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증거 하는 요한복음 본서의 본문은 쉬운 이해를 위하여 풀어쓴 것에 불과합니다. 가능한 요한복음 본문은 한글 개역 성경의 원문으로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한글 개역 이외의 성경들에는 메시지 전달용 용어들이 많이 변형되어 있기 때문에 본문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성령은 곧 지혜입니다.
1 太(클 태)初(처음 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 태초에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며 이 말씀은 하나님이십니다.
2 그가 太(클 태)初(처음 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2 그 말씀은 태초에도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며
3 萬(일만 만)物(만물 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3 만물은 그로, 말씀으로 지어졌고 지어진 모든 것이 말씀 없이 된 것은 없습니다.
# 말씀과 하나님을 분리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잠언에 의인법을 써서 표현되고 있는 지혜(智:슬기 지, 慧:슬기로울 혜)에 대한 말씀입니다. 다음의 내용을 보면 태초에 계신 ‘말씀’과 ‘지혜’의 격이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잠언 8장] 22 여호와께서 그 造(지을 조)化(될 화)의 始(처음 시)作(지을 작) 곧 太(클 태)初(처음 초)에 일하시기 前(앞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23 萬(일만 만)歲(해 세)前(앞 전)부터, 上(위 상)古(옛 고)부터, 땅이 생기기 前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24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前(앞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25 山(뫼 산)이 세우심을 입기 前(앞 전)에, 언덕이 생기기 前에 내가 이미 났으니 26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世(대 세)上(위 상) 塵(티끌 진)土(흙 토)의 根(뿌리 근)源(근원 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27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穹(하늘 궁)蒼(푸를 창)으로 海(바다 해)面(낯 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28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堅(굳을 견)固(굳을 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29 바다의 限(한정 한)界(지경 계)를 定(정할 정)하여 물로 命(목숨 명)令(우두머리 령)을 거스리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基(터 기)礎(주춧돌 초)를 定하실 때에 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創(만들 창)造(지을 조)者(사람 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恒(항상 항)常(항상 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31 사람이 居(있을 거)處(살 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人(사람 인)子(아들 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
다음 역시 지혜에 관한 잠언의 말씀입니다.
[잠언 9장] 1 智(슬기 지)慧(슬기로울 혜)가 그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 2 짐승을 잡으며 葡(포도 포)萄(포도 도)酒(술 주)를 混(섞을 혼)合(합할 합)하여 床(상 상)을 갖추고 3 그 女(계집 여)종을 보내어 城(고개, 재 성)中(가운데 중) 높은 곳에서 불러 이르기를 4 무릇{헤아려지기를} 어리석은 者(사람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智(슬기 지)慧(슬기로울 혜) 없는 者에게 이르기를 5 너는 와서 내 食(밥 식)物(만물 물)을 먹으며 내 混(섞을 혼)合(합할 합)한 葡(포도 포)萄(포도 도)酒(술 주)를 마시고 6 어리석음을 버리고 生(날 생)命(목숨 명)을 얻으라 明(밝을 명)哲(밝을 철)의 길을 行(갈 행)하라 하느니라 7 倨(거만할 거)慢(거만할 만)한 者(사람 자)를 懲(징계할 징)戒(경계할 계)하는 者는 도리어 凌(업신여길 능)辱(욕될 욕)을 받고 惡(악할 악)人(사람 인)을 責(꾸짖을 책)望(바랄 망)하는 者는 도리어 欠(하품 흠)을 잡히느니라 8 倨(거만할 거)慢(거만할 만)한 者(사람 자)를 責(꾸짖을 책)望(바랄 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智(슬기 지)慧(슬기로울 혜) 있는 者를 責望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9 智(슬기 지)慧(슬기로울 혜) 있는 者(사람 자)에게 敎(가르침 교)訓(가르칠 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智慧로와 질 것이요 義(옳을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學(배울 학)識(알 식)이 더하리라 10 여호와를 敬(공경할 경)畏(두려워할 외)하는 것이 智(슬기 지)慧(슬기로울 혜)의 根(뿌리 근)本(뿌리, 밑 본)이요 거룩하신 者(사람 자)를 아는 것이 明(밝을 명)哲(밝을 철)이니라 11 나 智(슬기 지)慧(슬기로울 혜)로 말미암아 네 날이 많아질 것이요 네 生(날 생)命(목숨 명)의 해가 더하리라 12 네가 萬(일만 만)一(일) 智(슬기 지)慧(슬기로울 혜)로우면 그 智慧가 네게 有(있을 유)益(더할 익)할 것이나 네가 萬一 倨(거만할 거)慢(거만할 만)하면 너 홀로 害(해칠 해)를 當(대할 당)하리라
# 우리는 보통 인생들이 가르쳐준 대로 삼위일체라는 말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같이 성부, 성자, 성령 말고 지혜라는 하나님도 있고, 여호와라는 하나님도 있습니다. 우리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 ‘지혜’라는 위격의 하나님은 왜 빠져 있는 것일까요? 어떻게 된 것일까요?
