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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안동권씨 송소종택(安東權氏 松巢宗宅)
소 재 지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이상리 557
건 축 주 : 권우(權宇, 1552∼1590)
건축시기 : 조선 후기
중건시기 : 1824년(순조 24)
소 유 자 : 권기남 / 권응룡
문 화 재 : 중요민속자료 제203호, 1984년 12월 24일 지정, 일곽
❍ 건축 이야기
종택에는 이계재사도록(伊溪齋舍都錄)이 전해오고 있다. 이로 미루어 종택이라 불리기 전 원래 이름이 이계재사(伊溪齋舍)였음을 짐작케 한다.
송소종택은 작고 아담한 규모이다. 사람이 살지 않고 비워져 있으므로 빠르게 허물어져 가는 중이다.
이 집은 1824년 개기(開基)라는 들보의 글씨로 볼 때 송소(松巢) 권우(權宇, 1552∼1590)의 시대가 아니라 그 후인들이 세운 종택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 건축 특징
송소종택이 있는 골짜기는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도 아니고, 너른 분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산은 나직하게 돌아가면서 그 기슭에 서너 채의 집이 자리 잡을 만큼의 좁직한 공간을 풀어두고 있다. 골짜기는 남동향으로 뻗어 나가며 다른 골짜기와 연결된다. 그 사이를 비집고 남동향으로 치달려 가는 기찻길이 있다.
기찻길이 골짜기의 끝 지점을 타고 나가므로, 기찻길과 삶 터의 상호 배반적 관계는 상당히
희석된다. 그만큼 떨어진 지점에서는 골짜기를 타고 치달려 가는 기찻길도 낭만으로 받아
들여 질 수 있으리라.
송소종택 앞으로는 좀 떨어진 지점에 이계서당이 있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는 건물이라고 한다.
❍ 건축 구성
본채는 정면 5칸 규모이다. 중앙에 대문을 두고, 양 옆으로 행랑채가 벌려 서 있다. 서쪽 두 칸은 중앙 벽을 나무판으로 처리하였고, 벽의 위쪽에는 각각 작은 풍창, 또는 광창을 달고 있다. 대문 기둥에는 주인의 문패가 달려 있다. 권기남(權奇南). 이름 석 자가 혼자 외롭게 집을 지키고 서 있다.
동쪽의 두 칸 중대문 쪽으로 붙은 것은 서쪽과 같은 방식으로 처리되어 있다. 동쪽 끝의 1칸은 아궁이가 붙은 방이다. 작은 방문이 하나 밖을 향하여 달려 있다.
대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가면 공간은 둘로 분할된다. 안채 영역과 바깥채 영역이 서로 나뉘어 있고 서로 높이가 다른 대좌 위에 앉아 있다. 그러니까 口자 형상이 횡선으로 반절씩 나뉘어져 있는 것이다.
안마당은 거의 아래쪽에 붙어 있다. 口자 형상의 아래 횡선이 서쪽에서 위로 향하는 수선을 이루며 아래에서부터 차례로 방, 방, 광을 만들어 놓고 있다. 작게 나뉘어져 있는 것들이다. 동쪽의 수선 부분에서는 마루방, 광을 만들고 있다. 마루방은 아래로는 행랑채의 동쪽 끝 방과 연결되고 위로는 광과 연결된다.
4단 계단을 오르면 위채 영역이 앉아 있는 뜰이다. 뜰은 양쪽으로 터져 있다. 동쪽으로는 쪽문이 달려서 밖으로 드나들 수 있다. 그곳을 통해 나아가면 사당으로 오르는 길과 연결된다. 서쪽으로는 담 속에 좁은 공간만 열려 있는데 아마도 문짝이 사라져 버린 탓일 것이다. 그리로 나아가면 측간이다.
뜰 위에는 口자 형상의 위쪽 횡선 부분이 자리를 잡고 있다. 서쪽 끝은 통째로 방이다. 동쪽 끝은 앞에 쪽마루 영역을 두고 물러나 앉은 방이 있다. 중간은 마루이다.
본채의 동북쪽 지점으로, 본채보다 조금 더 산기슭 위로 올라가 있는 부분에는 사당이 있다. 사당은 불규칙하게 원형을 그리는 담 속에 자리 잡았다. 울타리가 바닥을 밀고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닥 기울기를 그대로 이용하여 지어져 있으므로, 울타리의 지붕도 뒤로 갈수록 조금씩 층을 이루며 올라가고, 아래로 갈수록 조금씩 층을 이루며 낮아진다.
사당은 3칸 규모의 집이다. 본채와 마찬가지로 남향을 하고 있다. 사당의 출입문은 동쪽 측면으로 열려 있다.
