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양온천과 관광호텔 : 온양행궁, 영괴대, 신정비>
촬영 방문일 : 2018.11.9
아산은 역사적 유물이 많은 고장이다. 외암리민속마을이 있고, 맹씨행단이 있으며, 현충사가 있다. 일부 흔적만 남아 있지만 온천행궁도 그중 하나다. 온양온천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으로 역사적 내력이 깊다. 백제 때 이름이 탕정이므로 이미 백제시대에도 알려진 온천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온양행궁을 비롯하여 온천문화를 잘 보존하고 있는 곳은 온양관광호텔이다.
조선 시대에는 온양행궁에 왕과 왕족의 행차가 잦았는데 태조를 이어 특히 세조와 숙종이 많이 행차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외에도 세조, 현종, 숙종, 영조 등등이 보인다.
실록 세조조에는 "온양온천에 무릇 목욕하고자 하는 자는 어정, 어실 외에는 금하지 말라" 하는 왕지가 충청도 관찰사에 전해진 기록이 있다. 세조조에 어정을 따로 만들고 어실을 지어 사용했으며, 많은 백성들이 온천을 즐겨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세조조에 이미 온양행궁도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세조는 머무는 동안에 '주필신정'이란 이름을 내렸는데 이를 기념하는 '신정비'가 호텔 안에 있다. (아래 사진)
다산 정약용은 사도세자가 심은 홰나무가 훼손되고 관리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시를 지어 남기기도 했다.
"온천 행궁에 장헌세자께서 손수 심은 홰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그 당시 단을 둘러 쌓아 나무가 잘 자라도록 하라고 명하였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나무가 울퉁불퉁 오그라들고 단 또한 보이지 않아 슬픈 생각이 들어 이를 짓다" (다산시문집1권, 고전번역원 송기채역)
온천 행궁 안에 홰나무 한 그루가 / 溫泉宮裏一樹槐
오랜 세월 잡초에 매몰되어 묵히었네 / 歲久蓁蕪沒蒿萊
오이덩굴 새삼덩굴 칭칭 서로 감기어 / 瓜蔓兎絲苦相糾
기운을 펴지 못하여 겨우 한 길 자랐는데 / 志氣鬱抑長丈纔
마른 가지 뻣뻣하고 줄기 옹이 맺혔거니 / 枯條澀勒幹擁腫
동궁께서 과거 손수 심으신 걸 누가 알리 / 誰識儲君舊手種
이곳에서 동궁이 곰 과녁을 쏘실 적에 / 鶴駕於此射熊帿
다섯 발의 철촉이 모두 눈알 명중했네 / 鐵鏃五發皆貫眸
이에 귀한 나무 심어 그 자리를 기념하고 / 爰植嘉木表其地
아울러 돌을 쌓아 단 만들게 하시었네 / 且令砌石爲檀壝
(중략)
곁가지는 모두 다 뭇 아이들 올라타고 / 杈枒總被衆兒攀
기와 조각 자갈들을 누가 한 번이라도 치웠던가 / 瓦礫何曾施一彎
서글픔에 서성대며 차마 떠나지 못하고 / 彷徨惻愴不忍去
얽힌 덩굴 손수 뜯어 울타리 사이 던지네 / 手決纏縛投籬間
아, 이 나무 그 누가 사랑하지 않을 건고 / 嗚呼此樹誰不愛
여보게들 행여나 자르거나 휘지 마소 / 戒爾勿剪且勿拜
내 장차 돌아가서 임금에게 아뢴 뒤엔 / 吾將歸去奏君王
그 자리에 장헌세자 즉 비운에 간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의 어필을 새긴 '영괴대'라는 비석과 이를 위한 비각이 있다. 영조대는 사도세자가 영조를 따라와 활을 쏘던 곳이다. '영조대'는 정조의 어필이다. 그 내용은 정조의 <홍재전서>에 잘 나와 있다. 홍재전서는 정조의 시문과 교지 등을 모은 문집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어가를 수행한 사람, 뜨거운 햇빛을 피하기 위해 심은 홰나무를 보호하고 기린 관리 등등 사도세자 수행에 공이 있는 사람을 모두 찾아 논공행상을 하였다. 벼슬을 올리거나 하사하고, 재물을 하사한 사람이 천 5백명 정도였다. 영괴대야말로 정조 부자의 피맺힌 정서가 맺힌 곳이다. 이름하여 영괴대, 신령스런 홰나무는 정조에게 사도세자를 상징하는 그 무엇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영조대 비각은 온양행궁 터에 자리잡은 관광호텔 안에 있다. (아래 사진 참조)
유명한 유성온천도 일제 때 개발된 것이다. 온양온천의 역사가 그대로 우리의 온천문화사인 셈이다. 이렇게 되는데 온양관광호텔이 큰 역할을 했다. 지금은 바로 앞에 제일호텔, 근처에 그랜드호텔 등이 있어서 먼곳의 손님을 불러들이지만 일제시대에는 온양관광호텔만 있었다. 지금도 이 호텔은 성업중이고, 호텔 영업만이 아닌 아산과 온천의 문화를 지키고자 애쓰고 있다.