우선 이것을 바르게 정리하고 지나가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1. 인생들이 “성부”라고 표현하는 아버지 하나님은 ‘절대자’이신 창세기 1장의 하나님입니다.
2. 사람에게 육, 혼, 영이 있는 것과 같이 절대자이신 하나님께도 혼, 즉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이사야 55:8)” 하는 말씀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도 생각하는 중에 ‘아이디어’라는 것을 만들어냅니다. 그처럼 어떤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아이디어가 곧 “지혜”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시고 위의 지혜에 관한 말씀을 읽으시면 과연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3. 하나님께도 마음이 있습니다. 성경은 마음을 영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육은 무익하니 살리는 것은 영이라고 하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곧 “성령”입니다.
4.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마음으로 인생과 함께하시는 상태를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호세아 12장] 5 저는 萬(일만 만)軍(군사 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記(기록할 기)念(생각 념) 稱(일컬을 칭)號(부르짖을 호)니라
5. 그다음, 세상은 ‘말씀’으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창조를 하실 때 “하나님이 가라사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라사대’란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곧 마음과 생각으로 만들어진 것을 ‘실행’에 옮겼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실행은 ‘소리’로 나타났습니다. 인생이 인식할 수 있는 소리가 곧 ‘말씀’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소리, 곧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인생들이 사는 세상으로 내려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성령’, 즉 하나님의 마음을 근간으로 하여 잉태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을 일컫는 표현에는 5위가 있습니다. 3위 일체라는 표현도 맞지만, 그 표현에는 이렇게 2위가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는 이름인 여호와와 성령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왜 신약에는 성령이라고만 표현하고 있고 구약에는 여호와라고만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정작 시편에는 여호와라는 표현만 있습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인생이 세상, 즉 악과 싸워 이겨야 하는 상태에서 인생을 도와주실 때에 인생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성령이란 마음의 법안에서 인생의 마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구약시대는 행위의 율법이 실행되고 있었으므로, 즉 마음을 인도하시는 법이 없었으므로 행위적 결과를 선하게 내는 데에만 함께 하셨기 때문에 여호와라는 이름만 사용되고 있는 것이며, 신약시대에는 행위율법보다 상위법인 마음의 율법이 실행되고 있는 때이므로 성령만 언급된 것입니다. 결국, 더 이상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그 이름의 의미가 ‘성령’ 안에 포함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약시대에는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전쟁터를 다니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군사력을 아들에게 필요한 전력만큼 그때그때 조달해 주었고 그 병기가 “군사력- 만군의 주”라는 이름이며, 신약시대에는 병기를 가지고 따라다니시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혼자 다니게 하면서 그 아들을 믿고 군사력의 지휘권을 아들 손에 들려준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택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하나님의 마음’이 곧 “성령”이고, 하나님이 그 아들을 믿어주는 믿음의 결과, 곧 전쟁하는 데 필요한 ‘병기’가 곧 “군사력-만군의 주”라고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결국, 성령의 법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과 함께 여호와라는 병기도 들고 다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마음의 법인 성령의 법은 시편에 ‘두 날 가진 칼’이라고 표현이 됩니다. 한 날은 하나님이 규정하시는 선과 악을 구분하는 ‘성령의 법’을 전했을 때 그 전함을 받은 자는 자기를 부인하는 죽음을 인생 스스로 택하게 하고, 그 과정에서 ‘여호와’는 악을 이기도록 돕는 역할을 하시며, 나머지 한 날은 흙을 먹어야 하는 사단이 성령의 법을 거부한 자를 흙으로 돌아가게 할 때 쓰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본 요한복음은 아들을 얻으시려고 창조를 단행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방법, 즉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 구원의 길이 예수님께서 완성하시는 성령의 법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며, 예수님께서 ‘내가 성령의 법을 완성하기 위하여 왔다. 내가 먼저 성령의 법을 따라가는 시범을 보일 것이니 너희도 내가 죽어 완성하는 성령의 법을 따라오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독자는 성령의 법이라는 말은 들어왔지만, 선과 악을 구분하는 성령의 법령, 즉 마음의 법령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필자는 본 요한복음 내용으로 그 법령이 ‘잠언’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입니다. 일단 앞에서 보신 것과 같이 잠언의 ‘지혜’는 인생의 영이 살 수 있는 방법이 확실하다는 증거를 성경 내용으로 보여 드렸습니다.