❍ 현판 이계서당(伊溪書堂) : 종택 뒤쪽의 강당에 있다.
❍ 문중 이야기
- 송소종택가는 길
두루마을에서 이하 쪽으로 내려와서 논 사이로 난 길을 타고 나가다 철길을 넘는다. 이곳에는 철길을 넘는 노선이 둘 있다. 두루 쪽으로 올라가다 철길을 넘으면 송소종택으로 갈 수 없다. 이하 쪽으로 내려와서 철길을 넘어야지 송소종택으로 들어가는 길과 연결된다.
길은 아주 위험하다. 고갯마루 같은 경사길 꼭대기에 철길을 넘는 통로가 있고, 시야는 좌에서도 우에서도 차단되며, 철길을 지키고 서있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철길을 넘으면 길은 둘로 갈라진다. 직진하듯이 계곡 위쪽으로 뻗어 올라가는 길은 몇 채의 가옥들 속에서 증발된다. 다시 철길 아래쪽을 조금 타고 내려가다가 전답 사이로 휘도는 길을 택해 올라가야만 홀로 따로 서 있는 송소종택에 이를 수 있다. 산기슭이 크게 호선을 그리며 오무라들고, 송소종택은 그 산기슭의 호선이 동쪽으로 나아가다가 전답으로 흩어져 버리는 지점에 남면하여 서 있다.
- 송소집(松巢集)
권우(權宇, 1552~1590)의 시문집이다. 이 문집은 2책 4권으로 되어 있으며, 1811년(순조 11)에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 관련인물
1. 권우(權宇, 1552~1590)
송소(松巢) 권우(權宇, 1552∼1590)이고, 자는 정보(定甫)이다. 1552년(명종 7)에 태어나 1590년(선조 23)에 타계하였다. 향년 39세. 젊은 나이에 아깝게 이승을 하직한 것이다. 권우는 퇴계 이황의 문도이며 매헌(梅軒) 금보(琴輔)와 더불어서 『주역대전(周易大全)』을 필사하며 궁리하는데 진력하였다. 1573년(선조 6) 식년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된다. 1586년(선조 19)에 학행(學行)으로 추천되어 경릉 참봉에 제수되었고, 왕자사부에 이르렀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은 『송소집(松巢集)』의 발문에서 ‘우리 무리의 영원한 스승’이라는 표현으로 칭송하였다. 배위는 전주유씨이다.
송소 권우는 권익민(權益民), 권익정(權益丁), 권익신(權益臣), 권익린(權益隣), 권익겸(權益謙)의 다섯 명의 아들과 딸들을 두었다.
장자인 권익민은 자가 태초(太初)이고, 1573년(선조 6)에 출생하여 1598년(선조 31)에 타계하였다.
문장과 행의가 뛰어났다. 승의랑(承議郞)에 제수되었다. 배위는 영천이씨이다. 권우의 아들 중에는권익린이 가장 현달하였다. 넷째 아들 권익린은 자가 인재(隣哉)이고, 호가 금곡(琴谷), 대명옹(大明翁)이라는 호를 임금으로부터 받았다. 1583년(선조 16)에 출생하였다. 여헌 장현광의 문인이고, 1616년(광해군 8) 생원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치욕을 당하자 태백산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청음 김상헌과 주고받은 시가 있다. 인조가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는 그 뜻을 알겠다고 하며 대명옹이라는 호를 내렸다. 명나라를 추모하는 노인이라는 뜻을 담은 것이다.
문집이 있다. 배위는 순흥안씨이다.
- 권우의 후손들
권우의 장자 권익민의 큰아들은 권혁(權赫)이다. 자는 회경(晦卿), 호는 이천(伊泉)이다. 1595년(선조 28)에 출생하여 1643년(인조 21)에 타계하였다. 전재(全齋) 김중청(金中淸)에게 배우고, 여헌 장현광의 문하에 들었다. 효행으로 주위의 칭송을 들었다. 배위는 광산김씨이다.
권혁은 안동권씨 25세이다. 권혁의 장자는 권이추(權以錘)이나 후사가 없고, 권혁의 가계는 둘째 아들 권이전(權以銓)이 이어간다. 이전 이후 10대가 지나면 현 종손인 권기남(權奇男)에 이른다.
현종손 권기남은 35대 권응룡(權應龍)과 배위인 의성김씨 사이에서 1931년에 출생하였다. 권응룡은 자가 세현(世見), 호가 일성(一聲)으로 국전에서 서예로 입선한 경력이 있다. 1912년에 태어나 1991년 80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권기남 등 세 아들을 두었다. 권기남은 배위인 의성김씨와의 사이에서 장자 권순홍(權純弘) 등 세 아들을 둔다.
