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처럼 현명하게(Brain-Wise)
- 신경철학 연구 -
“건전한 철학은 마음의 본성과 기원에 관한 견실한 이해에 기초하며, 한편 그러한 이해는 (가장 유력한) 신경과학에 의존한다. 패트리샤 처칠랜드는, 열정적으로 그리고 정확히, 그것들을 연결시키는 큰 일보를 내딛었다.”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 하버드 대학 명예교수
“내가 우리 사회에 통섭의 개념을 소개하며 제일 먼저 들었던 예가 바로 철학과 뇌과학의 만남이었다. 이제 뇌과학이 뇌를 직접 들여다보기 시작한 마당에 철학자는 적어도 뇌과학의 기본을 알아야 한다. 처칠랜드는 물리학을 공부한 철학자로서 과학사, 분자생물학, 진화생물학, 신경생리학, 신경인지심리학, 인공지능 등을 통섭하며 여러 철학적 의문에 새로운 설명을 제시한다.”
최재천, 이화여자대학 석좌교수
차례
1장 전체 개요
Ⅰ부 형이상학
2장 형이상학 소개
3장 자아와 자신에 대한 앎
4장 의식
5장 자유 의지
Ⅱ부 인식론
6장 인식론 소개
7장 뇌가 어떻게 표상하는가?
8장 뇌가 어떻게 학습하는가?
Ⅲ부 종교
9장 종교와 뇌
역자 서문
이 책의 저자 패트리샤 처칠랜드(Patricia S. Churchland)는 그녀의 남편 폴 처칠랜드(Paul M. Churchland)와 함께 신경철학(neurophilosophy)이란 영역을 개척한 창시자이다. 이들 부부는 이 분야의 연구에서 서로 분업적으로 협업하기도 한다. 패트리샤는 주로 인지신경과학(cognitive neuroscience)에 그리고 폴은 주로 연결주의 인공지능(connectionist AI)에 각각 집중한다. 혹시라도 그들 부부의 입장에 서로 어떤 차이가 있다고 보는 시각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함께 살며 언제나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고 통합하기 때문이다. 다만 패트리샤가 최신 신경과학 연구에 대한 실증적 자료를 모으는 반면에, 폴은 그 자료에 도움을 받아 과학철학과 인식론의 가설을 구상하는 편이다. 물론 이런 각각의 연구 성과는 서로에게 가설이면서 동시에 근거가 되기도 한다.
신경철학은 전통 철학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 현대 발전하는 신경과학 관련 연구들에 근거하여 대답하려는 목표를 갖는다. 이 책이 그러한 목표에 충실한 시도임은 이 책의 목차에서 알아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철학의 큰 주제를 나누자면 (학자에 따라서 다를 수 있겠지만) 형이상학(존재론), 인식론, 그리고 윤리학 등이다. 이 책의 저자는 Ⅰ부 형이상학, Ⅱ부 인식론, Ⅲ부 종교 등으로 구분하고, 윤리학의 주제들을 Ⅰ부와 Ⅲ부 내에서 다루고 있다. 이 책이 2002년 출판되었지만, 역자가 번역을 시작한 것은 2011년이다. 다소 늦었다는 아쉬움이 있으나 이제라도 한국에 소개하게 된 것을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독자들은 이 책의 내용과 관련하여 이후에 나온 최신 뇌과학 관련 연구를 저자의 새로운 책, 『신경 건드려보기(Touching a Nerve, 2013)』에서 참고할 수 있다.
역자가 보기에, 이 책 『뇌처럼 현명하게(Brain-Wise)』를 읽어야 할 일차적 독자는 아마도 뇌과학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국내 학자들이 될 듯싶다. 그들의 연구가 철학적으로 어떤 큰 그림에서 연구되고 있는지 그 현주소를 안내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연구가 어떤 철학적 의미를 가지며, 철학적 관점에서 그들 연구에 어떤 주의가 필요한지도 알려준다. 나아가서 다른 각도에서 뇌과학에 접근하는 동료들의 연구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알려준다.
