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1 이삭빛의 진달래꽃 김소월을 만나다.hwp
이삭빛 시인 (사진 2007)
기획 Ⅰ
이삭빛의 진달래꽃 김소월을 만나다
이삭빛 시인
봄은 늘 행복했다. 설레었고, 상큼한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했다.
마치 나의 20대 초반 외모처럼 신선했다.
그러하기에 나의 몸짓도 진달래 빛처럼 아름다웠으리라.
늘 봄은 신비롭고 새로웠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한참 동안, 진달래를 보고도 행복하지 않았다.
열정은 무감각으로 길들여져 갔고 무기력함으로 일상 속에 빠져들었다.
내 사랑도 김소월의 작품, 진달래꽃처럼 꽃을 밟고 떠났으리라.
아니, 떠나보냈다. 떠나보내야만 했다. 여기서 사랑은 이성적인 사랑만이 아닌 내 모든 삶의 의미적 사랑이다. 아마도 나를 가둔 보호막 속에서 곱고 정의롭게 만 살아오다가 호된 혹한기를 몸소 맞은 삶의 무기력은 긴 터널처럼 몇 년간 계속되었다. 아픈지도 모르고 부초처럼 떠밀려 왔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봄이 다시 찾아왔다.
진달래가 눈에 들어왔고 내 깊은 샘 속에서 생명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강열하거나 화려하진 않지만 분명한 것은 성숙하고 새로운 봄을 맞이한 것이다.
나는 내 삶의 진정한 사랑을 떠나보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한 단계 성숙해진 자세로 세상을 봐라보게 된 것이다. 사랑을 되찾은 것이다. 그것은 신이 내 안에서 겨울을 견디어 내는 법을 깨닫게 하려고 했던 것이리라.
고통 없는 삶은 삶이 아니다. 신이 무조건 넘어지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삶만을 허락한 사람은 결국 축복이 아님을 알기에 이 시간, 고통을 주신 신을 통해 고통을 넘어서는 성숙한 자세로 행복을 얻으려 한다. 아무리 연한 꽃도 혹한기를 맞고 이겨내야 만이 꽃을 피우고, 소중한 향기를 발산할 수 있다. 삶의 실패를 인정하며 다시 일어서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성숙한 자세가 아닐까? 이젠 꽃처럼 내 삶의 주인으로 고통을 품으려한다. 고통 뒤에는 분명 봄이 걸어 들어오는 길목이 있으리란 것을 알기에. 설령, 고통 뒤에 또 다른 고통이 온다할지라도 이것은 분명, 살아있는 향기 앞에 걸어가고 있다는 증거임으로 행복해야할 이유인 것이다.
참, 행복하다. 진달래가 내 앞에 있고, 김소월의 시가 내 가슴에 있다.
보고 있어도 듣고 있어도 아무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살아있어도 죽은 것이나 진배없는 법이다. 봄은 마음먹기에 따라 다르게 찾아들며 여름, 가을, 겨울도 성숙한 태도에 따라 가슴 속에 봄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이별을 노래했지만 사랑을 초월한 시라고 정의내리고 싶다.
그래서 이별의 시지만 이별을 승화한 이별의 정한이 가슴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을 두고 여성편향적인 여린 마음이라고 평가하는 평론가들도 있지만 성숙한 자세로 자신의 사랑을 승화한 것이며, 고통을 분노가 아닌 사랑으로 표현한 대장부 같은 자세가 아니였을까?
- 김소월-
나보기가 역겨워가실때에는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영변에 약산진달래꽃아름따다 가실길에 뿌리오리다가시는 걸음걸음놓인 그꽃을사뿐히 즈려밟고 가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진달래꽃」전문 -김소월-
김소월 진달래 이삭빛시인
소월시인을 가슴에 안으니
진달래꽃이 별이 되어
반짝인다.
= 서울 남산공원 김소월시비=
전체적으로 볼 때, 진달래꽃은 7·5의 음절수를 기초로 한 3음보 율격의 민요조 가락을 밟고 있다. 여기에 향토적인 시어의 활용, 1연의 반복에 의한 수미쌍관(首尾雙關)식 결구 '∼옵소서'와 같은 여성적 화법 등이 효율적으로 어우러져 승화된 이별의 정한(情恨)으로 표출되고 있다.
