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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의 역사>
순흥안씨 판서공파
孝岩 安 在 弘 (晦軒25代孫) 撰
순흥안씨順興安氏 문성공파文成公派 (또는 1파)는 회헌晦軒안향安珦의 후예後裔다. 고려 때에 신학문인 성리학性理學(주자학)을 들여와 전파하고 계승 발전시킨 철학자이자 교육자였던 순흥順興사람 안향(선수유학제거 도첨의중찬 宣授儒學提擧都僉議中贊)이 귀하게 이름을 떨쳤고, 그의 윗대가 대대로 순흥현順興縣(지금의 경상북도 영주榮州)에 세거했기 때문에 ‘순흥順興’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아버지 부孚는 고려 의과醫科에 급제하고 중앙(개성開城)으로 진출하여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歷任하고 수 태사 문하시중守太師文下侍中에 추봉追封 되었고, 할아버지 영유永儒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추봉 되었고, 증조 자미子美는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 신호위 상호군神號衛上護軍에 추봉 되었으니 이는 모두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현달顯達에 따름이다. (이하 모든 ‘諱’字와 존칭을 생략함.)
시조(子美) 이전에도 선대先代가 있었을 터이지만, 맨 처음 족보인 '순흥안씨족보 병오보(丙午1546년)‘ 서문에 밝힌 바 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선조先祖(子美)이상은 가승家承이 전傳하지 못하여 다 기록하지 못하니 이것은 내가 두고두고 비통悲痛하게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그러므로 순흥안씨 문중에서는 병오보를 주관한 안위(安瑋 문간공文簡公) 선조의 기록 외에는 어떤 기록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순흥안씨는 크게 세 갈래로 구분된다.
호군공護軍公(始祖)의 큰아들 영유永儒의 후손後孫을 ‘흥주인興州人’이라 하였고
회헌晦軒 안향安珦 후손을 ‘문성공파文成公派’라고 한다.
작은아들 영린永麟의 후손을 ‘순정안씨順政安氏’ 또는 ‘검교공(成哲)파’라고 한다.
문성공文成公의 족자族子인 석碩의 후손은 ‘흥령인興寧人’ 또는 ‘죽계안씨竹溪安氏’라고도 하였다.
순흥안문 최초의 족보 병오(丙午1546년)보를 주관한 안위(安瑋 文簡公) 선조가
‘순흥順興안씨’로 통합하여 계보를 정리 간행한 이래 전혀 변함이 없다.
호군護軍(子美)공의 큰아들인 추밀원부사공 영유永儒가 부孚를 낳았고, 태사공 부孚는 동방東邦의 성현聖賢으로 추앙推仰하는 향珦을 낳았다. 순흥인順興人 향珦(1243~1306)은 부친父親을 따라 중앙中央(개성開城)으로 진출하여 18세(元宗1년1260년)에 문과文科 급제及第하고 여러 관직官職을 거쳐 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대제학) ·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에 이르기까지 사문斯文을 당신의 임무로 삼았으며 말년에는 항상 회암晦菴의 화상畵像을 걸어놓고 사모思慕하는 마음을 다하고는 스스로 회헌晦軒이라 호號를 지었다. 1306년 9월 12일에 64세로 졸卒하자 왕이 장단長湍 대덕산大德山에 장지葬地를 내렸고 장례葬禮 날에는 칠관(七管)ㆍ십이도(十二徒)의 유생儒生들이 소복素服을 입고 노제路祭를 지냈다. 충숙왕 6년(1319년)에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다. 시호諡號는 문성文成이다. 선부인先夫人은 한남군부인漢南郡夫人 수원김씨水原金氏로 아버지는 우사간右司諫 녹연祿延이다. 아들은 우기于器와 인연仁衍(대선사)이고 딸 다섯은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 문욱文頊 ·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허수許綏 · 통문서록사通文署錄事 박제朴璾 · 직사관直史館 한수연韓守延(문과) ·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김사원金士元에게 시집갔다. 후부인後夫人 염씨廉氏는 예빈경禮賓卿 수장守蔣의 여女로 후사後嗣가 없다.
