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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돈 교수님 구원론을 ‘보리밥에 청산가리 1% 섞은 쥐약’으로 ‘음해’하신 정이철 목사님,
정이철 목사님 구원론은 ‘100% 다른 복음’입니다.
사계四季 (2018.01.06. 08:59)
다음 댓글들은 {개혁주의 마을} 카페지기 그레이스 님 {페북} 담벼락에서 옮겨오는 댓글들입니다. 편의상, 제 이름 ‘박채동’ 대신에 {개혁주의 마을} 별명 ‘사계四季’를 씁니다. ‘그레이스’ 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댓글을 쓴 시간은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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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박영돈 교수님 말과는 매우 다릅니다. 박영돈 교수님은 성화가 일어나지 않고 있으면 자신의 구원을 다시 점검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화가 얼마나 일어나야 하는지를 놓고서는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그레이스
성화 시작이라는 게 어느 정도의 성화에 도달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잖습니까? 전 이 글과 박영돈 목사님 주장이 대치된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레이스
성화를 갈망하는 마음조차 없다면 가짜 구원이죠.
사계四季: <박영돈 교수님 구원론을 두고 “쥐약”이라는 ‘극단의 정죄’를 서슴지 않으신 정이철 목사님, 질문 드립니다.>
박영돈 교수님께서는 {페북} 자신의 담벼락에 ‘2017년 12월 28일 오후 4시 31분’에 올리신 글에서 20세기 개혁신학자들께서 “20세기 개혁신학의 보물”로 높이시는 ‘결정(확정, 근본) 성화’, 고故 존 머레이 목사님께서 해박한 성경 원어 지식으로 밝히신 ‘순간 단회 중생 시 확정(단회, 결정) 성화’를 언급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레이스 님이 올리신 박영선 목사님 위 글은) 박영돈 교수님 말과는 매우 다릅니다. 박영돈 교수님은 성화가 일어나지 않고 있으면 자신의 구원을 다시 점검하라고 합니다.” 하신 정이철 목사님, 다음 ‘①, ②, ③과 같은 주장’을 놓고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00%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쥐약과 같이 1% 그르다’고 생각하십니까?
① 믿음과 선행은 굳게 결합돼 있다.
②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 하실 때에 행위도 함께 주신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거룩하다)고 칭하실 뿐만 아니라, 칭의와 함께 그리스도의 의로움(거룩함)도 나눠주신다.
③ 그러므로 우리는 선행(성화) 없는 믿음이나 선행(성화) 없이 유지되는 칭의는 꿈도 꾸지 않는다.
물론, ‘주장 ①, ②, ③’은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이신칭의론’에 적힌 ‘고故 존 칼빈 목사님 주장’입니다. 그리고 이 주장을 그대로 받드신, ‘박영돈 교수님 주장’입니다. 만약 ‘①, ②, ③과 같은 주장’을 ‘100%로 옳다’고 생각하신다면, 당연히 “성화가 일어나지 않고 있으면, 자신의 구원을 다시 점검하라.” 하신 박영돈 교수님 권면은 ‘옳은 권면’이 아닙니까?
바꿔 말하면, “오직, 구원은 내 행위(공로)가 아닌 하나님께서 값없는 은혜로 주신 믿음으로 얻는다. 나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공로(의義)를 나에게 덧입혀(전가해) 주셔서 나를 의롭다고 선언해 주신 사실을 믿는다. 그러므로 내 행위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공로(보혈)를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은 나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하나님 자녀다.”고 고백하면서도 ‘성화(행위, 선행)’가 없으면, “선행 없는 믿음이나 선행이 없이 유지되는 칭의는 꿈도 꾸지 않는” 그에게 “자신의 구원을 다시 점검하라.”고 권면하는 일은 ‘무척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도대체 박영돈 교수님 구원론을 두고 “쥐약”이라는 ‘극단의 정죄’를 서슴지 않으신 정이철 목사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도 행위가 없는 신자, ‘그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하신 바울 사도 말씀을 가지고 어떤 권면, 어떤 설교를 하시는가, 무척 궁금합니다.
정이철 목사님이 가지고 계시는 {성경}에는 ‘고린도후서 13장 5절 상반절 말씀’은 없습니까?
정이철
저는 단지 벤자민 오가 즐겨 이용하는 그 부분이 문제가 있어서 쥐약이라고 했습니다. 아주 작은 분량의 독 때문에 먹는 짐승을 죽인다는 뜻입니다. 교수님이 그 부분을 사과하시면 끝납니다. 옳은 말로 틀린 말을 덮을 수는 없습니다. 박 교수님은 행위구원 이단 아닙니다.
