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9월 2일)
눈이 부었다. 여행 온 처녀총각들이 밤새 거실에서 떠드는 바람에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던 탓이다. 눈은 떴지만, 비몽사몽이다. 익숙하지 않은 숙소 분위기에 최대한 빨리 적응해야 하리라. 비싼 호텔가는 그 돈으로 여행 기간 늘이고 싶다라고 했던 배짱을 잘 유지하려면 즐거운 음악을 듣는 것처럼 이런 일에 익숙해져야 하리라.
‘한창 좋을 때다.’
짜증이 나다가도 한편으론 딸 아들이라 생각하니 귀엽게 보인다.
아침 식사로 빵 과일 요구르트 시리얼 등이 식탁에 놓여있다. 커피를 타는 사람, 빵에 잼을 바르는 사람, 과일을 통째 들고 버석버석 깨무는 사람 등 분주하다. 주인 아가씨는 거실 소파에서 잔 듯 몹시 피곤한 기색이다.
오늘은 어떻게 시간을 잘 보낼 것인가. 우유에 탄 시리얼을 퍼 먹으며 프린트해 온 블라디보스톡 관광지 몇 곳을 들여다본다. 그때다. S의 제의에 눈을 번쩍 뜨인다. 택시 대절로 관광하잔다. 7시간에 6만원 정도이고 택시기사가 알아서 관광지를 데려다 줄 것이란다. 루스키섬까지. 부지런한 S가 혹시나 좋은 방법이 있나하고 주인 아가씨에게 물어보다 뜻밖에 거둬들인 수확이다.
‘세상에 이런 행운이 어데 있노.’
한 사람당 우리 돈으로 만 오천이면 일곱 시간동안 골고루 관광할 수 있다니 이보다 큰 행운이 어디 있겠는가. 여행 시작부터 징조가 좋다. 저절로 입이 벙글거린다. 뭔가 어려운 일을 수월하게 척척 처리한 것처럼 스스로가 대단해 보인다.
그런데 기사와 소통을 어떻게 할 것인가. 아이구 닥치는 대로 해보자. 그래그래 고마 그렇게 해보자. 서로에게 위안을 주며 대기한 택시 앞으로 갔다.
“엄마야~~~“
대절 택시 문을 열던 O가 소리치며 물러난다. 다들 차 안으로 눈이 몰린다. 어찌 이럴 수가. 사십대 초반의 택시기사는 트렁크 팬티 같은 반바지에다 런닝 차림이다. 저 속옷 바람으로 손님을 맞다니. 기가 찬다. 놀란 우리를 보고 진작 그는 싱긋이 웃는다. 아 여기는 러시아지. 우리의 고정관념을 버리자. 팍팍 털어서. 속옷 바람의 저 남자 까짓거 겁날 거 없다. 뭔 일 있다 해도 아줌마 네 명이 저 남자 하나 못 당해 낼라구.
(운전기사 유니폼??)
‘모닝’차보다 조금 더 커 보이는 차에 네 명이 구기어 앉는다. 운전사까지 다섯 명, 빡빡하다. 차가 굴러 가려나.
말도 없이 기사는 차를 몰아간다. 침묵의 남자 한 명 주위로 여자 네 명의 들뜬 음성이 수다스럽다.
‘어제 비행기에서 내려다 봤던 다리가 저 다리인갑네요. 우리가 저쪽으로 갈 모양이네요. 글체요? 그런거 같심더......’
그런데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가? 제대로 가고 있는 건가? 믿져야 본전인데 알아듣던 못 알아듣던 그래도 한 번 시도는 해 봐야지. 기사 어깨를 툭툭 친다.
“어이. 루스키? 지금 루스키?”
기사가 고개를 끄덕인다. 도착할 때 다 되어간다는 듯 손을 뻗어 이리 저리 갈 길을 가리킨다. ‘그래 그냥 있어보지머. 설마 중 늙은이들을 팔아 먹겠나. 캐봐야 돈도 얼마 안될낀데.’
우리를 내려놓은 곳은 해변, 전봇대 하나 없는 넓은 언덕, 그 아래선 파도가 쉼 없이 바위를 친다. 기사는 검지손가락 하나를 펴 몇 번 흔든 뒤 자기 차 쪽을 가리킨다. 1시간 후 차로 돌아오라는 뜻이다. ‘오케이. 오케이. 그래 잘 알아 들었다구.’
망아지처럼 언덕 아래를 뛰어 내려 간다. 원시의 모습을 보는 듯 주위는 자연 그 자체뿐이다. 해변에 나란히 앉았다. 1시간의 여유를 줬으니 잘 분배해 써야한다. 뭉게구름이 수평선 위에 떠 있다. 평화, 느긋한, 여유로움을 다 섞어 놓은 기분이다 행복이 밀려온다.
“우리나라는 어느 쪽일까요?”
