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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에 건국된 조선은 이전의 고려시대와는 또 다른 성격을 가지고 성립하였다. 고려 말부터 성장하기 시작한 향촌사회와 민에 대한 인식으로 조선의 사대부 건국 주도세력은 귀족이 아닌 민에 기초한 국가를 성립시키려고 애썼다. 조선이라는 국호는 고려가 고조선의 후예라는 측면에서 민족의식이 한 단계 심화된 단계에 있었음을 말한다. 조선은 태조 3년(1394년)에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였는데, 이는 한반도 중앙에 위치하고, 남쪽에 한강을 끼고 있어서 수로교통에 편리할 뿐 아니라, 주변에 높은 산이 둘러싸고 있어서 방위에도 매우 편리하였다.
조선은 고려시대와는 다른 중앙의 정치구조나 권력구조로 개편하였는데, 기본적인 정치사상은 유학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제 유학은 정치사상일 뿐 아니라 통치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또한 지방통치도 새롭게 개편하여, 고려와 달리 전국의 民을 일원 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전국 모든 군현에 수령을 파견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수령이 주로 주군(主郡)에만 지방관이 파견되어 주위의 속군(屬郡)과 속현(屬縣)을 지배하였는데, 그렇기 때문에 국가의 공권력이 전국적으로 미치지 못하는 폐단이 있었다.
중앙에서 파견한 수령(守令)은 지방의 행정, 사법, 군사권을 장악하고, 그 공권력을 바탕으로 교육진흥, 부세 수취, 치안 확보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2) 그리고 民에 대한 지배권을 수령이 가짐으로써 민의 지위는 전보다 향상되었다. 이것은 수령이 공적으로 지배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공정하였기 때문이다. 이들 수령을 견제하기 위하여 각 도(道)의 관찰사(감사)가 수령의 성적을 평가하여 중앙에 보고하게 하였다. 각 수령이 파견된 군현의 아래에는 면(面)·리(里)·통(統)을 두고, 5가(家)를 1통(統)으로 편성하였다.
이와 같이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그 권한을 강화하는 한편, 지방민의 자치를 허용하기 위해 각 군현에 유향소(留鄕所)를 두었다. 여기에는 덕망 있는 지방의 유력인사들이 모여 좌수(座首) 혹은 별감(別監)을 선출하여 자율적으로 규약을 만들고, 수시로 향회(鄕會)를 소집 하여 여론은 수렴하면서 백성을 교화하고, 수령의 비행을 감사에게 고발하는 역할도 하였다. 이처럼 조선은 중앙집권적인 모습과 지방자치적인 특성을 갖추어 지방을 통치하였다. 이렇게 하기 위한 기초가 된 제도가 전국의 8道(도) 350여 군현이었다. 또 고려시대의 특수행정구역이던 향,소,부곡은 모두 일반 군현으로 승격하여, 신분제적인 지배를 극복하였다.
조선이 이처럼 지방 통치에 관심을 가지고 전국을 일원적으로 지배하려고 했던 것은 그 사회가 고려시대의 사회보다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민의 의식도 고양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려 말에 원의 간섭과 왜구, 홍건적의 침입으로 군사적인 취약점이 노출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좀 더 원활한 지방지배에 기초하여 군사 동원력도 증강하기 위해서였다. 즉 지방통치와 군사조직은 서로 군역에의 동원이라는 측면에서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이었다. 조선의 지방제도는 호구와 토지 전결 수에 따라 일원적으로 구획 화 되었다. 한편 태종은 왕권강화를 위하여 관제개혁, 수취체제 정비, 호패법등을 실시한 데 이어 13년(1413년) 10월 도제(道制)와 군현제의 정비를 단행하였다. 이때의 지방 행정 정비로는 8道制 (도제)를 들 수 있다. 8도제는 동·서북면의 주·부·군·현 경계와 명호(名號)를 정함으로서 확립되기 시작하여 이때에 이르러 완성을 보았다. 8도제의 도명은 계수관 읍명 위주로 채택하였는데, 강원도는 강릉과 원주에서 따왔으며, 그 뒤의 읍호승강(邑號昇降)에 따른 도명의 변천을 볼 때 춘천은 양양과 더불어 그 다음의 대읍으로 꼽혔던 것으로 짐작된다. 즉 원양도(原襄道), 강양도(江襄道), 강춘도(江春道), 원춘도(原春道) 등으로 변천되었다. 1395년 강원도가 생긴 후 1895년까지 500년간 강원도를 관할하는 강원감영은 원주에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중앙집권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지방도시에서 역적이나 불효자 등이 생기면 그의 집안은 물론이고 그의 고향이나 사는 곳 전체가 벌을 받도록 하였다. 지방의 벌은 대체로 대도호부나 목 또는 부·군을 강등하여 하부기관으로 명명하였다. 그 실례로 강릉대도호부에서 역적이나 불효자가 있을 경우 강릉대도호부를 강릉현으로 강등시켰다. 이러한 벌은 10년을 한도로 복권되었으므로 10년 내에 본래의 지위를 찾을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강원도의 명칭도 여러 차례 변화되었던 것이다.
