겪게 됩니다.
여기 오대산 사고본은 일본 강점기 동경대로 옮겨졌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때 대부분 불타 없어져버리고 겨우 74책이 남았고,
1932년 그 중 27책이 돌아오고,
나머지는 동경대와 규장각에 각각 보관되고 있다가,
지난 2000년 47책이 극적으로 우리나라에 돌아왔습니다.
실로 93년만의 귀환이었습니다.
이제 정족산 사고본은 서울대 규장각에,
태백산 사고본은 부산 국가기록보존소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또 적상산사고본 역시 한성으로 옮겼으나
6.25때 행방불명 되어버렸는데
현재는 북한 평양학습원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우여곡절속에서도 조선왕조실록이 지금껏 전해올 수 있었던 것은
조선시대에 실록을 여러권 만들어서 여러곳에 보관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깊은 산속에 말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이 산으로 간 이유,
그것은 오래도록 이 실록을 보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역사 기록을 중시했던 조선의 시대의식, 역사에 대한 외경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역사정신이야말로 실록이 우리에게 남긴 더 중요한 유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후대에 남길, 그리고 평가받게 될 역사를 과연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요?"
- 유인촌, 고두심의 역사스페셜을 보고 (늘 편안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