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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로(火爐);
호롱불(등잔불) : 호롱에 켠 불.
물레(솜 잣는 틀); 솜에서 실을 자아내는 틀.
솜이나 고치에서 하루 15∼20개 가락에 실을 드릴 수 있다. 중국에서 목화씨를 전래한 문익점(文益漸)의 손자 래(萊)가 목화씨에서 실을 자아내는 틀을 발명하였다고 하여 문래라 부른 것이 변이되어 물레가 되었다고 전한다.
나무절구 : 통나무를 파서 만든 절구.
나무 절구는 위아래의 굵기가 같은 것이 대부분이나 남부지방에서는 허리가 잘록하게 좁힌 것을 많이 씁니다.
절구의 크기나 형태는 지역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며 다양한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쟁기 : 논이나 밭을 가는 데 쓰는 데 농기구.
쟁기의 형태는 무척 많아 그 이름만도 60여 가지에 이른다. 이를 비슷한 것끼리 묶어보면 쟁기류 8가지, 보류 13가지, 보습류·극젱이류 12가지, 훌칭이류 10가지, 가대기류 5가지, 기타 18가지이다.
또, 쟁기에 딸린 14가지의 부분명칭 가운데 지금의 군(郡) 정도의 거리를 벗어나면 달리 불리는 것도 적지않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쟁기의 다양성을 나타내는 좋은 보기이다.
쟁기는 뒤지개〔掘棒〕에서 비롯되어 따비를 거쳐 완성된 연장이다. 쟁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보습으로, 철제가 나오기 전에는 나무를 깎거나 돌을 갈아서 썼다.
연자방아 :
연자방아는 연자매라고도 하며 둥글고 판판한 돌판 위에 그보다 작은 둥근 돌을 옆으로 세워 이를 소나 말이 끌게 하여 돌리면서 곡식을 찧거나 빻는데 사용한 대형 맷돌을 말한다.
연자방아는 개인 소유물이 아닌 마을의 공동 소유물이다. 따라서 연자방아는 마을의 광장이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당산나무 아래에 있는 것이 보통이며 연자칸이라 불리우는 건물 안에 있는 경우도 있다.
안동 하회탈 :
하회탈은 우리 나라의 탈 가운데 유일하게 국보(제121호, 병산탈 2개 포 함)로 지정된 귀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며, 가면미술 분야에서 세계적인 걸작으로 평가받고있다. 하회탈은 [주지] 2개, [양반], [선비], [중], [ 백정], [초랭이], [할미], [이매], [부네], [총각], [별채], [떡다리] 12 개와 동물형상의 탈 [주지] 2개가 있다고 한다.
하회탈 제작에 사용되는 나무는 오리나무이며, 제작시기는 대략 고려 중 엽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회탈은 하회마을에 보관되어 오다가 1964년 국보로 지정되어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경대(鏡臺) :
거울을 부착하고 화장품 및 화장도구를 넣도록 서랍을 만들어 꾸민 가구. 각종 화장품 및 빗·빗치개·뒤꽂이·비녀·불두잠(佛頭簪 : 반타원형의 가랑비녀)·족집게를 비롯하여 분접시·분물통·연지반죽그릇·머릿보·실·수건 따위를 담아두는 데 사용된다.
일반적인 형태는 하단에 여닫이문이 있고 문을 열면 서랍이 서너개 있는 작은 직사각형으로, 뒤에는 거울이 부착되어 있어 뚜껑을 열어젖혀 비스듬히 세워 사용한다.
경대(鏡臺) :
거울을 부착하고 화장품 및 화장도구를 넣도록 서랍을 만들어 꾸민 가구. 각종 화장품 및 빗·빗치개·뒤꽂이·비녀·불두잠(佛頭簪 : 반타원형의 가랑비녀)·족집게를 비롯하여 분접시·분물통·연지반죽그릇·머릿보·실·수건 따위를 담아두는 데 사용된다.
일반적인 형태는 하단에 여닫이문이 있고 문을 열면 서랍이 서너개 있는 작은 직사각형으로, 뒤에는 거울이 부착되어 있어 뚜껑을 열어젖혀 비스듬히 세워 사용한다.
짚신 :
볏짚으로 삼은 신. 짚신은 신의 형태별 분류에 의하면 운두가 낮은 이(履)에 해당하는 것으로 재료에 따라 짚신·삼신〔麻履〕·왕골신菅履〕·청올치신〔葛履〕·부들신〔香蒲履〕 등으로 부른다.
이와 같이 짚신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북방의 화(靴)와 대응하는, 남방계통 최고(最古)의 신이라 하겠다. 짚신을 삼는 방법은 짚으로 새끼를 한발쯤 꼬아 넉줄로 날을 하고, 짚으로 엮어 발바닥 크기로 하여 바닥을 삼고, 양쪽 가장자리에 짚을 꼬아 총을 만들고 뒤는 날을 하나로 모으고, 다시 두 줄로 새끼를 꼬아 짚으로 감아 올려 울을 하고, 가는 새끼로 총을 꿰어 두르면 발에 신기에 알맞게 된다.
가마솥 : 아주 크고 우묵한 솥
멍석 :
곡식을 널어 말리는 데 쓰는 짚으로 결어 만든 자리.
짚으로 새끼 날을 짜서 장방형으로 두껍게 결은 것으로 네 귀에 고리 모양의 손잡이를 달기도 한다.
무게는 12∼15㎏이고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가로 350㎝, 세로 210㎝쯤 되어 보리 5∼7말을 널어 말릴 수 있다. 멍석을 짜는 데에는 잔손질이 많이 가서 한닢을 장만하려면 능숙한 이라도 일주일쯤 걸린다.
옛날 세도가에서는 멍석을 둥글게 말고, 무고한 백성을 이에 엎쳐서 붙들어맨 뒤에 볼기를 치는 사형(私刑)을 자행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를 멍석말이라고 하였다
지 게 :
짐을 얹어 사람이 지고 다니게 만든 기구로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운반기구의 하나였다.
꼴망태 : 소나 말이 먹을 꼴을 베어 담는 도구. 주로 대나무나 칡덩굴로 만든다.
다디미 :
어린시절 어머니의 다듬질 소리를 자장가 삼아서 잠들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다듬이는 우리나라 생활풍습상 매우 운치있는 멋의 하나이다. 흔히 아낙네들은 품앗이로 넓은 대청에 모여 이불 호청을 마주 붙들고 잘 접어 다듬잇돌 위에 올린 후 발로 밟고 올라 다져서 천을 가지런히 해두고 방망이질을 한다. 혼자서 하는 경우도 있지만 서로 마주보며 두드린다. 깊은 밤 다듬이질 소리가 아련히 들리는 풍치는 예로부터 많은 시인과 묵객(墨客)들의 시에도 등장했다.
죽부인 [竹夫人] :
구멍이 나도록 성글게 짜서 원통형이 되게 하고, 마구리는 잘 접어서 궁글리어 모나지 않게 한다. 말끔하게 손질하여 잔털이 돋거나 가시가 서지 않도록 한다. 숯불에 지져 색을 내는 외에는 콩댐을 하거나 생옻을 칠하는 등 가공을 하지 않는데, 이는 여름철 땀에 씻기거나 묻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또 짤 때에는 끈이나 못을 사용하지 않는데, 이는 품에 품었을 때 찔리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무더운 여름철 잠자리가 불편하면 사랑방에 기거하는 선비는 죽부인을 활용하게 된다. 삼베의 홑이불을 씌워서 죽부인을 가슴에 품고 한 다리를 척 걸치고 자면 허전함을 덜 뿐만 아니라 솔솔 스며드는 시원한 바람에 저절로 숙면하게 된다.
장승 :
돌이나 나무에 사람의 얼굴을 새겨서 마을 또는 절 어귀나 길가에 세운 푯말. 10리나 5리 간격으로 이수(理數)를 나타내 이정표 구실을 하거나,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한다.
대개 남녀로 쌍을 이루어 한 기둥에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또 한 기둥에는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고 새긴다.
홀태 :
이것은 지역에 따라 ‘기네·베홀깨’·(이상 인천광역시 덕적), ‘훌챙이·치개’(이상 충청북도 봉양), ‘청치기개·찌깨·첨치’(이상 충청남도 서산), ‘왜홀태’(전라남도 보성), ‘벼훑이’(전라북도 봉동), ‘호리깨’(경상북도 안강), ‘홀태’(전라남도)라고도 한다.
길고 두툼한 각목의 앞·뒤쪽에 네개의 다리를 달아 가위다리 모양으로 떠받치게 하고, 빗살처럼 날이 촘촘한 쇠틀을 몸에 끼웠다. 경상남도 영산에서는 작업중에 틀이 흔들리지 않도록 몸 양편에서 줄을 늘이고 발판을 달아서 일하는 사람은 한 발로 발판을 밟는다.
덕적에서는 앞발 중간에 막대를 가로대고, 이에 의지하여 발판을 놓아 사용한다. 날과 날 사이에 볏대를 넣고 훑어내면 나락이 떨어진다. 주로 여자들이 사용하는데, 하루에 벼 여섯가마 정도를 떨어낼 수 있다.
멍에 :
곧은 멍에는 겨리쟁기를 메울 때 쓰며, 굽은 멍에는 한마리가 쟁기나 달구지를 끌 때 쓴다. 멍에를 거는 불룩 솟은 목뼈 부분을 멍에목이라고 하며, 말에게 마차를 끌게 할 때에는 가죽으로 싼 멍에를 씌운다.
흔히, 멍에를 건 다음 이것이 벗겨지지 않도록 멍에끈으로 동여매나, 북한지방에서는 달구지의 챗대에 멍에를 고정시켜서 멍에목에 걸 뿐 멍에끈은 쓰지 않는다.
이것은 험한 길에서 달구지가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질 경우 멍에가 저절로 벗겨져서 소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멍에는 마소뿐만 아니라 배에도 걸었다. 중선(中船)을 비롯하여 돛배나 거룻배의 뱃바닥을 단단히 고정시키기 위하여 가로질러 거는 각목이 그것이다.