태종13년에 8도제 정비와 함께 명칭도 고쳐졌는데, 소규모 군현의 이름이 개정되었다. 춘천지역은 당시의 개편 과정에서 군현의 이름과 관련이 있다. 첫째는 고려 후기 이래 무질서하게 승격되었던 읍(邑)의 격(格)을 호구와 전결(田結)수에 따라 재조정하는 문제 이며, 둘째는 부사(府使) 이하의 군현에 ''주''(州)자가 붙은 읍 명을 다른 글자로 대체하여 읍 격을 명실상부하게 하고 발음상 비슷한 것은 서로 혼동되지 않게 개정하는 것이었다. 이때의 개정은 부윤(府尹)·대도호부(大都護府)·목사(牧使) 외에 ''州''자를 띤 도호부 이하의 군현명은 모두 산(山)·천(川)·양(陽)·성(城)의 글자로 개정하였고, 같은 발음의 군현명도 고쳤다. 이에 따라 춘주는 ''주''대신 ''천''자를 쓰게 되었다.
그러나 군현의 병합은 해당 지역 주민의 반대가 심하여, 태종 15년(1415년)병합된 군현을 부설시키면서 새로운 조치를 취하였다. 즉 1천호를 단위로 인구와 전결을 기준으로 군현을 승강(昇降)시켜 행정구역의 개편이 합리적인 방향으로 접근되었다. 이에 따라 춘천은 1천호 가 넘는 지역으로서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어 종3품의 수령이 다스리는 고을로 되어 1894년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까지 큰 변화가 없었다.(춘천의 명칭 개정에 관해서는 앞의 최영희 논문을 주로 인용하였다.)
고종 32년(1895년) 5월에 갑오개혁의 추진으로 지방제도가 8도 체제에서 23부 336군 체제로 개편되었는데, 이때 강원도는 강릉부와 춘천부로 개편되고, 원주·영월·평창·정선 등 4개 지역은 충주부로 이속되었으며, 원주 감영을 폐지하고 춘천과 강릉에는 관찰부(觀察府)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춘천부는 춘천군·양구군·홍천군·인제군·횡성군·철원군·평강군·김화군·낭천군·회양군·금성군·양근군·전평군 등 13군을 관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개편이 500여 년 계속되던 행정제도를 개편하는 것이었으므로 인위적이라는 비판에 따라 다시 1년 2개월 만에 13군 1목 7부 331군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춘천은 춘천군·원주군·강릉군·회양군·양양군·철원군·이천군·삼척군·영월군·평해군·통천군·정선군·고성군·간성군·평창군·금성군·울진군·흡곡군·평강군·김화군·낭천군·홍천군·양구군·인제군·횡성군·안협군 등 26개 군을 관할하는 치소(治所)를 두고 이들을 관할하게 되었다. 약 500년 동안 원주에 있던 감영(監營)이 춘천으로 옮겨지게 된 것이며, 춘천이 강원도의 수부(首府)역할을 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춘천은 강릉·원주와 더불어 3대읍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춘천에는 다른 지역과 다른 특이한 점이 있는데, 다른 군현에 있는 읍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봉의산에 산성을 쌓아 방어체계를 갖추는 점이다. 이는 춘천이 산으로 둘러싸여 분지의 형태를 이루고 있어 따로 읍성을 쌓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기 때문일 수 있다. 한편 숙종 원년(1675년)에는 춘천을 전란 시 임금 피난처로 검토하여 축성을 하려는 논의가 있기도 하였으나 실행되지 못하였다.
어느 시대에나 도로는 한 국가의 근간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군사적인 측면·인적·물적인 교류 등으로 한 국가의 근간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선시대 춘천의 역로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역로(驛路)는 국가에 의해서 특별히 운용되어 행정과 군사상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국가시설 가운데 하나였다. 역(驛)은 각 지방에 이르는 도로에 30리마다 설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마필(馬匹)과 역리(驛吏), 역졸(驛卒) 등을 두어 중앙과 지방의 공문서 전달, 관물(官物) 공세(貢稅)의 수송, 관료 사행(使行)에 대한 마필의 급여와 숙식 제공, 변방의 군정 (軍情)과 민정(民情) 감찰 등을 담당하였다. 조선시대의 역로(驛路)는 군사, 행정상의 의미가 사회경제적인 의미보다 더 강하였다.
