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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힐링여행 1일차(2019.8.6, 화, 맑음)
2018년 6월에 몽골 고비사막과 일타이산맥 답사(6.17~28)를 다녀온 후 꼬박 1년을 기다린 끝에
2019년 8월6일 몽골 미야트 항공(MIAT Mongolian Airlines)을 타고 울란바토르공항에 도착하여
10박 11일의 신나고 재미있는 기상천외의 답사여행를 하였다.
8월16일 새벽 0시 30분에 인천공항에 도착. 짐을 찿고 공항에서 대원들과 함께 머물다
공항철도 첫 차인 5시25분를 타고 아침 7시15분에 서울 집에 돌아왔다.
집에 오니 온 식구가 따뜻하게 맞아준다.
여러날 여행을 즐기고 왔는데도 불고기 등 진수성찬을 차려주어 맛있는 밥을 먹고 꿀잠을 즐겼다.
서너시간 자고 일어나니 지저분한 여행 짐들이 말끔하게 정리되고
세탁을 못해 냄새나는 옷들이 세탁기에 들어가 깔끔하게 빨랫대에 걸려있었다.
아내에게 미안하여 오후 4시50분 메가박스에서 상영하는 <엑시트> 영화표를 예매하고 데이트 신청을 하였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6월에 신청한 희망도서(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저자:구범진, 출판사:까치, 2019년 3월 출간)를
찾아가라는 카톡이 와서 동네에 있는 작은도서관을 방문하여 '희망도서책'을 받아왔다.
<몽골 힐링여행기>는 11일간의 뜨거웠던 8월의 여정을
사진과 함께 생각나는 것을 간략하게 적어 수정 보완하려고 한다.
금번 8월 몽골여행에서 꼭 보려고 했던 선사시대 사람들의 제사유적과 사슴돌,
몽골 'Hustai National Park'의 '타키'라 불리우는 야생마, 몽골의 야생화,
영혼의 춤과 소리인 몽골 전통음악인 '흐미', 찬가, 몽골의 악기,
샤먼의 복장, 원시 부족과의 만남, 다양한 지역의 몽골 게르 체험,
몽골 전설과 신화, 몽골 문자, 재래시장, 지역 박물관들을 마음껏 보아서 너무나 행복하고 좋았다.
단지 아쉬운 점은 울란바토르 시내에 있는 <자나바자르 불교미술박물관>를 방문해 7점의 '타라 보살상'을 친견하지 못한 것과
작년에 보았던 몽골 천재화가 샤라브(1869~1939)의 <몽골의 하루>풍속화를 다시 못본 것이다.
<몽골의 하루> 풍속화에는 1911년경의 몽골의 일상이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몽골주라크를 한 점이라도 구입하고 싶었는데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그리고 훈 제국의 발원지이며 8c 위구르제국의 수도였던 하르발가스 유적(Khar Balgas)을 방문하지 못한 것이다.
이번 여행에 100% 만족하며, 다음에 7개의 눈을 가진 타라보살과 풍속화를 보러 몽골에 다시 가려고 한다.
2019년 8월6일 아침 9시 가족의 환송을 받으며 집을 출발해 9호선 지하철을 타고 김포공항에서 환승해
공항철도를 이용해 오전 11시경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에 도착하였다.
공항에는 외국을 오고 가는 많은 사람들로 시장터처럼 혼잡했다.
안동립 대장님을 비롯한 많은 대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대장이 주는 여권과 비행기표, 사탕을 받고 신속하게 짐을 분배한 후
몽골 항공 MIAT OMO308기를 타려고 긴 행렬에 줄을 서서 출국수속을 받았다.
인천공항 제1 여객터미널에서 출국 수속을 마치고 면세점 구경을 하면서 게이트에 도착했다.
홍승원 단장님이 "우리 출출한데 점심식사를 하러 가자."고 말씀하셔서
"비행기를 타면 곧 바로 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지만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시간이 되면 자동적으로 식사를 하던 습관이 있어서
4층에 있는 식당으로 올라가 전통 불고기 비빕밥을 한그릇 뚝딱 먹었다.