중선의 경우 멍에는 모두 4개로 이물 쪽의 수판멍에, 한가운데의 한판멍에, 구레짝을 세우기 위한 구레짝멍에, 큰 닻을 싣기 위한 큰닻멍에 들이다.
멧돌 : 돌을 끈에 매달아서 나무막대기로 돌리면서 콩,깨,조,수수,녹두등 다양한 먹을거리를 가는 도구.
suhnlee ☞ 맷돌 : [명사]곡식을 가는 데 쓰는 기구. 둥글넓적한 돌 두 짝을 포개고 윗돌 아가리에 갈 곡식을 넣으면서 손잡이를 돌려서 간다. ≒돌매·마석(磨石)·매·석마(石磨)·연애(碾磑).
추억의 책가방 :
제가 중학교 들어가서 사용하던 책가방들이네요. 도시락이 엎어져 김치냄새나던 내가방. 이것저것 넣어서 너무나 무거워 손바닥이 너무아파 손잡이에 보조손잡이를 부착하고 다니던 생각이납니다.
예전에 버스에 타면 앉은 사람이 책가방을 무릎위에 올려놓던게 예의였죠. 그래서 어쩔때는 3개 4개 까지도 올려놓아 오히려 앉는게 더 고역일때도 있었어요. 저 책가방 다시한번 보고싶다.
나락뒤주 :
벼를 담는 수장구(收藏具). 지역에 따라 나락두지(경상남도 영산), 두대통·볏두지(전라남도 보성), 둑집(전라북도 진안)이라고 부른다. 이에는 다음과 같은 네 종류가 있다.
① 짚으로 엮은 날개를 둥글게 둘러세우고 위에는 비가 스미지 않도록 주저리를 씌운다. 이것을 마당 한 귀퉁이에 세우고 나락을 갈무리하는데, 겨우내 조금씩 꺼내므로 봄이 되면 자연히 철거하게 된다.
곳간과 같은 수장공간이 부족한 집에서 세우는 임시 뒤주인 것이다. 근래에 와서는 쥐의 피해를 막기 위하여 함석판으로 만들기도 한다.
② 나락을 갈무리하기 위하여 한 칸 내지 서너 칸의 독립건물을 짓기도 한다. 네 벽은 널벽으로 처리하고 지붕에는 짚이나 기와를 덮는다. 바닥에도 널을 깔며 지면과는 30∼50㎝의 간격을 둔다.
어느 한 면의 설주에 홈을 파고 여러 개의 쪽널을 차곡차곡 끼워넣어 문으로 삼는다. 농사가 많지 않은 집에서는 부엌 모퉁이에 지어 사용하는 일이 많다. 이러한 ‘둑집’은 호남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다.
③ 대로 항아리처럼 배가 부르고 아래쪽이 홀쭉하게 짠 것이다. 위에는 짚으로 엮은, 송낙 모양의 모자를 씌운다.바닥 네 귀에는 주추를 놓고 널을 깐 다음 쥐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철사로 뜬 그물을 깔아둔다.
전면의 상부에 작은 널문을 달아 나락을 넣으며 꺼낼 때에는 아래쪽의 작은 구멍을 이용한다. 안쪽에는 진흙으로 초벌 바른 위에, 모래·토사·밀풀 따위를 잘 섞은 것을 덧발라서 틈새를 메운다.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스물 네 가마의 나락이 들어가는 대형도 있다. 이것은 경상남도 진양군 일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④ 바닥에 전이 달린 큰 방석을 깔고 이에 맞추어 짚으로 멍석처럼 짠 발을 두르고 나락을 담아두는 것이다. 나락이 많을 때에는 발을 덧대어 늘일 수 있으므로 편리하다. 이러한 나락뒤주는 전라북도 지방에서 많이 쓴다.
살 : 창문,얼레,부채,갓모,연따위의 뼈대가 되는 나무오리나 대오리
(나무오리: 가늘고 긴 나뭇조갓/ 대오리: 가늘게 쪼갠 댓개비)
삼태기 :
농가에서는 주로 인분과 재를 섞은 퇴비를 담아 논·밭에 뿌릴 때 사용하며, 이밖에도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즉 온돌에서 긁어낸 재, 흙, 쓰레기 등을 담아 실어 나르기도 하고, 타작할 때 이것으로 곡식을 가마니에 퍼 담기도 한다. 또 이것을 허리에 끼고 밭에 씨앗을 뿌리기도 한다.
삼태기는 가는 싸리·대오리·칡·짚·새끼 등으로 엮어 만드는데 짚이나 새끼로 엮어 만든 것은 앞이 벌어져 있고 뒤 언저리에 연한 덩굴성 나무를 굽혀 둘러서 손잡이로 이용한다.
물(水)지게 :
물을 길어 나르는 데 쓰는 지게.
등태에 긴 막대기를 가로 대고 그 양 끝에 물통을 달게 되어 있다.
본 작가의 고향 진도 조도 섬마을에서는 겨울철 재래식으로 김을 건조할때 이 물지게를 이용해 물을 길러 나르던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복(福)조리 :
한해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뜻에서 설날 새벽에 사서 벽에 걸어두는 조리. 조리는 쌀을 이는 기구인데 그 해의 행복을 쌀알과 같이 조리로 일어 취한다는 믿음에서 생겨난 풍속으로 보인다. 설날에 조리를 1년 동안 사용할 수량만큼 사서 방 한쪽 구석이나 대청 한 귀퉁이에 걸어놓고 하나씩 사용하면 1년 동안 복이 많이 들어온다는 민간신앙도 있다.
특히,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의 산촌이나 농촌에서는 설날에 복조리와 아울러 갈퀴도 사두는데, 조리는 이는 기구이고 갈퀴는 긁어모으는 기구이므로 이는 모두 생활상 필요한 기구로서, 1년 동안 복을 긁어들이거나 일어 취하는 일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리나 갈퀴는 함부로 사용하지 않으며 간수를 잘 하는데, 새해를 맞이하는 설날에는 반드시 이를 장만하여두는 습속이 있다.
조리 장수는 조리를 팔기 위하여 섣달 그믐날 밤에 “복조리 사시오, 복조리요.” 하고 외치면서 밤새도록 골목을 돌아다닌다. 원산지는 보은·담양·원주·서산 등지이나 곳곳에서 만든다. 겨우내 만든 복조리를 온 식구가 등에 지고 전국 각지로 흩어져 내다팔았다.
청사초롱(등롱) :
(1) (궁중에서 썼던) 푸른 운문사로 바탕을 삼고 위아래에 붉은 천으로 동을 달아서 만든 것으로 둘러씌운 등롱.
(2) 조선 때, 푸른 사로 둘러씌운 등롱으로 정3품부터 정2품의 벼슬아치가 밤에 다닐 때 썼던 등롱.
요강(尿釭) :
요강은 삼국시대 토기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처럼 예로부터 오랫동안 사용되어온 생활용품으로 신분의 고하를 막론한 필수품이었다.
다만, 신분상의 차이가 있었다면 그것을 만드는 재료에 차등이 있었을 뿐이다. ≪산림경제≫에 기재된 여자의 혼수품 중에 놋요강·놋대야가 들어 있는데, 가세가 어려우면 요강 둘을 해 준다고 하였다. 여기서 요강이란 질그릇 제품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요강은 방에 비치하는 것만이 아니고 여성이 가마로 여행할 때 휴대하는 것, 혹은 의료용도 있었을 것이다.
요강의 재료는 도기·자기·유기·목칠기 등 다양한 편이다. 그런 여러 재료의 제품들이 각각 어느 시대에 한하여 쓰였던 것이 아니고, 오히려 어느 시대에나 함께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말기의 ≪임원경제지≫에 의하면 “놋요강은 조그만 백자항아리 모양과 같고, 뚜껑이 있는데 규방의 용기이다. 백자로 만든 것은 동부(胴部)를 끈으로 엮어두면 알뜰하게 사용할 수 있다. 오동나무로 깎아 옻칠한 것은 휴대용이나 서재용으로 좋고, 쇠가죽으로는 기름을 먹여 만든다.”고 하였다.
지게 :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운반기구의 하나였다. 지게는 양다리방아와 더불어 우리가 발명한 가장 우수한 연장의 하나이다. 처음에는 ‘지개’로 불리다가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지게’라는 말이 처음 나타난 책은 1690년(숙종 16)에 나온 ≪역어유해 譯語類解≫이다. 청나라 말 교본이었던 까닭에 지게의 뜻을 풀어서 ‘배협자(背狹子)’로 적었으며, 1748년(영조 24)에 출간된 ≪동문유해 同文類解≫(만주말 자습서)의 저자도 이를 따랐다.
지게를 우리말에 가깝게 적은 최초의 책은 1766년에 간행된 ≪증보산림경제≫로, 저자는 이를 ‘부지기(負持機)’로 적었다. 지게를 나타낸 ‘지기’에 ‘진다’는 뜻의 부(負)를 덧붙인 것이다. 이로써 ‘지게’라는 이름이 18세기 무렵에 이미 굳어졌음을 알 수 있다.
갓과 망건 :
삼국시대 남자들은 머리에 깃을 꼿거나 건을 쓰거나 관을 썼다.
남자들이 갓을 쓰기 시작한 것은 고려말로 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러 남자들이 외출할 때 성인은 상투를 쫓고 망건을 두른후
갓을 쓰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갓은 삿갓 형이나 패랭이 형 모두를 통칭하는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흑립을 가르켰다.
망건은 상투를 틀 때 머리카락이 흘거 내려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머리에 두른 그물처럼 생긴 물건이다.
상류층에서는 대모, 마노, 호박 등을 사용하였으며, 일반은 동물뼈나 뿔을 사용했다고 한다.
소쿠리 :
죽피를 떠서 결어 만든 위가 트이고 테가 둥근 그릇. 죽공예에 관한 기록은 조선시대의 ≪경국대전≫ 공장조(工匠條)에서 죽소장(竹梳匠)·양태장(凉太匠)·우산장(雨傘匠)·선자장(扇子匠) 등 몇몇 죽공예 관계 공인(工人)의 종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소쿠리와 같은 부엌용구를 만들었으리라고 생각되는 공종(工種)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렇듯 기록으로 남아 있지는 않으나, 죽공예가 다양하게 발달하였던 조선시대였던 만큼 소쿠리와 같은 일상용구를 만드는 공인계층이 있었을 것임을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소쿠리의 재료인 대는 우리 나라의 경우, 호남·영남지방에서 많이 생산되므로 모든 죽공예가 그러하듯이 소쿠리도 대개 남쪽지방을 중심으로 발달되어 왔다.
