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 봉평비에서 신라 법흥왕의 실명이 "모진"으로 기록이 되어져 있음은 고고학적으로 명백한 팩트이다. 그리고 법흥왕의 이름은 중국의 문헌에서는 "모태"로 기록이 되어져 있는데, 모태는 모진의 오기인 것으로 학자들이 이해들을 하고 있다. 어떻든 법흥왕은 모씨이고, 법흥왕의 이름이 모씨인 것을 보고, 한 발랄한 방송국 피디는 자신의 책에서 "신라 김씨는 모용선비족"이라는 말 같잖은 논리를 개시를 했던 바가 있다. 이 빈약한 수준을 오늘은 파쇄를 해볼까 한다.
오늘의 주제는 "모씨의 미스테리"라고 명명을 하면 될듯 하다.
이 모씨의 이름이 등장하는 또 하나의 사례가 있는데, 바로 일본서기에 등장을 하는 "미마나국"의 국주(미마나국왕)가 바로 모씨이다. 모류지라고도 하는데, 현재의 일본에 존재하는 미마나씨의 1대시조가 바로 이 모류지왕이다. 그럼 미마나국은 어디인가? 한문으로 풀이하면 任那이고, 우리가 알수 있는 이름은 "가야"이다. 즉, 경상도 김해에 있었던 나라이다.
미마나국주, 그러니까 가야국왕이 모씨를 사용을 하고 있는데, 신라왕가 역시도 그 성에 모씨를 사용을 하고 있다. 그리고 牟라고 하는 단어 자체는 "소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단어"이다.
본좌는 신라의 경주 김씨가 가야김씨에서 이주를 해왔다는 주장을 세계에서 최초로 했던 사람으로서, 한때 경주 김씨와 김해 김씨를 통합을 해야 한다는 김해 김씨 일성론을 주장을 했던 바도 있다. 즉, 한국의 모든 김씨는 김해 김씨를 그 시조로 한다는 것이다. 김씨들이 김씨라고 하는 성씨를 쓰기 전에 사용을 했었던(혹은 누군가에게 불리어졌던) 모씨가 가야와 신라에서 일치하는 것이 확인이 되어지는 것이다.
헌데 비단 이 모씨가 김씨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신라의 대충신 박제상"에게서도 나타난다. 박제상의 삼국사기의 이름은 "모말"이고, 일본서기에서는 "모마리질지"로 나오는데, 여기서 질지는 관등이나 존칭으로 해석을 하기 때문에 "모마리"로 이해를 하면 될 것으로 본다.
즉, 김씨와 박씨가 함께 모씨를 사용을 하고 있으며, 모두 신라왕가들(박씨도 한때는 신라왕가)이 사용을 했다는 특징이 있다.
헌데 이 모씨의 근원이 부여계이지 않겠느냐라는 고고학 유물이 중국의 길림성에서 발견이 되었다. 고구려대에 세워진 고분으로서 "모두루총"이라고 명명된 고분이다. 역시 그 성이 "牟"씨이며, 광개토 대왕사후에 얼마되지 않아서 조성이 되어진 것으로서 서기 4말 5초의 것으로 비정이 된다.
모두루는 그 고분에서 발견이 된 비문에서 이야기 하길"북부여에서 난 인물"로 묘사가 되어져 있으며, 북부여가 멸망당한 후 고구려에 유입이 되어 귀족으로 살았던 것으로 확인이 된다. 그리고 고구려의 동명성왕과 모씨 일족은 모두 북부여에서 났던 것으로 해당 고분의 피장장가 남긴 문서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물론 이 성씨만을 가지고 모씨일족들을 부여계라고 단언을 한다면 근거가 많이 약하다고 본다. 헌데 고고학 유물은 또 모씨가 동일한 계통의 유물을 사용을 하고 있음을 확인을 시켜주고 있다. 바로 아래의 고고학 유물이 그것들이다.