오랜만에 공항식당에서 고추장에 비벼서 밥을 먹으니
지난 2월 안용복 자료를 구하러 일본 돗토리현과 시마네현을 방문할 때 혼자서 밥을 먹던 때가 생각났다.
3시간 30분간 비행하여 몽골 칭키스 칸 비행장에 도착하여 입국장으로 걸어가는데 사막에 낙타가 우리 일행을 반갑게 반긴다.
몽골 울스의 수도인 울란바토르 오후 5시, 칭기스 칸 공항 밖으로 나오니 축복의 비가 조금씩 내리고 날씨가 벌써 서늘하다.
울란바토르는 '붉은 영웅'이리는 뜻을 가진 도시로
1924년 몽골인민공화국이 탄생하면서 혁명 영웅인 수하바타르 장군을 기념하기 위해서 명명한 이름이다.
원래 이름은 '니스렐 후레(Niisel Khuree)'로 큰 사원이란 뜻이다.
1899년의 후레의 인구는 2만 명이었다.
1920년대 이 지역 남자의 50%는 승려였다.
몽골 저리거 사장과 부인 머기氏, 운전기사의 환대속에 중형 24인승 버스와 화물차 프루공에 짐을 싣고
첫날 숙영지인 호스테이 국립공원까지 130km를 신나게 달렸다.
1년만에 보는 몽골 대초원의 싱그러운 냄새에 벌써 마음이 급해졌다.
호스테이국립공원 입구 팻말을 지나니 비포장도로가 나온다.
비가 부슬부슬 내려 미끄럽고 꾸불텅한 도로를 30분정도 더
달려 호스테이국립공원 초입에 있는 높은 산 중턱에 텐트를 치고 늦은 저녁을 먹었다.
이 장소는 6월달 선발대가 미리 봐둔 장소였다.
시장이 반찬으로 저녁 밥맛이 정말 꿀맛이다.
안 대장이 울란바토르 호텔에 가지않고 야영을 선택한 것은 놀라운 神의 한 수였다.
날씨가 흐리고 구름이 많아 별들을 보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자정무렵이 되니 신비하게도 구름이 사라지고 별들이 하나씩 나타났다.
작년과 똑같이 초원에서 은하수를 마음껏 볼 수가 있었다.
별을 날이 새도록 구경하고 싶었지만
내일을 기약하며 새벽 1시경 따뜻한 텐트속 침낭으로 기어들어갔다.
몽골 #힐링여행 2일차(2019.8.7, 수)
새벽 4시경 추위에 눈을 뜨니 예상했던 것보다 날씨가 매우 서늘하고 춥다.
누워서 뒹글다가 옷을 하나 더 껴입고 텐트를 벗어났다.
산책을 하려고 주변에 어스렁거리다가 가까이 있는 山에 올랐다.
산에 오르니 어제 저녁에 텐트를 친 곳이 정말 좋은 숙영지임을 알았다.
주변 경관이 정말 뛰어나고 푸른 초원속에 만물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대원들은 기상하자마자 아침을 뒤로 미루고 오전 6시 대원들은 버스에 올라 호스테이국립공원으로 갔다.
야생마 타키들이 물을 먹기위하여 일찍 산능선에서 있다가 산 아래에 있는 물가로 내려오기 때문이었다.
비포장도로를 20여분간 달려 호스테이국립공원매표소에 도착했다.
아침 7시. 온도 13도.
밖의 날씨가 조금 쌀쌀하여 벗어두었던 파카 옷을 다시 껴입고
버스에서 내려 호스테이국립공원 간판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겼다.
간판에는 야생화와 '엉거트 제사 유적'이 있었다.
호스테이 국립공원은 아르타보르그 솜의 아브다라(Avdar) 산 서쪽에 위치한다.
몽골의 행정구역은 크게 21개의 아아막(道, Aimag)이 있고 아이막 밑에 348갱의 솜(郡, Som)과 박( 면 ,Bag)이 있다.