(루스키 섬 해변에서)
L의 물음에 방향을 가늠해본다. 여기다. 저기다. 위도가 어떻고 경도가 어떻고 나름 방향과 위치를 잡아본다. 벌써 내 살던 곳이 그리워진다. 내 영혼이 뿌리박은 곳, 그곳이 나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저 멀리 언덕 위에 흰 런닝 남자가 차 주위를 왔다갔다 한다. 운전기사다. 시간이 다 되어가나 보다. 헉헉대며 다시 언덕길을 오른다. 우리는 대한민국 민간 외교관이다. 그러니 약속을 잘 지켜야한다. 그럼 그렇지.
“와~~”
차에 타자마자 엄지를 치켜 올려준다. 경치가 좋았다는 뜻이다. 그 말을 기사는 알아들었을까. 그냥 웃기만 한다. 돈 드는 일도 아닌데 칭찬을 많이 해 줘야지. 그래야 또 좋은 곳 데려다 줄 지도 모를 텐데. 그 마음을 벌써 낚아챘는지 차는 된 소리를 내며 또 어디론가 간다. 어디로 가지? 물어볼 수도 없고 대답을 해 준다한들 알아들 수가 없다. 그냥 얹혀 간다.
해변 식당이다. 창문 바로 아래엔 바닷물이 넘실거린다. 꼭 바다에 떠 있는 기분이다. 점심시간에 맞춰 우리를 근사한 식당에 데려다 준 것이다. 음음 그럼 그렇지. 손가락으로 메뉴를 짚어 주문을 하고 후식까지 해결한다. 식당으로 들어 오지 않는 기사를 보니 점심을 굶는 모양이다. 빵과 음료수를 샀다. 삼천 원 정도다. 기사가 먹을 동안 이번엔 우리가 기다려준다. 한국인의 인정을 보여준 우린 애국자다. 그러면서 신나한다.
이제 다음은 어디로 우리를 데려다 줄 것인가. 점치는 일도 재미있다. 학교 같은 큰 건물 앞에 차를 세우더니 그 반대쪽 언덕을 올라가라한다. 그 다음에 학교로 들어가라고 한다. 무슨 말인가. 언덕엔 왜 올라가라고 하는 건지. 답답하다. 언덕 너머에 무엇이 있는 건가? 시든 가을 풀을 밟으며 언덕을 올랐지만, 구경할 만한 것도 없다. 그때 기사가 내려오라고 손짓을 한다. 뭐지? 또 내려간다.
학교 건물을 돌아 앞쪽으로 돌아가니 너무도 아름다운 캠퍼스의 모습이다. 얼른 관광안내자료를 보니 세계적으로 캠퍼스가 유명한 극동연방공과대학이란다. 그제야 언덕위로 올라가라는 뜻을 알아차린다. 그 위에서 한번 내려다보라고 한 것임을.
(아름다운 캠퍼스로 세계 5위안에 든다는 극동연방공과대학에서)
해안을 낀 캠퍼스, 짠했다. 풀밭에 누워도 보고 앉아도 보고 사진도 찍는다. 숲 속도 걷고 어린이 공연도 보고. 이처럼 알뜰히 블라디보스톡 관광을 할 수 있다니.
예상보다 한 시간 일찍 숙소에 도착했다. 양심있는 기사다. 시간당 계산하여 돈을 돌려주겠단다. 돈 대신 우리는 기차역까지 가방을 실어주기를 부탁한다. 저 웃음 띤 기사의 얼굴, 역시 우리의 판단이 옳았다.
기차는 7시 10분 출발이다. 혹시나 서두르다 놓치기라도 할까봐 일찌감치 도착한다. 생각보다 역은 작다. 계단이 많아 가방을 옮기기가 어렵다. 한 곳에 기다리게 하고 내가 역대합실로 먼저 가본다. 대합실 들어가는 절차도 까다롭다. 공항 검색대처럼 검색을 거쳐야한다.
두리번거리며 창구를 찾는다. 아이구 반가워라. 저기 있다. 인터넷기차표를 밀어 넣으니 ‘패스포드’라고 한다. 옳거니 일이 진행되는 거 보니 제대로 될 모양이다. 다시 헉헉 계단을 올라와 여권을 모은다. 종이 티켓으로 바꾸는데 성공, 의기양양한 걸음이다.
다음은 마트에 갈 차례다. 역 앞에 마트가 있다고 했는데, 앗 저기 보인다. 가방을 끌고 갈 것이냐 한 사람이 가방을 맡고 있을 것이냐를 토론하다 결국 다 가보기로 한다. 혼자 있는 것은 금물, 이왕이면 마트 구경도 다 같이 하자는데 합의를 본 것이다.