잠언에는 위와 같은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창세기 3장] 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善(착할 선)惡(악할 악)을 아는 일에 우리 中(가운데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生(날 생)命(목숨 명)나무 實(열매 실)果(실과 과)도 따먹고 永(길 영)生(날 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세기 3장]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기쁨> 동산 東(동녘 동)便(편할 편)에 그룹<영이 산 자>들과 두루 도는 火(불 화)焰(불꽃 염)劍(칼 검)을 두어 生(날 생)命(목숨 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잠언 3장] 18 智(슬기 지)慧(슬기로울 혜)는 그 얻은 者(사람 자)에게 生(날 생)命(목숨 명)나무라 智慧를 가진 者는 福(제사에 쓰는 고기와 술, 복 복)되도다
[요한계시록 2장] 7 귀 있는 者(사람 자)는 聖(성스러울 성)靈(신령 령)이 敎(가르침 교)會(모일 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樂( 즐길 락, 낙)園(동산 원)에 있는 生(날 생)命(목숨 명)나무의 果(실과 과)實(열매 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9 萬(일만 만)一(일) 누구든지 이 冊(계획, 책 책)의 豫(미리 예)言(말씀 언)의 말씀에서 除(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冊에 記(기록할 기)錄(기록할 록)된 生(날 생)命(목숨 명)나무와 및 거룩한 城(고개, 재 성)에 叅(간여할 참)與(줄 여)함을 除하여 버리시리라
4 그 안에 生(날 생)命(목숨 명)이 있었으니 이 生命은 사람들의 빛이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습니다. 이 생명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빛입니다.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5 빛이 어둠에 비취었으나 어둠에 있는 인생들이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 잠언이 지혜의 말씀이며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법이라는 사실을 아무리 전해도 어둠에 거하는 사람들은 눈으로 읽고 머리로 이해해도 마음으로는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잠언 1장 - 8장을 읽어보시면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주의 은혜>이라
6 예수님에 앞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습니다.
7 저가 證(증거 증)據(의거할 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對(대할 대)하여 證據하고 모든 사람으로 自(스스로 자)己(자기 기)를 因(인할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7 그는 빛에 대하여 증거 하여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가 전하는 말로 인하여 빛이 되는 말씀을 믿게 하려 하였습니다.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對(대할 대)하여 證(증거 증)據(의거할 거)하러 온 者(사람 자)라
8 그는 그 빛 자체는 아니며 그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 온 자였습니다.
9 참 빛 곧 世(대 세)上(위 상)에 와서 各(각각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는데
10 그가 世(대 세)上(위 상)에 계셨으며 世上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世上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0 그는 세상에 계셨습니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나 세상은 그를 알지 못 하였습니다.
# 빛이란 구원의 길을 보여주는 말씀이며, 그 말씀이 곧 지혜임을 앞선 잠언의 말씀으로 보았고,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예수님으로 나타나신 것임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 이렇게 확인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알되 그 전신인 지혜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혜는 분명하게 성경에 이미 있었으나 말씀을 가르치는 관장자들의 눈이 어두워 그 빛을 알지 못했었던 것뿐입니다.
11 自(스스로 자)己(자기 기) 땅에 오매 自己 百(일백 백)姓(성, 겨레 성)이 迎(맞이할 영)接(사귈 접)지 아니하였으나
11 그가 자기 땅에 이미 와 있었으나 자기 백성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2 迎(맞이할 영)接(사귈 접)하는 者(사람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者들에게는 하나님의 子(아들 자)女(계집 녀)가 되는 權(권세 권)勢(기세 세)를 주셨으니
12 영접하는 자, 곧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13 이는 血(피 혈)統(큰 줄기 통)으로나 肉(고기 육)情(뜻 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者(사람 자)들이니라
13 그 권세를 가진 자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난 자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 인하여 난 자들입니다.