대소쿠리는 통일신라 이래로 화척(禾尺)·수척(水尺)·양수척(楊水尺) 또는 고리백정이라 불리는 천민집단에 의하여 만들어진 버들광주리와 그 형태가 비슷하다. 그러나 버들광주리가 밑이 편편한 데 비하여 대소쿠리는 밑이 둥글고 둥근 테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키 :
지역에 따라 ‘칭이(경상남도 영산)’·‘치(강원도 도계)’·‘챙이(전라남도 구례·보성)’ 등으로 불린다.
키는 고리버들이나 대로 만드는데 남부지방에서는 대로 엮은 것을 많이 쓴다. 고리버들이나 대를 납작하게 쪼갠 오리로, 앞은 넓고 편평하며, 뒤는 좁고 우긋하게 짜는데, 양 앞쪽에 작은 날개를 붙여 바람이 잘 일어나게 한다.
곡식을 담고 까부르면 가벼운 것은 날아가거나 앞에 남고 무거운 것은 뒤로 모여 구분되는데, 이를 ‘키질’이라고 한다.
또, 곡식 등에 섞인 불순물을 고르기 위하여 키에 담아 높이 들고 천천히 쏟아 내리는 것을 ‘키내림’이라 하고, 키를 나비 날개치듯 부쳐서 바람을 내는 것을 ‘나비질’이라 한다.
민간에서는 오줌을 잘 가리지 못하는 어린이에게 키를 씌워 다른 집으로 소금을 얻으러 보낸다. 그러면 상대집에서는 그 까닭을 알아차리고 소금을 뿌리고 키를 두드리면서 “다시는 오줌을 싸지 마라.” 하고 소리친다. 이렇게 하면 나쁜 버릇이 고쳐진다고 믿고 있다.
경상남도지방에서는 정초에 처음 서는 장에 가서는 키를 사지 않는다. 키는 까부는 연장이므로 복이 달아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만약 모르고 사온 경우라도 집안어른이 부수어버린다.
제주도에서는 섣달그믐날 키점〔箕占〕을 친다. 부엌을 깨끗이 치우고 키를 씻어서 엎어두었다가 새해 아침에 그 자리를 살펴본다. 쌀알이 있으면 쌀이, 조가 있으면 조가 그해에 풍년이 들 것이라고 한다.
또 윤달에 주부가 마루에서 마당 쪽으로 키질을 하면 집안이 망한다고 믿는다. 이는 대문에 그 집을 지켜주는 문전신(門前神)이 있어 그쪽으로 키질을 하면 그 신을 내쫓는 격이 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시골메주 :
삶은 콩이나 삶은 콩에 밀가루 등 전분질 원료를 첨가한 것에 메주곰팡이(황곡균를 접종·배양시켜 만든 장(醬)의 제조원료. 형태는 낟알·국수형·입방체 등이 있다.
장을 만주말로 ‘미순’이라고 한다. 이 말은 오래 전에 우리 나라에 전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12세기에 간행된 ≪계림유사 鷄林類事≫에 ‘장왈 밀저(醬曰蜜沮)’라 하여 메주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세운 나라이고 고구려는 발효식품이 발달한 나라였다. 또한 콩의 원산지가 우리 나라이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 메주는 우리 나라에서 오랜 옛날부터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재래식의 메주제조방법은 콩을 삶아 으깬 것을 덩어리로 만들어 볏짚위에 얹어 2, 3일 건조시킨다. 그런 다음에 이것을 볏짚으로 묶어 방안의 선반에 달아메어 발효숙성시키거나 큰 용기에 짚을 깔고 그 위에 메주덩어리를 넣고 뚜껑을 덮은 다음 27∼28℃에서 2주간 숙성시킨다. 이것을 햇볕에 말려 다시 용기에 넣고 발효를 시켜 말린다.
개량식 메주 제조방법은 1960년대 이후부터 실시되었다. 이것은 삶은 콩에 밀가루와 종곡을 첨가하여 발효시키는 것이다. 재래식 메주는 콩만으로 만들고 간장과 된장 겸용으로 쓰이나 개량식의 메주는 간장용과 된장용을 구분하여 별도로 만든다.
재래식 메주는 야생의 잡균이 많이 번식하여 특유한 향을 낸다. 또한 숙성 관리가 미비하여 발효 숙성이 불완전하다. 그러나 개량식 메주의 경우에는 발효 숙성이 양호하여 효소 역가가 높고 불쾌치도 적다. 반면에 품질이 균일하여 과거의 집집마다 독특하던 장맛을 내지 못한다.
지금은 생활양식의 변화로 집에서 메주를 쑤는 것이 점차 줄어들고 있으며, 겨울철 아랫목을 차지하던 메주의 모습도 사라져가고 있다.
광주리 :
싸리채나 댓가지로 엮어 만든 부엌 세간. 농가에서는 주로 운반구로 쓰인다. 바닥을 판판하게 하여 울타리를 둥글게 엮으며 굽이 있다. 큰 것은 바닥지름이 65㎝에 달하고, 작은 것은 30㎝ 미만인 것도 있어서 반짇고리로 쓰일 정도이다.
광주리는 싸리채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소품에 있어서는 광대싸리 같은 유사재료를 활용하는 지방도 있고 혹은 대나무로도 만든다. 싸리는 그해에 곧게 자란 참싸리를 8월경에 베어 곧 껍질을 벗겨 쓰며, 가을 늦게 벤 것은 쪄내서 벗겨야 하는데 재질이 누런 기를 띠게 된다.
두레박 :
우물물을 퍼올리는 데 쓰이는 기구. 지역에 따라 두룸박·드레박이라고도 한다. 바가지를 그대로 쓰거나 양철 또는 판자를 짜서 만드는데, 바닥이 좁아야 물 위에서 쉽게 쓰러져 물을 푸기 쉽다. 흔히 긴 끈을 매달지만, 긴 대나 작대기로 자루를 박아 쓰기도 한다.
이것은 ‘타래박’이라고 따로 부른다. 두레박질은 흔히 사람이 두손으로 하지만, 우물가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긴 나무를 가로질러, 한끝에서는 돌을 매달고 다른 한끝에는 두레박을 매달아서, 물을 퍼 올릴 때 돌이 내려가는 힘을 이용하기도 한다.
이것은 그 원리가 디딜방아를 닮았다고 하여 ‘방아두레’라고 부른다. 이밖에 우물 위의 기둥 복판에 수레바퀴를 설치하고, 한쌍의 두레박을 달아서 번갈아가며 푸게 한 장치도 있는데, 이것은 ‘쌍장애’라고 한다.
이것은 줄을 아래로 잡아당기므로 그만큼 힘이 덜 든다. 한편, 대나무가 흔한 전라남도지방에서는 우물가에 박아놓은 대나무 끝에 줄을 달고 이에 바가지를 연결해서 물을 뜨기도 한다. 사람의 힘으로 억지로 휘었던 대나무가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힘을 이용하여 물을 뜨는 것이다.
맞두레 :
두 사람이 마주서서 물을 푸는 두레. 지역에 따라 ‘쌍두레’(경기도 화성군)·‘물두리’(경상남도 영산)·‘물파래’(경상북도 울진)·‘두레’(전라남도 보성)·‘고리박’(전라북도 봉동)·‘고리두레’·‘거두레’라고도 불린다.
목판처럼 바닥이 좁고 위가 넓은 나무그릇 네 귀퉁이에 줄을 달아, 두 사람이 두 줄씩 마주서서 잡고 물을 떠올린다. 나무통은 파손되기 쉬우므로 생철통이나 헌 이남박을 대용하기도 한다. 물이 깊이 고여서 두레나 용두레로는 물을 옮기기 어려운 데에서 쓴다.
물을 풀 때 한 사람이 ‘어리 하나’, ‘어리 둘’ 하고 세면 다른 한 사람은 ‘올체’ 하고 받아서 장단을 맞춘다. 천두레를 한메기라고 하는데 지역에 따라서는 백두레를 한메기로 잡기도 한다.
전라북도 고창에서는 한메기의 물을 풀 때, 천두레에 다시 열두레를 떠올린다. 마지막 열두레는 그 집의 풍년을 기원하는 덤인 것이다. 그러나 천두레를 꼭 채우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여 999두레를 한메기로 잡는 곳도 있다.
이렇게 해야 집안에 복이 들어올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고 믿기 때문이다. 남자 두 사람이 하루에 깊이 1m 아래의 물을 1,000말 가량 퍼내며, 나무두레의 무게는 1.5㎏ 내외이다.
토매 :
벼를 찧어서 현미를 만드는 농기구. 맷돌 모양으로, 아래위 두 짝이 있고 위짝에 자루가 달려 있다. 흙을 구워 만들거나 나무로 만든다. 벼를 갈아서 겉껍질(등겨)을 벗겨내는 수동 방아틀이다. 반죽한 진흙을 매통안에 경사지게 바르고 건조시켜 만들었는데 쇠손잡이를 좌우로 돌려 사용한다.
무자위 :
물을 퍼올리는 농기구. ≪북학의 北學議≫의 수차(水車)는 이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지역에 따라 ‘무자새’(경상남도)·‘자새’(전라남도 보성, 전라북도 봉동)·‘물자새’(전라남북도)·‘수리차’(충청남도 서산)·‘수차’·‘수룡(水龍)’·‘답차(踏車)’라고도 불린다.
받침대 끝에 긴 작대기 두개를 엇비스듬히 질렀으며, 사람은 이것을 의지하고 서서 우근판(발받침)을 밟아 바퀴를 돌린다. 바퀴가 돌 때마다 물이 따라 올라온다. 이것을 돌리는 일은 매우 힘이 들어서 보통 30분마다 교대한다.