호스테이 국립공원은 몽골어로 "호스타이 노로(잣나무 숲)'라고도 불리며 1992년에 설립됬다.
현재 네덜란드 정부와 몽골자연환경보호협회(MACNE)가 지원하는 '호스테이 국립공원 트러스트'에서 운영하고 있다.
'엉거트 유적지'는 A.D.E. 6~8c의 돌궐 제국시대에 만들어진 제사유적지이다.
제사유적지는 철책이 둘러져있고 4개의 판석과 주변에 30여기의 석인상이 남아있다.
길게 늘어선 선돌에는 사슴 문양이 표현된 사슴돌이 남아있다.
거석기념물인 엉거트석인상의 두 팔이 ×자로 교차하고 있어
몽골과 중앙아시아의 석인상과 차이점이 확실하게 다른 점을 보여준다.
엉거트 제사유적 석인상은 전남 화순 운주사의 석인상과 거의 비슷한 손 모습을 하고 있어 아주 놀라웠다.
2001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재구 연구관은 "운주사 천불천탑 원나라가 조성"이라는 학술 논문을 발표했다.
몽골 엉거트 제사유적지 판석과 ×××××격자무늬는 아주 특이하다.
격자무늬는 유목민족의 집인 게르와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영원의 집에 들어왔다는 것으로 나는 해석했다.
엉거트 제사유적은 신비스런 모습으로 오랜 세월 초원을 지켜왔다.
무지개가 뜬 엉커트유적지(전시관 사진)
몽골 야생마인 프르제발스키는 경계심이 아주 강해 사람이 다가오기 전에 멀리 달아나는 특징이 있다.(전시관 사진)
멀리 능선을 바라보니 "프르제발스키" 말들이 능선에 머물고 있었다.
러시아 군인이며 민속학자인 "니콜라이 프르제발스키(Przewalski)"가
1879년에 멸종위기종인 이 말들을 최초로 발견하여 학계에 보고하였다. 그래서 야생마들은 그의 이름을 따서 학명으로 삼았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프로제발스키"도 5,500년전 카자흐스탄에서 가축이었던
"보타이(Botai)말"과 유전체가 같은 계열로 보고 있다.
샌드라 올센 미국 캔자스대 자연사박물관 학예사는 최근의 연구 결과를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현재 연구자들은 러시아 남부 아나톨리아, 중앙아시아 등에 멸종을 피한 야생말의 조상이
아직 살고 있을 것으로 보고 탐색을 계속 진행하고 있다.
전시관에는 많은 자료가 전시되고 있어 천천히 자료를 관람하였다.
러시아 민속학자, 지리학자, 과학자, 군인이었던 니콜라이 M. 프르제발스키(1839.4.12~1888.11.1)는 위대한 탐험가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
실크로드가 세상에 알려지기 20년 전인 1870년대에 프로제발스키는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몽골과 고비사막, 암도 티벳트(현재 칭하이 지역), 중가리아의 천산 유역를 비롯하여 연해주와 조선의 두만강지역과 경흥 지방을 직접 조사하였다. 그는 중국 황하의 발원지를 찾아내고, 신장 위구르 지역의 로프노루 호수를 발견했다.
1861년 프로제발스키는 합동군사참모대학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자료들을 수집하여 "아무르 지방의 군사통계학적 계설" 책을 발표했다. 이 책을 우연히 본 표토르 세묘노프가 그를 추천하여 1864년 지리학회 구성원이 되었다. 프로제발스키는 이 논문을 통하여 티벳과 중국을 탐험하려고 계획했지만 세묘노픙의 권유로 1867년 아무르 지방을 2년동안 조사하고 보고서를 제출한다. 그는 육로로 처음 조선과 연해주를 방문하고는 "우수리주를 따라서"라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프로제발스키는 1870년부터 시작하여 1887년까지 중앙아시아와 티벳의 4차례의 탐험을 통하여 식물표본 5,000개, 조류 표본 1,000개, 포유류 가죽 130장, 곤충 3,000마리, 파충류박제 70개를 만들어 산트-페트르부르크박물관과 러시아 지리협회로 보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강연이나 대외활동은 일체 거부하고 오로지 학문 저술과 오지 탐사에 전념하고 헌신했다.
