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상찬전집이 나오고 나서 지난 화요일 편집위원회의 첫모임이 있었다. 올해의 작업으로 잡지 <별건곤>의 작업 이야기를 하기 위한 모임이었으나 1차분을 두고 이런저런 의견도 나누었다. 서울에서 지정한 인쇄소를 통해선지 책이 다들 잘 나왔다는 의견이었다. 한자가 많이 섞인 글이므로 무엇보다도 문단의 레이아웃 자체가 답답해 보이거나 가독성이 떨어질 것이 염려되었으나 내가 보기에도 행간이 넓고 활자도 괜찮아 면 편집은 꽤 성공한 편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차상찬의 행적에 관하여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1910년대부터 삼일운동 전후까지의 공백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런 의문점이 미해결인 채로 여태 문제였고 몇 가지 보태는 말들이 보태지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 열심히 자료를 뒤적이시는 홍순우 선생이 차상찬이 쓴 <천렵>이란 글을 언급하며 고향을 멋지게 그렸다고 크게 상찬하는 말을 하였다. 나는 그런 글이 있었나 싶어서 집에 오자마자 얼른 그 글이 어디에 실렸는지 찾아보았다. 하지만 어느 잡지에 실린 글인지도 좀처럼 확인이 되지 않았다. 이게 우리의 현대문학 연구자들의 현재 수준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최근에 나온 <문장모범>이란 책에 그 글이 실린 것을 알게 되었다. 민병덕이란 사람이 (1946년 박태원의 <중등문범>이란 책을 기준으로 거기에다) 우리의 예전 좋은 문장들을 더 보태 모아서 대중서로 낸 책이었다. 중고서밖에 보이지 않아서 주문을 하고도 며칠을 기다렸다. 오늘 그 책이 드디어 온 것이다.
이 책은 나름 생각이 없지 않은 책으로 보였다. 일제시기의 문인들이 쓴 글들을 선발하면서도 발표 당시의 잡지 삽화들까지 함께 수록하며 옛 분위기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한 책이었던 것이다(정산미디어, 2010년). 이 책에 따르면 글 끝에 발표시기가 1940년 8월이고 조선금융연합회에서 발행하던 <가정지우(家庭之友)>라는 잡지 제34호에 실린 것이라고 하였다. 차상찬의 글은 박태원 책에는 없던 새로 추가한 글이었다.
너무도 반가운 나머지 이 멋진 글을 우선 사진으로 찍어 먼저 소개하기로 하였다. 원문을 보아야겠지만 그것은 나중에 찾아지는 대로 올리도록 하겠다.