사계四季
“교수님이 그 부분을 사과하시면 끝납니다.”??? 행위구원론자 벤자민 오 목사(?)가 자신의 행위구원론에 맞춰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확증편향’으로 박영돈 목사님 강의를 ‘발췌 편집’한 일을 두고, 박영돈 교수님께서 사과하셔야 한다구요? 속된 말이어서 덕스럽지 못한 말입니다만, “지나가는 개가 웃습니다.”
박영돈 교수님께 사과를 요구하실 일이 아니라, 사과를 요구하는 그 시간에 ‘발췌 편집한 일’을 들춰내 ‘벤자민 오 목사(?) 거짓됨, 거짓증거’를 비평하시면 그만입니다.
정이철
벤자민 오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박 교수님 말을 그대로 인용했을 뿐입니다. 그 부분을 놓고는 상식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사계四季
“벤자민 오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박 교수님 말을 그대로 인용했을 뿐입니다.”??? 이른바 “바른 믿음”이라는 슬로건으로 ‘이단 비평’ 사역을 하시는 분이 ‘이단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확증편향으로 성경에 적힌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다.’는 ‘기초 상식’을 모르시나, 봅니다.
“그 부분을 놓고는 상식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지금 벤자민 오 목사(?) ‘확증편향’을 언급하며 정이철 목사님을 꾸짖고 있는 저는 ‘상식이 없는 사람’, ‘골빈 사람’인가, 봅니다.
정이철
이단이라고 전부 상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계四季
지금 이걸 반론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사계四季
박영선 목사님 강설을 가지고 박영돈 목사님 구원론을 반대하는 글을 {페북} 정 목사님 담벼락에 올려 여러 사람을 ‘현혹’하고 계시는데, 박영선 목사님 구원론을 얼마나 아십니까? 왜 벤자민 오 목사와 똑같은 못된 행위를 되풀이하십니까?
참고로, 저는 남포교회 평신도입니다.
정이철
그만 합시다. 박영돈 교수님은 성화를 잘못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행위구원 이단이 좋아라 하면서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저는 그만 응하겠습니다.
사계四季
박영돈 교수님께서 성화를 잘못 강조하셨으면, 그래서 박영돈 교수님 구원론이 “1% 쥐약”이면, ‘헛된 믿음을 두고 이야기하시는 {복음이란 무엇인가?}와 {구원의 신앙}’을 쓰신 고故 김홍전 목사님 구원론은 ‘99% 쥐약’입니다. 또한 김홍전 목사님 제자이신 황영철 목사님, 황영철 목사님께서 독립개신교회 성약교회 평신도 시절에 쓰신 {구원과 윤리} 역시 ‘99% 쥐약’입니다. ㅡ‘황영철 {구원과 윤리}’에 적힌 글 하나를 바로 아래 댓글란에 옮깁니다. ㅡ
아무튼 ‘창피를 아는 목사님’이시라면, 박영선 목사님 구원론을 가지고 박영돈 교수님 구원론을 ‘왜곡 매도 음해’한 글, 정이철 목사님 담벼락 글을 삭제하시기 바랍니다. 저에게 이곳에서 ≪도대체 박영돈 교수님 구원론을 두고 “쥐약”이라는 ‘극단의 정죄’를 서슴지 않으신 정이철 목사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도 행위가 없는 신자, ‘그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하신 바울 사도 말씀을 가지고 어떤 권면, 어떤 설교를 하시는가, 무척 궁금합니다. 정이철 목사님이 가지고 계시는 {성경}에는 ‘고린도후서 13장 5절 상반절 말씀’은 없습니까?≫라는 ‘비꼼’으로 반론을 당하셨으니, 삭제하시기를 바랍니다.
삭제한 까닭을 밝히며 박영선 목사님 구원론을 가지고 박영돈 교수님 구원론을 왜곡 매도 음해한 일을 정이철 목사님 페친들에게, 박영돈 목사님께 사과하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창피를 아는 목사님’이시라면, ‘화인 맞지 않은 양심’을 가진 목사님이시라면….
그러지 못하시겠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도 행위가 없는 신자, ‘그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하신 바울 사도 말씀을 가지고 어떤 권면, 어떤 설교를 하시는가, 무척 궁금합니다. 정이철 목사님이 가지고 계시는 성경에는 ‘고린도후서 13장 5절 상반절 말씀’은 없습니까?≫라는 제 궁금증을 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정이철 목사님,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는 바울 사도 말씀은 정이철 목사님 {성경}에는 없는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그 {성경}은 ‘100% 쥐약 {성경}’입니다.
