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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자손이 없이 죽으면 우리 집안의 긴 핏줄은 끊어지게 된다. 내가 나기 전 우리 집안에는 딸이 둘 있고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은 얼마 후에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집안에 후손이 없는 데다가 어머니는 자꾸 나이를 먹으시니 모두들 퍽 근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밤 어머니는 큰 용이 하늘에서 날아와 자신의 가슴에 뛰어드는 꿈을 꾸고 깨어나서 가족에게 그 얘기를 하였는데, 그것이 나를 갖게 될 태몽이었다. 나는 그 얘기를 어머니한테서 여러번 되풀이하여 들었던 기억이 난다.[4] | ” |
— 이승만의 회고 |
아버지 이경선은 양녕대군(조선 태종의 장남)의 다섯째 서자 장평도정(長平都正) 이흔(李訢)의 15대손으로, 왕족이었지만 계승권에서 밀려나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이승만은 조선[6] 그는 장평도정
왕족으로서의 대우는 장평도정의 손자이자 이승만의 13대조인 수주정(樹州正) 이윤인(李允仁)에서 끝이 났고, 이윤인의 손자이자 이승만의 11대조 이원약(李元約)이 병자호란 때에 무공을 세워 전풍군(全豊君)에 추증되었고, 그 후광을 입은 몇몇 자손들이 무관직에 등용되기도 했으나, 이승만의 6대조 할아버지 이징하(李徵夏)가 음직조선[7]
이승만은 후일 자신의 간단한 일대기를 써서 로버트 T. 올리버
“ | 나의 선조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말아 주십시오.[4] 나의 정적들은 내가 민주제도를 세우려고 하지 않고 왕권을 회복시키려 한다는 자기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나의 족보를 캐내려고 애를 많이 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적은 것은 윤곽에 불과합니다.[8] | ” |
— 로버트 T.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 |
그는 '아버지는 나에게 너는 6대 독자인 줄을 알라고 되풀이하곤 하였다. 그런 탓으로 주위에 가까운 친척이 없다. 그런데 만약 16대 전의 나의 선조가 그렇게 관대하게 상속권을 그의 동생에게 넘겨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고종의 위치에 놓여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고종 치하에서 독립을 빼앗긴 것이다. 그러므로 나와 이씨 왕족과의 먼 친척 관계는 나에게는 영예가 아니라 치욕이다. 그러한 관계로 나는 성을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당장 바꾸어 버리기라도 하겠다.[9]'고 하였다.
로버트 T. 올리버[8] 이승만은 자신이 왕족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껄끄럽게 여겼다. 아버지 이경선은 계보학자이자 당대의 양반 사대부들처럼 여러번 자신의 족보를 아들에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고, 나중에 양녕대군이 태조의 아들인지 태종의 아들인지도 구별 못하였다. 그래서 이승만은 자신의 간략한 일대기를 적어 보낼 때 양녕대군을 태조의 아들[10] 이고 정종에게 양보한 것 이라고 하기도 했다.
이승만의 증조부 이황(李璜)의 대에 한성부에서 황해도숭례문[6] 그의 회고에 의하면 '아버지는 한때 부자였지만 젊은 시절에 모두 탕진해 버렸다. 어머니 말로는 내가 태어날 무렵에는 집에 재산이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부모는 어렵게 얻은 아들에 대한 공부열이 대단하였다.
1879년 퇴직 대신 이건하가 운영하는 낙동서당에 입학하였고, 1885년부터 1894년 이전까지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으며 양녕대군의 봉사손 이근수[6] 도동서당은 한성부
아버지 이경선은 풍수지리에 몰두하여 조상의 묘자리를 새로 찾아 이장함으로써 가문의 재흥을 꾀한다는 생각에 남은 재산을 거의 탕진하고 방랑으로 집에서 일없이 지냈다.[5] 어려서 음죽 박씨 박춘겸(朴春兼)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아들 이봉수가 요절하면서 관계는 소원해졌고 결국 해방 후 최종 이혼한다.
유년시절의 이승만은 집중력이 뛰어났다. 그는 혼자서 몇 시간이고 연을 날리기도 하고, 나비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여 '이나비'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으며[11] 서당 정원에 꽃 심기에 몰두하여 '꽃귀신이 씌였다'는 반갑지 않은 말을 듣기도 하였다고 한다.[11] 한편 이승만은 유년 시절 주변에서 본 일상풍경이 미개하고 미신이 많았다고 회고하였다. 이승만에 의하면 자신이 태어날 당시 사람들은 상당히 미개하고 문을 꽉 닫고 살았다고 했다. '나는 당시 어른들이 중국사람들과 일본사람들을 무슨 뿔달린 괴상한 짐승들인 것처럼 얘기하는 것을 기억한다.[9]'고 했다.