아들 우기于器(1265~1329)는 문과(壬午1282년)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정당문학正堂文學(대제학 正二品)에 있을 때는 우수한 인재를 발굴하여 등용하였다. 검교찬성사檢校贊成事(正一品)에 이르렀으며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순文順이다. 부인夫人은 철원군부인鐵原郡夫人 철원최씨鐵原崔氏로 아버지는 문하시중門下侍中 충약沖若이다. 아들 정頂(조계종大禪師)과 목牧을 낳았다. 후취後娶 이李씨도 아들이 둘이니 신愼은 뒤에 판관공파判官公派 파조派祖이고 둘째는 전해지는 기명記名이 없다.
손자 목牧(1291~1360)은 문과(乙卯1315년) 급제하여 봉상대부사헌장령奉常大夫司憲掌令·밀직제학·밀직부사·서연관書筵官 등을 거쳐 정당문학(대제학 正二品)에 이르렀다.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숙文淑이다. 부인夫人은 화평군부인化平郡夫人 화평化平(광산光山)김씨로 아버지는 정승政丞 태현台鉉이다. 대제학 민유閔愉(여흥군麗興君)에게 시집보낸 딸 하나와 아들 하나 원숭元崇을 낳았다.
증손 원숭元崇(1320?~1382?)의 초명은 정靖이다. 고려 공민왕 때에 문과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정당문학(대제학 正二品)에 이르렀다. 순성군順城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혜文惠다. 부인夫人은 원주원씨原州元氏로 아버지는 평리評理인 선지善之다. 아들은 셋이니 곧 원瑗 · 조동祖同(부제학副提學) · 수垂(예의랑禮儀郞)로 모두 문과에 급제하므로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에 봉封해지고 름록凜祿을 받으니 세상이 모두 부러워하였다. 둘째아들 조동祖同은 뒤에 부제학공파 파조가 되었고 최근에는 양공공파良恭公派라고 부른다. 셋째아들 수垂(또는 隨)는 한림공파翰林公派 파조다. 딸 여섯은 우사간右司諫 김사렴金士廉 · 덕양부원군德陽府院君 기전룡奇田龍 · 창령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린成石璘(영의정) · 판서判書 김추金錘 · 좌랑左郞 김수金垂 · 현감縣監 유원지柳元之에게 시집갔다.
이로써 문성공(향珦) 이래 4대四代가 문과文科 급제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대제학)을 지냈고 모두 ‘문文’자字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3대(우기于器 · 목牧 · 원숭元崇)가 봉군封君 되어
이른바 ‘4대 대제학 · 3대 봉군’을 배출한 당대의 최고 명문가로 성장하였다.
현손 원瑗(1345~1411)의 병진(丙辰1376)년에 급제하여 고려高麗에서 형조전서刑曹典書를 지냈고 조선朝鮮 태종 때에 다시 벼슬에 나아가 개성유수 · 사헌부 대사헌(검찰총장) · 한성판윤(서울시장) 등을 지내고 태종11년(1411)에 졸卒하고 시호는 경질景質이다. 선부인先夫人 영양군부인英陽郡夫人은 영양남南씨로 아버지는 정승政丞 휘주輝珠이고, 아들 종약從約을 낳고 일찍 졸卒하였다. 종약從約은 판서공파判書公派 파조派祖로 순흥 종문宗門을 대표한다. 후부인後夫人 파평군부인坡平郡夫人 윤尹씨는 파평坡平사람으로 아버지는 영평군鈴平君 척陟이다. 아들 다섯과 딸 다섯을 낳았다. 아들은 종례從禮(감찰공파) · 종의從儀(첨추공파) · 종렴從廉(도정공파) · 종신從信(참판공파) · 종검從儉(참의공파)이고 딸은 김효공金孝恭(장령掌令) · 최굉崔宏(정언正言) · 이행李行 · 김문金汶(현감縣監) · 김유일金惟一(대호군大護軍)에게 시집갔다.
<5공8부인五公八夫人> 문성공(珦)과 한남군부인(수원李씨) 서원군부인(파주廉씨) ·
문순공(于器)과 철원군부인(철원崔씨) ·
문숙공(牧)과 화평군부인(광산金씨) 군부인 이씨(李氏) ·
문혜공(元崇)과 진한국대부인(원주元씨) ·
경질공(瑗)과 영양군부인(南씨) 파평군부인(尹씨)을 가리킨다.