1888년 제5차 원정을 키르키스탄에서 준비하던중 장티프스에 걸려 49세로 세상을 떠나 러시아 제국 황제 알렉산드로 3세(1845~1894)의 명에 따라서 그가 머물렀던 도시 카라콜이 프로제발스크로 명명되고, 일부 산맥과 빙하에 이름이 명명되었다. 그의 동상은 상트페트르부르크 해군성 공원을 포함하여 여러 곳에 있다.
호스테이국립공원리조트 입구에 있는 상설 전시관에는
몽골 야생말인 '타키'에 대한 복원 과정과 각종 자료가 전시되고 있어서 너무 좋았다.
야생말 타키를 보고 나오는 길에 넓은 유채꽃을 보고
'제38차 고조선유적답사회' 대원들은 일제히 환희의 함성을 질렀다.
한 대원이 "대장님! 사진을 찍고 가요?" 하는 간절한 호소에
안 대장이 " 이것이 바로 힐링여행이예요." 하면서 바로 하차하라고 선언하여
싱그러운 유채꽃으로 직행했다.
유채꽃밭은 생각했던 것보다 정말 넓고 아름다웠다.
안동립 답사대장님의 지시에 맞춰 원형을 돌고
360도 카메라로 "어메 기죽어!" 등 다양한 영상을 찍었다.
올기호수로 가는 길에 들린 톨강휴게소에서 맛있는 아이스크림과 여행에 필요한 물품, 과자를 구입했다.
아이스크림은 홍승원 단장님이 사서 하나씩 나누워주셨다.
우유가 많이 들어가 맛이 아주 좋았다.
이 휴게소에서는 수요일 이날만 보트카를 팔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씩 술을 팔지 않는다.
휴게소를 출발해 포장도로를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비포장도로로 접어들었다.
멀리서 바라보니 큰 성채가 보인다.
버스에서 내리니 햇빛이 무척 따갑다.
이 유적은 9c~11c에 가장 왕성했던 기탄(Gitan)왕국 '하르 보흐(khar Bukhiin) 발가스(Balgas) 유적'이다.
기탄왕국은 거란족으로 10~11c '하르 보흐 발가스'를 쌓고 번창했으나
같은 유목민족인 몽골족에 의해서 13c경 멸망했다.
진흙과 벽돌로 만든 사각형 성들은 원형을 비교적으로 잘 유지하고 있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아주 웅장하다.
고대에는 아주 큰 도시였던 것으로 보인다.
기탄은 독일을 제외한 모든 유럽에서 집시(gypsy)로 통한다.
'하르 보흐(khar Bukhiin) 발가스(Balgas) 유적'은 1870년대에 이 지역을 지나던 러시아 학자에 의해서 발견 조사되었다.
현재 몽골 문화재로 등록되어 보호되고 있는데
이 동네 많은 말들이 햇볕을 피하기위하여 그늘로 찿아오고
까마귀들의 안식처로 사용되고 있다.
시간상 들리지 못한 북쪽의 먼곳을 망원으로 바라보니 대형 파고다형 돌탑이 서있다.
이 탑은 17c에 몽골 티벳불교 홍모파가 세운 사원탑으로,
이 탑 주변에서 1970년대 성터 발굴중에
몽골의 문자 및 서지문화에서 매우 중요한 자작나무 껍질에
몽골문자가 적힌 수십 종류의 책이 나온 곳으로 전해온다.
거란의 성터인 '하르 보흐 발가스'에는 동서 2km 남북 1km의 토성이 쌓여져 있고
북쪽의 유목민들을 관리하기 위하여 이곳에 성을 쌓고 군사를 주둔하였다.
후대 16c~17c초에 몽골인들이 거란에 토성에 남아있던 석재와 벽돌로 새롭게 건축물을 남겼다.
17c 이곳에 머물렀던 붉은 모자를 착용한 티벳 홍모파 스님들을 회상하며
성 주변을 오래오래 걸으며 성을 바라보았다.