1895년 4월 2일에는 아펜젤러의 배재학당[6] 배재학당에 들어간 이승만은 초기에는 '기독교[11] 그러다 배재학당에서 공부하던 중, 곧 일본1895년 11월 29일 명성황후가 살해당하자 이에 대한 원수를 갚는다는 계획(춘생문 사건[6] 그 뒤 배재학당에 다시 복귀하였다.
1896년 귀국한 서재필[11] 그 후 이승만은 독립협회의 민중운동시기 즉 1898년 만민공동회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등을 만나 자주 교류했는데, 그 중 서재필은 그에게 미국
1896년 11월 30일 배재학당에서 양홍묵 등과 함께 청년단체인 협성회[6] 협성회협성회의 창립회원이자 동지의 한사람인 이승구는 이완용이승구의 아버지 이완용은, '자식이 이승만 패거리와 뭉쳐 다니는 것을 걱정'하여 미국 캘리포니아의 무관학교로 유학을 보내[12] 버렸다. 협성회는 계속 발전하였고, 학업과 협성회 활동을 병행하면서도 이승만은 1897년 7월 배재학당
1897년 7월 8일 정동에 새로 지은 감리교회 예배당에서 배재학당문학 시강으로 한문과 영어의 공개 강독[13] 영어 강독에서 신흥우가 영어 문장을 읽고 한글영어 연설이 시작되었는데, 발음도 유창하거니와 조선의 독립[13]
1898년 1월 양홍묵과 함께 한글판 주간신문이자 협성회의 기관지인 《협성회회보》를 간하고 주필3월 10일 러시아의 이권 침탈을 규탄하기 위해 독립협회(獨立協會)가 종로에서 제1차 만민공동회 집회를 개최하자 이승만은 연사로 참가, 가두연설을 통해 인기를 얻고, 대한제국 정부 외부대신[6] 4월 한국8월 10일에는 이종일[6] 11월 5일 익명의 투서 사건이 발생,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도입하려했다는 혐의를 받고 독립협회의 이상재, 남궁억 등 간부급 17인이 체포되자, 이승만은 배재학당의 학생과 대중을 동원, 이들을 이끌고 경무청과 평리원[6] 11월 26일 고종 황제는 독립협회를 달래기 위해 헌의 6조의 실시를 약속하고, 남궁억 등 50여명을 중추원 의관[6] 이후 영의정[출처 필요]
그러나 12월 23일 고종이 만민공동회 해체로 방향을 바꾸자, 그는 미국인 의사 해리 셔먼[6] 이후 그는 협회의 전단지를 배포하다가 전단지 내용 중 '광무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 주셔야 한다.'라고 쓰인 문구가 문제가 되어 요시찰 대상이 되던 중, 1899년 1월 9일 발생한 박영효 일파의 대한제국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904년 8월 9일
1899년 1월 17일 주미국공사로 근무했던 알렌은 외부대신 박제순1월 30일 독립협회의 동지였던 한글학자 주시경을 만나 그로부터 몰래 건네받은 육혈포를 쏘며 동지 2인과 함께 감옥을 탈출했으나, 서상대[6] 7월 11일 평리원 재판소에 회부, 당시 재판장으로 지냈던 홍종우에게 곤장 100대와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한성감옥최정식[6] 본래 성격이 성급하기로 유명했던 이승만은 오랜 감옥생활로 성격이 더 굳어지는 계기가 되었다.[11] 그는 옥중 생활에서 성경책을 통해 영어한성감옥독립정신'을 1904년[14] 한편 이승만은 옥중에서 어른 죄수와 어린이 죄수를 나뉘어서 글을 가르치고, 기독교
독립정신은 총 52편으로 이뤄졌고, 크게 근대 역사관과 정치관으로 이뤄진 앞부분과 당시 시대상황을 해석한 뒷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당시 독립정신은 대중과 지식인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출간이 되지는 않아 필사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돌려봤다고 한다. 이후 이승만이 도미한 1910년이 되어서야 LA에서 첫 출판본이 나올 수 있었다.