그리고 이차적으로 이 책이 철학 저술인 만큼, 한국의 철학자 혹은 철학에 관심을 갖는 연구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될 것이다. 물론 이 책을 들기 위해서는 뇌과학에 대한 기초 소양이 있어야 하며, 어쩌면 그런 부담감에 이 책이 다소 초보자들을 주눅들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앞서 역자가 번역한 『뇌과학과 철학(Neurophilosophy, 1986)』의 1부를 먼저 접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다.
나아가서, 이 책은 전문 연구자가 아니면서 뇌과학에 관심을 갖는 일반 독자들에게도 도전하고 싶은 욕구를 적지 않게 자극할 것으로 기대된다. 만약 쉽게 페이지를 넘기기 어려운 독자라면, 빠른 걸음보다 한발씩 신중히 옮기는 발걸음이 도움이 된다고 조언하고 싶다. 안내자 없이 성급하게 철학의 숲과 신경과학의 늪에 발을 옮기다가 길을 잃고 헤매지 않는 것이 더 유리해 보이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발걸음이 무겁다고 느껴지더라도 서두르지 말고 느린 걸음으로 정직한 땀을 흘리는 것이 결국은 정상에 도달하는 길임을 조언하고 싶다. 대가의 철학자가 통섭적으로 복잡하게 쌓아놓은 언덕과 계곡을 오르는 길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한 번에 한 걸음씩 나아가면서 조심스럽게 발을 옮길 필요가 있다. 일반 독자로서 이것이 너무 부담스럽다면, 앞서 번역된 『신경 건드려보기』에 만족하는 것도 좋겠다.
적지 않게 무게가 느껴질 이 책을 애써 탐색해보려면, 처칠랜드 부부의 기본 입장에 대한 우호적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그들 부부의 기본 입장에 대해서 국내에 아직 이해가 부족해 보인다. 그들의 철학적 견해에 대해서 가장 커다란 저항은 아마도 다음 두 가지일 것이다. 첫째는 그들이 철학을 자연주의(naturalism) 입장에서 접근한다는 것에 대한 저항이며, 둘째는 그들이 환원주의(reductionism)를 붙들고 있다는 태도에 대한 저항이다. 이런 두 저항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아래와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처칠랜드 부부는 전통 철학의 문제들을 경험과학의 결과, 즉 뇌과학 연구의 결과에 기반하여 대답하려 한다. 이러한 철학 연구 태도는 전통 철학이 해 온 연구 방법과 목표와 상반된다. 전통 철학의 입장에서 보면, 철학은 본래적으로 혹은 본성적으로 경험적 연구에 의존하지 않는다.
둘째, 그들 부부는, 근대의 환원주의 정신이 무너졌다고 하는 지금의 시대에, 여전히 환원주의를 붙들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환원주의와 함께 제거주의를 동시에 주장한다. 그러한 그들의 철학적 태도는 자기 모순적으로 비쳐진다. 데카르트 이래로 서구 문명이 추구해온 환원주의는 이제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다. 그 점을 명확히 지적한 철학자가 바로 콰인(Quine)이며, 그들 부부는 콰인의 자연주의 철학의 정신을 계승한다. 나아가서 그들 부부는 심리적 용어와 개념을 신경학적 용어와 개념에 의해서 환원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환원주의 임장에서 기대하면서, 동시에 그렇게 설명되지 않을 경우에 통속심리학 용어를 제거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한다.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적어도 스스로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비쳐진다.
이러한 비판적 견해에 대해서 역자는 먼저 번역한 『신경 건드려보기』의 역자 서문에서 환원주의 쟁점과 관련한 논의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간략히 밝혔다. 전통적으로 철학자들은 수학과 기하학에서 (칸트는 뉴턴역학도 포함하여) 진리의 참모습을 보았고, 그와 같이 철학도 체계화 혹은 형식화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괴델(1930, 1931)은 수학 체계의 불완전성을 증명하였고,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출현하였으며, 그러한 공간이 실제적 공간임을 아인슈타인(1905)이 밝혔다. 이러한 현대 과학의 배경에서 보면,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밝혀내려 했던 “선험적 종합판단”에 대한 정당성은 이제 무의미한 일로 드러난다. 이렇게 과학과 함께 발전해온 서양철학의 기초는 크게 흔들리고 말았다. 이런 배경에서 콰인은 “어떤 제1철학도 없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분석철학을 포함하여) 철학이 경험에서 벗어나 순수함을 추구해야 한다는, 즉 선험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과거의 신념을 버려야 하는 시기가 이미 오래 전에 도래하였다. 한 마디로, 철학이 오랜 동안 의지해온 과거의 낡은 과학의 옷을 벗어 던지고 현대 과학을 수용한다면, 이제 철학이 과학과 다른 (독립적) 방법과 목표를 갖는다고 외칠 수만은 없게 되어 버렸다.