#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낳아진 자들만이 성령의 법, 잠언의 말씀을 마음으로 믿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과연 믿는 자인가, 안 믿는 자인가를 어떻게 분별하면 될까요? 이러한 말씀을 보고, 성경으로 직접 확인하고, 무엇을 몰랐고, 무엇을 잘못 알고 있었는지를 헤아려 논리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이성으로 성경의 말씀을 이해한 뒤 그 말씀을 믿고 따라간다면 그것이 자기를 하나님께로부터 낳아진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인생이 생각할 부분이 아닙니다. 인생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이시며, 성경은 장자가 아닌 차자나 서자와 같은 ‘주변인’의 역사로 이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장자의 축복권을 가지지 못하고 태어난 상태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그 구원을 받아 내려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는 자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14 말씀이 肉(고기 육)身(몸 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居(있을 거)하시매 우리가 그 榮(꽃 영)光(빛 광)을 보니 아버지의 獨(홀로 독)生(날 생)子(아들 자)의 榮光이요 恩(은혜 은)惠(은혜 혜)와 眞(참 진)理(다스릴 리)가 充(찰 충)滿(찰 만)하더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므로 우리는 그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 영광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15 요한<주의 은혜>이 그에 對(대할 대)하여 證(증거 증)據(의거할 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前(앞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외쳐 말하였습니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시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16 우리가 다 그의 充(찰 충)滿(찰 만)한 데서 받으니 恩(은혜 은)惠(은혜 혜)위에 恩惠러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영광 가운데에서 그 빛을 받으니 이것이 은혜 위에 은혜가 더해진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17 律(법 율)法(법 법)은 모세<苦河(세상)에서 건져내다>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恩(은혜 은)惠(은혜 혜)와 眞(참 진)理(다스릴 리)는 예수<여호와는 구원이시다> 그리스도<기름부음>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신 것이며,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전도서 12장] 10 傳(전할 전)道(이치, 길 도)者(사람 자)가 힘써 아름다운 말을 求(구할 구)하였나니 기록한 것은 正(바를 정)直(곧을 직)하여 眞(참 진)理(다스릴 리)의 말씀이니라 11 智(슬기 지)慧(슬기로울 혜)者(사람 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 같고 會(모일 회)衆(무리 중)의 스승의 말씀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牧(기를, 칠 목)者(사람 자)의 주신 바니라
18 本(뿌리, 밑 본)來(올 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獨(홀로 독)生(날 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자기를 인생들에게 나타내신 것입니다.”
19 유대<찬송하다>人(사람 인)들이 예루살렘<안식처>에서 祭(제사 제)司(맡을 사)長(길 장)들과 레위<결합을 돕는 자>人(사람 인)들을 요한<주의 은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주의 은혜>의 證(증거 증)據(의거할 거)가 이러하니라
19 요한이 이렇게 전하고 다니자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 묻게 하였습니다. “네가 누구냐?”
20 요한<주의 은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기름부음>가 아니라 한대
20 요한은 자기가 누구인 것을 드러내어 말하였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21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나의 하나님은 여호와>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先(먼저 선)知(알 지)者(사람 자)냐 對(대할 대)答(대답할 답)하되 아니라
21 “그러면 네가 엘리야냐?” 또 “네가 그 선지자냐?” 하고도 물었으나 모두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對(대할 대)答(대답할 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對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2 “그러면 넌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할 말이 있어야 하니 넌 너 자신을 스스로 뭐라고 생각하는지를 우리에게 말하라.”
23 가로되 나는 先(먼저 선)知(알 지)者(사람 자) 이사야<여호와가 救(건질 구)贖(속바칠 속)하셨다>의 말과 같이 主(주인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曠(빌 광)野(들 야)에서 외치는 者(사람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3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보내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다.”라고 하니
24 저희는 바리새<분리된 자>人(사람 인)들에게서 보낸 者(사람 자)라
24 이번에는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들이 물었습니다.
25 또 물어 가로되 네가 萬(일만 만)一(일) 그리스도<기름부음>도 아니요 엘리야<나의 하나님은 여호와>도 아니요 그 先(먼저 선)知(알 지)者(사람 자)도 아닐찐대 어찌하여 洗(씻을 세)禮(예도 례)를 주느냐
25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선지자도 아니라면 어째서 정결하게 하는 의식인 세례를 주는 것인가?”
26 요한<주의 은혜>이 對(대할 대)答(대답할 답)하되 나는 물로 洗(씻을 세)禮(예도 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6 요한이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줍니다. 그러나 당신들 가운데에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고
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발에 신을 매는 끈-일의 시작을 위한 준비) 풀기도 勘(헤아릴 감)當(대할 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27 그는 내 뒤에 오시는 그분입니다. 나는 그분의 신들메를 푸는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분의 오심을 알리는 사람일 뿐입니다.”