물과 언덕의 높이가 1m인 경우, 200여평의 논에 물을 대는 데 약 두 시간 정도 걸린다. 또, 물과 언덕의 높이가 30㎝인 경우, 한 시간에 약 5,500ℓ정도의 물을 자아 올릴 수 있다. 그 크기는 일정하지 않다.
중형의 것은 바퀴의 지름이 180㎝이고 우근판은 19개가 설치되며 이의 길이는 38㎝, 너비는 28㎝쯤 된다. 무게는 60㎏ 내외이며 염전에서도 많이 쓰인다.
돌절구 :
돌의 가운데 부분을 오목하게 파서 만든 절구로써
곡식을 빻거나 또는 떡을 치는데 쓰이는 농구로 돌 또는 나무의 속을 파내어 우묵하게 만들고 그속에 곡식이나 떡을 넣고 절구공이로 작업하는데 사용한다.
잿박 :
농가에서 거름으로 쓸 재를 담는 그릇.
풍구 :
나무로 만든 둥근 통 안에 여러 개의 날개가 달린 축을 장치하고 밖에서 이것을 돌리면 큰 바람이 나도록 만들었다. 위에는 곡식을 흘려넣는 아가리가 따로 있으며, 축을 돌리면서 곡식을 부으면 겉껍질이나 검부러기들은 바람에 날려 옆으로 빠져나가고 낟알만 아래로 떨어진다.
바람을 일으켜 보리를 비롯하여 콩·팥, 밀에 섞인 겨, 먼지·쭉정이 따위를 가려내는 데에 쓰인다. 한 가마니의 쌀을 내리려면 3분쯤 걸린다. 풍구는 18세기 전까지는 우리 나라에서 사용되지 않은듯하다.
발 :
여름날 창문이나 대청에 쳐서 햇볕을 가리는 물건. 땅에 펴서 농작물을 말리는 데 쓰기도 한다. 햇볕을 가리는 데 쓰는 발은 갈대 또는 대오리를 삼끈이나 실로 엮어 만드는데, 바람이 잘 통하므로 매우 시원하다. 이것은 대의 마디를 무늬로 하여 엮기도 하며 한복판에 ‘喜(쌍희)’자 모양의 무늬나 ‘壽(수)’자 또는 ‘福(복)’자 무늬를 놓는다.
주위에 ‘卍〔완〕’자를 놓으며 완자 바깥쪽에는 다시 남색 모단(毛緞)으로 선을 두르기도 한다. 발에 놓는 무늬는 일정하지 않아서 이 밖에 송호(松虎)·용·송록(松鹿)에 뇌문(雷文)을 돌리거나 ‘富貴康寧(뷔귀강녕)’ 따위의 길상문자도 놓는다. 또한 치장을 위해서 매듭을 꼬아 덧걸어두기도 한다.
발을 본디 목적 이외에 장식용으로도 쓰는 것은 이처럼 글자와 무늬·매듭이 이루는 조화가 매우 아름다운 까닭이다. 이 밖에 가마발이라 하여 발을 작게 짜서 가마의 앞뒤와 좌우 창문에 늘이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남녀가 내외하는 데에 이용한 일도 있다. 수렴청정(垂簾聽政)이라는 말이 그것으로 본디 왕대비가 조신을 접견할 때 앞에 발을 치고 대화를 나누었던 데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이 말은 뜻이 바뀌어져서 임금이 나이가 어려 등극하였을 때 그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대리정치를 하는 일을 가리키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대로 엮은 발을 조선발이라고 따로 불렀으며, 근대 구미각국에서는 블라인드 대용으로 쓰기도 한다. 현재는 비닐이나 합성수지로 만든 것도 생산된다.
고추나 목화 따위의 농산물을 널어 말리는 발은 주로 싸리로 엮으며, 그 밖에 달풀의 줄기나 대 또는 겨릅대로 만들기도 한다. 특히 목화를 말릴 때 발의 양끝을 무엇에 걸쳐놓으면 위 아래로 바람이 통해서 쉬 마른다. 이것은 비를 맞히지 않으면 오래 쓸 수 있으며, 겨울철에는 방 윗목에 둥글게 펴서 감자나 고구마를 갈무리한다.
먹통 :
자재를 가공하기 위하여 선을 긋는 데 사용하는 연장. 장방형의 두꺼운 통재에 앞뒤로 두개의 구멍을 파내어 한쪽은 먹물을 묻힌 솜을 넣어두는 먹솜칸을, 다른 한쪽은 먹줄을 감을 수 있도록 타래를 끼워놓았다.
먹통에는 먹칼[墨刀]이 딸려 있어서 짧은 직선이나 곡선, 글씨 등을 쓰거나 먹줄을 풀 때 먹이 잘 묻도록 하는 데 사용된다. ≪재물보 才物譜≫에는 ‘먹통[墨斗]’·‘먹칼[墨侵]’이라 기록되어 있다.
사용하는 방법은 먹칼로 먹솜을 누르면서 타래에 감겨진 줄을 풀어 반대쪽 끝에 먹통 줄구멍을 맞춘 다음, 먹통을 단단히 고정하여 먹줄을 직각으로 들었다가 퉁기면서 놓게 된다.
이 때 잘못 퉁기면 직선이 되지 않고 휘거나 곡선이 되기 쉽다. 먹통을 만드는 재료는 소나무를 비롯한 자단나무·광솔용 괴목의 뿌리가 쓰이는데, 특히 자단나무로 만들면 결이 곱고 물을 덜 먹어 먹물을 오래 보관할 수 있다.
먹칼은 대나무나 싸릿대가지로 만든다. 한쪽 끝은 가늘고 둥글게 하며 다른 끝은 사선으로 절단한 다음 참빗과 같이 잔칼질을 하여 부드럽게 만든다.
섬틀 :
섬(곡식)을 담기 위하여 짚으로 엮어 만든 멱서리를 치는 연장. 가랑이가 벌어진 나무 두 개를 마주 세우고 위쪽에 둥근 나무를 꿰어 고정시켰다. 그리고 둥근 나무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날눈을 파서 고드레돌을 앞뒤로 걸쳐 놓는다.
고드레돌은 주먹만한 돌이나 네모진 나무에 새끼를 꿰거나 얽어서 만들며, 짜인 것을 아래로 촘촘하게 내리뜨리는 구실을 한다. 섬틀로는 섬의 바닥과 몸을 이루는 부분만을 짚으로 거적처럼 짜며, 이 것이 완성되면 사람이 한복판에 들어서서 양끝을 당긴 다음 밑에서부터 엮어 올라가서 우긋한 모양이 되게 한다.
따라서, 섬틀로 바닥과 몸을 짜는 것을 ‘친다’라고 하며, 사람이 섬의 모양을 만드는 것을 ‘우긴다’라고 한다. 능숙한 사람은 하루 10여 장의 섬을 치거나 우긴다. 일본에서 들어온 가마니가 나오면서 섬은 자취를 감추었다.
발구 :
말이나 소의 목에 얹어 매는 형태로 물건을 운반하는 데 쓰는 도구. 서까래와 같은 통나무 두개를 ‘발고’라고도 하는데 달구지의 전신이라고도 할 원시적인 연장이다.
사다리 모양으로 위는 좁고 아래 쪽이 벌어지도록 연결시킨 모양인데 앞쪽에는 가로대(멍에)를 박아서 소 등에 얹으며 뒤의 양쪽에는 짧은 기둥을 세우고 여기에 역시 가로대(달애)를 붙였다. 이 달애는 실린 물건이 흘러 떨어지는 것을 막아준다.
그리고 땅에 닿는 달애의 아랫부분은 지면에 평행이 되도록 깎아준다. 이렇게 해야만 저항이 적어 눈이나 얼음 위에서 잘 미끄러진다. 발구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길이는 3∼4m이며, 너비는 1m 내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달애에, 두개의 바퀴가 달린 작은 달구지를 연결시켜서 끌기도 한다.
달구지의 사면에는 낮은 널벽을 세운다. 무게는 무겁지 않으나 부피가 큰 것을 실을 때에는 달애에 또 다른 발구를 잡아매어 운행하기도 한다. 또한 ‘똥뒤’라고 하여 긴 통나무 위에 짧은 기둥을 세우고 여기에 Y자 모양으로 한쪽이 벌어진 틀을 박아 달애에 연결시키기도 한다.
앞이 벌어진 부분에는 물건이나 곡식이 담긴 광주리 따위를 얹는다. 발구는 대체로 얼음이 깔리거나 눈이 깊어서 달구지를 이용할 수 없는 곳에서 많이 쓰이는데, 함경도를 비롯한 평안도의 산간지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무게는 20㎏ 내외이다.
숫돌;
칼이나 낫 또는 도끼 따위를 갈아서 날을 세우는 데 쓰는 돌. 쓰임에 따라 가정용과 목공용 그리고 공업용으로 나눈다. 천연의 수성암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낸 것이 가정용이며 목공용은 이보다 조금 작고 석질이 더 단단하다.
공업용은 카버런덤·알런덤·코런덤(금강사) 등의 알갱이를 접합제로 둥글게 뭉쳐 만든 것으로 금속을 자르거나 가공물의 겉면을 깍는 데 쓴다. 따라서, 앞의 두가지가 날을 숫돌에 대고 가는 것임에 반하여 공업용은 숫돌에 달린 날이 금속 따위를 자르거나 가는 것이다.
또, 가정용이나 목공용은 너비가 좁은 직육면체를 이루어서 날이 너른 것을 갈 때에는 뉘어놓고 쓰지만 좁을 때에는 모로 놓고 가는 것이 편리하다. 이들을 쓸 때에는 한 손으로 물을 뿌려주어야 한다.
숫돌은 벼루처럼 산지에 따라 이름을 붙이기도 하고, 그 빛깔에 따라 청숫돌·박숫돌 따위로 부른다. 또, 돌의 재질에 따라 거친숫돌·중숫돌·완성숫돌로도 구분하는데, 가정용은 대체로 중숫돌이다.
예전에는 농가는 물론, 도회지의 가정에도 숫돌 한두개는 반드시 갖추었으나 근래에는 칼 따위를 전문적으로 갈아주는 행상이 자주 다닐 뿐 아니라 칼 자체의 질도 좋아져서 숫돌의 필요성은 그만큼 낮아진 셈이다. 또, 요즈음에는 자연산 돌숫돌보다 인조숫돌을 더 많이 쓴다.
