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창 1:1).
창세기 1:1의 해석에 있어 본문의 진의에 접근하는 단순한 방법은 문자적 해석이다. 세대주의에서 핵심 모토로서 지향하는 문자적 석의주의라는 것이 성경의 시작 구절인 창 1:1에서만큼 요긴한 데가 없다고 나는 이야기하는 것이다.
성경이 "철학과 과학"에 대해 규정하는 바는 아예 부정적인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적인, 성경에 따르는 사고방식과 생활 준칙들을 자신에게 적용하고 살아야 하지만 성경적 "철학"이 필요하지는 않다. 철학은 기본적인 해석이나 적용을 떠나서 그것이 형이상학적 개념을 덧붙여서 사상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신학은 철학의 일종이 아니라 성경 해석의 규범을 확립하고 이단들을 억제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점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창세기 1:1을 철학적,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한 나머지 이 구절의 "하늘"을 공간, "땅"은 물질로 나누어 하나님께서 공간과 물질을 만드셨다고 해석하는 것이 대표적인 문제 해석이다. 나는 그렇게 애초에 보지 않고 있었지만 평면 지구에 대한 개념을 확립하기 전, 본 구절을 섣불리 해석하지 못하고 유보한 채 다음으로 넘어갔던 것이 사실이다. 왜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 밖에 없었는지 이야기하겠다.
"태초에", 이것은 시간의 창조를 이야기하는 것인데 이해하기에 무리가 없는 단어이다. 영어로 "In the beginning", 영원이라는 개념만 존재하던 하나님의 시간표에 세상의 시간표가 등장했고 그것이 성경 66권의 시작을 알리는, 또한 세상의 시작을 알리는 "태초"이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어떤 신학자나 철학자들은 "태초에"를 시간, "하늘"을 공간, "땅"을 물질로 해석하여 시간, 공간, 물질의 3요소가 창조되었다라고 이 구절을 나름 해석한다.
나는 3이라는 숫자, 3요소라는 부분이 삼위일체의 속성이고 세상 만물의 이치가 삼원소로 이뤄진 많은 케이스가 있으므로 이러한 해석이 일견 타당하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겠다. 그러나 성경의 제1구절이 철학 개론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현상적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는 구절이지 형이상학적인 소리만 하고 넘어갈 내용이 아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지 생각을 해 보라. 하늘과 땅이 창조되었다. 어떤 하늘과 어떤 땅을 말하는 것인가? 여기에서 현대적 우주론과 지구 둥글설에 입각한 모든 지식이 머리 속에 입력되어 있는 표준적인 대학교육 받은 지성인은 말문이 막힐 것이다. 그 사람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배운 적이 없고 "하늘"(지구의 대기권이라 일컫는 구간)이 지구라는 공간을 두르는 얇은 공기층 정도이지 전우주적인 견지에서 봤을 때 의미가 없는 말이라는 것을 학습했다. 그에게 "하늘"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그것이 무중력과 진공의 우주공간이겠거니 대답하거나 결국 대답이 궁하면 철학자들의 단골 대답대로 "시간, 공간, 물질" 이야기를 하기 시작할 것이란 말이다.
내가 이제부터 설명하는 내용들은 창세기 1장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핵심적 의미들을 간과하지 않고 문자적 해석을 가능케 하면서 여러분의 이성을 만족시키는 내용일 것이다.
여기서 말씀하는 "하늘"(heaven)은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지구 대기권이 아니다. 또한 우리가 개념적으로 알고 있는 무한한 우주 공간 따위도 아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인들이 머릿속에 그려보는 그 천국, 소위 하늘나라도 아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는 지금 우리가 발딛고 서 있는 땅과 붙어 있지 않고 떨어져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 무슨 하늘이냐고 할텐데 간단히 이야기한다. 그냥 "하늘"이다. 그 범위에 있어서 제한이 없었다고 보는 게 옳은텐데 왜냐하면 6절에부터 등장하는 "창공"(firmament)은 덮개가 있는 형태를 말하고 1절의 하늘은 영역을 규정하는 게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과학에서 이야기하는 무한대의 우주 공간이라는 따위의 개념은 우주 공간에 선사할 호칭이 아니라 창세기 1장 1절의 그 "하늘"에 붙여져야 할 말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 구절의 "하늘"에 대해서 정의할 수 있는 말은 단지 이것이다. 그 하늘은 분명 "지구"를 위해 존재한 것이었지 별도의 의미가 없었다. 땅, 곧 지구가 천국이었고 하나님의 계신 처소였고 보좌였으며 모든 사건들의 중추였다.
현재의 창공도 "지구"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별들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혹은 블랙홀이나 성운들, 은하계들을 위해 무한대의 우주가 있어야 되는 게 아니다. 하늘에 있는 작은 조명들, 곧 별들은 땅, 곧 우리의 영역을 비추기 위해 하나님께서 창공 위에 제정하신 법도들이다.
1절에서는 별들과 해와 달 등에 대한 언급이 없고 암시도 없다. 1절의 문장이 간략하여 혹 생략된 것 아니냐 생각하겠지만 생략되기에는 너무 중차대하기에 생략이 아니라 없었다 함이 옳다. 그렇다면 태초의 평평 지구는 무엇이 조명 역할을 했는지 생각해 봐야겠는데 하나님 자신께서 빛으로서 그 공간을 비추고 계셨다고 함이 옳겠다. 3절에서 "빛이 있으라"고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빛은 그 뒤에 존재한다.
땅은 형체가 없고 공허하며 어두움이 깊음의 표면에 있으며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에서 거니시더라(2절).