'하르 보흐 박물관'내부에는 하르 보흐 발가스에서 발견된 다양한 유물·그림·사진을 전시하고 있었다.
작은 불상에 시주하고 탑사대원들의 안전을 기원했다.
몽골 사람들의 휴양지인 올기 호수에서
안동립 대장은 카페를 새롭게 열고 탐사대원들에게 바리스타로 변신하여 맛있는 드립 커피를 제공했다.
올기 호수의 석양은 정말 대단하다.
고대 투르크 문자로 돌궐제국의 발전을 기록한
빌게 카간(683~734) 비석(왼쪽)과 동생 퀼 테긴(684~731)비석을 바라보니
당시 돌궐의 힘이 아주 뜨겁게 느껴졌다.
당시 돌궐은 중가리아(Jungaria) 남부 초원과 알타이 산지를 중심으로 크게 힘을 키워 552년 당시 초원을 지배하던
유연(柔然)을 물리치고 초원 역사에 등장했다.
'푸른 투르크'라 불리는 돌궐은 멀리보이는 알타이 산맥의 모습이
마치 투구와 흡사하여 이들이 투구를 돌궐이라고 불렀기때문에
이름을 돌궐이라고 했다고 중국 사서에 기록되어있다.
고대 투르크어로는 '성스러운 투르크' 또는 '푸른 투르크'라 말한다.
당시 중국은 북위가 쪼개져 혼란중이었고 멀리 있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동맹으로 드넓은 초원을 평정했다.
2001년 7월31일 기념관터 발굴중에 2,000여 개의 유물이 수습되고
그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유물인 보석 상감된 황금 금관이 출토되어 세상을 놀라게했다.
2000년대 초장기 발굴 사진
비문이 있는 지역은 '오르 콘 밸리(Orkhon Velley)'지역은
문화경관 유네스코 2004년 세계문화유산의 일부로 터어키 정부가 비문을 복원하고
2000년부터 전 세계 70여 명의 고고학자들이 이지역을 집중 연구하고 발굴을 진행하였다.
프로젝트 비용은 약 2,000만$이 소요되었다.
빌게 카 간(Bilge khagan) 비석의 높이는 3.3m 폭 1.3m이며 66줄의 비문이 남아있다.
비문에는 터키의 전설적 기원과 역사의 황금기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1889년 러시아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고,
1893년 덴마크 언어학자 빌헬름 톰슨(Vilhelm Thomsen)에 의해 해독되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비문에 나오는 내용으로 번역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들의 장례식에) 조문으로 동쪽에서는 해뜨는 곳에서 먼 Bokli백성, 스텝인........거란, 타타브 백성이 와서
울고 슬퍼했다고 한다." 여기에 나오는 Bokli 백성이 한반도와의 연관성 및 고구려 일수도 있겠다는 많은 논문이 있다.
올기 호수를 출발해 비포장도로를 달려 박물관에 늦게 도착하여 주변을 기웃거렸더니
박물관 옆에 게르에 살있는 Gokhturk Museum의 관리인이 문을 열어주겠다고 선의를 베풀어
탑사대원들은 박물관 티켓을 끊고 입장하였다.
1년 전에는 이 지역에 구제역이 돌아 동행로가 모두 차단되어 관람을 못했는데
올 해는 어렵게 방문하고도 관람할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했다.
박물관 관람후 단체사진을 촬영했다.
투르크박물관(호쇼 차이담 소재) 내부 모습.
돌궐 프로젝트는 1995년 터키 대통령이 몽골 정부에 터키의 역사유물과 대표 유적지 발굴을 제의하면서 시작되어,
1997년 6월 터키국제협력처(TICA)와 몽골교육문화과학부와 협력을 체결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몽골 3개 지역에서 고대 돌궐비문의 고고학적 연구·발굴·수리·복원의 5개년 계획이 세워지고
재정이 투입되고 각종 활동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캄캄해져서 카라코롬 '이크몽골리아 캠프장'에 도착하여 허르헉을 먹고 아주 편한 두번째 날 잠을 청했다.
