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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경효전(景孝殿)
정의
1897년(광무 1년) 명성황후 민씨의 신주를 봉안하기 위하여 경운궁에 설치한 건물.
개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살해당한 명성왕후의 장례 기간에 신주를 봉안하고 제사 지내던 빈전(殯殿)과 혼전(魂殿)의 기능을 하던 곳이었다.
위치 및 용도
원래는 경운궁(慶運宮: 현 덕수궁) 내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咸寧殿) 바로 서쪽 옆 가까이에 있었다. 명성황후의 빈전과 혼전으로 쓰였으며, 1921년 고종황제 삼년상이 종료되어 명성황후와 고종황제의 신주가 종묘에 함께 부묘(祔廟)될 때까지 관련 상례·제례가 행해졌다.
변천 및 현황
1896년(고종 33) 명성황후의 국장(國葬) 때 빈전인 경소전(景昭殿)이 건립되었다. 1897년 10월 명성황후를 홍릉(洪陵)에 안장한 후 빈전을 그대로 혼전으로 쓰면서 이름을 경효전(景孝殿)이라고 바꾸었다. 1898년 11월 명성황후의 신주를 잠시 경운궁의 정전인 중화전(中和殿)으로 옮겼다. 1904년(광무 8) 4월 경운궁에 큰 화재가 일어나 경효전이 불에 타자 급히 황실도서관인 수옥헌(漱玉軒)으로 옮겼으며, 중건될 때까지 경운궁 남쪽에 자리한 수풍당(綏豊堂) 등으로 옮겨지기도 하였다. 1905년 함녕전 등과 함께 중건되었다.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점한 일제는 1912년 약 60,000원의 경비를 들여 증축하고 전 황제(일명 덕수궁 전하)인 고종의 접견실로 만들어 귀빈을 접견하도록 하였다. 이때 건물의 내부를 화려하게 바꾸고 이름도 덕홍전(德弘殿)으로 고쳤다.
형태
관련사건 및 일화
1895년(고종 32) 10월 경복궁을 습격한 일본인에 의하여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 발생하였다. 명성황후의 장례는 1896년 시신도 없이 국장으로 진행되었다. 원래 빈전과 혼전은 상례·장례 기간이 끝나면 없애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명성황후의 경우 황후가 사망하였을 때부터 고종황제가 생존해 있는 동안 계속 유지한 것이 특징이었다. 위치상으로도 경운궁의 정전인 중화전 바로 오른쪽에 있었다. 이는 명성황후가 단순히 황제의 배우자에 그치지 않고 대한제국의 위상과 관련하여 중요 인물로 취급되었음을 보여 주었다.
참고문헌
『경효전일기(景孝殿日記)』
『경효전의궤(景孝殿儀軌)』
홍순민, 『우리 궁궐이야기』, 청년사, 2005.
小田省吾, 『德壽宮史』, 李王職, 1938.
군주(郡主)
정의
왕세자의 적녀(嫡女)에게 내리던 외명부(外命府)의 정2품 작호(爵號).
내용
조선초기에는 왕의 적녀와 서녀를 공주 또는 옹주로 칭하였으나, 종실녀(宗室女)에 대한 칭호는 없었다. 이로 인한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1431년(세종 13) 10월에 중국의 옛 제도에 따라 근친종실(近親宗室)의 딸을 군주(郡主)·현주(縣主)로 칭하였다. 그러다가 1440년(세종 22)에 왕의 서녀 또는 왕세자의 적녀를 군주로, 왕세자의 서녀와 대군의 적녀를 현주로 봉하였다. 그 뒤 『경국대전』에서는 왕세자의 적녀를 정2품 군주로, 서녀를 정3품 현주로 규정하여 차등을 두었다.
군주는 아버지인 왕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공주로 승격하여 품계를 초월하고 그에 따른 대우를 받았다. 또한 군주에게 장가든 사람은 정3품 부위(副尉)와 봉순대부(奉順大夫)에 봉작되었으나, 부인이 공주가 되면 부마로서 종1품 위(尉)로 승격되었다.
