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떠나며
만28세 때 북인천여자중학교에 발걸음을 내디딘 후, 만 62세인 올해 상인천여자중학교를 끝으로 교직생활을 마친다. 1985년 3월1일부터 2019년 8월 31일까지 총 34년 반이다. 20대 후반까지는 대부분의 시간을 학생으로 살았고, 60대 초반인 오늘까지는 오로지 교사로 지냈으니, 학교가 우리 집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제 정들었던 집을 떠날 날이 다가오고 있다.
어제 오후 학교에선 내 후임으로 올 한문교사 면접에 참여했고, 퇴근 후 집에선 공무원연금관리공단에 들어가 퇴직연금과 퇴직수당을 신청했다. 오늘 아침 공무원관리공단에 전화를 걸어 담당자에게 질문하니. 퇴직수당은 9월초에, 연금은 9월 25일 이후에 지급될 것이라 한다. 이제 봉급생활을 마감하고 연금생활로 진입하는 것이다. 학생 시대와 교원 시대를 지나, 무직 시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는다.
얼마 전까지 자인(子仁) 고00 선생이 틈날 때마다 물었다.
“부장님, 학교를 떠나는 기분이 어떠세요?”
그때마다 내 대답은 한결같았다.
“별 느낌이 없어요. 평소와 같아요.”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별다른 감정이 없다. 학생 시절 주위 어른들한테 입었던 은혜를 교사 노릇을 통해 나의 제자들에게 되돌려주었으며, 두 딸이 다 커서 더 이상 가족 부양의 의무감을 가질 필요가 없기에, 날아갈 듯 가뿐하고 홀가분하다. 묵은 빚을 다 갚아 빚쟁이의 굴레를 벗어난 기분이 이런 걸까. 앞으로 나의 무직 시대는 가볍고, 편안하고, 유유자적한 탄탄대로가 되리라 예측하고 예비한다.
우선, 정주생활을 벗어나 유목생활로 들어갈 생각이다. 발길 닿는 대로 국토 산하 이곳저곳을 떠돌며 살고 싶다. 신분의 예속으로 인해 자유롭지 못했던 우리 선조들 중에도 제 맘대로 제멋대로 떠돌며 살다간 사람이 많았거늘, 이토록 개인의 자유가 보장된 민주사회에서 어찌 한 곳에 매여 살아야만 하는가?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는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만들기 위해 방방곡곡을 헤맸지만, 나는 대동여지도를 손에 들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돌 것이다. 다니다가 맘에 들면 한동안 머무르고, 그러다가 또 좋은 곳이 생기면 다시 떠날 것이다.
둘째, 읽고 싶은 책을 맘대로 읽고 쓰고 싶은 글을 원 없이 쓰며, 내 한문 강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나 모임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참여할 생각이다. 역시 내가 좋아하는 것은 한문 공부고, 가장 잘하는 일은 한문 강독이다. 교직 생활 초기엔 동료들과 독서토론회를 만들어 활동했고, 학교를 옮기고 나서는 『삼국유사』(『三國遺事』) 윤독회를 결성해 주도했다. 윤독회가 발전해 내 개인 강의를 개설한 지 사반세기가 넘는다. 요즘엔 산책회(山冊會)라는 한문 강독 모임에서 『연암집』(『燕巖集』)의 척독(尺牘)을 읽고 있다. 그 동안 읽은 한문서적은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위시한 경서와 『사기』(『史記』)를 비롯한 역사서, 제자백가(諸子百家), 『고문진보』(『古文眞寶』), 당시(唐詩), 한국 한문 문집 등 다양한 시문을 섭렵했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 지속할 과업이다.
셋째, 뭐니 뭐니 해도 건강이 최고다. 은퇴 후 최고 보배는 돈이 아니라 자기 몸이다. 오늘까지 별다른 운동을 하지 않고 살아왔는데, 앞으로도 특정한 운동을 하고자 별도의 시간을 내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에 집안 걸레질, 음식물쓰레기 버리기, 장보기 등 최대한 몸을 움직거리며 살아갈 생각이다. 차타는 걸 줄이고 걸어 다니는 시간만 늘여도 최소한의 몸 건강은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맹자』(『孟子』)가 말하는 식색지성(食色之性)의 조절이다. 늙어서도 건강하게 사는 길은 욕망의 절제에 달려있다. 젊어서는 다소 무리해도 회복할 여지가 있겠지만, 나이 육십이 넘어 합궁에 탐닉하는 것은 자해(自害)요, 자멸 행위다. 노년의 양생(養生) 비결은 애정(愛精), 곧 정기(精氣)를 아끼는 데 있다고 옛 선인들은 가르쳤다.
우리학교에서 지낸 6년 반이란 세월이 꿈결처럼 흘러갔다. 나는, 오는 7월 19일 방학하는 날까지만 출근할 예정이다. 2학기 한문수업은 새로 부임하는 선생님과 함께 시작하는 게 학생들한테 유익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우리학교 교직원들과는 7월 19일 점심을 함께하는 것으로 작별할 작정이다. 정년퇴직을 알리는 현수막 게양이나 이러저러한 행사는 정중히 사양한다. 그저 조촐하고 소박한 밥상자리에서 오순도순한 대화로 족하다.
모두들 건강하고 평안한 삶을 누리기를 기원하며 미리 안녕을 고하고 이별 인사를 전한다.
2019. 7. 2(화) 15:11 산목 현금석 서.
#정년퇴직 #유목생활 #한문강독 #욕망의 조절
첫댓글 평생을 바쳐오신 교직과 탐구의 삶 앞에 숙연해지는 마음입니다. 큰 결실을 거두시고 떠나는 교직은 앞으로도 제한되지 않은 평생 한문 교육으로 그 장을 옮겨 계속되리라 봅니다. 이제 더 자유롭게 읽고, 쓰고, 사유하심이 더 큰 기여와 성취로 이어지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제2막이 편안하고 여유롭기를 빕니다.
감사합니다. 영탄, 회고 타령이나 하며 신변잡기에 머물까봐 걱정입니다. 미수 허목의 기언을 본받고 싶으나 역량이 모자라 근심하고 있습니다. 봉황은 꿈도 못 꾸고 학은 근처에도 가지 못하더라도, 닭만은 되어야겠다고 다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