28 이 일은 요한<주의 은혜>의 洗(씻을 세)禮(예도 례) 주던 곳 요단<흐르는 것> 江(강 강) 건너便(편할 편) 베다니<가난한 자의 집>에서 된 일이니라
28 이 일은 요한이 세례를 주던 곳인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29 이튿날 요한<주의 은혜>이 예수<여호와는 구원이시다>께서 自(스스로 자)己(자기 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世(대 세)上(위 상) 罪(허물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羊(양 양)이로다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 인생들의 어린 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양은 죄를 씻는 제물이며,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죄를 씻어 내기 위해 하나님이 제물로 삼으신 어린 양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代: 대신할 대, 贖: 속바칠 속)하신 것은 맞으나 우리 마음에 있는 죄를 발생시키는 악을 향한 마음까지 지우신 것은 아닙니다.
자기의 악을 대신 씻으신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십자가를 믿으니 나는 구원되었다.' 인 것입니다. 만일 그것으로만 구원을 받는 것이라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는 가르침을 주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공관복음서 전체의 주제가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인데 그것은 빼놓고 단지 공의 실현의 과정인 ‘구원의 길을 여심’만 보고 “나는 구원 받았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제물입니다.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생을 하나님이 만드셨고, 그 인생에게 “정녕 죽으리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하신 것을 돌이켜, 죽지 않고 사는 길을 여시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죄짓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이 ‘결자’이므로, 역시 하나님이 ‘해지’하시는 것이 곧 공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달림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창조로 발생한 죄를 지우기 위하여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삼아지신 것이며, 우리에게 있어서는 죄 없는 거룩한 사람이 되는 방법의 본을 보이신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라.” 하신 것입니다.
성령의 법을 완성하시는 과정에서 예수님이 독단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을 가셨느냐 하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함께 하셨기에 그것이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 됩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지 않으므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게 하려면 당시로써는 표적(表: 겉 표, 迹: 자취 적)을 보여야만 했는데, 그 표적은 예수님이 단독으로 행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언제나 예수님의 행하심에 함께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예수님의 따라오라는 조건에 맞추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만 합니다. 그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완성하신 성령의 법안에서 활동하시는 보혜사(保: 지킬 보, 惠: 은혜 혜, 師: 스승 사)인 성령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의 말씀인 성령의 법을 주셨고 지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잠언 7장] 1 내 아들아 내 말을 지키며 내 命(목숨 명)令(우두머리 령)을 네게 看(볼 간)直(곧을 직)하라 2 내 命(목숨 명)令(우두머리 령)을 지켜서 살며 내 法(법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 그리스도께서 완전케 하신 마음의 율법이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법입니다. 그 법이 있는 곳이 곧 성전입니다. 잠언 외에 어미의 법, 지혜의 법을 말하는 책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주 “지혜를 구하라 혹은 성령이 가르치실 것이다.”라고 본 요한복음에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영접(迎: 맞이할 영, 接: 사귈 접)했는가를 스스로 생각할 때 우리는 보통 자기의 감성적 느낌으로 영접의 가부를 말합니다. 하지만 본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감성에 의존하여 영접의 여부를 말했던 것은 이처럼 성령의 법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법을 몰랐던 이유는 예수님의 당시에 모세율법 관장자들이 모세의 율법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율법을 장로의 유전(遺: 끼칠 유, 傳: 전할 전)으로 가리고 그 유전을 지키게 한 것과 경우가 같습니다.
다시 말해, 율법을 하나님을 향하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자기들의 유익을 위한 도구로 사용을 하며, 자기들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사는 방법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그 의미를 변질시켰고, 또 하나님의 법보다 장로의 유전이라는 것을 만들고 구원의 법을 사람들에게 가렸기 때문입니다. 이전 공의 관장자들의 마음이 그때의 상황과 같은 상태가 되어 성령의 법이라는 존재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를 주창하는 모든 교파 안에 교리라는 것이 있고, 그 교리가 모두 성경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모두 자기들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법인 성령의 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법인 잠언이 성경에 없습니까? 아닙니다. 있습니다. 그러면 왜 교리 안에는 없을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의 법이 비움과 낮아짐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하게 되면 조직을 확장할 수도 없고, 세력 확장을 시도할 수도 없습니다. 채우는 자가 비우라고 가르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법인 잠언의 모든 말씀을 마치 인생들의 윤리를 말하고 있는 책인 양 재해석하여 덮어버리고, 또 하나님의 도가 나타나 있는 전도서를 인생들이 철학에서 다루는 허무주의(虛: 빌 허, 無: 없을 무, 主: 주인 주, 義: 옳을 의)를 말하고 있는 책인 양 변질을 시켰던 것입니다.