이 시의 화자는 여성이다. 표면적으로 화자는 임과의 이별이라는 비극적 상황을 그저 묵묵히 받아들이는 체념의 자세를 보여 준다(1연). 물론, 이 같은 자세는 가시는 임의 앞길에 꽃을 뿌려 축원하고(2연), 임이 그 꽃을 즈려 밟고 가길 바라는(3연) 진실 되고 헌신적인 사랑을 품고 있기에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 축복의 이면에는 임을 절대로 보내지 않겠다는 역설적인 의미가 내재해 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이 시는 자유시지만 7·5조를 기초로 한 3음보격의 외형률을 보이고 있고, 그 형태를 분석해 보면, 제 2연의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만이 거의 4·4조에 가까운 음수이고 그 밖의 모든 부분은 7·5조의 음수로 배열되어 있다. 7·5조는 일본 시가의 율조인데, 그것이 우리 시에 쉽게 수용된 것은, 7·5조가 4·3·2·3조 또는 3·4·3·2조 등의 음절수로 분해되어 우리 전통 시가의 율격과 쉬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의 이미지를 살펴보면, 사랑하는 임과의 이별이라는 극한적 상황을 '진달래꽃'을 통하여 초극하려는 역설적 의지가 담겨진 작품이다. 이 '진달래꽃'은 붉고 아름다운 서정적 자아의 사랑의 완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서정적 자아가 지니고 있는 원망과 슬픔을 상징하는 동시에 떠나는 임에게 끝까지 자신을 헌신하려는 순종과 정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옛 시에서도 '진달래꽃'은 민족 정서의 대유적(代喩的) 상징물로써 존재하는데, 특히 사랑과 이별의 정한을 노래하는 작품으로 표출되고 있다.
또, 이 시의 서정적 자아는 김소월 시들이 거의 그렇지만 여성이다. 소월 시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통 시가들은 여성을 서정적 자아로 가지고 있다. 섬세하고 부드러우며 순화적인 감정 승화를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으며, 이런 비극적 장면 속에서의 여성적 목소리는 자신의 고난을 극복하려는 새로운 의지와 자세로 변하는 과정을 겪게 되고, 폭력과 인종의 굴레를 달관하는 이상적 의지를 실현하고자하는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김소월(김정식) 시인
출생-사망 음력 1902년 8월 6일, 평안북도 구성 - 1934년 12월 24일
데뷔 1920년 시 '낭인의 봄’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으로 널리 알려진 시인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한을 노래한 시인이라고 평가받으며 짙은 향토성 7·5조의을 전통적인 서정으로 노래하여 오늘날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산유화》외 많은 명시를 남겼다. 왕성한 창작적 의욕과 그 작품의 전통적 가치를 고려해 볼 때, 1920년대에 있어서 천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유일한 시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시는 오늘날까지도 계속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1902년 8월 6일(음력) 평안북도 구성(龜城)에서 출생하였다.
사립인 남산학교(南山學校)를 거쳐 오산학교(五山學校) 중학부에 다니던 중 3·1운동 직후 한때 폐교되자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 졸업하였다.
1923년 일본 도쿄상과대학 전문부에 입학하였으나 9월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오산학교 시절에 조만식(曺晩植)을 교장으로 서춘(徐椿)·이돈화(李敦化)·김억(金億)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웠다.
특히, 그의 시재(詩才)를 인정한 김억을 만난 것이 그의 시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문단의 벗으로는 나도향(羅稻香)이 있다. 일본에서 귀국한 뒤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광산 일을 도우며 고향에 있었으나 광산업의 실패로 가세가 크게 기울어져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에서 동아일보지국을 개설, 경영하였으나 실패한 뒤 심한 염세증에 빠졌다. 1930년대에 들어서 작품활동은 저조해졌고 그 위에 생활고가 겹쳐서 생에 대한 의욕을 잃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34년에 고향 곽산에 돌아가 아편을 먹고 자살하였다.
시작활동은 1920년 『창조(創造)』에 시 「낭인(浪人)의 봄」·「야(夜)의 우적(雨滴)」·「오과(午過)의 읍(泣)」·「그리워」·「춘강(春崗)」 등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작품발표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은 1922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인데, 주로 『개벽』을 무대로 활약하였다.
이 무렵 발표한 대표적 작품들로는, 1922년 『개벽』에 실린 「금잔디」·「첫치마」·「엄마야 누나야」·「진달래꽃」·「개여울」·「제비」·「강촌(江村)」 등이 있고, 1923년 같은 잡지에 실린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삭주구성(朔州龜城)」·「가는 길」·「산(山)」, 『배재』 2호의 「접동」, 『신천지(新天地)』의 「왕십리(往十里)」 등이 있다.
그 뒤 김억을 위시한 『영대(靈臺)』 동인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이 무렵에 발표한 대표적 작품들을 게재지별로 살펴보면, 『영대』에 「밭고랑 위에서」(1924)·「꽃촉(燭)불 켜는 밤」(1925)·「무신(無信)」(1925) 등을, 『동아일보』에 「나무리벌노래」(1924)·「옷과 밥과 자유」(1925)를, 『조선문단(朝鮮文壇)』에 「물마름」(1925)을, 『문명(文明)』에 「지연(紙鳶)」(1925)을 발표하고 있다.
소월의 시작활동은 1925년 시집 『진달래꽃』을 내고 1925년 5월『개벽』에 시론 「시혼(詩魂)」을 발표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이 시집에는 그동안 써두었던 전 작품 126편이 수록되었다. 이 시집은 그의 전반기의 작품경향을 드러내고 있으며, 당시 시단의 수준을 한층 향상시킨 작품집으로서 한국시단의 이정표 구실을 한다.