동복-청동형 솥이다. 김해 대성동에서 출토가 되었으며, 학계 명칭으로는 "오르도스형 동복"이라고도 한다. 흉노제국에서 사용이 되었던 것으로 보는데, 중국의 부여박물관에서도 역시 동일한 형태의 동복이 출토가 되었던 바가 있다. 이 뿐만 아니라, 김해 대성동 고분에서는 "호형대구"라고 하여, 말을 타고 달릴때 흩날리는 옷깃을 붙잡아주는 옷고정 유물이 함께 출토가 되었던 적도 있는데, 같은 유물이 동물의 문양만 달리한 채, 부여에서도 역시 출토가 되었던 바가 있다. 물론 기마민족들에게는 필수품들이기 때문에 이들 유물의 출토는 당연할 수 밖에 없기도 하다.
사실 가야와 부여가 매우 밀접한 나라이지 않겠느냐라는 것은 본좌이전에 작가인 최인호씨가 방송국과 연결이 되어 그와 관련한 다큐를 제작을 했던 것에서 이미 주장이 되었던 바가 있으며, 최인호씨는 자신의 책에서 또한 그것을 쓰기도 했었다. 본좌는 그들 주장에서 나타난 것에 대한 추가보완자료를 더 제시하는 것이고, 나아가 아무도 몰랐던 "신라의 근원이 부여계"임을 고증하는 주장을 현재 펼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의 동명성왕과 모씨가 북부여에서 났다고 한다면 그들이 가진 풍속이나 풍습 역시도 북부여계의 것을 승계했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추론을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본좌가 특히 눈여겨 보는 것이 "두개의 새깃털로 머리를 장식하는 문화"를 재미있게 보았는데, 처음에는 고구려의 양식을 신라가 받아들여, 그러한 양식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는데, 아닌 것으로 생각이 된다.
"부여의 양식"이었던 것으로 이해가 된다. 즉, 고구려와 신라가 전부 부여에서 났기 때문에 그들 왕가가 어디서 줏어온 놈들이 왕권을 갈아치우지 않은 이상"은 사용하는 문화 역시도 동일했었을 것으로 보이며, 묘제의 양식도 기본적으로 비슷했었을 것으로 보인다는 의미이다.
임나국주도 모씨, 신라왕가 역시도 모씨, 그리고 고구려귀족이었던 모두루의 근원이 역시 부여.. 고구려의 동명성왕이 역시 부여에서 난 인물.. 서해안을 제외한 한반도, 북한지역, 그리고 만주와 요동 지역이 "동일한 시조"를 모시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바로 "고조선이 아닌 부여"라는 결론이다.
헌데 또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모씨들이 김씨로 개성(改性)"을 했다는 부분이다. 헌데 이것이 신라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 가야에서도 함께 일어난 일이다. 왜냐하면 가야계 후손인 김유신이 그 성을 명백히 "김씨"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한다면 김유신가계도 역시 "모씨로 이어져 오다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김씨로 개성을 했었고, 그 시기는 신라와 일치"하였을 것으로 본좌는 현재 추정을 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 임라와 신라인들이 "왜" 어떤 이유에서 성씨를 모씨에서 김씨로 바꾸어야 했는지가 미스테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임라의 김씨와 신라 김씨는 "동일 시조론"을 내세우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재미가 있는 것이 "성한왕"을 임라와 신라가 꼭 같이 자신들의 시조로 지목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멀리로는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면서 가까이로는 성한왕을 중심으로 하여 임라와 신라가 나뉘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한다면 여기서 추적을 해보아야 할 부분은 "부여와 흉노와의 관계"가 이제 또 풀어야 할 숙제가 되어진다.
일단 부여와 흉노가 기마민족이라는 사실 자체는 명백한 팩트이다. 헌데 그 부여를 흉노제국의 일원으로 보아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 부여와 왕망의 신나라의 멸망으로 집단으로 "어딘가로 망명했던" 김일제의 후손들은 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를 이제부터 풀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라와 임라의 김씨들은 왜 자신들의 시조를 부여가 아닌 김일제로부터 찾았던 것이며, 그들 김씨(모씨)일족은 언제부터 한반도에 들어온 것인지도 풀이를 해보아야 하겠다는 것이다.