묘소墓所는 장단長湍 대덕산大德山 문성공 묘역墓域에 있다. 그러나 남북분단으로
선영先塋을 참배參拜할 수 없게 되니, 후손들이 판서判書(종약從約)공 묘역墓域에
세사망배비歲祀望拜碑를 세우고 음력 10월 초4일에 망배제望拜祭를 모시고 있다.
<판서공파> 경질공景質公(원瑗)의 아들 종약從約(1364?~1426)은 고려조 창왕昌王 원년元年(戊辰1388년)에 급제하여 조선조에서 황주판관黃州判官·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내자시판사內資寺判事·창원부사昌原府使·이조참의吏曹叅議를 지냈고 해주목사海州牧使(正三品)를 끝으로 관직을 물러났다. 개성의 종가宗家를 헐어서 한양 훈도방薰陶坊 주자동鑄字洞에 이건移建하였고 문성공 영정影幀과 경질공 신주神主를 모셨으나 이복제異腹弟 종의從儀(현감)의 무고誣告를 여러 번 당하였다. 마음의 병이 깊어져 파주(교하) 별서別墅에서 시서詩書와 벗하며 살다가 생生을 마감하니 교하交河 원롱산月籠山 서현鋤峴에 장례하였다. 아들 구玖와 손자 지귀知歸 등 내외손內外孫들의 문과 급제 그리고 모두 당상관堂上官 이상의 영달榮達로 이조판서吏曺判書에 추증追贈 되었다. 추증을 더하여 겸하니, 경연經筵과 춘추관春秋館과 성균관成均館과 의금부義禁府의 지사知事·홍문관弘文館대제학大提學과 예문관禮文館대제학大提學으로 ‘양관兩館대제학‘이다. 부인夫人은 동래정씨東萊鄭氏로 아버지는 봉원군逢原君 양생良生이고 아들 구玖(參贊) · 경璟(贊成) · 수琇(直長) · 리理(西破)와 딸 둘(판서判書 성염조成念祖 · 현감縣監 박수지朴遂智)을 낳았다. 판서공 종약의 자손은 조선말까지는 판서공파判書公派라고 했고 왜정倭政 때에 아들 넷이 모두 파조派祖로 분리되었다.
<참찬공파> 판서공(從約)의 맏아들 구玖의 문과 급제와 손자 지귀知歸(대사성大司成)의 급제, 증손 호瑚(판서) · 침琛(판서/恭平公) · 기璣(전적) 삼형제 급제, 현손 처선處善 · 처성處誠 형제와 종형제 처순處順의 급제, 처선處善의 아들 정珽까지 11대에 걸쳐 장자長子가 문과에 급제하였으니 이는 동서고금東西古今에 다시없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구玖의 아들 호瑚 · 선璿 · 침琛 자손들은 모두 대를 잇지 못하게 되었으니 종손宗孫는 훈도방薰陶坊 주자동鑄字洞에서 8대를 살다가 가세家勢가 기울었고 종가宗家도 재목材木으로 팔려버렸다. 이후, 종琮의 후손이 종손宗孫을 대신하였고 기璣의 후손들은 남원南原지역에서 보종保宗하였다.
<찬성공파> 종약從約의 둘째아들인 경璟의 아들 5형제 곧 중후重厚 · 근후謹厚 · 관후寬厚 · 돈후敦厚는 문과, 인후仁厚의 무과 급제는 대단한 화제가 되었다. 근후謹厚의 아들 림琳도 문과 급제하였고 또 돈후敦厚의 아들 당瑭(정민공)은 문과 급제하여 좌의정에 올랐으나 아들 처겸處謙 · 처함處諴 · 처근處謹 삼형제 급제와 기묘사화己卯士禍 · 신사무옥辛巳誣獄으로 인한 영욕榮辱의 세월은 역사의 크나큰 아픔이었다. 인후仁厚의 증손 판서 위瑋(문간공文簡公) · 좌의정 현玹(문희공文僖公) · 상瑺(판결사判決事) 삼형제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직장공파> 셋째아들 수琇의 군자감軍資監 직장直長을 끝으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고 후손들은 기묘사화己卯士禍 와중渦中에 함안咸安(경상남도) 등지로 흩어져서 보종保宗하였다. 후손이 임진壬辰년 왜란倭亂 때에 의병義兵으로 혁혁赫赫한 공功을 세웠다. 현손 민慜과 아들 신갑信甲은 순절殉節하였고 민慜의 이복제異腹弟 희憙(죽계공竹溪公)는 문과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난亂에 맞섰고 난후亂後에 대구부사大邱府使를 지냈다.