이승만은 이 책에서 입헌군주제의 도입을 주장했지만 실제로 해외 사례를 언급하는 부분 상당수가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대통령제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차 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이 실제로 원한 제도는 대통령제였지만, 집필 당시 사형수였다는 신분상의 이유로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는 척 하는 게 아닌가 하는 해석이 있다.[15]
이승만은 독립협회[16]'는 주장이다. 그런 거짓말의 증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허정은 그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투옥당한 뒤 고문당한 것을 진술했다. 허정은 자신이 황성기독교회관 청년부[17] 시절에 이승만이 안면 경련을 일으켰던 것을 진술했다. 허정안면 경련은 독립협회[18]'고 한다.
옥중에서 영한사전을 집필했고, 1900년 8월, 한성감옥에서 청·일전쟁1917년에 미국 하와이[6]
1904년 7월 8일민영환, 한규설 등이 그의 사면을 위해 노력한 결과, 러일 전쟁이 발생하면서 그는 8월 9일[6] 민영환과 한규설고종 황제를 만나보라는 민영환의 요청을 거절했고, 고종
1904년 8월 민영환, 한규설 등의 건의로, 예정이 없던 특사조치로 출옥한 이승만은 민영환[19]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고종[11] 그러나 왜 고종군주들 가운데 가장 허약하고 겁쟁이 임금 중의 한 사람'이라며 나라를 망쳐버린 고종[11] 1904년 11월 4일 일본 고베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시카고를 거쳐 워싱턴D.C.
1905년 1월 15일 미국 신문 "워싱턴포스트" 지와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의 한국[6] 2월 워싱턴 D.C의 조지워싱턴 대학교[6] 2월 20일 이승만은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적이 있던 미국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를 찾아가, 그의 주선으로 존 헤이 미국 국무장관1882년[6] 4월 23일장로교회의 류이스 햄린[6]
1905년 8월 윌리엄 태프트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와 미 의원 워즈워스를 대동하고 아시아 수행길에 하와이의 호놀룰루시어도어 루스벨트[11] 1905년 8월 4일 뉴욕시 동부 로즈벨트 대통령 별장에서 이승만과 만난 루즈벨트 대통령은 밀서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귀국을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건 할 용의가 있다"라고 답변했다. 다만 외교적인 일이므로 밀서가 아닌 위싱턴의 한국공사관을 통해 제출하라고 권유했다. 이승만은 당시 공사인 김윤정[20] 9월 10일 대한제국 황실 시종무관장 민영환민영환은 을사조약[6]
1905년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는 대한제국을 방문, 고종 황제를 예방하게 되는데, 고종은 미국이 한국의 독립에 우호적인 입장으로 판단하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으나 앨리스 루스벨트[21]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끝내 이승만을 만나주지 않았다. 이미 태프트를 보내 일본 총리 가쓰라와 식민지 분할에 합의한 뒤였다. 가쓰라-태프트 밀약[11] 밀사활동 실패에 실망한 이승만은 미국에 남아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다.
이후 이승만은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철학1907년에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Bachelor of Arts)를 받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1910년에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22] 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Doctor of Philosophy)를 받았다. 학비나 후원자가 없던 이승만은 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였다. 그의 처지를 알게 된 지도교수가 학교에 요청하여 장학금과 박사학위달러가 없어서 논문은 2년 후인 1912년
1908년 덴버의 감리교회장인환·전명운 의사가 1908년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하던 친일파 미국인 더럼 스티븐슨을 오클랜드전명운, 장인환[23][24] 당시 이승만은 이 사건에 대해 미국[25] 또한 후에 그는 임시정부의 주요 수반이 되었던 까닭에, 그가 전명운에 대한 변호를 거부한 것은 오늘날 비판받기도 한다.