법이 없으면 성전이신 그리스도의 몸도 없고, 법이 이미 있다면 교리라는 것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있는데 어째서 교회헌법이 또 필요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헌법이 교파(敎: 가르칠 교, 派: (물)갈래 파)마다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이 어느 교파에도 없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만든 장로의 유전이 모세의 율법을 재해석하여 관장자들의 유익을 추구하려 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지난 세대가 성령의 법을 덮고 각각 자기들의 유익을 따라 교리라는 것을 만든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관장하는 자들을 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에게 고난(苦: 쓸 고, 難: 어려울 난)을 받으며 성령의 법을 완성하는 길을 가시는 것과 오늘날 하나님이 공의 관장자들을 폐하시고 성령의 법을 다시 드러내시는 것은 동일한 하나님의 섭리(攝: 다스릴/잡을 섭, 理: 다스릴 리)입니다.
당시에는 예수님께서 그 길을 가셨고, 오늘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 된 각 사람이 예수님이 가신 그 길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원리상으로 보면 예수님은 공의 실현을 위해서, 우리는 그 실현된 공의(公: 공변할 공, 義: 옳을 의)를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나는 ‘나의 양’으로 동일하게 나를 산 제물로 삼아 산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세상에 만들어 놓으신 죄의 근원을 씻어내기 위해 오신 것이지 당신의 죄를 씻기 위해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죄는 당신이 씻되 그 방법의 본을 예수님이 보이신 것이므로 우리는 그 본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 말대로 따른다는 것이지 “믿습니다.” 하고는 안 따르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아는 것’입니다.
그 길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이 도우신 것과 같이 우리는 성령의 가르침을 도움받아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 그 길을 갈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성령의 가르침이 없이 그 길을 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세상 어디에도 성령의 법이 없으므로 우리가 구원을 받을 길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 사라진 것을 다시 이렇게 드러내실 때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이전 공의 관장자들의 그릇됨입니다. 기독교 서점에 있는 그 모든 성령의 법이 빠진 책들이 모두 그릇된 것으로 드러나고, 이미 조직과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그 모든 것이 일순간에 사라지게 될 때, 그 사라지게 한 사람을 핍박(逼: 닥칠 핍, 迫: 궁할 박)하고 십자가에 달아 죽이고 싶은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이전 공의 관장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핍박을 당하면서 가는 길이 십자가의 길이 되는 것이고, 예수님과 동일하게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와 같은 핍박을 당하며 가야 하는 상황이 이제라야 가능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가르치신 대로만 살았어도 그 사람은 예수님이 길을 가신 것과 같은 길을 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서에서 이미 “세상에 속하는 것은 악한 것이다.”라고 하셨으니 예수님의 말씀을 믿은 사람은 그것을 전했을 것인데, 아무도 세상에 속한 것이 악하다고 하지 않았으므로 아무도 핍박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전도란 그렇게 세상에 속한 것을 비우라, 거룩해지라, 깨끗해지라고 말하는 것인데, 세상에서 잘 살고 싶어 하면서 잘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고, 자기의 의로 행하는 윤리적 선이 마치 하나님의 선인 양 행하고 예수를 따랐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대학에 들어가고 사업에 성공하고 하는 것들이 다 무엇입니까. 높음을 추구하는 것이며 채움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에 속한 것이므로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그것을 부러워하고 칭찬도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칭찬하는 삶이 어찌 하나님께 속한 삶이겠습니까.
세상과 하나님의 방향이 반대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자기 유익을 따라, 부처 앞에서 삼천 배 하면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와 같은 동질의 마음으로 새벽에, 또 밤샘을 하며 자기의 유익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로 했던 사람이라면 성령의 법을 몰랐어도 예수님과 요한과 스데반 집사와 같은 길을 갔을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때에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한 상황이 되었었고, 오늘날은 그보다 더 심해져 있는 상태입니다. 아예 하나도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본 요한복음 전체가 성령의 법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30 내가 前(앞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30 내가 여러분에게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었습니다. 그가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시기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분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洗(씻을 세)禮(예도 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하나님이 상대해 주신 자>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었습니다.
# ‘이스라엘에게’란 하나님이 축복을 주시기로 한 야곱, 하나님의 축복을 갈망하는 야곱 같은 이들을 말하며, 그들이 갈망하는 축복이란 거룩함에 나아감입니다. 세상에 속한 것을 채우고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에 속한 것을 비워내고 예수님과 같이 세상이 악하다고 증거하며, 그 증거를 들었으나 받지 않고 도리어 자기들이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전하는 자를 핍박하는 그것을 자기 십자가로 지고 가는 자들이 곧 이스라엘입니다.