<서파공파> 넷째아들 리理는 기묘사화己卯士禍 이전以前에 순흥順興으로 낙향落鄕하여 대룡산大龍山자락에 은거隱居하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증손曾孫 공신公信이 문과 급제하여 벼슬에 나아가 문성공文成公 가문家門을 빛냈다. 후손들은 관향지貫鄕地 순흥順興의 추밀원부사공(영유永儒) 묘소와 영모암永慕庵(재실)을 수호守護하며 자손子孫이 크게 번성繁盛하였다.
맏사위 성염조成念祖는 문과 급제하여 판윤判尹을 지냈고 시호는 공혜恭惠이고 부父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영의정 추증) 엄揜이다. 아들 삼형제 임任(대제학) · 간侃(수찬) · 현俔(판서 대제학)이 모두 문과 급제하여 이름을 날렸고, 현俔의 아들 성세창成世昌(좌의정) 등도 문과 급제하였고 문장 또한 뛰어나서 가문을 빛낸 인물들이었다.
둘째사위 박수지朴遂智는 현감을 지냈고 부父는 직장直長 선鮮이다. 아들은 다섯이니 이온以溫 · 이량以良 · 이공以恭 · 이신以信 · 이근以謹이다.
판서공判書公 종약從約의 후손은
조선말까지 '판서공파判書公派‘ 또는 ’구玖경璟수琇리理파‘라고 하였고,
문성공文成公(회헌晦軒 안향安珦) 후손을 대개 '순흥안씨 문성공파'라고 한다.
최근에는 ‘추밀원부사공(永儒)파’라고 하고 ‘순흥안씨1파’라고도 부른다.
문성공(珦)의 도덕道德과 학문學問은 ‘聖人의 도道’를 가르치니 곧 효孝 · 충忠 · 예禮 · 신信 · 경敬 ·성 誠으로, ‘자식으로서는 효孝를 해야 하고, 신하로서는 충忠을 해야 하며, 예禮로서 집안을 다스리고, 신信으로 벗을 사귀고, 자기 수양은 경敬으로 하고, 일을 함에는 반드시 성誠으로 할 따름이다.’이다. 이 ‘안자安子6훈六訓’은 후학後學들이 계승繼承 발전發展시켜 새나라 조선朝鮮의 통치 이념으로 제공提供 되었다. 세종대왕의 아버지 태종(太宗 조선3代임금)은 하교下敎하기를, ‘안문성安文成은 학교를 일으키고 가르침을 베풀었으니 여러 왕들이 모범으로 삼을 만하다. 공로에 보답하는 은전恩典을 마땅히 후손에게까지 미쳐야 할 것이니, 자손은 비록 서출庶出이라도 영원히 군역軍役에 소속시키지 말 것이며 적손嫡孫은 대대로 부역賦役을 면제하고 동반東班과 서반西班에 기록하여 등용登用하라.’고 하였다. 조선朝鮮초에는 의관衣冠을 하고 관복官服을 입은 자손들이 조정朝廷에 가득하였으니 이른바 ‘려말선초麗末鮮初의 육대성六大姓’이라고 하는 ‘안安·정鄭·박朴·이李·김金·최崔‘의 맨 앞에 회자膾炙되는 고금古今과 천하天下에 보기 드문 이름난 가문家門이 되었다. 조선말까지도 역대 왕들은 같은 내용의 교지校旨를 내려 문성공文成公 후손을 배려하였다. 이 어찌 선조께서 선善을 많이 쌓은 경사慶事로써 뿌리가 깊고 근원根源이 먼 것이 아니겠는가. 마땅히 자손들이 번성繁成하여 시서詩書의 유택遺澤이 더욱 오래도록 전해져야 하지 않겠는가. 판서공 자손은 힘쓰고 힘쓰라. 판서공파가 바로서야 문성공 자손이 산다.