제기차기;
제기를 가지고 발로 차서 떨어뜨리지 않고 많이 차기를 겨루는 아이들놀이. 제기는 엽전이나 구멍이 난 주화(鑄貨)를 얇고 질긴 한지나 비단으로 접어서 싼 다음, 양끝을 구멍에 꿰고 그 끝을 여러 갈래로 찢어서 너풀거리게 한 것인데, 주로 정초에 많이 노는 어린이 놀이기구이다.
제기는 가죽조각을 엽전 크기로 오려서 엽전 밑에 받치고 다른 오라기(조각)를 가죽 밑으로부터 구멍에 꿴 다음에, 다시 닭이나 꿩의 깃을 꽂아서 매어 만들기도 하였다. 종이나 비단으로 술을 만들거나 새 깃을 붙이는 것은, 발로 차올린 제기가 바르게 떨어져서 발에 잘 맞닿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제기는 흔히 어린이들이 제 손으로 만들었으나 요즘은 상점에 플라스틱 제품이 나와 팔리고 있다.
놀이방법은 한 사람씩 차기도 하고 여러 사람이 모여서 마주 차기도 한다. 서울에서는 한번 차고 땅을 딛고, 또 차고 땅을 딛고 하는 따위의 제기차기를 ‘땅강아지’, 두 발을 번갈아 가며 차는 것을 ‘어지자지’, 땅을 딛지 않고 계속 차는 것을 ‘헐랭이’라고 한다. 한편, 전라남도 고흥지방에서는 땅강아지를 ‘땅지기’, 어지자지를 ‘양발지기’, 헐랭이를 ‘들지기’라고 한다.
이 밖에 한번 차서 제기를 입에 물었다가 다시 차고, 다시 차고 다시 무는 ‘물지기’, 키를 넘게 올려 차는 ‘키지기, 차서 머리 위에 얹었다가 떨어뜨려 다시 차는 ’언지기‘도 있다. 앞의 여러 가지 방법 중에 어느 한가지만을 미리 정해서 차기도 하고, ’삼세 가지‘라 하여 위의 세 가지를 모두 차거나 해서 합계를 내어 승부를 짓기도 한다.
잘 차는 사람은 한가지만으로 몇 백까지 차기도 하는데, 차올린 제기를 머리 위나 어깨로 받아서 한참씩 다리를 쉬거나 발 안쪽과 바깥쪽은 물론이고 발등과 발뒤축 또는 무릎으로 차는 재주를 부리기도 한다. 진 쪽에서는 종들이기라 하여 상대의 서너 걸음 앞에서 제기를 발부리에 던지며, 이긴 사람은 이것을 멀리 차낸다.
진 쪽이 그것을 손으로 잡지 못하면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드려주어야 하며, 차는 쪽에서 헛발질을 하게 되면 종의 입장에서 벗어나게 된다. 한편, 제기를 받아 차는 쪽에서는 일단 받아서 자기 혼자서 몇 번이고 차다가 주위에 서 있던 자기편에게 넘기기도 한다. 그래서 진 쪽에서는 이것을 받아 찬 사람에게까지 종들이기를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종 들이는 사람은 제기를 던지는 헛 시늉을 하거나 일부러 다른 데로 던져서 상대의 헛발질을 유도한다. 또, 세 사람 이상이 찰 때에는 갑이 을에게 차 넘긴 것을 다시 병이 받아 차면서 순서대로 다음 사람에게 넘기기도 하며, 여러 사람이 둥글게 둘러서서 순서 없이 아무나 차기도 한다. 이때에는 헛발질을 한 사람이 종을 들이게 된다.
훑이;
두 개의 가는 나무가지나 수숫대 또는 댓가지의 끝을 동여매어 집게 비슷하게 만든다. 벼이삭을 양틈에 끼고 오므린 다음 훑어내면 알갱이가 떨어지는 것이다. 부젓가락처럼 길고 둥근 쇠끝에 자루를 박아 쓰기도 한다.
근래에는 풋바심이나 볍씨를 받을 때에 많이 썼으며 한 사람이 하루 닷 말내지 열 말을 훑는다. 이와 비슷한 것에 ‘짚채’가 있다. 이것은 물푸레나무나 싸리나무로 회초리처럼 만들며 주로 평안도에서 썼다.
짚채를 한 손에 쥐고 볏짚을 쳐서 알갱이를 떤다. 개상질을 아무리 잘 해도 곡식을 완전히 털어내기는 어려우므로 덜 털어진 것을 따로 모아두었다가 벼훑이나 짚채로 떨어내며 이를 ‘짚 앗는다’ 또는 ‘벼 앗는다’고 한다.
짚채질을 수확량에 대한 기대보다 알갱이를 그대로 둔채 이엉을 엮어 지붕을 덮으면 쥐가 올라가 지붕을 들쑤셔 놓으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하는 것이다.
채독;
싸리로 독이나 항아리처럼 엮은 그릇. 오지그릇이 귀한 산간지방에서 많이 쓰인다. 아가리는 둥글며 바닥은 네모꼴 또는 둥근모양이다. 안쪽에는 틈을 메우기 위하여 쇠똥을 바른 다음(쇠똥)에는 섬유질이 많기 때문이다.
진흙을 덧바르거나 아예 보릿겨와 진흙의 반죽을 바르며 안팎으로 종이를 바르기도 한다. 채독에는 콩·감자·고구마와 같은 마른 곡식을 갈무리하는데, 보통 콩은 두 가마니쯤 들어가며 무게는 3㎏ 내외이다. 물에 젖지 않으면 10여년은 쓸 수 있다.
지신밟기;
꽹과리·징·북·장구·쇠납 등의 민속악기로 구성된 풍물을 선두로 소고패·양반·하동(河童)·포수·머슴과 탈을 쓴 각시 등이 마을의 당산(堂山)굿을 비롯하여 집집마다의 지신을 밟으면서 지신풀이가사를 창하며 춤과 익살, 재주를 연희하는 것으로, 마을의 지신에 대한 공연적(供演的) 성격을 띤 놀이이기도 하다.
지신밟기패가 자기 집에 당도하면 주인은 주·과·포의 고사상을 차리고, 또 주식(酒食)을 대접하며 전곡을 성의대로 희사하면, 그것을 모아 마을의 공동비용으로 사용한다. 농경민족인 우리 겨레는 예로부터 지방마다 행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나 현재는 영남지방에 많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지신밟기의 절차는 지방마다 다소의 차이가 있으나 그 대강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음력 섣달 중에 악기·의상·도구를 준비하고 연습하는데, 인원은 기수(旗手)·사대부·팔대부·하동·포수·머슴·촌로(村老)·촌녀·각시(탈을 씀.) 등이며, 악사는 꽹과리·징·북·장구·날라리·소고로 구성하되 인원의 다과는 다를 수 있다.
지신풀이가 끝나면 주인이 대접하는 음식을 먹고 전곡을 얻어 가지고 간다. 이때, 전곡을 많이 얻기 위하여 하동과 포수가 갖은 수단과 골계적 희극을 부린다. 얻은 재물은 마을의 공동경비에 사용한다.
용두레;
통나무를 배모양으로 길쭉하게 파서 몸통을 만들고, 그 가운데 양쪽에 작은 구멍을 뚫어 가는 나무를 끼우고 여기에 끈을 매었다. 이 끈은 세개의 긴 작대기를 원추형으로 모아 세운 꼭대기에 매어 몸통을 적당히 들어올리도록 한다.
한편, 몸통 끝에는 손잡이가 달려서 이것을 쥐고 앞뒤로 흔들며 물을 퍼올린다. 통나무가 귀한 곳에서는 쪽나무로 직사각형의 통을 짜고 바닥에 긴 자루를 달았다. 나무통 윗부분에는 들어온 물이 넘치지 않도록 드문드문 나무 조각을 가로댄다. 줄의 길이는 지형에 따라 조정한다.
용두레에는 보통 두말의 물이 실리는데, 두세 사람이 교대해가면서 푸면 하루에 약 1,000석(石)쯤 옮길 수 있다. 무게는 7㎏ 내외이다. 흔히 논 한귀퉁이에는 가뭄에 대비한 구덩이를 파고 물을 가두어두는데 이를 둔벙이라고 한다. 이 둔벙의 물은 어느 정도까지 용두레로 푸고 남은 것은 맞두레를 이용하여 퍼낸다.
소굴레;
소의 머리에 씌워 고삐에 이어 매는 물건
주판;
셈을 할 때 쓰는 계산기구. 산판(算板)·수판(數板)·주반(珠盤)이라고도 하며, 이것으로 셈을 하는 일을 '주산(珠算) 놓는다.’고 한다.
이것은 장방형의 작은 틀 위쪽에 칸을 막고 가는 철사나 대오리 21∼27개를 내리꿰어 동글납작하고 작은 나무알이나 뼈로 깎은 알을 위칸에는 하나 또는 둘, 아래칸에는 네 개 또는 다섯 개를 꿰어놓은 것이다. 위의 알은 한개를 다섯으로, 아랫알은 하나로 셈을 쳐서 십진법에 따라 덧셈·뺄셈·나눗셈·곱셈을 한다. 이것은 중국에서 발명되었다.
후한 말의 서악(徐岳)이 쓴 ≪수술기유 數術記遺≫에 주산(珠算)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에 이미 주판을 썼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주판이 널리 보급된 것은 15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이며 이전까지는 산목(算木)으로 셈하였다.
서양의 메소포타미아지방에서는 3,000∼4,000년 전에 널빤지에 모래나 분말을 놓아 셈하는 토사주판을 썼으며, 로마에서는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4세기 사이에 홈을 판 널빤지 위에 여러 개의 줄을 긋고 이에 바둑알을 놓아 셈하는 홈주판을 썼다.