사계四季: 황영철 <‘값싼 복음을 전하는 까닭으로 세상에게 짓밟히고 있는 한국 교회’에 루터 선생이 살아있다면>
그러므로 교회가 사회에게 비웃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 있는 우리 교회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빛과 소금 노릇을 못하고 있는 상태인가? 아니면, 사람들에게 밟히고 있는 상태인가? 이런 상황의 원인을 여러 가지 사회적 측면에서 반성해 볼 수도 있지만, 근본 까닭은 결국 하나님 말씀을 오해하고 있거나 아니면 부족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근거해 오늘날 널리 퍼져 있는 그리스도인 윤리적 삶과 관련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오해와 부족을 구원과 관련해 반성해 보기로 하자.
먼저 지적해야 할 문제는 많은 신자들이 “사람은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구원과 행위는 무관하다.’는 뜻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직 믿음!”이라는 표어는 종교개혁의 위대한 외침이었다. 또한 하나님 말씀이 올바로 전파되지 않고 많은 사람이 흑암 가운데 있을 때 신선하고 새롭게 전파된 메시지였다. 그러나 이것은 루터나 어떤 종교개혁자들이 새로 만들어낸 표어가 아니었다. 이미 성경에 기록됐고, 주님의 교회가 처음부터 믿어오던 바로 그 내용이었다. 루터나 종교개혁자들은 단지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어서 그 내용을 그대로 재발견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읽고 이해하기 시작하자 인류 역사에 큰 획을 긋게 됐다. 바로 종교개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만약 루터가 오늘날 살아서 종교개혁을 일으킨다면 루터 표어는 “사람은 행위가 없는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야고보 말이 될 것이다. 물론, 이 두 표어는 서로 상반된 표어가 아니다. 동일한 진리를 서로 다른 면에서 진술한 것뿐이다.
그러면 오늘날 루터가 살았다면 외쳤음직한 야고보 말이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문자 그대로 “행위가 없는 믿음은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행위 구원’을 가르치는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루터는 ‘이신칭의’ 가르침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간주한 나머지 [야고보서]를 좀 무시한 듯하다. 물론, 이 태도가 배울 만한 태도는 아니다. 그럴지라도 당시 상황을 미뤄 볼 때, 그런 부족이 루터의 위대성을 상쇄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루터의 통찰력이라면, 오늘날은 분명히 루터는 도리어 야고보 가르침을 들고 나왔을 법하다.
* 황영철 {구원과 윤리} (서울:도서출판 대장간, 1991)에서. *
사계四季
아 참,
박영돈 교수님 구원론이 “1% 쥐약”이면, 칼빈 목사님께서 ‘구원 받지 못할 헛된 믿음이 아닌 참된 믿음이란 무엇인가, 구원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3권} [2장]’를 논하신 뒤 ㅡ‘이신칭의’ 앞서ㅡ ‘성화의 삶: {3권} [3장, 6장~10장]’을 논하신 다음에 ‘이신칭의: {3권} [11장~18장]’를 논하신 {기독교 강요}, 칼빈 선생님 구원론은 ‘100% 쥐약’입니다.
사계四季
{개혁주의 마을} 카페지기 그레이스 님, 이 글 삭제하지 말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사계四季 <창피도 모른 채 화인 맞은 양심을 계속 자랑하시는 정이철 목사님, ①>
“바른 믿음”이라는 슬로건으로 ‘이단 비평’ 사역을 하는 분이시기에, 또한 [정보]를 보니 제 모母 교단 예장 합동 총회신학교인 총신신대원을 졸업하신 목사님이시기에 이에 한 가닥 믿음을 갖고 ≪‘창피를 아는 목사님’이시라면, ‘화인 맞지 않은 양심’을 가진 목사님이시라면…….≫ 말을 써 가면서까지 ‘벤자민 오 목사와 똑같은 못된 짓으로 박영선 목사님 글을 발췌해 박영돈 교수님 구원론과 박영선 목사님 구원론이 다른 것으로 음해하며 박영선 목사님 명예를 훼손한 글’, <박영돈 교수님 말>을 삭제하실 것을 권면 드렸건만, 제 권면은 소처럼 우직한 정이철 목사님에게 속담대로 “쇠귀에 경 읽기”일 뿐이군요.