본좌는 원삼한시대에 있었던 삼한국가가 기본적으로 "기마민족 집단"이라는 가설을 제기를 했던 바 있으며, 고도의 철기 문명을 이루고 있었던 집단이라고도 설명을 했던 바 있다. 본좌 이전에는 삼한이 강력한 철기문화를 갖춘 기마민족 집단이라는 것을 주장을 했던 학자는 없었다. 물론 여기에 등장하는 신라의 근원이 부여계라는 사실이나, 신라 김씨는 가야에서 왔다라는 주장 역시도 세계에서는 유일하게 본좌만이 가장 먼저 주장을 했던 것이기도 하다. 앞으로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학자들이 있다면 반드시 본좌가 주장한 것들을 보고 "베낀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삼한과 부여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지 않겠느냐라는 추론도 크게 무리할 것이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문제는 이를 알 수 있는 문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저 아쉬울 뿐이다. 단지 본좌의 흠잡을데 없는 완전한 논리에 의해서 삼한이 부여와 매우 큰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추정만 가능할 뿐이다.
아울러 본좌가 이를 추적을 해나가면서 확인을 했던 것중의 하나가 "백제왕들중 일부가 임나(가야)에서 이주를 한 왕"이라는 것도 현재 확인이 되었다. 즉, 백제왕계는 신라나 고구려처럼 단일왕계에 의해 지배당한 것이 아니라, 일부는 倭계, 혹은 중국계, 혹은 임나계인들이 백제왕을 했었다는 것이 확인이 되었다.
즉, "혈통관계에 의한 왕권의 대물림"은 거의 없다는 것으로, 외부에서 철저하게 "임명제로 왕이 임명이 된 국가가 바로 백제"라는 것을 확인을 했다. 유일하게 혈통관계가 입증이 되어지는 사례는 백제 성왕과 위덕왕으로서, 이들을 제외한 백제왕들중 그 뿌리나 출신지가 뚜렷하게 들어나는 왕은 없는 것이 정상이다. 왜냐하면 임명에 의해서 왕을 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임명된 왕중에서 몇명이 "임나계(가야계)"임을 확인이 되었는데, 그 중에서 "명백한 임나계"로 보이는 인물이 "백제의 동성왕"이었다. 바로 그의 이름이 중국의 기록에 "모대"로 나타나 있기 ?문이다. 처음엔 성씨(부여씨)가 제거가 되었다고 생각을 했는데, 모씨의 미스테리를 추적을 하면서 이 당시에는 부여씨를 쓰고 있지 않았음을 확인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동성왕은 모씨가 임명이 되었던 것이고, 그는 "임나에서 임명이 되었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부여에서 났다고 했던 왕중에 백제의 개로왕이 있는데, 백제의 개로왕은 그 실명을 알 길이 없어, 단언할 수는 없으나, 만약 그가 주장한대로 부여에서 난 인물이 맞다고 한다면, 백제의 개로왕도 역시 모씨로 인정을 할 수 있으며, 임나에서 임명이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부여인들이 한반도로 넘어왔다. 그리고 곧 한반도의 지배자로 군림을 했다가 중국혹은 동남아에서 이주해온 세력에 의해 이들은 일본 열도로 쫓겨났다. 그 일본 열도마저도 제3의 세력, 한반도를 공략했던 세력과 동일한 문화를 가졌던 인종집단에 의해 공략당하게 되면서 또 다시 한반도로 쫓겨들어와야했으며, 그때 그들이 들어온 지역이 바로 "경주신라"였다.
본좌는 김해 지역과 경주 지역이 고대에 해안지역이었음을 굉장히 미스테리하게 관찰을 하고 "이들이 왜 수도를 배가 접안할 수 있는 해안 지역에 설정"을 했는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분석을 했는데, 이러한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그리고 일본 열도에서 다시 한반도로 넘어오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 부여계 일족을 공격을 했던 제3의 세력, 사서에서는 倭라고 명명이 된 그들,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아내면 이제 한반도와 일본의 고대사의 큰 줄기는 다 풀리게 되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부여계 모씨들이 무엇때문에 자신들의 근원을 부여로 지목하지 않고 흉노제국으로 지목을 했는지도 분석하고 풀이해보아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부여와 흉노제국의 관계.. 헌데 풀이할 수 있을까?
첫댓글 大雪인 오늘 기온이 큰 폭으로 떨어져
금년 겨울에 제일 추운 한파가 찾아왔으며
바람이 불어서 체감온도는 더 떨어졌으니 옷깃을 단단히 여미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