그러나 서양의 주판은 아라비아숫자의 보급에 따라 점차 쇠퇴하여 17세기에는 모습을 감추었으며, 필산(筆算) 위주의 셈법이 이루어졌다. 한때 주판이 유럽에서 중국으로 들어왔다는 설이 있었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각기 독립적으로 발명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중국의 주판이 우리 나라에 언제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주산교본이라고도 불리는 정대위(程大位)의 ≪산법통종 算法統宗≫이 1593년(선조 26)에 출간되면서 우리에게도 수입되었다. 그러나 셈을 정확히 따지지 않았던 당시의 관념 때문에 널리 보급되지는 못하였으며 일부 식자층에서만 관심을 기울였다.
인조 때의 학자 최석정(崔錫鼎)은 그의 ≪구수략 九數略≫에서 중국의 경우 관공서나 상인들이 모두 주판을 쓰고 일본의 사정도 이와 비슷하나 이것은 번거로워 재래의 산목에 못 미친다고 하였으니 당시의 사정을 충분히 짐작할만하다. 이와 같은 사정은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도 변함이 없었다. 당시에 출간된 것으로 보이는 주산소개서인 ≪주학신편 籌學新篇≫에도 주판구조에 대한 설명뿐, 정작 주판계산방법에 관하여는 아무 것도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우리의 주판은 임진왜란을 통하여 일본에 전래, 곧 널리 사용되었다. 본디 우리 나라나 중국의 주판은 윗줄에 5개로 셈하는 알이 2개, 아랫줄에는 1개를 나타내는 5개의 알로 구성되었으나, 일본에서 이를 개량하여 윗알 1개를 줄였으며 뒤에는 아랫알도 4개로 바꾸었고 이것이 1932년에 거꾸로 우리에게로 들어왔다.
우리 나라의 주산보급은 1920년 조선주산보급회가 생기면서 본격화하였으며, 1936년에 당시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학교)에서 주산경기대회를 연 것을 계기로 이후 각종 대회가 개최되었다. 1950년대에는 상업학교의 교육과정에 주산과목이 채택되었고, 1960년대에는 문교부에서 검정을 실시하였으며, 학교에서도 주산교육을 특기교육의 하나로 장려하였다. 근래에는 주산교육을 실시하는 사설학원이 곳곳에 있었다.
지금은 계산기 따위가 보급되어 주판의 실용성이 적어졌음에도 두뇌회전이나 셈 능력을 키우기 위하여 간혹 어린이들이 배우고 있다.
문서통;
각종 공문서류를 담아 운반에 편리하도록 대나무의 원통을 이용하여 제작하였다. 큰 대나무 마디의 중앙을 따서 뚜껑을 만들고 경첩을 달았다. 대가 갈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대나무결 틈에 가는 놋쇠 이음쇠를 대었다. 양끝의 마디는 짧게 잘라 장식하고 끝을 매는 고리를 달아 휴대·보관에 편리하게 하였다.
부뚜;
타작마당에서 곡식에 섞인 티끌이나 쭉정이, 검부러기 따위를 날려 없애려고 바람을 일으키는 데 쓰는 돗자리를 말한다.
사용방법은 ≪농사직설≫에도 “긴자리의 가운데를 밟고 양끝을 들어올린다.”라고 쓰여 있듯이, 발로 가운데를 밟고 양끝을 손으로 쥐고 흔들어 바람을 낸다. 이것을 부뚜질이라고 하는데 다른 한 사람이 곡식을 높이 들고 조금씩 쏟아내리면서 곡식에 섞여 있는 검부러기나 쭉정이 등을 바람으로 날린다.
쥐덫;
쥐를 잡는 데 쓰는 덫 (고두;斗, 쥐틀)
논호미;
논과 밭을 매는 데 쓰이는 농기구. 지역에 따라 호맹이·호메이·호무·홈미·호마니·허메·허미·희미 등으로 불린다. 앞이 뾰족하고 위가 펑퍼짐한 쇠날과 연결된 가는 목을 휘어 고부리고 나무자루를 끼워 만든다. 호미 날은 각 지방의 자연조건·토질·농작물의 종류에 따라 형태를 달리하고 있다. 보습형은 경기도, 충청남·북도, 전라북도 등지에서 쓰이는데, 날 끝이 뾰족하며 윗쪽으로 올라가면서 넓적해진다. 땅에 날을 꽂고 잡아당기면 흙이 잘 뒤집어지므로 논 매는 데 적당하다. 낫형은 전라남도·경상남도·제주도 등지의 도서지방 및 산간지대에서 많이 쓰이는데, 날이 낫처럼 나비에 비하여 길이가 길며 그 끝이 날카로워 밭일에 적당하다. 세모형은 중부 이북 지역에서 주로 쓰이는데, 날과 자루가 길어 보리·옥수수·밀 등을 심은, 이랑이 넓은 밭에서 풀매는 데 편리하다.
매통;
벼의 껍질(왕겨)을 벗겨내는 연장이다. 위짝은 위와 아래 면을 움푹하게 파내고 그 가운데에 아래짝에 박힌 고줏대를 끼울 구멍을 낸다. 위짝과 아래짝이 닿는 양쪽 면에는 울퉁불퉁하게 홈을 내서 왕겨가 잘 벗겨지게 한다. 위짝을 좌우로 돌리면 고줏대 사이로 벼가 내려오면서 까지는데, 하루에 3~4가마의 벼를 현미로 만들 수 있다.
태평소(太平簫);
태평소를 만드는 법은 오매(烏梅)·산유자(山柚子)·대추나무·황상(黃桑)·황양(黃楊) 등 단단한 나무를 쓰는데, 관의 길이는 30㎝ 못되게 하여 위는 좁고 차차 퍼져 아래를 굵게 한다.
지공(指孔)은 모두 8공이고, 그 중에서 제2공은 뒷면에 있다. 갈대로 만든 작은 혀〔舌〕를 동구(銅口)에 꽂고, 끝은 나발 모양의 동팔랑(銅八郎)이 달려 확성 구실을 하게 되어 있다.
이 악기로 전라도 지방의 시나위를 불었던 사람은 방태진(方泰鎭)과 한일섭(韓一燮)이다. 방태진은 1950년대 후반부터 여성국극단의 악사로 따라다니며 국극의 장면이나 중요한 대목을 태평소의 즉흥가락으로 옮기기 시작하여 그 나름대로 중심가락을 만들고 서용석(徐龍錫)에게 전하여 주었다.
방태진의 시나위는 굿거리·자진모리·동살푸리·휘모리로 짜여져 있고, 가락은 그때그때마다 즉흥가락이며 몇 개의 대표적인 가락들이 일정하게 나타난다.
한편 한일섭의 태평소 시나위는 그 자신의 아쟁이나 판소리의 가락들을 태평소에 옮겨 불기 시작한 데에서 비롯한다. 그의 가락은 박종선(朴鍾善)·김동진(金東振) 등에 의하여 전해지고 있는데, 역시 대표적인 가락들은 몇 가락뿐이고 대부분은 즉흥적으로 연주되고 있으며 주장단은 굿거리와 자진모리이다.
개상;
곡식의 낟알을 떨어내는 탈곡기구. ≪해동농서 海東農書≫에는 ‘가상〔稻床〕’, 〈농가월령가 農家月令歌〉에는 ‘개샹’이라고 적혀 있다. 지역에 따라 ‘챗상(충청북도 봉양)’·‘태상(강원도 강릉)’ 또는 ‘공상’이라고도 한다.
여러 가지 형태의 것이 있는데, 서까래와 같은 통나무 서너개를 새끼줄로 나란히 엮은 뒤 네 귀퉁이에 높이 50∼70㎝의 다리를 붙인 것이 가장 흔하다. 충청북도 봉양에서는 가위다리처럼 벌어진 나무 앞쪽에 다리를 붙여서 땅과 45°쯤 되게 세워놓은 틀 위에 적당한 크기의 넓적한 돌을 얹어놓은 것을 쓴다.
농사가 많은 집에서는 안마당의 귀퉁이에 앞은 높고 뒤가 낮아지도록 적당히 깎은 돌을 붙박이로 설비하여 두고 이용하기도 한다. 강원도 도계에서는 크고 둥근 자연석을 그대로 쓰는데 그것을 ‘탯돌’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반농가에서 개상을 따로 준비하는 일은 드물며, 한쪽이 평평한 굵은 통나무를 그대로 엎어놓거나 절구를 가로뉘어 쓰기도 한다. 자리개로 단단히 묶은 볏단이나 보릿단을 어깨 위로 돌려서 머리 위로 높이 쳐들었다가 힘껏 내리쳐서 곡식의 알갱이를 떨어낸다. 남자 한 사람이 하루에 벼나 보리 한가마반 내지 두가마를 털 수 있다.
어리;
병아리 등을 가두어 기르기 위하여 덮어 놓는 싸리나 대나무, 또는 가는 나무로 엮어 둥글게 만든 물건. 닭 등을 놓아서 팔러다니는 것도 어리라 한다. 지방별 명칭은 종두리(충청북도 봉양)·삘가리통(경상남도 영산)·달구가리(전라남도 보성)·가리(전라남도 영광)·달구어까리(전라남도 구례)·닭장·닭집 등이 있다.
대나무가 많은 호남지방과 영남지방에서는 닭집, 즉 어리를 나무장군처럼 둥글고 갸름하게 짰다. 안에는 두개의 나무를 끼워 홰를 삼고, 가운데에 사각형의 구멍을 뚫어 입구를 만들었다. 닭들이 쉽게 오르내리도록 대나뭇가지를 새끼로 엮어서 이 문에 걸쳐 놓고 층계로 삼았다.
이는 주로 어미닭의 집이 되며, 행랑채나 헛간 같은 추녀 밑 벽쪽에 매달아둔다. 또, 대로 밥공기를 엎어 놓은 것처럼 바닥은 편평하고 위는 둥글게 짠 것이 있다. 이것 역시 층계를 단다.
이런 모양의 것은 싸리나 대로 만들되 바닥은 없게 하여 마당에 엎어서 병아리나 어미닭을 여기에 가두기도 한다. 발채를 펴서 엎고 이것의 대용으로 삼기도 한다.