지금 세상은 완전히 사단에게 사로잡혀 높음과 채움을 추구하며 살아가므로 이제 말씀을 받는 사람은 그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여건이 충분하게 마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무 곳에든지, 누구에게든지 비움과 낮아짐을 가르치는 성령의 법을 전해도 그들은 내게 나의 십자가를 지워줄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렇게 내가 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워주는 것입니다.
32 요한<주의 은혜>이 또 證(증거 증)據(의거할 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聖(성스러울 성)靈(신령 령, 영)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2 요한이 또 말했습니다. “내가 보니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洗(씻을 세)禮(예도 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聖(성스러울 성)靈(신령 령, 영)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聖靈으로 洗禮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분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분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證(증거 증)據(의거할 거)하였노라 하니라
34 내가 그 지시대로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35 또 이튿날 요한<주의 은혜>이 自(스스로 자)己(자기 기) 弟(아우 제)子(아들 자) 中(가운데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5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있는 중에
36 예수<여호와는 구원이시다>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羊(양 양)이로다
36 예수님이 다니시는 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 역시 하나님의 어린 양이지 인생의 어린 양이 아닙니다.
37 두 弟(아우 제)子(아들 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여호와는 구원이시다>를 좇거늘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38 예수<여호와는 구원이시다>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求(구할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나의 주인>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랍비<나의 주인>는 飜(뒤칠 번)譯(통변할 역)하면 先(먼저 선)生(날 생)이라)
38 예수께서 자기를 따라오는 자들을 보시고 그들에게 “당신들은 내게 무엇을 원합니까?”라고 물으시니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랍비여, 거처가 어디이십니까?”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입니다.)
39 예수<여호와는 구원이시다>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 함께 居(있을 거)하니 때가 第(차례 제) 十(십) 時(때 시)쯤 되었더라
39 그러자 예수께서 따라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가서 예수님이 계신 곳을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 그때가 제 십 시쯤 되는 때였습니다.
# 오늘날은 성령의 법이 있는 곳이 됩니다. 사람이 아니라 법이 있는 곳이 곧 성전이므로 성령의 법이 있는 곳이 성령이 머무르시는 곳입니다. 잠언이 성령의 법임을 말하는 곳으로 가면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여기에도 저기에도 없고, 성령의 법을 마음으로 받는 이의 마음속에 거하시는 것이며, 또한 성령의 법안에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게 될 때 자기 자신이 곧 자기가 살아가는 환경 안에서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있다고 해도 저기에 있다고 해도 믿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스스로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어디로 갑니까? 사람 앞으로 갑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으로 가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법안에 들어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당신이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 자, 기름 부음 받은 자인 그리스도가 되어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의 법의 가르침을 깨달으며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갈 때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 39절에 ‘때’를 나타내는 말이 있는데 이 설명은 뒤로 미루겠습니다. 성경의 숫자 의미를 설명하는 글이 뒤편에 있습니다.
40 요한<주의 은혜>의 말을 듣고 예수<여호와는 구원이시다>를 좇는 두 사람 中(가운데 중)에 하나는 시몬<탄원에 응답하심> 베드로<반석>의 兄(맏 형)弟(아우 제) 안드레<남자 같은>라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습니다.
41 그가 먼저 自(스스로 자)己(자기 기)의 兄(맏 형)弟(아우 제) 시몬<탄원에 응답하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기름 부음>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飜(뒤칠 번)譯(통변할 역)하면 그리스도<기름부음>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기를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입니다.)
42 데리고 예수<여호와는 구원이시다>께로 오니 예수<여호와는 구원이시다>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주의 은혜>의 아들 시몬<탄원에 응답하심>이니 將(장수 장)次(다음, 버금 차) 게바<바위>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바위>는 飜(뒤칠 번)譯(통변할 역)하면 베드로<반석>라)
42 그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할 것입니다.”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입니다.)
43 이튿날 예수<여호와는 구원이시다>께서 갈릴리<원, 둘레>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빨리 흐르는 물을 사랑하다>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났는데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라오십시오.”
44 빌립<빨리 흐르는 물을 사랑하다>은 안드레<남자 같은>와 베드로<반석>와 한 洞(골짜기, 골 동)네 벳새다<어부의 집> 사람이라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인 벳새다 사람이었습니다.