신대원에서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평신도인 저에게 반론을 당하시고서도,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는 바울 사도 말씀에도 정신을 못 차린 채, 한 술 더 떠서 오늘 아침 {바른 믿음}에 <박영돈 교수님 말>을 업그레이드 한 글, <박영돈 교수처럼 성화를 강조해 나오는 것이 성화일까?>를 올려 저를 ‘분노’하게 만드시는군요. 왜 일을 이처럼 키우십니까?
정이철 목사님, 총신신대원에서 도대체 어느 교수님께 구원론을 배우셨습니까? ‘제가 존경하는 서철원 목사님’ 지도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으신 고경태 목사님과 친하신 걸 보니, 서철원 목사님께 배우셨습니까?
“박 교수님은 행위구원 이단 아닙니다.”구요??? 그런데 {페북} 정이철 목사님 담벼락 글, <박영돈 교수님 말>에 ‘좋아요’를 누른 제 페친 목사님 두 분이 계시는군요. 물론, 한 분은 고경태 목사님이십니다. 또 한 분은, 저를 경악하게 만든, 전주대학교 교목이신 Paul Han 목사님이십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세어 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이 글에 달린 댓글은 제가 여태껏 {페북}에서 못 봤던 댓글 수, 전무후무한 숫자라는 점이었습니다.
더더욱 저를 경악하게 만든 사실은, ‘박영돈 교수님’이라는 존칭까지 바라지 않으나, ‘박영돈 교수’ 혹은 ‘박영돈 목사’라 하지 않고 “박영돈은”이라고 칭하는 목사님들도 계신다는 점이었습니다. 한 분은 [정보]란에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설교학 박사 전공. 고려신학대학원에서 B.E.P 전공”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신 David Young 목사님이십니다. 또 한 분은 “박영돈하고 계모임 하세요.”라는 댓글을 쓰신 강종수 목사님이십니다.
사계四季 <창피도 모른 채 화인 맞은 양심을 계속 자랑하시는 정이철 목사님, ②>
전무후무한 댓글들 가운데 “(박영돈은) 단도직입적으로 행위 구원론자입니다.”라는 댓글이 있습니다. David Young 목사님 댓글입니다. 제 반론으로 이곳에서 “박 교수님은 행위구원 이단 아닙니다.”고 하셨으면, David Young 목사님 이 댓글에 오늘 아침에라도 “박 교수님은 행위구원 이단 아닙니다.”는 댓글을 쓰시는 게 ‘이신칭의를 받은 신자’로서, ‘이신칭의’를 가르치는 목사로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설교하는 목사로서 ‘바른 태도’가 아닙니까?
이런 옳지 못한 태도가 이른바 “바른 믿음”에서 나오는 행위입니까? 아니면, ‘화인 맞은 양심’에서 나오는 행위입니까? 제발, “바른 믿음” 운운하시기 전에 불신자도 가지고 있는 ‘창피’를 아시기를 바랍니다.
밤늦게까지 {개혁주의 마을} 카페지기 그레이스 님 {페북} 담벼락을 계속 번잡케 하는 불편함 때문에, 고경태 목사님이 운영자로 계시고 강종수 목사님이 회원으로 계시는 카페, {Daum} 카페 {개혁주의 마을}에서 이 문제를 계속 거론하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이에 앞서, 정이철 목사님께 질문 하나 드립니다. 다음과 같은 문답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르다’고 생각하십니까?
≪문: 그렇다면 선을 행함이 없이 단지 믿기만 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까?≫
≪답: 아닙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영접하는 것이요 그분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무흠한 공로로써 우리를 죽음에서 구출해 내시고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성령님으로 우리를 중생케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도록 만드십니다.≫
사계四季 <창피도 모른 채 화인 맞은 양심을 계속 자랑하시는 정이철 목사님, ③>
물론, ‘박영돈 교수님을 “박영돈”으로 칭한 David Young 목사님과 강종수 목사님’과 정이철 목사님은 제가 인용한 ‘요리문답’을 두고 소처럼 우직 미련하게 “그르다.”고 대답하셔야만 합니다. {바른 믿음}에 <친근한 정이철 목사와 존경하는 박영돈 교수님 사이에서>를 올리신 고경태 목사님, [박영돈 교수의 99% 밥 1%의 독으로 만든 쥐약 같은 칭의론] 댓글란에 jtbc 기사 <‘청산가리 6천 배’ 협죽도, 학교 앞 산책로 도처에 깔려>를 링크하신 고경태 목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른바 “개혁 신학”을 전공하신 목사님들이 언제까지 ‘이단 구원파 신학을 낳는 값싼 복음’을 옹호하시려는지, 그것도 이분들 가운데 조직신학 박사 학위를 가진 목사님도 계시는데, 답답하기만 합니다. 또한 한심하기도 합니다.