달구지;
본디 이름은 달구지이지만, 소가 끌면 ‘우차(牛車)’, 말이 끌면 ‘마차(馬車)’라고 부르며, 소가 끌어도 ‘마차’라고 하기도 한다. 우리 나라 달구지는 바퀴 수가 두 개와 네 개의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앞의 것은 북한지방에서, 그리고 뒤의 것은 중부 이남의 평야지대에서 많이 썼다.
두 바퀴 달구지는 반드시 소가 끌었으며, 소 등에 길마를 얹지 않고 쳇대를 길게 하여 소의 등에 걸어 둔다. 그리고 쳇대가 등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양쪽에서 목 앞으로 끈을 둘러 감았다. 이처럼 길마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험한 길에서 달구지가 넘어지거나 언덕으로 굴러떨어질 때 소나 말이 다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또 이 지역 달구지 바퀴는 다른 지역의 것에 비하여 매우 큰 편인데, 이렇게 해야만 상틀이 높아져서(지상에서부터의 높이는 5자) 바닥이 바위나 돌 등에 닿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네 바퀴 달구지는 마소가 함께 끌었으나, 도회지에서 짐을 나르는 경우는 말을, 농가에서 곡식 따위를 운반할 때는 소를 이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은 앞바퀴가 뒷바퀴보다 작으며 거덜이가 장치되어 있기 때문에 좌우로 움직여서 방향을 잡는다. 달구지 바퀴는 모두 목재이며, 텟쇠를 둘러서 보강한다. 한때는 나무 바퀴 대신 자동차 타이어를 쓰는 일이 많았다.
달구지로는 곡식 가마니를 비롯하여 잔 모래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짐을 운반한다. 예전에는 도회지에서도 대부분의 짐을 달구지를 이용하여 운반했으며 중소도시에서 흙·모래·시멘트 등의 건축자재를 운반하는 데 사용하였다. 지금은 차나 경운기 등으로 대체되어 찾아보기가 어렵다. 한 틀의 무게는 1,500∼2,000㎏이다.
남방애;
통나무를 파서 만든 제주도의 정미도구 중 하나로, 절굿공이를 이용해 곡식의 껍질을 벗기거나 가루로 빻을 때 사용된다. 이곳에서는 '남방아', '남방애'라고 불리운다.
제주도의 방아는 그 재질에 따라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서너 아름드리 되는 통나무를 파서 만든 것을 나무방아 곧 '남방애'라 하고, 그와 거의 비슷한 크기로 돌을 다듬어 만든 것을 '돌방애'라고 한다.
남방애는 통나무를 잘라내서 세로로 자른 후, 마치 커다란 사발모양의 그릇을 만들고, 다시 밑바닥 가운데 둥그렇게 구멍을 내어 그곳에 '돌혹'(돌확)을 고정시켜 놓는다. 돌혹에 담긴 곡식은 절굿대와 마찰되어 껍질이 벗겨지며, 가장자리로 튀어나오는 곡식은 빗자루로 쓸어 돌혹 속으로 모아 담으면서 찧기를 계속한다.
통나무를 세로로 자른 후 넓게 홈을 파내고, 그 홈 가운데 동그란 구멍을 내어 그 구멍에 돌을 끼워 고정시켰다. 흔히 말하는 '절구'에 해당되나 제주도의 방아는 보통 3명에서 6명까지 서서 동시에 찧을 수 있을 만큼 크다.
이 까닭은 밭농사를 주로 짓는 제주도의 농업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제주도는 경지면적의 대부분을 밭으로 사용하여 잡곡을 주로 재배하는데, 잡곡은 낱알이 작아 탈곡과정이 무척이나 까다롭다. 결국 정미도구도 이렇듯 제주도식으로 크고 넓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농경문화에 없어서는 안될 도구 중 하나로서 밭농사 위주의 제주도 특성에 맞게 편리하고도 효율적으로 발달한 방아의 모습이 흥미롭다.
나무독;
주로 음식을 담아두는, 운두가 높고 배가 부르며 전이 달린 오지그릇이나 질그릇.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며 대형인 것은 높이가 1m 혹은 2m에 이르기도 한다. 무늬는 대개가 소박하고 간단하며 물결 또는 화초의 무늬가 들어가기도 하고 서너 줄의 띠도 두르며 물방울모양으로 요철(凹凸)시키기도 한다. 독에는 주로 곡물, 간장이나 된장을 비롯한 조미료, 술 등을 담아둔다. 곡물이 담긴 독은 헛간이나 곳간에 두나, 조미료가 담긴 독은 집안에서도 햇볕이 잘 쪼이는 양지바른 곳에 돌로 낮은 단을 쌓아 장독대를 만들고, 그곳에 모아둔다. 장독대는 예로부터 주부들이 청결과 갈무리에 정성을 쏟았고, 집을 지키는 토지신을 모시는 정한 곳이 되기도 했다.
오지나 질그릇의 운반이 어려운 산간지대에서는 굵은 피나무의 속을 파내어 독으로 쓰는 경우도 있다. 굵은 피나무를 적당한 길이로 자른 뒤에, 양쪽에서 속을 파내어 5㎝ 두께의 원통을 만든다. 아래에는 소나무로 된 함지모양의 받침을 끼우고 그 굽에는 괭이풀을 이겨발라서 내용물이 새지 않도록 한다. 주로 겨울철의 김치를 갈무리하여 이를 김칫독이라고 부른다. 곡물이 담긴 항아리나 독은 두트레방석으로 덮는다. 이것은 짚으로 둥글고 두툼하게 짠 것으로, 한쪽에 고리를 달아 손잡이에 대신한다. 수명은 2∼3년이며, 무게는 1.5㎞ 안팎이다. 중국에서도 독은 예로부터 <옹(甕;瓮)>이라고 부르며 널리 사용되어 왔다. 옛날에는 땅에 놓고 두들기며 장단을 맞추는 악기로도 쓰였다. 도종형(倒鐘形)이 있고, 단경호(短頸壺)도 있다.
고대 그리스의 피토스는 대형의 독이었으며 영어의 <jar> <urn>도 독이었다. 다만 후자는 화장한 뼈를 담는 것을 가리키는 수가 많다. 서아시아의 유적에서는 토기 출현의 초기부터 칠무늬토기[彩紋土器]와 조제토기(粗製土器)가 같이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조제토기는 대개 큰 것이 많아 땅에 묻어 곡식을 갈무리하기도 하고 물독으로도 쓰였다. 작은 조제토기는 음식을 끓이고 익히는 데 많이 쓰였다
짚독;
곡물 따위를 보관하는 짚으로 만든 독. 짚독은 곱게 다듬질한 짚으로 꼰 새끼줄을 이중으로 날줄하여 아주 섬세하게 짠 독으로 뚜껑까지 만들어 수확한 벼를 저장하는 데 사용되었다.
박제가의 《북학의》에는 나락뒤주로 나온다. 짚독은 널리 쓰이지는 않았으나, 통풍이 잘 되고 습기가 차지 않아 곡식을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었다.
농가에서는 짚독 이외에도 짚으로 짠 생활 용구가 다양하다. 짚으로 된 용구는 우리나라에 벼가 들어온 것이 대략 기원전 2-3세기 무렵이므로, 그 이후부터 차츰 생활의 필요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측한다. 주로 짚 한 가지 재료를 이용하였으나, 때로는 삼·왕골속·모시껍질·칡껍질, 싸리껍질 따위와 함께 갖가지 무늬와 색상을 살려가며 섞어 엮기도 하였다.
삼이나 왕골속은 질길 뿐만 아니라 흰빛을 살려 이용했고, 싸리껍질·모시껍질·칡껍질은 볏짚의 노란색과 잘 조화되는 갈색을 살려 썼다. 간혹 글자를 넣을 때는 색 있는 헝겊을 쓰기도 하였다. 한편, 해안지방처럼 짚이 귀한 지역에서는 부들·자오락(짚과 거의 구별이 안될 정도이나 좀 거칠고 질긴 것)·띠·글텡이·닥나무껍질 등과 같은 재료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 유물은 뚜껑과 몸체로 구성되는데, 뚜껑은 울이 있고 윗면 중앙에 고리 손잡이가 달렸다. 몸체는 2겹이며 목이 짧아 주둥이에서 바로 어깨로 이어진듯 보인다. 어깨부분이 몸체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와있고 그 밑으로 점차 줄어드는 형태이다.
등잔대;
등잔을 걸어 놓는 대
하늬바람이 휘몰아치는 삼동의 밤은 길다. 달이 없는 밤이면 먼 하늘에 별빛도 희미하게 얼어붙어 발 밑도 가릴 수가 없다. 바람소리와 문풍지 우는 소리에 곁들여 외양간에서 여물을 삭이는 소의 풍경소리가 이따금 섞일 뿐 사방은 묵직한 어둠인데, 초가삼간의 봉창 언저리는 달무리처럼 손바닥만하게 밝았다.
소나무를 까뀌로 깎아 만든 등잔대에는 사기등잔에 명씨기름을 붓고 거기에 솜을 곱게 꼬아서 적신 심지 끝에서 작은 불꼬리가 촐랑거린다. 가장자리는 군데군데 해어졌을망정 삿자리는 깨끗이 걸레질이 되어 정갈한데, 단칸방 한 모서리에 놓인 희미한 등잔불 아래에서 할머니는 물레질에 여념이 없고 어머니는 씨아를 돌리며 무명씨를 앗기에 바쁘다.........
밤이 이슥하게 되면 그들은 한 차례 밤참을 나눈다. 밤참이라야 움에서 내온 배추 뿌리거나, 얼음이 뜬 국물이 시원스런 동치미거나, 때로는 뒷산에서 주운 도토리로 만든 묵이 고작이지만 모두 달게 먹고 첫닭이 홰를 칠 무렵이 가까워서야 두 방의 불은 조용히 꺼진다. 그때까지도 먼 초당에서는 마을 머슴들이 부르는 노랫가락이 바람결에 들려온다.