- 권대기(權大器, 1523~1587)
송소 권우의 부친은 권대기(權大器)이다. 자는 경수(景受), 호는 인재(忍齋)이다. 1523년(중종 18)에 출생하여 1587년(선조 20)에 타계하였다. 1552(명종 7) 식년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중훈대부 사헌부 집의로 추증되고, 용계서원(龍溪書院)에 배향되었다. 배위는 진성이씨이고, 후배위는 곡강배씨이다.
권대기는 21대 권엽(權燁)의 아들이고, 권위기(權偉器)의 아우이다. 권엽은 1488년(성종 19)에 탄생하여 1580년(선조 13)에 타계하였다. 향년 93세이다. 참봉이고, 사후에 군자감 정으로 추증되었다.
배위는 인동장씨이며, 20대 권갑성(權甲成)의 둘째 아들이다.
권갑성은 충순위(忠順衛), 병절교위(秉節校尉)이다. 배위는 일직손씨이다.
권우의 가계 중 권갑성 이상 상계는 부종공파 파조 권통의 종계이다.
❏ 안동 >와룡예안권 >이상리
- 이우리, 샘골, 황새골 등으로 이루어진 마을
이상리는 구한말 안동군 북선면(北先面)에 속했고, 1914년 이우리(伊友里)와 황새골을 병합하여 안동군 와룡면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이상리는 현재 이우리, 샘골, 황새골 등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이우리는 이상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중앙선이 마을 중심부를 지나며 익우촌, 이계(伊溪) 등으로 불려왔다. 이 마을은 약 400년 전 청주한씨(淸州韓氏)가 북쪽의 비아골을 개척하였고, 그 이래로 김해김씨(金海金氏)와 평해황씨(平海黃氏)가 많이 살고 있다.
『영가지(永嘉誌)』를 보면 이 마을은 천동촌 또는 이화어(伊火於)로 불렀다고 하였다. 당시 안동부사로 온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이곳에 와서 “마을의 이름이 군자가 사는 곳으로는 합당치 못하다.
”하여 이계로 고쳤다고 했다. 이계는 마을을 흐르는 내로 한거랑이라고도 부르는데 남으로 흘러 가수천(嘉水川)이 되어 낙동강(洛東江)에 유입된다.
샘골은 이우리 서쪽에 있는 마을로 좋은 샘이 있어 샘골이라 하였으며, 한자로 천동, 천곡 등으로 부른다.
황새골은 이우리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황새짓골로도 부른다. 이 마을은 옛날 송림(松林)이 울창하고 산세가 아름다워 황새가 많이 깃들었다고 한다. 황새골 출신으로 선조 때의 문신인 권우(權宇, 1552~1590)는 호(號)를 ‘새들의 보금자리’라는 의미로 송소(松巢)라고 하였다.
황새골은 처음에 광주안씨(光州安氏)가 터를 잡고 살았으나 그 후 안동권씨(安東權氏)가 들어와 살았는데, 안씨들이 떠나게 된 것은 샘골에 있는 갓바위(거북바위) 전설에 전한다.
마을에는 권우의 송소종택(松巢宗宅)을 비롯하여, 그 아버지인 인재(忍齋) 권대기(權大器, 1523~1583)의 이계서당이 마을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 송소 권우선생
권우(權宇) , 1552년 ~ 1590년 자는 정보(定甫) 호는 송소(松巢) 1573년(선조 6) 사마시(司馬試) 합격 경릉참봉(敬陵參奉), 집경전(集慶殿), 세자사부(世子師傅)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
❍학문에 대한 깊은 애정
나이 21세에 연달아 지방과 서울의 초시(初試)에 장원하였고, 그 이듬해 1573년(선조 6)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화려한 명성이 날로 높아졌다.
그러나 공은 부족하게 여겨 과거를 보지 않기로 결심하고 성리학에 마음을 다 쏟았다. 사서를 깊이 연구하고 주위 백가의 서적에 이르기까지 모두 강론하고 관통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서실 하나를 만들어 좌우에 도서를 비치해 두고 그것을 읽고 나면 생각하느라 날짜 가는 줄도 몰랐다.