마트까지는 잘 갔으나 입구를 몰라 이 문 저 문 열어본다. 앞선 사람이 들어가면 따라가고, 돌아 나오면 다시 따라 나오길 반복한다. ‘아이구 참말로~ 도대체 이 가게는 들어가는 구멍이 어데 있노?‘ 겨우 입구를 찾았다. 그런데 입구는 왜 이리 좁고 복잡한지. 손님을 받을 자세가 아니네. 장사를 하려나 말려나. 아 참 여긴 외국이지.
장까지 봤으니 이제 기차만 타면 된다. 대합실 의자에 앉아 기차를 기다린다. 아직 두 시간 전이다. 그냥 보이는 곳에서 기타를 타면 될 줄 알았는데 시간 때마다 타는 레일이 다르단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15번 레일까지 있다니. 차표를 들여다봐도 당최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전광판을 보니 아직 뜨지를 않는다. 전광판에 떠 있다한들 러시아글자는 예쁜 그림으로 보일 뿐이니. 일단 앉아서 기다려 보자. 뭔 수가 나겠지머.
(블라디보스톡역에서 횡단열차를 기다리며)
태산같이 가방을 짊어진 아가씨가 말을 건네온다. 인터넷티켓을 내보이며 이걸로 타느냐고 묻는다. 아하 우리보다 못한 사람도 있구나. 안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종이 티켓으로 바꿔야한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한참 후 또 한 남자가 티켓에 대해 물어 온다. 아 안다는 것이 이렇게 재미있는 일이구나.
하지만, 우리가 타야할 기차 레일번호를 알아내지 못한 상태다. 기차표를 보이며 묻고 또 물어 겨우 레일 번호를 알아낸다. 바로 앞이다. 또 행운이다. 7시(기차표에는 12시 10분 출발:모스크바 시간 기준) 가까워 온다. 기차를 타러 가방을 끌었다. 드디어 횡단열차를 타는 구나. 감개무량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기 직 전~~(왼쪽에서 두 번째가 필자)
007 3호차 객실을 찾아 기차에 오르며 차장에게 표를 보인다. 4인실 우리 방은 3호차의 중간정도의 위치다. 양쪽으로 이층 침대가 있고 중간엔 작은 탁자가 창 쪽에 놓여있다. 이곳에서 삼일 밤을 자야한다. 그저 즐겁기만 하다. 여기가 횡단열차라니. 1,2층 침대에 나눠 자리 잡고 눕는다. 기차는 쉼 없이 간다. 새마을호 정도의 속도다. 편안한 속도다.
차장은 젊다. 어린 티가 난다. 차장이 돈을 요구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 그런 분위가 전혀 아니다. 괜한 염려다. 라면으로 저녁을 먹으려니 벽의 콘센트가 플러그와 맞지 않는다. 구식인 모양이다. 복도에 콘센트가 하나 있긴 하다. 혹시나 하고 O가 집에서 들고 온 전선줄을 연결해 우리침실로 전기를 끌어온다. 하지만 라면포트가 끓지 않는다. 왜 그럴까. 고장 났나.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콘센트 구멍을 바꿔가며 꽂아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물어볼 수도 없다. 전열기구 금지이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포기한다. 전압이 낮은 걸로 결론 내린다. 뜨거운 물을 받아와 불린 라면에 햇반을 털어 넣어 퍼지는 대로 먹는다. 불편함을 각오하고 온 터라 아무래도 좋다. 배만 부르면 오케이다.
화장실 적응하는 것도 일이다. 양치와 세수 볼일을 다 한 곳에서 봐야한다. 들락거릴 때마다 소독 냄새가 옷에 밴다. 용변을 볼 때는 곤욕이다. 처커덕거리는 반동을 이용해 아예 변기 위에 발을 얹고 앞의 손잡이를 잡고 겨우 볼일을 본다. 어쩔 것인가. 그래도 할 수 없지. 삼 일 동안 샤워는 고사하고 세수만 해결할 정도다. 그래도 좋다. 처커덕처커덕 기차는 끊임없이 달린다. 지금 우리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는 중이다. 노란 자작나무 숲이 기다릴 것이다. 오늘 밤, 주먹 만한 별을 볼 수 있을까. 내일 새벽이면 광활한 대지 위로 그 별들 부서져 내려 작은 이슬방울로 반짝이지 않을까. 피곤함이 쏟아진다. 눈 뜨면 바로 볼 수 있도록 창문 쪽으로 얼굴을 향한 채 잠을 청한다. 처커덕처커덕 흔들리는 요람 속에서.
첫댓글 용감하시네요^^ 저는 크루즈로 Saint Petersburg 에 잠깐들러 궁전 몇 군데 들러본게 전부인데 대단들 하셔요.
대단하십니다.
댓글 감사드려요~~~^^*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드디어 탑승하셧군요. 축하!
재미있고 생생한 글입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가시는 느낌. 행복 하신 것 같습니다.
좋은 구경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