“다음과 같은 문답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르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제 질문에 숨은 ‘함정’을 정이철 목사님이 눈치 채셨다면, 앞으로 더 이상 박영돈 교수님 구원론을 가지고 ‘시비’ 걸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불신자도 가진 ‘창피’도 모른 채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속담과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대로 그저 ‘소처럼 우직 미련함’을 자랑하시는 정이철 목사님,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저 같은 평신도’보다 더 ‘짧은 신학’을 가지신 정이철 목사님이 제 질문에 숨은 ‘함정’을 눈치 채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힌트’는 드립니다.
제가 인용한 요리문답은 ㅡ“사랑(행함)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이야기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으로 보신 루터 선생님과 다르게ㅡ [로마서]와 [야고보서]를 똑같이 귀하게 여기신 우리 개혁 신앙의 선조께서 작성하신 요리문답입니다. 즉, 개혁 교회 요리문답입니다.
사계四季 <창피도 모른 채 화인 맞은 양심을 계속 자랑하시는 정이철 목사님, ④>
다시 인용합니다.
≪문: 그렇다면 선을 행함이 없이 단지 믿기만 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까?≫
≪답: 아닙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영접하는 것이요 그분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무흠한 공로로써 우리를 죽음에서 구출해 내시고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성령님으로 우리를 중생케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도록 만드십니다.≫
바로 이 요리문답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를 받고 의지하는 믿음은 칭의의 유일한 수단이다. 그렇지만 이 믿음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 안에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다른 구원의 모든 은혜들과 항상 함께 있다. 또한 그것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고백하며 “거룩함이 없이는 주를 보지 못한다.”고 고백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갈라디아서]에서 ‘이신칭의’를 논하신 뒤 “은혜를 더하려면 더욱더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반법주의, ‘이신칭의 진리를 오해함으로써 생기는 반법주의’를 염려하는 경계심으로 바울 사도께서 하신 말씀,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진리, 바울 사도 가르침을 받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모태가 된 것입니다.
제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아야만 한다.”는 바울 사도와 같은 심정으로 ‘이단 구원파 신학을 낳는 값싼 복음’, ‘다른 복음’을 경계하신 박영돈 교수님을 두고 이제 그만 시비를 멈추시기를 바랍니다. 평신도보다 ‘짧은 신학’으로, 제 ‘분노’를 더 이상 자극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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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오늘 아침 {페북} 그레이스 님 담벼락 다른 글, 댓글란에서 나눈 댓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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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진짜 보이고 들린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붙드시지 않는 불행한 영혼의 상태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다행이지만, 허접한 영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계四季
“역사적 전통신학을 무시하지 말자.”는 그레이스 님 권면은 ‘이단들 주특기인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확증편향’에 사로잡히신 정이철 목사님 눈에는 안 보이시죠? 칼빈 선생님 구원론을 받드신 박영돈 교수님, 그분 구원론을 “쥐약”으로 ‘음해’하심으로써, 어거스틴 선생님 신학을 이어받으신 칼빈 선생님, “역사적 전통신학”의 큰아버지 칼빈 선생님마저 ‘이단’으로 만드신 정이철 목사님, 제가 <창피도 모른 채 화인 맞은 양심을 계속 자랑하시는 정이철 목사님, ②>에서 인용한 요리문답, 그 요리문답 작성자를 아십니까?
정이철
박채동 님, 더 이상은 안 되겠습니다. 절친하는 것을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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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친”??? 차단한다는 뜻입니다. 정이철 목사님이 “절친”이라 하셔서 순간 착각했습니다. ‘내가 정이철 목사님과 페친이었나?’ 하고 말입니다.
정이철 목사님이 저에게 페친을 신청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바른 믿음}에 적힌 정이철 목사 글 몇 개를 읽고는 ㅡ{바른 믿음}에 소개한 ≪정이철 목사는 총신대학(B.A),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아세아연합대학 대학원(Th.M),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을 졸업했다. 그리고 Theological Seminary(Th.M)에서 수학했다.≫는 약력이 뜻하는 대로ㅡ ‘학벌은 좋지만 모교들을 욕 먹이는 편협한 신학으로 극단의 정죄를 일삼는 목사님이시구나.’ 판단하고 페친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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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요리문답} [제126문답]
목사: 그렇다면 선을 행함이 없이 단지 믿기만 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까?
아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영접하는 것이요 그분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무흠한 공로로써 우리를 죽음에서 구출해 내시고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성령님으로 우리를 중생케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도록 만드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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