2절에서 상황이 급반전하기 때문에 간격이론을 믿는 측에서는 우주적 대홍수를 이야기하고 믿지 않는 쪽에서는 원래 창조 과정이 이렇게 진행된 것이라 주장한다. 물론 간격이론은 백번 타당하고 격변과 같은 것이 있었다. 물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궁금해할 사람이 많을텐데 사실 물들은 어딘가에 이미 창조되어 존재했어야 한다. 태초의 지구에도 물이 있었을 것인데 구체적으로 하늘 위의 어떤 물인지 5대양과 똑같았는지 아니면 다른 형태로 존재했는지는 모른다. 그 물들은 홍수를 이루어 태초의 산과 골짜기와 강과 바다를 형체 없이 덮어 버리고 하늘까지 채웠다. 이 홍수가 피조 세계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계신 공간은 불가피하게 firmament, 곧 창공이라 불리는 구획 위로 분리되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물들의 홍수 위에서 재창조를 시작하시는데 그 작업은 단순하게 물들을 위 아래로 분리하는 데서 출발한다.
"형체가 없고 공허하며", "어두움", 모두 부정적인 표현들이고 창조의 아름다운 과정으로 보기에 너무나 무리가 있다. 간격이론을 안 믿는 측에서는 이런 표현들을 하나의 시적이고 감상적인, 은유적인 문학적 표현으로 간주하고 넘기려 하는데 아무렴 하나님께서 창조를 하시면서 이런 부정적인 것들을 자신의 역사에 대입하여 말씀하시지는 않는다.
1:1에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하나님 자신의 영역과 함께 있었고 2절 이후부터는 분리되어 있다.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사는 곳의 창조 이야기만 하고 있다. 하늘나라는 일절의 언급이 되지 않는다. 전부 우리의 공간을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더라(3절).
이 구절을 정직하게 해석해서 순수한 빛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한 해석이고 다른 형이상학에 붙이면 곤란한 억측이 나올 수 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역시나 입을 너무 경박하게 놀리기 좋아하는 철학자 성향의 크리스찬들은 이것을 자꾸만 "그리스도의 출현을 상징하는 은유법"으로 만든다던지, 대우주를 지탱하는 광명의 원리 따위로 해석한다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빛"이라고 하셨고 이것을 "빅뱅"이라고 부르지 않으셨는데 빅뱅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시한폭탄 터지듯이 어느 순간 대폭발을 일으켜서 팽창하는 무한 우주를 등장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이보셔, 빅뱅은 애초에 나올 구석이 없는 게 그 무엇이 뻥 터져서 우주가 나온 게 아니라 세상은 이미 존재했고 빛은 조용히 나타났다. 어떤 것도 재깍재깍 쾅 하고 터진 게 없이 그냥 나왔다 말이다.
내가 계속 이야기하는데 모든 피조세계 창조의 목적은 여기에 거주하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위한 봉사의 목적에 집중된다. 빛도 인간을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낮과 밤이라는 게 언급되기 전에 빛은 있었고 즉 별과 태양과 상관없이 빛은 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해와 달과 별들이 일제히 그 조명을 꺼버린다면, 실제로 가능한 일이지만 그렇게 되면 땅을 비추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지만 빛은 남아있다. 어떤 빛이 있는가? 3절의 "빛"이 여전히 있다. 이 빛은 창공 아래 땅을 별도로 비추는 빛이며 해와 달과는 무관하게 별개로 계속 있다. 3절에만 있다가 해와 달에게 임무를 교대하고 사라진 게 아니라 계속 존재하는 것이다. 나의 그러한 진술에 관한 증거가 곧이어 4절에서 나온다.
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그 빛을 어두움에서 나누시더라(4절).
창조 첫째 날의 사역은 단순히 빛을 만드시고 빛을 통해 낮과 밤을 나누신 것 외에 없다. 태양이 비추는 조명과 이 별도의 "빛"이 합쳐져서 주간을 이루는 것이다. 야간에는 이 빛이 없고 달빛과 별빛이 땅을 비추는 역할을 한다.
하나님께서 그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과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더라(5절).
평평 지구를 믿지 않는 입장에서는, 특히 그리스도인이 3-5절 사이를 해석함에 있어서 어려움이 속출한다. 크리스찬의 입장에서 빅뱅이니 성운가설이니 같은 무신론에 기반한 설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만부당하기 때문에 그런 설명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정체불명의 어떤 우주적 광원이 지구라는 둥글이 행성 옆에서 태양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고 해석해야 될텐데 이것은 무슨 설명 자체가 안 되는 소설밖에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그냥 빛이라고 하셨지 빛을 내는 "원시 태양"이라던지 "태양의 고조 할아버지 항성 같은 것" 따위로 이야기하신 적이 없다.
자,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저 "빛"이라고 하셨지 어떤 항성을 말씀하지 않았다. 클라렌스 라킨 같은 경우 태양이 이 시점에 이미 존재했지만 단지 보이지만 않았다고 이상한 설명을 시도하는데 그건 아니다. 태양은 안 보인 게 아니라 창조가 되기 이전이다. 달도 별도 창조되지 않았다. 안 보인 게 아니라 없었다.
이 세상의 모든 빛들은 "광원"이 있어야 존재한다. 별이 없으면 별빛은 발산될 수 없다. 달이 없으면 달빛이 없고 해가 없으면 마찬가지로 햇빛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구절들에서 말씀하는 빛은 별도로 존재했다. 아인슈타인 이래 현대 물리학이 수립해 놓은 빛에 대한 원리들은 본문을 제대로 고찰했을 때 상당히 미심쩍고 거의 폐기되어야 할 정도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