사림의 기대는 더욱 중해져, 1586년(선조 19)에는 경릉참봉에 임명되었고, 1589년(선조 22)에는 왕자사부에 임명되었다. 그는 또 자신을 고상하게 여기지 않고 조정의 부름에 나갔으나, 앞서는 아버지 상을 당하였으며, 곧 뒤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가 왕자를 가르칠 적에 선조 임금이 경서 가운데에서 가장 난해한 대목을 지적하여 왕자로 하여금 질문하게 했는데, 그가 서슴없이 분명히 해석하자 임금이 칭찬하고 당시(唐詩) 10절을 대폭(大幅) 초서로 써서 하사했다.
❏ 가족
조부 권엽(權燁) 생부 권대기(權大器) 모는 진성이씨(眞城李氏) 이제(李濟)의 딸 형제는 권굉(權宏), 권성(權宬), 권환(權寏), 권면
❍ 효제에 충실히 한 권우
가정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친척 간에 화목하는 도리를 다하였다.
나이 9세에 어머니 상(喪)을 상하여 3년 간 고기를 먹지 않았고 효성을 다하여 계모 배씨(裵氏)를 섬기었는가 하면 아우들에게 외가 노비를 나누어 주었다.
막내 숙부가 돌림병을 앓다가 죽고, 사촌형이 돌림병에 걸려 위독할 때 공이 방 안에 들어가 염습하고 간병하는 등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으며, 죽은 누이의 딸을 길러 시집을 보내기도 하였다.
부인 완산유씨(完山柳氏)는 유찬(柳燦)의 딸로 5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권익민(權益民),
권익정(權益丁), 권익신(權益臣), 생원 권익린(權益隣), 권익겸(權益謙)이고, 딸은 진성 이지손에게 시집갔다.
❏ 학문
스승는 이황(李滉) 향사는 경광서원(鏡光書院) 학파는 퇴계 학파
교유인물 남치리(南致利), 김해(金垓), 이덕홍(李德弘
❍ 위기지학에 힘쓰다
19세에 이황의 문하에 나아가 역학계몽(易學啓蒙)을 배우고, 자신의 인품 함양을 위한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썼다. 이황으로부터 금보(琴輔)가 쓴 주역대전(周易大全)을 받았다.
1573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된 후 학문에 힘쓰고자 14년 동안 향리에 머물러 있었으나, 1586년 경릉참봉(敬陵參奉)을 거쳐 복상 중인 1587년 왕자사부(王子師傅)의 명을 받아 나아갔다.
권우는 태극도, 통서, 서명, 정주의 성리서에 융통하였고, 논어, 맹자, 대학·중용 등의 경서에도 아주 밝았다. 나아가 의학, 산학, 사기에도 정통하였다. 그런가 하면 사서(四書)를 깊이 연구하고 주위 백가(百家)의 서적에 이르기까지 모두 강론하고 관통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 문 집
『송소집(松巢集)』
권우(權宇)의 시문집으로 4권 2책이다. 1811년(순조 11) 7대손 달충(達忠)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정종로(鄭宗魯)의 서문, 권말에 달충의 발문이 있다.
권1·2에 시 175수, 부(賦) 1편, 사(辭) 1편, 서(書) 28편, 권3·4에 제문 10편, 잡저 6편, 행장 2편, 부록으로 만사 5수, 사제문 1편, 제문 10편, 행장·묘갈명 각 1편, 노림서원(魯林書院)의 봉안문(奉安文), 상향축(常享祝) 각 1편, 경광서원(鏡光書院)의 복향문(復享文), 상향축(常享祝) 각 1편, 구발(舊跋) 3편, 지(識), 어사서첩후발(御賜書帖後跋)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의 「유감(有感)」은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중용을 얻기 어려움을 술회한 것으로 사람이란 공허에 빠지기도 쉬울 뿐더러 비루하게 되기도 쉽다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부의 「세망부(世網賦)」는 자신의 은둔 사상을 읊은 것으로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화의
그물[禍網]’에 걸리는 것이라 하여, 이러한 화의 그물을 벗어나 숨어 살며 한가로이 지내
고자 하는 뜻을 나타냈다.
서에는 당대의 이름난 선비인 조목(趙穆), 유성룡(柳成龍), 이덕홍(李德弘), 남치리(南致利)
등과 학문에 대해 논한 것이 많다.
특히 별지(別紙)로는 『중용』의 경의(經義) 해석을 비롯하여, 사단칠정(四端七情) 및 심·성·정(心性情)에 관한 성리학상의 문제와 상례(喪禮)·제례(祭禮)의 예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질의, 논변한 내용이 있다.