나중에 다른 데서 서지사항을 소개한 것을 보니까 원래는 <가정지우>가 여름호를 맞아서 납량특집으로 기획된 '쇄하수필(銷夏隨筆)'이란 꼭지명으로 이기영, 박계주 등의 글과 함께 이 차상찬의 <천렵>이란 글이 실린 것이었다. 1940년이면 창씨개명을 강제하고 대동아공영권이라며 파쇼정치가 판을 치던 때였다(차상찬도 '江村相瓚'이란 이름을 썼음이 확인됨!). 그러니까 일부러 딴청을 피우며 '천렵' 이야기나 늘어지게 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글은 더하고 뺄 것 없이 잘 쓰인 멋진 단문 수필이다. 그가 그리는 당시의 소양강 공지천 천렵 광경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지는 것도 같다. '공지어' 이야기도 그 근거가 어딘가 싶었는데 이처럼 명확히 말해놓았고, 우리가 아는 봉황대 아래의 대받이강이란 말도 구만강이라고 하였다. '할미바위(老姑巖)'라는 곳이 어딘지, 우선은 원문이 그대로인지 고친 것인지부터 확인하며 어디를 가리키는지도 알아봐야겠다. 천렵이라면 물고기를 잡아서 '매운탕'을 끓여먹는 것으로 아는 우리에게 '생선국'이라니 다소 생소하게 들리기도 한다. 당시엔 쏘가리 크기가 지금보다 훨씬 커서 그랬을까? '팔다리 같은 고기'가 "득실득실하게 걸린다"는 말도 참 놀라운 언급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에 언급한 장한(張翰) 이야기는 고사가 있는 말이다. 중국 남북조시대 진(晉)나라 강동(江東)의 오중(吳中)이라고 오나라 사람이었고 청재(淸才. 맑은 재기)가 있으며 글을 잘 지었다. 그는 북쪽으로 가 낙양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가을바람이 이는 것을 보자 고향인 송강(松江) 생각이 났다. 오중에서 줄나물(菰菜. 볏과의 식물로 어린 것을 식용)이나 순챗국(蓴羹. 순채는 수련과로 어린잎을 식용), 그리고 농어회[鱸魚膾]를 먹던 생각이 나자 그는 "인생은 뜻에 맞게 사는 게 귀한데, 어찌 수천 리 밖의 벼슬살이에 매여서 명예나 관작을 구하겠는가[人生貴得適志 何能羈宦數千里 以要名爵乎]”라고 말하며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장한의 고사는 후대 당나라 때 두보나 이태백이 시에서 그 고사를 말함으로써 훨씬 더 유명한 일이 되어 전해내려오며 시인들이 회자하는 말이 되었다. 차상찬이 이 고사를 말한 것도 그가 당시에 처한 상황과 그의 심경을 알려주는 배경이 된다고 하겠다. 그는 맘에 맞지 않는 현실을 떨쳐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예전처럼 천렴렵이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이처럼 여실하게 한 것이었다.
일제시대에는 여름만 되면 잡지들이 피서특집호를 꾸미곤 하였다. 같은 1940년에도 그런 글들이 여럿 쓰였다는 게 확인된다. 하지만 아래와 같은 글에서는 차상찬 글의 상큼함이나 애틋함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같은 시기에 같은 제목의 글들이니 비교해보면 좋을 것 같다. 먼저 홍효민의 <천렵>(1940년)이란 글로 <인문평론>이란 잡지에 실린 글이다.


다음은 조선일보사에서 발행한 1940년의 <여성>에 실린 계용묵의 <천렵>이다.


그런가 하면 1940년의 한글학회에서 나온 <한글>에는 안동지방의 천렵과 관련한 용어들을 모아서 싣기도 한 것이 보였다.


위에서 '통살' 혹은 '살매기'라고 한 것을 춘천 남산면에서는 어렸을 적 기억으로는 '삽'이라고 불렀다. 어찌 기록에 남겨 알렸다고 표준말이 되겠는가마는 지역마다 방언이니 사투리니 하며 홀대하던 표준어정책과는 달리 우리 지역의 고유한 우리말들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여기서도 보이는 것 같다. 우리에게 과거의 애국계몽운동과 겹친 조선어학회의 한글운동은 연구보다 운동이 먼저였다는 점을 잘 들여다 볼 줄도 이제는 알 때가 되었다. 민족의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당시 현실의 강박 아래서 계몽운동은 불가피하게 과도한 계몽주의의 허울을 쓰고 있었다는 점 말이다.
차상찬의 글에서는 표준어 냄새가 나지 않는다. 아니 영서지방 춘천의 어투가 살아 있다. 그게 김유정에게서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문학인, 아니 문필가라면 이 점이 중요하다. 아무리 매끄러운 문장이라도 맥없다고 느껴지거나 쓸데없는 말이 남발되면 그건 살아있는 문장이 아니다. 일제시기 문인들이 썼던 우리말에도 그런 억지 한글이 많고, 그 중에는 일본어 말투를 답습한 것들도 많다. <문장강화> 같은 문장 교재 자체가 일본에서 나온 책을 그대로 답습하며 본뜬 것들이 많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우리는 교육을 통해 표준어로 훈련받게 되면서부터 이미 생생한 삶의 현장을 떠나게 되는 셈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표준어는 잘못된 표준어다, 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