아산에는 풍부한 문화재와 맛집이 있다. 들러서 몸도 마음도 하루 쉬면서 충전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참고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양관광호텔 안팎 전경















*신정비
* 석불과 영괴대에 위치한 울 안은 야외혼례식이 진행되는 공간이다.
* 지하 대중탕 앞에는 온양행궁과 온천에 대한 안내가 붙어 있다.
* 호텔 오른쪽 마당에는 신정비각이 있다.
< 영괴대 >
*홍재전서 제34권 / 교(敎) 5
온양(溫陽) 행궁(行宮)의 괴대(槐臺)에 비석을 세우라는 하교 상전(賞典) 사실(事實)을 덧붙여 주냄
예전 선조께서 경진년(1760, 영조36) 7월에 온양의 행궁에 행행(幸行)하셨을 때 서쪽 담장 안에서 표적을 정해 활쏘기를 한 뒤 품(品) 자 형태로 세 그루의 홰나무를 심어 후일에 그늘을 드리우게 하라고 명하셨는데, 이제 36년이 지나는 동안에 뿌리가 서리고 줄기가 뻗어 온 뜰 안에 그늘이 지게 되었다. 이에 고을 수령이 도백(道伯)과 수신(帥臣)에게 말하여 그 나무 둘레에 대(臺)를 쌓아 보호하게 하였다고 한다. 영흥(永興) 본궁(本宮)의 욕례(縟禮)를 위하여 경모궁(景慕宮)에 가서 재숙(齋宿)하고 돌아왔는데 이날 이러한 말을 듣게 되니 또한 기다림이 있었던 것 같다. 슬프면서도 감격스러워 마음을 가눌 수가 없다. 대를 만드는 공사가 이미 완공되었는데 사적(事蹟)이 또한 본읍에 기록되어 있지 않겠는가. 그 당시의 도신(道臣)과 고을 수령 및 분부를 받들어 나무를 심었던 사람의 성명을 조목별로 나열하여 계문(啓聞)하도록 하라. 그리고 삼가 그 사실을 기록하여 대 옆에 비석을 세우라.
이 대는 온천 행궁의 북쪽 담장 서쪽에 있다. 영묘(英廟) 경진년 7월 25일에 어가(御駕)가 온천 행궁에 행행하여 이틀 뒤에 과녁을 설치하고 친히 활쏘기를 하였다. 그리고 하교하기를, “이 땅은 표시해 두어야만 할 것이다.” 하고 다음 날 수신(守臣)에게 명하여 어린 홰나무 세 그루를 캐어 와 심도록 하였는데, 그루마다 가지가 두 개씩이었다. 이때 이르러 대를 쌓고 대 옆에 비석을 세웠는데, 친히 영괴대(靈槐臺) 세 글자를 비석 앞면에 쓰고 비석의 뒷면에는 명(銘)을 제술하였다.
○ 대의 길이는 15자 5치, 너비는 12자 5치, 높이는 3자 2치였다. 비석에는 남포(藍浦)의 오석(烏石)을 썼는데, 길이가 3자 9치, 너비가 1자 5치, 두께가 8치였다.
○ 이해 10월 27일에 영괴대의 비석 인본(印本)을 친히 받을 때 예방 승지(禮房承旨)와 각신(閣臣)이 의장(儀仗)과 고취(鼓吹)를 갖추고 만팔문(萬八門)을 경유하여 배진(陪進)하였다. 하교하기를, “올해에 온양 행궁의 세 그루 홰나무에 대한 고적(古蹟)을 듣게 되어 각(閣)을 세우고 비석을 세웠으니 마치 기다린 바가 있었던 듯하다. 내가 감회가 일어 슬픈 생각이 드니 마음을 가눌 수가 없다. 역역(力役)이 완성되어 인본을 친히 받게 되었는데, 그러한 훌륭한 고적을 보고 받은 것이 수원(水原)의 숙차(宿次)에 나아갔을 때였으니 어찌 기이하지 않겠는가. 예전에 이곳에 어가를 머물고 있을 때 도백(道伯)이 곧 능은군(綾恩君)이었는데 오늘 예조 판서로서 나와 숙배하게 되었다. 능은군 구윤명(具允明)의 집에 옷감과 음식물을 실어 보내도록 하라. 예전에 이곳의 지방관이었던 증 참판 용은군(龍恩君) 윤염(尹琰)이 또한 분부를 받들어 직접 세 그루의 홰나무를 심었다. 그 아들 각신 윤행임(尹行恁)이 지금 또 분부를 받들어 음기(陰記)를 썼으니 녹비(鹿皮)를 하사하라.” 하였다.