45 빌립<빨리 흐르는 물을 사랑하다>이 나다나엘<하나님이 주셨다>을 찾아 이르되 모세<苦河{세상}에서 건져내다>가 律(법 율)法(법 법)에 記(기록할 기)錄(기록할 록, 녹)하였고 여러 先(먼저 선)知(알 지)者(사람 자)가 記錄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그가 더하실 것이다>의 아들 나사렛<지켜보다> 예수<여호와는 구원이시다>니라
45 그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는데 그분이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시라더라.”
46 나다나엘<하나님이 주셨다>이 가로되 나사렛<지켜보다>에서 무슨 善(착할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빨리 흐르는 물을 사랑하다>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46 그 말을 들은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니?”라고 하자 빌립이 “그럼 한번 가보자.” 하였습니다.
47 예수<여호와는 구원이시다>께서 나다나엘<하나님이 주셨다>이 自(스스로 자)己(자기 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하나님이 상대해 주신 자> 사람이라 그 속에 奸(범할 간)詐(속일 사)한 것이 없도다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는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참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군요.”
48 나다나엘<하나님이 주셨다>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여호와는 구원이시다>께서 對(대할 대)答(대답할 답)하여 가라사대 빌립<빨리 흐르는 물을 사랑하다>이 너를 부르기 前(앞 전)에 네가 無(없을 무)花(꽃 화)果(실과 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48 그 말을 들은 나다나엘이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라고 여쭙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이 당신을 부르기 전에 나는 당신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 무화과나무 아래란 무화과 열매와 같이 꿀같이 단 말씀을 바라고, 또 그 씨와 같이 많은 말씀을 원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 나무 아래 있었다는 것은 ‘늘 구원의 말씀을 바라던 자’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나다나엘이 하는 것입니다.
49 나다나엘<하나님이 주셨다>이 對(대할 대)答(대답할 답)하되 랍비<나의 주인>여 當(대할 당)身(몸 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當身은 이스라엘<하나님이 상대해 주신 자>의 임금이로소이다
49 나다나엘이 대답하였습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
50 예수<여호와는 구원이시다>께서 對(대할 대)答(대답할 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無(없을 무)花(꽃 화)果(실과 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0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당신이 내가 당신을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므로 나를 믿지만, 곧 이보다 더 큰 일을 볼 것입니다.
51 또 가라사대 眞(참 진)實(열매 실)로 眞實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使(시킬 사)者(사람 자)들이 人(사람 인)子(아들 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51 진실로,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볼 것입니다.”
# 오르락내리락 한다: 사람이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이 응답을 해주시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당신이 지혜의 말씀을 구하고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자가 당신의 구함을 가지고 올라가고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는 답을 받아 당신에게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 하늘이 열린다: 셋째 하늘인 성령의 법의 말씀이 사람의 눈에 보이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늘이란 하나님의 법을 뜻하는 말이기에 첫 번째 하늘은 아벨이 드렸던 ‘제사법’이며, 두 번째 하늘은 ‘모세율법’이고, 세 번째 하늘은 ‘성령의 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셋째 하늘을 언급했던 것입니다. 시편에는 “하늘을 차일같이 펴셨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구원의 법을 펼치셨다는 표현입니다.
#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에는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 요한이 물고기를 잡다가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왔다고 기록되어 있고, 누가복음에는 그 기록이 없습니다. 그리고 본 요한복음에는 전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이러한 의문을 갖게 된 것은 ‘공관복음’과 같이 인생들이 작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용어들이 인생들의 머리를 장악하여 성경을 보는 시각을 엉터리로 고정되게 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건의 기록을 전하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의 지명, 숫자, 이름 등은 모두 인생들이 인식하고 있는 인물이나, 지역이나, 특정 시간이나, 수를 나타내기 위하여 적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모두 허상적 기준에 의한 인식이며, 영원할 수 없는 비 진리들입니다.
벳세다가 언제까지나 벳세다일 수 없으며, 육지가 언제까지나 육지도 아니고, 바다가 언제까지나 바다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비 진리적 기준을 적용하여 성경을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각각의 이름들이 가지고 있는 원어의 뜻이 메시지 전달 수단이며, 숫자의 의미가 메시지를 전하는 수단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마가복음이나 마태복음에서 반석(베드로)이 되는 자를 불렀는데 그때에는 어부 중에서 불렀고, 요한에서는 요한의 제자 중에서 교회 세움 받을 자, 곧 베드로를 불렀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특정 인물이 아닌데 특정인으로 보게 하면서 성경에 오류가 있는 것으로 오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