민요시인으로 등단한 소월은 전통적인 한(恨)의 정서를 여성적 정조(情調)로서 민요적 율조와 민중적 정감을 표출하였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되고 있다.
생에 대한 깨달음은 「산유화」·「첫치마」·「금잔디」·「달맞이」 등에서 피고 지는 꽃의 생명원리, 태어나고 죽는 인생원리, 생성하고 소멸하는 존재원리에 관한 통찰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시 「진달래꽃」·「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먼후일」·「꽃촉불 켜는 밤」·「못잊어」 등에서는 만나고 떠나는 사랑의 원리를 통한 삶의 인식을 보여줌으로써 단순한 민요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생에 대한 인식은 시론 「시혼」에서 역설적 상황을 지닌 ‘음영의 시학’이라는, 상징시학으로 전개되고 있다. 시집 『진달래꽃』 이후의 후기 시에서는 현실인식과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하게 부각된다.
민족혼에 대한 신뢰와 현실긍정적인 경향을 보인 시로는 「들도리」(1925)·「건강(健康)한 잠」(1934)·「상쾌(爽快)한 아침」(1934)을 들 수 있고, 삶의 고뇌를 노래한 시로는 「돈과 밥과 맘과 들」(1926)·「팔벼개 노래」(1927)·「돈타령」(1934)·「삼수갑산(三水甲山)·차안서선생삼수갑산운(次岸曙先生三水甲山韻)」(1934) 등을 들 수 있다.
시의 율격은 삼음보격을 지닌 7·5조의 정형시로서 자수율보다는 호흡률을 통해 자유롭게 성공시켰으며, 민요적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독창적인 율격으로 평가된다. 또한, 임을 그리워하는 여성화자(女性話者)의 목소리를 통하여 향토적 소재와 설화적 내용을 민요적 기법으로 표현함으로써 민족적 정감을 눈뜨게 하였다.
1981년 예술분야에서 대한민국 최고인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시비가 서울 남산에 세워져 있다. 저서로 생전에 출간한 『진달래꽃』 외에 사후에 김억이 엮은 『소월시초(素月詩抄)』(1939), 하동호(河東鎬)·백순재(白淳在) 공편의 『못잊을 그사람』(1966)이 있다.
- 이삭빛 -
파드닥 날개 짓 하는 소리에
그대의 첫날임을 알았습니다
가만히
아주 조용히 하늘을
여는 소리에
내 눈도 그대의 눈 속에
가닿은 것을 알았습니다.
아! 오묘한 그대의 떨림이
온몸으로
따뜻해집니다.
태초에 대지가 울리듯
나또한 당신으로 인해
첫 생을 열 듯
아름다움으로
살고 싶습니다.
빛이 내려앉은
당신의 뜻 깊은 자리가 오늘부터
모든 이의 가슴속에도
축복입니다.
「진달래」전문 -이삭빛-
김소월 시집 초간본 '진달래꽃'을 출간한지 90주년이 지났다. 곧 있으면 100주년이다.김소월시인은 시집 단 한 권으로 한국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시인이다. 초판이 문화재로 등록된 시인, 전국에 시비(詩碑)가 20여 개나 세워진 시인이며 이본 시집이 600종류나 되는 시인이다. 그런데도 실제 한국 근대문학은 100년이 넘는 동안 역사적인 격동기를 온몸으로 겪으며 성장했고 세계문학사에 기록될 만큼 좋은 문학적 성취를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특별이 국민시인 김소월시인의 시비를 가슴에 안으며 이 따뜻한 봄날 필자의 마음이 이토록 아리는 이유는 왤까?
국립중앙도서관, 국립현대미술관, 국립국악원, 국립박물관 등 국가 중요 문화콘텐츠에 대한 국립기관이 있는데 유독 문학 분야만 빠져 있으며, 우리 문학사 전체를 정리하고 자료를 찾아 보존하고 연구, 교육, 홍보, 활용하기 위한 통합적인 국가시설이 없다는 것이다. 작년에 경매에서 초간본 시집 '진달래꽃'이 1억3500만원에 낙찰되었다. 그리고 초판본 시집 '진달래꽃' 출간 이후, 이본 시집이 200만 권 이상 팔렸다. 소월의 시가 노래로 만들어진 것도 한두 편이 아니다. 무려 300곡에 이른다. 요즘도 각종 매체에서 설문을 통해 한국인의 애송시와 사랑하는 시인을 발표하는데 늘 김소월시인이 일등이다. 시집이 사람들 손에서 떠난 지 오래라지만 소월 시집은 아직도 독자들이 찾는다. 그뿐이랴, 대부분 시인의 시가 교과서에 실렸다가 사라져도 소월 시는 살아 있다. 그런데 국민 시인으로 문학사에 길이 전해질 인물을 기리는 건물 하나 짓지 않는 대한민국의 또 다른 의도가 있는 걸까? 문제의식을 가지고 기도하듯 김소월시인의 시를 낭송해 본다. 화창한 봄날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별이 되어 반짝인다.
출처 네이버 다음 김소월관련 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