선발대가 미리 도착하여 이곳저곳 뛰어다니며 게르를 구했으나
몽골 성수기 시즌이라 끝내 게르를 못 구해 캠프장에서 텐트를 치기로 결정했는데
다른 팀들이 다른 지역으로 가는 바람에 아주 어렵게 방이 생겨 밤 10시에 짐을 풀었다.
신익재 대표랑 머기씨가 고생하여 편하게 저녁식사를 할 수가 있었다.
참으로 길고 긴 운행길에 말없이 수고해준 운전기사와 선발대의 보이지 않는 수고 등 정말 고마운 헌신의 하루였다.
다음날 아침 일찍 밖에 나서니 안동립 대장이 몽골 전통복장을 입고 신나게 춤을춘다.
그 모습이 아주 자연스럽다.
몽골을 자주 방문하다 보니 추운날에는 이처럼 델이 아주 긴요하게 사용된다.
몽골 3일차 아침 회의
7시 늦은 기상속에 누룽지탕으로 속을 든든히 채우고 씩씩한 모습으로 게르에 모여 앉았다.
대장님의 힘찬 모습에 모두가 반가운 얼굴이다.
게르가 처음인 사람은 난로에 불을 안지피고 그냥 잔 모양이다.
오랜만에 목욕을 해서인지 대원들 모두 얼굴이 깨끗하다.
날씨가 특이해서 땀냄새도 나지않고 옷도 칭낭도 뽀송뽀송하다.
출발전에 게르에서 사진을 남기다.
게르 문에 있는 문양은 길상문으로 우리도 아주 익숙한 전통문양이다.
원래 예약했던 아나르캠핑장에서 잠을 잤으면 바로 붙어있는 산에 올라 카타코롬 승리전망대을 돌아보고
옛 수도의 전체 모습을 설명하려고 했는데 다음 기회로 미러야했다.
몇 년 전 몽골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울란바토루가 매우 비좁고 도시환경이 나빠서
수도 이전을 하자고 회견을 한 적이 있었다.
이후 한동안 많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2050년경에는 카타코롬으로 이전하겠다는 수도 이전 프로젝트가 마련되고 있다.
에르덴조사원 앞에 있는 관광상품점에서 매사냥 폼을 진지하게 잡았다.
가게 직원이 한 번 꼭 해달라고 간청하여 매를 받아 손등에 올렸는데 생각보다 무척이나 무거웠다.
매를 손에 잡고 동영상과 사진을 남겼다.
몽골돈으로 5,000투르크, 한국돈으로 2,500원으로 내가 섬뜻 응해주니 여직원이 아주 좋아한다.
10,000투르크 돈을 주었는데 잔돈이 없는지 한참을 이 가게 저 가게 돌아다니다가 거스름돈을 전해준다.
우리 대원들이 기념품 가게에 들어가 선물할 상품을 많이 구입했다.
가격도 저렴하고 제품이 아주 좋다.
홍승원 단장님이 멋진 여우 털모자를 구입하고 기념촬영에 나섰다.
날씨가 추운데 이 모자를 쓰니 정말 따뜻하다고 좋아하셨다.
안동립 대장도 멋진 털모자를 구입했다.
가게 앞에 있는 늑대를 보니 어릴적에 내 별명이 생각나서 늑대와 사진을 찍었다.
어릴 때 고집이 하도 세고 한 번 마음 먹으면 끝까지 될 때까지 해서
어른들이 울프라는 별명을 지어주어서 지금까지 달고 산다.
안동립 대장과 늑대
북원(北元)의 알탄칸(Altan Khan, 1507년~1582년)은 군사적으로 명나라를 위협하고 원정을 하며 초원을 지배했다.
1552년에는 하르호린(카라코롬)지역을 지배하면서 1575년 티베트 겔룩파 승려 소남가쵸를 초청해 불교를 국교로 공인하였다.
