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완성되거나 화려하거나 유명하거나 값비싼 것보다는 그렇지 않은 것을 더 좋아한다. 난설헌 허 초희를 흠모하는 것은 그런 생각과도 어느 정도 맥을 같이한다.
물론 그는 매우 유명하며 조선시대 최고 여류시인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남아있는 작품이 많지 않고 너무나 아쉽게도 불과 27세에 요절했다. 사임당과 견주어 보면 그 타고난 천재성에 비해 너무나 박복하다. 그는 8세 때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으로 이미 세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허씨 5 문장이라 일컫던 그의 부친을 비롯한 기라성 같은 오라비들도 천재여류시인의 지속적 창작활동무대를 만들어 주지 못하는 황량한 시대를 한을 간직한 채 살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그의 일생에 대한 책을 읽고는 나도 27세가 되기 전에 이제 죽어도 아깝지 않을 그 무언가를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27세가 지나고도 20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꿈속을 헤매고 있다.
그는15세 때 16세 된 안동 김문의 성립과 혼인했다. 그러나 지아비 성립과의 금슬은 그리 좋지 못했다고 한다. 그 시대엔 거의가 조혼을 했으므로 나이 때문은 아니고 천재를 발산할 수 없는 막힌 사회구조와 사대부 집안의 틀의 무게와 남편의 도량 탓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의 시의 성격과 흐름을 결정하는 주요 요소가 된 사건은 두 아이의 죽음이었을 것이다. 어린 딸이 죽고 이듬해에 아들마저 잃는다. 여늬 어미가 다 그렇겠지만 특히나 고도로 예민한 감성을 가진 난설헌의 그후 삶은 이미 껍질뿐이었을 것이다.
그는 시에서 이미 27세의 죽음을 예견했고 분신과도 같은 시작원고를 모두 다비(茶毘) 할 것을 유언하고 먼저 떠난 아이들에게로 갔다. 그 순간 조선중기 여류문학이 송두리째 재가되어 한순간에 사라졌다....
당시 21살이던 동생 허 균은 엄청난 실수를 했다. 누이의 부탁을 그대로 따르기 위해 혹은 스스로의 천재성을 과신한 나머지 자신이 그 시들을 모두 외우고 있다고 판단하고는 그 국보급 친필유고를 필사본도 남기지 않은 채 모두 불태워 버렸다.
그는 홍길동전으로 세인에 기억되지만 그의 문학적 역량은 누이의 그것에 훨씬 못 미친다. 스스로 그런 것을 판단할 능력도 없고 아녀자들의 규방 문집을 무시하던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판단에 큰 착오를 일으켰다. 결국 그는 누이에게는 물론이고 우리 문학에조차 엄청난 누를 끼친 것이다.
원고 소각의 책임이 반드시 그에게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그를 추궁하는 것은 이후 누이를 추모하며 그가 기억을 더듬어 재현하여 출간한 난설헌고(藁), 난설헌집 등에서 당나라의 시와 거의 같은 작품이 여러 개가 나와서 표절시비를 일으켜 님의 이름에 누를 끼쳤기 때문이다. 내 견해로는 그것은 표절이라기 보다는 인용에 가까웠다.
허균의 문필능력으로 보아 90% 정도의 재현은 가능했으리라 본다. 그러나 시적 상상력이 훨씬 뛰어났던 누이의 화룡점정의 진수를 되살리지는 못했을 것이고 무엇보다 누이의 문집을 돋보이게 하려고 당대의 작품을 몇 점 끌어넣는 미련의 극치를 보였다고 판단한다.
하수가 고수의 세계를 알아보지 못하고 형편없는 무리수를 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난설헌의 시집에는 난설헌의 이름을 붙일 수 없다. 그것은 "허균이 회상하는 누이의 시 세계" 정도 일 뿐이다.
나는 난설헌이 오래오래 살아 증손, 고손을 보고 12권 24책 혹은 그 이상의 주옥같은 세계적 대하 시작문집을 남겼더라면 이토록 그를 애닯게 추모하기는커녕 냉담했을지 모른다.
끓어오르는 재기(才氣)를 받아줄 아량도 없고 담아둘 그릇도 없는 깜깜한 세월을 살았던 우리의 무수한 뛰어난 누이들, 스물 일곱 푸르른 나이에 홀연 생을 접은 그를 보고도 무심한 세상은 조금도 바뀌려 하지 않았다. 정적들은 물론이고 그 삼족까지 멸해가며 이룬 알량한 나라를 몽땅 들어 왜인이나 양코에게 줘버리고도 아직도 누이들을 푸대접하는 우리이다.
나는 80년 대 중반에 청평 안쪽에 있는 설악면에 마련한 나의 누거에 난설헌(蘭雪軒)이라는 옥호를 붙였다. 그리고 난을 길렀다. 난에 관한 책을100여권이나 모으고 전국의 산하를 뒤져 각종의 자생란들을 찾아내며 명품에게는 난설헌의 시제를 하나씩 붙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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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고속도로 하남기점 16km 지점 즉 중부 제3터널을 나와서 800m 지난 지점의 도로 갓길에 무단 주차를 하면 바로 오른편이 난설헌이 묻혀있는 김 성립의 가족묘가 있다. 물론 고속도로 갓길에 이유 없이 차를 세우는 것은 불법이고 위험하다. 흐리거나 안개 끼거나 어두울 때는 절대 안 된다. 그러나 거기에는 깜박이를 켜고 잠시 불법주차를 해야할 충분한 이유가 있지 않은가.
100m만 걸어 올라가면 바로 난설헌의 묘와 추모시비가 있고 그 옆에 앞세운 두 아이의 앙증맞은 무덤이 있다. 준법정신이 투철한 분들께는 지방도를 알려드릴 능력이 나에게는 없다. 다만 물어가며 광주 장례식장을 찾은 후 북쪽으로 7~800m를 더 가면 되고 물론 포장은 되어 있다.
무심한 남편 성립도 난설헌을 여읜지 3년만에 임진왜란에 나가 전사했다. 난설헌 묘의 윗단 오른편에는 바로 재혼한 홍씨와 합장으로 모셔져 있다. 그 옆과 윗단에는 성립의 부친과 조부 증조부가 계신다.
이 가을 낙엽이 어느 정도 떨어진 후 스산한 바람이 불 때 중부고속도로를 지난다면 문득 차를 세우고 잠시 들러 애잔한 감상에 잠겨 봄직한 장소라 권유한다.
꼬리; 실은 거의 폐묘처럼 황량했던 그 무덤들은 85년엔가 중부고속도로를 건설하는 바람에 500m 정도 옮기면서 오늘의 모습이 되었다. 대가족 속에서도 너무나 외롭게 살다 생을 마감하고서도 한적한 첩첩산중에 갇혀 지내던 그가 이제 110km로 질주하는 수 만 명의 군상을 매일 지켜보게 되었다.
그의 천재성과 영감이 그 길을 지나다니는 어린 소녀들에 옮겨서 오지에 고속도로가 생기듯 조금씩 달라지는 새 천년의 좋은 환경 속에서 이제 거듭 활짝 피어날 것을 진심으로 믿는다.
끝으로; 우리 동기 중에도 자랑스러운 국문학과 한문학의 대가가 여럿 있다. 나는 하수와 고수의 크기를 짐작은 하는 사람이다. 부디 취미생활을 하는 이 글을 학문의 잣대로 재지 말아 주시기를 당부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