오늘날에 가장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등잔이나 호롱이나 초를 제자리에 놓으려고 장만했던 받침이나 걸이다. 등잔받침, 등잔걸이, 호롱받침, 호롱걸이, 등경, 등가, 유경, 촛대 따위로 불리는 이들의 가장 기본되는 생김새는 대나무 마디의 꼴을 한 것이다. 곧 둥글거나 네모난 바탕이 밑에 있고, 가운데 가느다란 토막 기둥에 대나무 매듭을 조각하고 그 위에 네모지거나 둥근 바탕보다는 훨씬 작은 등잔과 호롱이 얹힐 만한 받침을 만들었다. 그러자니 크게는 세 부분으로 나뉘는 셈인데, 그 길이와 너비와의 비례라든지 전체 모양에 무리가 없어 조화가 잘 이루어졌다.
죽절등잔이나 호롱받침 말고도 바탕을 거북으로 삼고, 기둥은 학이 한 다리를 깃에 감추고 서 있는 모양으로 새겨서 그 머리 위에 받침을 놓은 정교한 조각품으로 된 것이라든지, 바탕은 넓은 연잎을 조각하고 기둥은 연꽃대로 되어 자잘한 줄기와 가는 가시까지를 세밀하게 새겨, 받침은 막 피어날 듯한 연꽃으로 가늠한 것에서 옛 장인의 빼어난 솜씨가 보이는 것도 있고, 나무토막을 아무렇게나 깎아서 만든 우악스럽고 힘찬 것도 있으며, 선비가 소일 삼아 장도로 온갖 기하학적인 무늬를 정성들여 아로새긴 것도 있다.
이들의 재료는 오지, 사기, 나무, 벽돌, 놋쇠, 무쇠, 구리, 옥돌같은 갖가지가 있고, 형태가 저마다 다르며, 크기에서도 한 길이 넘는 것에서부터 한 뼘도 차지 않는 것까지 다양하며, 솜씨는 더더구나 천층만층이다.
이와같은 모든 것에 아랑곳없이 실용을 위한 기능의 철저한 추구는 형태의 아름다움을 어김없는 것으로 하였고, 이에 곁들여 하루도 없어서는 안되었을 생활 속의 필요성은 그것을 곱디고운 생활의 때와 애정으로 겹겹이 감싸서 아름답기가 한결같게 했다.
슴벅이는 등잔이나 호롱불 아래가 아니면, 촛대 위에서 눈물을 흘리며 타들어가던 촛불의 그늘에서 한집안 식구끼리, 정다운 이웃끼리 오손도손한 정겨운 모습이 지난날의 삶이었다. 그랬던 것이 석유에서 전기로, 백열등에서 형광등과 수은등으로, 그것도 모자라서 오색이 현란한 네온싸인의 독버섯이 대낮이 무색하게 우리의 밤을 밝혀도, 저마다의 가슴에는 오손도손함보다는 도리어 차디차고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듯하다.
재떨이 잠죽;
담뱃재를 떨어 놓는 그릇(담뱃재떨이)
호패;
조선시대 16세 이상의 남자에게 발급한 패. 오늘날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것으로 호구 파악, 유민 방지, 역(役)의 조달, 신분 질서의 확립, 향촌의 안정 유지 등을 통한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그 유래는 고려말 1391년(공양왕 3)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계청에 따라 군정(軍丁)에게 이를 패용하게 한데서 시작되었다. 이는 원나라의 제도를 참작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398년(태조 7) 이래 이의 실시에 대한 논의가 꾸준히 제기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1413년(태종 13) 9월 전인녕부윤(前仁寧府尹) 황사후(黃士厚)의 건의를 받아들여 먼저 호패사목(號牌事目)을 작성하고, 이에 따라 실시하였다. 호패제는 그 뒤 지속적으로 실시되지 못하고 여러 차례 중단되었다.
그 치폐과정(置廢過程)을 보면 1416년 6월 폐지, 1459년(세조 5) 2월 실시, 1469년(성종 즉위년) 12월 폐지, 1610년(광해군 2) 9월 실시, 1612년 7월 폐지, 1626년(인조 4) 1월 실시, 1627년 1월 폐지, 1675년(숙종 1) 11월 실시 등의 변천을 겪으면서 고종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와 같이 호패제 실시가 때때로 중단되었던 것은 이의 실시에도 불구하고 유망(流亡)이 감소되지 않았고, 양인(良人)들은 호패를 받으면 과중한 각종 국역(國役)을 부담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백방으로 호패 받기를 기피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세력가에 위탁함으로써 양인수가 오히려 감소되는 현상을 보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위조패(僞造牌)·무패(無牌)·불개패(不改牌)·불각패(不刻牌)·실패(失牌)·환패(換牌) 등 호패법을 위반하는 자에 대한 치죄(治罪)로 형옥(刑獄)이 번거롭고, 이에 따라 민심이 소란한 점 등을 들어 국가에 무익하다는 호패폐지론이 제기되었던 때문이었다. 이와는 달리 도적 및 백성의 유리(流離)를 방지할 수 있고 모든 백성의 신분과 직임을 밝힐 수 있으며, 호구를 장악해 군정을 확보할 수 있어 국가에 유익하므로 복구해야 한다는 호패실시론자들의 강력한 주장이 받아들여져 다시 실시되고는 하였던 것이다.
한편, 호패제의 일환으로 승형(僧形)을 가장한 유역인(有役人), 공사천(公私賤)의 피역(避役) 방지, 도첩(度牒)이 없는 승려에게 일정한 국역을 마친 뒤 도첩과 호패를 발급해 주려는 세조의 호불책(護佛策)으로 1461년부터 승인호패제(僧人號牌制)가 실시되었다. 그리하여 1469년 12월 폐지, 1536년(중종 31) 8월 실시, 1538년 12월 폐지, 1547년(명종 2) 2월 실시, 1550년 12월 폐지, 1610년 실시, 1612년 폐지, 1626년 1월 실시, 1627년 1월 폐지 등의 변천을 겪으면서 운영되었다.
호패는 왕족·관인(官人)으로부터 양인·노비에 이르기까지 16세 이상의 모든 남자가 패용하였다. 그런데 그 재료, 기재 내용, 각인(刻印)의 위치, 주관 관서, 발급 순서, 호패법 위반자에 대한 처벌 규정 등은 신분이나 실시 시기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었다. 호패제가 처음 실시된 1413년부터 지속적으로 실시되기 시작한 1675년까지의 260여년 사이에 불과 18년간 실시되었다.
또한, 그나마 ≪세종실록≫에 호패를 받은 사람은 전체인구의 1, 2할이라 하고, ≪성종실록≫에는 호패를 받은 사람 가운데 실제로 국역을 담당한 양인은 1, 2할에 불과했다고 기록하고 있어 별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구유;
마소나 돼지에게 먹이를 담아 주는 그릇.
곳에 따라 구융(경기·충청)·구수(전남)·구시(경남)·궁이(강원) 등으로 불린다.
긴 통나무를 나무의 생김대로 길고 우묵하게 파낸 것으로 양 마구리에 귀를 달아서 외양간의 기둥 사이에 고정시킨다.
강원도 산간지대에서는 지름 50cm, 길이 4∼5m에 이르는 큰 통나무로 만들어 서너 마리의 소를 함께 기른다.
소가 들어서는 쪽은 구유의 벽을 조금 높게 만들고 비슷한 간격으로 서너 개의 구멍을 뚫어서 소의 고삐을 꿰어둔다.
2010-3-4
청화백자(靑華白磁);
초기의 이름은 고청화(古靑華)이며, 청화백사기(靑華白沙器) 또는 청화백자 등으로도 불린다.
일반적으로 청화백자는 중국의 경우 원(元)나라 중기에 시작, 징더전[景德鎭] 가마에서 대량생산되어 유럽으로 수출되었으며, 명(明)나라 선덕연간(宣德年間:1426~1435) 및 성화연간(成化年間:1465~1487)에는 우수한 제품을 생산하였고, 이후 청(淸)나라 때까지 자기의 주류를 이루었다.
한국에 전래된 것은 14세기 말이며, 본격적으로 생산된 것은 15세기 중엽 이후이다.
이러한 발전과정은 시문양식(施文樣式)에서도 나타난다.
초기의 주요 무늬는 조선시대의 회화적인 무늬로 하고, 종속적인 무늬, 즉 접시 테두리와 항아리의 아가리 부분 및 어깨 부분의 무늬는 연꽃잎 무늬 등을 시문하다가 15세기 후반에 이르면 이러한 종속적인 무늬가 완전히 소멸되고 회화적인 무늬만이 남는다.
청화 안료는 사찰이나 궁궐 등의 건축물 단청에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안료에 따라 명칭이나 종류가 다양하다.
도자기에 사용되는 청화 안료는 페르시아산인 회회청(回回靑)과 중국산인 석청(石靑)이 있으나 조선은 주로 회회청을 중국에서 수입하여 사용하였다. 이러한 안료는 배합의 비율과 불의 온도, 태토와 유약의 성질 등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에 백자의 결과도 달라지게 된다.
경대
거울과 거울을 지탱하는 지지대에 서랍을 갖추어서 화장도구 등을 넣을 수 있게 만든 것과, 거울에 틀만 붙여서 만든 것이 있다.
대부분 동양에서는 좌식을, 서양에서는 의자식을 썼다.
일반적으로 경대라고 하면 좌식의 것을 말하는 경우가 많고, 의자식 경대는 화장탁자·드레싱 테이블이라고 하여 구별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정리용 장롱 위에 거울을 붙인 형식을 말한다.
유럽에서는 18세기 초에 3개의 서랍이 달린 박스 스탠드에 2개의 버팀대로 거울을 붙인 경대가 유행하였다.
이 형식을 토일릿 미러라고 한다. 프랑스에는 경대에 조각을 한 푸드뢰즈라는 상류층 부인용 경대가 있다.
영국의 경대는 스탠드에 회전 거울을 붙인 형식으로, 셰이빙 스탠드라 하였는데 미국에서도 크게 유행하였다.
18세기에 서양에서는, 거울의 제조 기술이 발달하여 크고 작은 거울을 쉽게 제조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조립식과 여행용 경대도 출현하였다.
오늘날에는 삼면경대(정면과 좌우면에서 비치는 거울)가 많이 보급되고 있고, 장롱의 천판(天板)이나 탁자의 뚜껑 이면(裏面) 등에 거울을 달아서 필요에 따라 열어 수직으로 세우면 경대의 기능을 하는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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