<끝>
<참고자료>
◇ 순흥안씨 5세 안우기安于器 묘지명墓誌銘 (1339년) - 근재謹齋 안 축 安軸 찬撰
◇ 순흥안씨 6세 안 축 安 軸 묘지명墓誌銘 (1348년) - 가정稼亭 이 곡 李穀 찬撰
◇ 순흥안씨 6세 안 보 安 輔 묘지명墓誌銘 (1379년) - 목은牧隱 이 색 李穡 찬撰
◇ 순흥안씨 맨 처음 족보 병오보丙午譜 序文 (1546년)- 문간공文簡公 안 위 安瑋 찬撰
◇ 순흥안씨 2세 안영유安永儒 묘갈명墓碣銘 (1558년) - 문간공文簡公 안 위 安瑋 찬撰
◇ 순흥안씨 4세 안 향 安 珦 묘지명墓誌銘 (1636년) - 순원군順原君 안응창安應昌 찬撰
◇ 순흥안씨 3세 안 부 安 孚 향려단기鄕閭壇記(1638년)-순원군順原君 안응창安應昌 찬撰
◇ 순흥안씨족보 병오보 (1546년) 초보草譜(1638년)
순흥안씨족보 기해보 (1659년)
순흥안씨족보 을유보 (1765년)
순흥안씨족보 정사보 (1797년)
순흥안씨족보 경인보 (1830년)
순흥안씨족보 을사보 (1845년)
순흥안씨족보 을축보 (1865년)
순흥안씨족보 무진보 (1868년)
순흥안씨족보 갑술보 (1874년)
순흥안씨족보 경자보 (1900년)
순흥안씨족보 무오보 (1918년)
순흥안씨족보 병자보 (1936년)
순흥[죽산탐진]안씨족보 병신보 (1980년)
조선왕조실록
<순흥안씨 문성공자손 계보>
시조始祖
諱 자미 [호군공 護軍公] [추증 신호위상호군]
휘 子美
2세
영유 [추밀공 樞密公] [추증 추밀원부사] ----------------------------------영린<2파> -----------영화<3파>
永儒 [樞密院부사公]
3세
부 [태사공] [고려 의과][밀직부사] [추증 守太師門下侍中]
孚 [太師문하시중公]
4세
珦 [문성공] (1243~1306) 초諱 유裕. 1260년 문과 급제(18세). 호號 회헌晦軒.
향 [文成公] [고려 문과] 수문전태학사(대제학) 벽상삼한삼중대광 도첨의중찬 致仕]
5세
우기 [문순공] [고려 문과] [정당문학=대제학] [광정대부 검교첨의찬성사贊成事] [순평군順平君]
于器 [文順公]
6세
목 [문숙공] [고려 문과] [정당문학=대제학] [순흥군順興君]----------------------신
牧 [文淑公] 愼 <판관공파>
7세
원숭 [문혜공] [고려 문과] [정당문학=대제학] [순성군順城君]
元崇 [文惠公]
8세
원 [경질공] [고려 문과] [대사헌=검찰총장] [판한성부윤=서울시장]------조동 [고려 문과] ------ 수 [고려 문과]
瑗 [景質公] 祖同 垂
<부제학공파> <한림공파>
9세 휘
종약 [판서공] [고려 문과] [해주목사] [증 이조판서]--------종례 ----- 종의 ----- 종렴 ----- 종신 ----- 종검
從約 [判書公] 從禮 從義 從廉 從信 從儉
<감찰공파><첨추공파><도정공파><참판공파><참의공파>
10세
구 [참찬공][조선 문과] 경 [찬성공] 수 [직장공] 리 [서파공]
玖 [參贊公] 璟 [贊成公] 琇 [直長公] 理[西波公]
<참찬공파> <찬성공파> <직장공파> <서파공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