잡저의 「제설변해 (諸說辨解)」는 심(心)에 대해 미발지심(未發之心)과 이발지심(已發之心)
으로 나누어 논하고, 『근사록 (近思錄)』,『심경 (心經)』 및 선유의 말을 인용해 존양(存養)의 중요성을 강조한 글이다.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은 청량산을 유람하고 쓴 일기체의 기행문으로 집을 출발하여 돌아올 때까지의 여정·풍물·경치·인심 등을 소상하게 기술하고 있다. 「자경설 (自警說)」,「강회조약 (講會條約)」 등은 모두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의 경계해야 될 점이나 강회의 규약 등을 정한 것으로 그의 규범적인 생활 태도를 알 수 있다
❏ 인재 권대기선생
권대기(權大器) , 1523년 ~ 1587년 자는 경수(景受) 호는 인재(忍齋) 출생지 안동(安東) 눌곡(訥谷) 1552년(명종 7) 사마시(司馬試) 합격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심
그는 성품이 깨끗하고 강직했으며 충효에 모두 뛰어났다. 젊어서 과거시험에 힘써 30세(1552)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경전에 통달함으로 주위에 알려졌으나 문과에 세 번이나 떨어지자 과거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찍 퇴계선생에게 나아가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심하고, 월천(月川) 조목(趙穆), 지산(芝山) 김팔원(金八元),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 성성재(惺惺齋) 금난수(琴蘭秀) 등 여러 사람들과 수계(修契)하고 매 계절마다 산사에서 강토하였다.
그는 세 번 장가들었는데 진성이씨(1남 1녀), 능성구씨, 흥해배씨(4남 4녀)이다. 그의 아들은 왕자사부 우, 영릉참봉 원종공신 굉, 생원 성, 장릉참봉 환이 있고, 퇴계의 제자이자
오천칠군자(烏川七君子) 중 한 사람인 면진재(勉進齋) 금응훈(琴應壎)이 바로 그의 사위이다.
❏ 가족
조부는 권갑성(權甲成) 생부는 권엽(權燁) 모는 인동장씨(安東張氏) 장양필(張良弼)의 딸
❍ 아들에게 절조를 지킬 것을 당부
장자인 송소(松巢) 우(宇)에게 답한 편지 가운데서,
“내가 네게 바라는 바는 여기에 있지 않다. 오로지 열심히 공부하여 성취하여 쇠미한 우리 집안을 부지하여라.”라고 하여 조금도 벼슬살이에 연연해하지 않는 선비다운 절조를 보였다.
검약으로 스스로를 지켰고 남에게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았으나, 남들은 더욱 그를 믿고 따라 선비들이 그의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 학 문
스승은 이황(李滉) 향사는 용계서원(龍溪書院) , 이계서원(伊溪書院) 학파는 퇴계 학파
교유인물 조목(趙穆), 구봉령(具鳳齡), 금난수(琴蘭秀)
❍ 경전을 통한 실천 학문 추구
그의 학문은 몸소 실천하여 얻는 것을 요법으로 삼았고 세상의 명리나 벼슬살이의 녹봉과 같은 것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경전을 통하고 힘써 실천하는 것으로 칭송을 받았으며 일찍 과거를 폐하고 은거하여 뜻을 구했다.
그의 학문은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기본으로 하고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것과 이록(利祿)을
구하는 것을 경계하였으며, 검약으로 자신을 지키고 남이 알아주는 것을 구하지 않았다. 이계(伊溪) 위쪽에 서숙(書塾)을 짓고 생도를 가르쳤는데, 당대의 문장과 아취(雅趣)를 갖춘 선비들이 많이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
❏ 문집
『인재선생실기(忍齋先生實記)』
문집에는 시 5편, 편지 2편만이 남았고, 그 외는 부록이다.
서문은 귀와(龜窩) 김굉이 지었다. 세계도 26면이 앞부분에 붙어 있다. 시는 남은 편수가 워낙 적어 성격을 말하기가 어려운데, 동문과의 창수나 차운을 즐기며 심성 수양에 더욱 힘쓴 듯하다.
편지 두 편은 아들에게 보내는 부정(父情)이 가득 담겨 있으면서 참된 학문에 전력할 것을
당부한 내용이다.
그에 대한 만사는 동문으로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문인으로 이형남, 이봉춘, 안개, 이정회, 박협, 이득춘, 권덕열, 남응허 등이 남겼다.
권하(卷下)에 부록으로 퇴계 선생이 보낸 편지 1편과 시가 있고, 조목 연보에서 발췌한 글이 있다.
전기 자료인 행록(行錄)은 그의 맏아들 우가 기록한 것으로 남은 자료 중 가장 자세하며,
유도원의 행략(行略), 넷째 아들 환의 묘지, 이헌경의 묘갈명이 있다.
그밖에 서원통문 5편이 있고, 권후지(卷後識)는 유범휴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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