처칠랜드 부부가 환원주의와 제거주의를 동시적으로 주장하는 이유를 여기 역자 서문에서 논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뇌과학과 철학』의 7장에 소상히 패트리샤가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비록 “환원(reduction)”이란 용어를 사용하긴 하지만, 그들의 입장은 데카르트식의 환원주의가 아니며, 콰인의 전체론(holism)에서 나오는 “이론간 환원주의(intertheoretical reductionism)”이다. 또한 『신경 건드려보기』의 역자 서문에서 언급했듯이, 그들은 콰인 이외에, 쿤(Kuhn)이 말한 패러다임들(paradigms) 사이의 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 측면에서 제거주의를 주장한다. 물론 이 책에서도 저자는 여러 곳에서 이 쟁점과 관련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기도 하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아마도 독자들은 이 책의 표지에 쓰인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의 추천사에 대해서 궁금해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윌슨이 『통섭(Consilience, 1998)』에서 주장하는 환원주의 입장과 처칠랜드가 주장하는 이론간 환원의 입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 궁금해 할 수 있다. 윌슨은 그 저서에서 여러 학문 분야들 사이에 설명의 대통합을 주장한다. 즉, 여러 분야의 지식들 사이에 통합적 설명이 이루어져야 하며, 그렇게 시도하라고 주문한다. 그러한 시도를 통해서 학문 분야들 사이에 공진화(coevolution), 즉 상호 발전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패트리샤 역시 Neurophilosophy(1986)에서 학문 분야들 사이의 ‘이론간 환원’을 통해서 상호 발전을 기대해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책, Brain-Wise(2002)에서 그녀는 “이론간 환원”이란 용어 대신에 “부합(consilience)”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아마도 윌슨과 마찬가지로 패트리샤 역시 오해가 많은 “환원주의”란 용어를 피하고 싶었던 것처럼 보인다. 패트리샤 역시, 철학이 신경과학과 부합을 시도함으로써, 그리고 신경과학이 철학과 부합을 시도함으로써 서로 ‘공진화’를 기대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용어에 관한 세밀한 논의가 필요하긴 하겠지만, 대략적으로 패트리샤가 말하는 ‘이론간 환원’의 개념과 윌슨이 말하는 ‘부합’의 개념이 매우 근접해 있다. 이런 측면에서 적지 않게 정확한 이해에 어려움이 있어 보이는 윌슨의 “부합”에 대한 세밀한 철학적 논의와 정당성을 패트리샤의 “이론간 환원”의 개념에서 찾아보는 것도 무방해 보인다. 윌슨이 전문 철학자가 아니라는 측면에서이다. 아무튼 패트리샤는 이제 철학과 뇌과학 관련 학문들 사이에 “부합”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그러한 통섭적 연구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준다.
끝으로 이 책의 번역과 관련하여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할 분들이 있다. 이 책의 번역에 직접 도움을 주고 교정에도 참여한 김두환(인천대 물리학)교수, 초고를 읽어주고 교정에 도움을 준 강문석 철학박사, 한정규(서울대 대학원생), 이일권(전북대 대학원생), 최승규(단국대 학생) 등에게 감사한다. 또한 철학과 현실사의, 꼼꼼한 원고 교정과 편집을 도와준 편집인들의 노고와, 교정 원고를 여러 번 직접 배달하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으신 전춘호 사장님께도 감사한다.
2014년 7월 인천 송도에서, 박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