○ 병진년에 하교하기를, “온양에 행행할 때 어가를 수행한 사람으로서 조관(朝官)은 각각 한 자급씩 더하고 무사(武士)는 품계에 따라 중추부의 직함에 비의(備擬)하라. 아직 추영(追榮)하지 않은 자는 추영하고, 군병과 이례(吏隷) 가운데 나이가 70이 넘은 자는 체가(帖加)하고 60 이하인 자는 쌀과 베를 나누어 주라. 그 당시 충청도 관찰사는 바로 능은군이었는데 자궁(資窮)에 관계되니 옷감과 음식물을 실어 보내고 낭관(郞官)을 보내어 안부를 묻고 오도록 하라. 지방관이었던 고 군수 용은군 윤염은 한 자급을 더 올려 주라. 그 나머지 차사원(差使員)과 수령은 해도(該道)에 물어보아 생존해 있는 자가 있으면 똑같이 가자(加資)하라. 어가를 수행하였던 무신 및 군교(軍校) 가운데 생존해 있는 자도 즉시 각부(各部)와 각 해당 영문(營門)에 물어보도록 하라. 해군(該郡)의 교리(校吏)도 도신으로 하여금 탐문하여 장계로 보고하도록 하라. 또 생각건대, 고 중신(重臣) 이담(李潭)이 암행어사 시절에 있었던 일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을미년 이전에 수립한 것이 곧 그 원류이다. 그 아들 참봉 이정모(李靖模)를 충청도의 수령으로 차임하여 보내라.” 하였다.
○ 이조가, 차사원과 수령 및 찰방(察訪) 가운데 생존해 있는 사람은 전 현감 권성응(權聖應) 한 사람밖에 없다고 아뢰자, 특별히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에 제수하라고 하교하였다.
○ 병조가, 배종(陪從)하였던 사람으로는 함경도 감사 조종현(趙宗鉉)이 세마(洗馬)로서 배종했었다고 아뢰자, 하교하기를, “또한 가자하라. 그 중신의 아비가 배종하였던 일을 생각하면 어찌 슬픈 마음을 가눌 수가 있겠는가. 중신에게 관교(官敎)를 전하여 선포하는 날 또한 그 아비 고(故) 중신 조운규(趙雲逵)에게 치제(致祭)하라. 또 생각건대, 고 중신의 아비인 고 중신 조영국(趙榮國) 또한 곧 내가 책봉될 때의 사부(師傅)였다. 늘상 또한 기억하고 있던 일인데 이제 치제하는 때에 어찌 빠뜨릴 수 있겠는가. 똑같이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어가를 수행했던 사람으로서 청주(淸州)의 영장(營將) 이인강(李仁康)에 대하여 뒤미처 아뢰자, 하교하기를, “그 당시에 온양 행궁에서 거행하면서 노고가 가장 많았던 사람이다. 더구나 그 처지가 다른 사람과는 다르니 특별히 지중추부사에 제수하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고(故) 의관(醫官) 박태균(朴泰均)이 노고를 아끼지 않았던 것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근래 온천에 배종하였던 사람을 거두어 녹용하는 일과 관계하여 들으니, 박태균의 집에는 늙은 처와 어린 손자밖에 없다고 한다. 음식물과 옷감을 넉넉히 지급하고 그 손자에게는 매달 다섯 말의 쌀을 지급하고 어른이 되기를 기다려 내국(內局)에 곧장 부직(付職)하도록 하라.” 하였다.
○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이 아뢰기를, “예전에 계방(桂坊)의 관원으로서 서연(書筵)에 출입한 자로는 이제 세 사람이 남아 있습니다. 이민보(李敏輔)는 숭품(崇品)의 지위에 올랐고, 정존중(鄭存中)도 기사(耆社)에 들어갔는데, 신광리(申光履)만이 영락(零落)함을 면치 못하였고 나이 또한 70세가 넘었으니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특별히 지중추부사에 제수하도록 하고 두 중신의 집에는 쌀과 고기를 실어 보내라고 하교하였다.
○ 종신(宗臣)인 조관(朝官)으로서 자궁(資窮)이 되어 옷감과 음식물을 하사받은 자는 2명이고, 조관으로서 가자된 자는 13명이고, 중관(中官)과 액속(掖屬)으로서 가자된 자는 5명이고, 말을 지급받은 자는 1명이고, 비단과 무명, 쌀과 고기를 지급받은 자는 10명이고, 소원에 따라 천역(賤役)을 면하게 된 자는 1명이고, 의관으로서 가자된 자는 2명이고, 무사, 군교, 이례로서 가자되어 관직에 제수된 자는 80명이고 체가(帖加)된 자는 99명이다. 나이 60세와 50세 이상으로 등급을 나누어 쌀과 베가 지급된 자는 190명이고, 경기와 충청도의 여러 고을 이교(吏校)로서 가자되어 위장(衛將)에 제수된 자는 12명이고, 나이가 100세에 가까워 첨지중추부사에 곧장 부직된 자는 1명이고, 90세 이상으로 가자된 자는 2명이고, 80세 이상으로 가자된 자는 2명이고, 70세 이상으로 체가된 자는 107명이고, 70세 이하 50세 이상으로서 등급을 나누어 쌀이 지급된 자는 1347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