칭기스 칸의 후손인 압 타이 사이 칸(Abtai Sain khaan,1544년~1588년)은 1585년 수도원 건축을 명하여
카라코럼 인근의 왕궁 폐허에서 나온 돌로 에르덴조 사원을 건축하였다.
압타이의 증손자인 자나바자자르가 사원을 중흥시켰다.
에르덴조 사원에 중앙에 위치한 '걸조'에 들어서면
중앙에 거대한 불상이 보이고 왼쪽에 남성수호상이 보인다.
머리위로 해골 장식이 보인다.
호법존에 있는 이 상은 여성 수호상으로 악귀사이에서 낳은 자식도 죽인 무서운 수호신이다.
에르덴조사원은 1585년 지어졌다가 17c 중국의 침략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8c에 이르러 다시 재건되고
1939년에 이르러 공산정권에 의하여 파괴되고 소실된 티벳불교 수도원입니다.
몽골의 옛 수도인 하르호린에 위치한 사원은 108개의 백색 초르텐이 15m 간격으로 높게 설치되어 있어서
사원이 매우 웅장하게 보인다. 옛날에는 승려 1,000명이 거주하고 경읽는 소리가 하루 종일 이어졌다.
현재 중앙에 있는 사원과 탱화 박물관에는
여러가지 불상과 티벳 탱화 탕카가 있어 오랜 티벳불교 역사를 보여준다.
불교회화
탕카
티벳불교 밀교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남녀합체불.
스님들이 수도하는 '라쁘린 사원' 내부에는 승려들과 신자들이 많이 앉아 있었다.
벽장에는 독특한 색깔의 보자기로 싸인 경전이 차곡차곡 쌓여 있어서 가슴이 뭉쿨했다.
사원에서 스님의 낭랑한 독경소리를 듣지못했다.
몽골 사람들의 점치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는데 조금은 아쉬워하면서 부처님께 시주하고 사원을 떠났다.
에르덴조 사원을 떠나면서 셀카로 기념사진을 남겼다.
대학에서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 익혀서 사원의 내용들이 조금은 알것같고 익숙하지만
세월이 지나니 글자도 단어도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붓다의 가르침을 형상화하기 위하여 탑을 축조하고 이름을 통상 '스투파(Stupa)'라고 불렀다.
스투파가 중국에 들어와 소리나는 대로 솔탑파(率塔波)라고
다시 음역되고 이것이 짧게 탑으로 축약되었다.
티벳에서는 불탑의 양식을 초르텐(Chorten)이라 부르는데 외관이 우리와 아주 다르다.
초르텐은 불법의 구도자가 가야 할 길을 함축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초르텐을 숭상한다.
초르텐 내부에 불상이나 경전을 보관하고 소원을 기도하기도 한다.
멀리 보이는 에르덴조 사원은 가로 세로가 각 400m인 계획적으로 건축한 사원이다.
사원 건축에 사용된 벽돌은 몽골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소똥으로 구운 벽돌로 아주 단단하다.
내부에 백개가 넘는 티벳사원과 게르가 있었다고 전해오지만 지금은 텅 비어있다.
에르덴조 사원에서 버스에 오르기전 신익재 대표가 드론을 띄어
프랑스에서 온 가족과 탐사대원들은 하늘에 감사 표시를 하였다.
에르덴조 사원을 나와 한참을 달리다가 늦은 점심을 들판에서 먹었다.
점심을 다 먹고 차담을 즐기면서
안동립 대장님의 몽골방문 여행담을 모두 즐겁게 경청했다.
2019년 8월 홉스콜~항가이산맥 답사여행에는 비행기티켓을 준비하고도
아쉽게 개인사정으로 여러 사람이 함께 몽골 여행에 동행하지 못해
내년에 몽골 남부 고비사막 여행에 꼭 함께 가자고 굳게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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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멋진 답사기 감사합니다.
좋은 사진 많이 올렸어요.
사진찍느라 역사 내용을 잘 몰랐는데, 답사기 읽어보니 몽골의 역사를 알 수 있어 좋습니다. 수고많았습니다.
영화 "이타미 준의 바다"를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