이승만은 서구적인 교육을 받은 영향으로 그의 이름을 성보다 앞서 사용하는 서양식 이름을 썼다 (Syng-Man Rhee, 또는 승만 리). 당시 박사(博士)가 거의 없었던 한국에서 이승만은 '박사'의 대명사가 되었고, 1948년 8월 대통령이 된 뒤에도 사람들은 그를 이승만 대통령1908년 8월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시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자회의'(愛國同志代表者會議)에 이상설[26]
1910년 3월 국민회YMCA에서 교사로서, 그리고 이어 YMCA 청년부 간사로 취임하여 기독교를 선교하였는데[11] 감리교
1911년에 중국 상하이와 일본 도쿄를 거쳐, 1912년[27] 1913년에 귀국을 시도했으나, 아버지 이경선으로부터 귀국하지 말고 미국
1913년 이승만은 국민회와 박용만의 초청으로 미국 네브래스카에서 하와이2월 3일 이승만은 박용만과 함께 하와이한성감옥[28] 이승만은 105인 사건을 폭로하는 《한국교회 핍박》을 출간하였고 그해 8월 미국 하와이 감리교회한국어와 한문[6]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감리교 부속의 한인중앙학원장으로 재직하면서 교육 활동과 실력운동 양성에 사업을 전개했다. 그는 감리교[29]
그리고 '태평양 잡지'를 창간해 '청일전기' 등의 홍보물을 간행하는 등 언론 출판활동을 전개했다. 이들 학생과 후원자들은 뒷날 이승만 계열 또는 후원자가 되어 하나의 파벌을 이루었고, 뒷날 대한인 동지회[29]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이승만은 하와이섬의 마운틴 뷰에서 숯 사업을 시작하기도 있다.[30]
한편, 이 무렵 1914년 박용만은 국민군단1915년 6월 17일[31]
1915년은 국민회[32] 하와이 한인들은 국민회에 의무금을 납부하였고 국민회는 당시 최대 인력과 자금력을 가진 독립운동국민회로베르타 장이 수집한 재미한인[28]
감리교 교단과 수시로 마찰을 빚어오던 중 1915년 6월에는 자신이 운영하던 '한인중앙학원'을 미국
1917년 이승만은 하와이 주 호놀룰루10월 29일[6]
1918년 7월 29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수립된 '신립교회' 예배당12월 1일 정한경, 민찬호 등과 함께 대한인국민회[6] 12월 23일[28]
1918년 박용만은 일본군 선박 출운호를 폭파하려 한다는 혐의를 받고 하와이 법정에 서게 되었는데 신한민보[28]
1918년 11월 독일[33] 서재필 역시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미주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평화회의에 이승만 박사, 민찬호 목사, 정한경을 파견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은 미국 시민이 아니므로 여권을 얻을 수 없었다. 이들은 일본 국민인 까닭에 마땅히 일본 대사관에서 여권을 받아야 한다는 게 국무부의 해명이었다.[33]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을 위한 파리 강화회의가 예정되고, 미국 대통령인 우드로우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민족자결주의
1918년 12월의 어느 날 미국으로부터 이승만이 보낸 밀사가 송진우와 김성수[34] 이승만이 보냈다는 그는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론의 원칙이 정식으로 제출될 이번 강화회의를 이용하여 한민족의 노예 생활을 호소하고 자주권을 회복시켜야 한다. 미국에 있는 동지들도 이 구국운동을 추진시키고 있으니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주기 바란다."는 내용의 밀서를 전해주었다.[34] 이승만은 밀서를 통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3월 1일 미국 현지에서 3·1 만세 운동3·1만세 운동 이후, 3월 21일 러시아령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노령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에 선출되었고 이승만은 그 사실을 4월 5일에 미국 워싱턴1919년 4월 1일 기호 지방에서 설립되려다가 해산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도 국무총리4월 7일 이승만은 노령 임시정부[6] 1919년 4월에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혹은 집정관 총재
4월 14일 3·1 만세 운동의 열기가 미국에 번져 한인자유대회가 미국 독립기념관이 있는 필라델피아워싱턴[31] 3·1 운동 소식을 접한 서재필4월 13일부터 4월 15일4월 16일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
1919년 4월 15일 길림성에서 선포된 고려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로 추대되었고, 4월 17일 평안북도에서 설립된 신한민국임시정부4월 19일 인천에서 수립된 조선민국임시정부1919년 4월 23일에는 경성에서 한성임시정부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워싱턴 D.C.[36] 각지의 임시정부의 총리, 수반으로 추대되자 1919년 4월 이승만의 목에 일본 제국
6월 14일부터 6월 27일 그는 '대한공화국' 대통령 이름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국가원수들과 파리 평화회의 의장 조르쥬 클레망소7월 4일7월 17일
8월 이승만은 한성임시정부 집정관 총재 사무소를 한국 위원회8월 15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대한독립혈전기(大韓獨立血戰記)를 발간했고, 8월 16일 대한인국민회가 연 이승만의 집정관 총재상하이에 알려지면서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는 논란이 발생하였고, 논쟁이 격화되자 8월 25일 임시정부의 내무부 총장 안창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