춘천에서 서울인 한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덕도원(德道院) 안보역(安保驛) 가평 평구(平丘) 왕산탄(王山灘) 망우리(忘憂里)를 거쳐 갔다. 각 역에는 종6품인 찰방(察訪), 또는 종9품인 역승(驛丞 : 중종 30년에 모두 찰방으로 통일하였다)을 파견하여 역의 사무를 관할하게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강원도에는 찰방은 없고 역승만 3인이 있었다. 춘천의 부내 (府內)에는 보안역이 있어서 중심역 구실을 하였고, 한양 방면에는 안보역이 자리하고 있어서 경기도 지방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역로가 있었으나 산이 많고 높아 육로 교통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북한강 중상류에 자리한 춘천으로서는 수로(水路)의 역할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춘천지역은 강원도 영서지방 세곡(稅穀)의 중간 집산지였다. 조선 초기에는 강원도의 세곡은 일시적으로 영길도(永吉道 : 함경도)로 옮겨져 군자(軍資)로 사용되거나 혹은 지역에 따라서 서울로 운송하지 않고 현지에서 군량, 혹은 기타 관수용(官需用)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경국대전』에 세곡 운송에 관한 규정이 생기면서 원칙적으로 세 경로를 통하여 경창(京倉)으로 집결되었다. 하나는 경창으로 직접 납부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춘천의 소양강창에 집결시켜서 북한강을 따라 경창으로 납부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원주의 흥원창(興原倉)에 집결시켜 남한강을 이용하여 운송하는 것이었다. 경창 직할구역은 회양·금성·김화·이천·평강·안협·철원이고, 소양강창구역은 춘천·홍천·인제·양구·낭천·흡곡·통천·고성·간성·양양이며, 흥원창구역은 원주·평창·영월· 정선·횡성·강릉·삼척·울진·평해 등이었다. 그러나 철원·이천을 비롯한 강원 북부의 7개 지역은 춘천으로 옮겼다가 경창으로 운송하는 것이 오히려 인력과 시간이 많이 소요되거나 별 차이가 없다는 관찰사의 건의에 따라, 성종대에 『경국대전』이 개정 보완을 거쳐 완성될 때에 강원 북부의 7개 지역은 경창에 직접 납부하도록 규정되었다. (원영환, 1996, 「조선시대」 『춘천백년사』, 204∼205쪽)
춘천을 중심으로 북한강의 수로를 이용한 운수는 세곡 외에도 목재나 토산품을 한양으로 운반하는 대신, 소금 등의 필수품의 다시 운반되어왔다. 목재는 주로 뗏목을 이용하거나 목재를 그대로 방류하여 특정지역에서 수거하는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소금은 배를 이용하여 수로를 따라 각 읍의 나루에 운반하여 공급하고, 수로가 닿지 않는 지역은 가장 가까운 읍의 나루까지 운반하고 그곳에서 다시 육로를 통하여 운반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강원도 지역의 목재를 궁궐 짓는데 사용하기 위하여 북한강 및 남한강 수계의 지역에서 계속 벌목을 하여 수로로 한양에 운송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강원도의 목재는 궁궐축조 뿐만 아니라 종묘·관아 성문 누각이나 민간 건축용 자재 또는 왕족들의 관(棺)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에도 관청의 축조를 위하여 계속하여 벌목을 하고 그 목재를 한양으로 운송하였다. 이들 목재는 주로 소금이나 포목으로 교환이 되었다고 하는데, 목재가 이 지역의 중요한 재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농한기에 목재를 벌목하여 한양에 매매하는 것을 전업(專業)으로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벌목과 운송은 대부분의 민에게는 매우 고된 부역이었다. 세종 25년에 춘천 등지에서 벌목을 하다가 죽은 군인에게 곡식을 하사했다거나, 성종 24년에 낭천(화천)에서는 깊은 골짜기에서 나무를 베어 운반하는데 100인의 힘을 써야한다며 어려움과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북한강을 이용하여 세곡이나 물자를 운송할 경우 춘천의 모진강(母津江)과 소양강을 통하여 수송되기 때문에 춘천부에서는 양강포감고(兩江浦監考)를 배치하여 이를 감독하고 수세(收稅)하도록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차례의 큰 전쟁을 겪고 난 후 조선은 전쟁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어야했다. 정치적으로는 우선 17·8세기에 왕조의 중흥을 위하여 숙종 영조 정조 등이 왕권강화를 시도하였으며,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다. 특히 정조는 사회전반에 걸쳐서 전쟁 복구 과정에서 나타난 경제발전에 힘입어 침체되었던 문예를 부흥하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여 정조대에는 학문과 기술이 발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이 시기를 문예부흥기라고 부르며 조선전기의 문화를 꽃피웠던 세종대에 비견될 정도였다. 그러나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이를 둘러싼 안동김씨나 풍양조씨 등을 위시한 세도정치 하에 사회가 극도로 불안하였다.
* 오영섭, 1996, 「춘천이궁고」『아시아문화』12, 한림대학교.
* 원영환, 1997, 「강원의 수부 춘천의 역사」 『강원사회의 이해』(강원사회연구회), 한울 아카데미.
* 최종일, 1999, 「북한강과 수운」 『한강유역사연구』, 사단법인 한국향토연구전국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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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수령이 맡는 일을 '守令 7事' 라는 하는데, 농업진흥, 인구증식, 학교 진흥, 군대정비, 부역과 세금 징수의 공정, 재판의 공정, 치안 확보 등 일곱가지였다.
<춘천문화원 제공>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