용례
自大君以下至于參外之妻 官制已備 獨宗室之女 只稱郡主縣主 固無差等之別 謹稽漢制 皇女稱縣主 諸女稱鄕亭翁主 唐制太子女爲郡主 親王女爲縣主 今依古制 正宮之女稱公主 嬪媵宮人之女 世子之女稱郡主 世子宮人之女及大君正室之女稱縣主 諸君正室之女及大君之子之女稱鄕主 其餘宗室之女 竝稱亭主[『세종실록』 22년 4월 15일]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궁가(宮家)
정의
왕실의 구성원인 후궁, 대군, 공주, 옹주 등의 집을 일컫는 말.
개설
궁가(宮家)는 왕실 구성원의 집을 가리키기도 하고 각 구성원들의 수입과 지출을 총괄하는 궁방(宮房)을 의미할 때도 있다. 궁가의 기본 재산은 국가에서 지급하는 궁방전(宮房田)인데 이것은 신분에 따라 그 규모가 달랐다. 출생, 가례, 또는 출산 등을 통해 왕실 구성원의 지위를 획득하면 궁방이 설립되고 그에 합당한 터전과 전지가 지급되었다. 그리고 왕실의 자녀들이 성장하여 궁궐 밖에 거처할 때도 국가에서 집을 구해주었다. 해당 인물이 사망하면 국가에서 지급하는 궁방전의 규모를 줄였고, 궁가는 제향을 위해 사용되다가 4대가 지나면 궁방이 폐지되고 사가(私家)로 전환되었다.
내용 및 특징
궁가는 수진궁(壽進宮)·명례궁(明禮宮)·어의궁(於義宮)·용동궁(龍洞宮) 등과 같이 내수사와 더불어 왕실의 재정을 담당하는 재정 기구, 경우궁·육상궁·선희궁 등의 제궁(祭宮), 왕실 일족인 후궁·대군·공주 등의 집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중에서 재정 기구 및 제궁은 영속성을 지녔지만 왕실 일족의 거주지인 집은 일정 기간 설치되었다가 폐지되는 유동적인 조직이었다.
변천
궁가들은 주로 면세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민간이 재산을 투탁하거나 혹은 민간의 소유를 침탈하는 사례가 많았다[『숙종실록』 3년 9월 5일].
참고문헌
조영준, 「조선후기 궁방의 실체」, 『정신문화연구』 112호, 한국학중앙연구원, 2008.
궁주(宮主)
정의
조선초기에 왕의 후궁을 일컫던 칭호.
내용
조선초기에는 내명부(內命婦)의 체계가 정립되지 않았으므로, 고려시대의 영향을 받아 왕의 후궁을 궁주(宮主) 또는 옹주라 칭하였다. 그런데 궁주는 고려 때부터 왕녀(王女)를 가리키는 칭호였으므로, 사실상 왕의 딸과 후궁의 칭호가 구분되지 않은 셈이었다. 이후 1428년(세종 10)에 내명부 체제가 마련됨으로써 1424년(세종 6)에 간택된 후궁들, 즉 최사의(崔仕儀)와 박강생(朴剛生)의 딸이 각각 명의궁주(明懿宮主)와 장의궁주(莊懿宮主)에 봉해진 것을 마지막으로 후궁에게 주어지던 궁주라는 작호는 폐지되었다. 그 대신 후궁들은 내명부 정1품 빈(嬪)에서 종4품 숙원(淑媛)까지의 작위에 봉작되었다.
용례
宮主 非王女之號 而稱王女爲宮女 翁主非宮人之號 而稱翁主 此實因前朝之舊 而未革者也[『세종실록』 10년 3월 8일]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경국대전(經國大典)』
내탕(內帑)
정의
조선시대 왕 사유재산의 궁궐 내 비축 공간 또는 왕의 사유재산.
개설
조선초기 내탕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첫째는 궁궐 내에 왕의 사유재산을 비축하는 공간을 지칭하는 말로, 대표적인 곳으로 상의원을 들 수 있다. 둘째는 왕의 사유재산 그 자체를 지칭하는 말로, 이와 관련된 기관으로는 내수사가 대표적이다. 조선후기에는 내수사에 더하여 명례궁(明禮宮)·어의궁(於義宮)·용동궁(龍洞宮)·수진궁(壽進宮) 등 이른바 4궁까지도 왕의 사유재산, 즉 내탕으로 간주되었다. 1907년 2월 24일자로 내수사와 4궁이 폐지되면서 왕 사유재산으로서의 내탕은 사라지게 되었다.
내용 및 특징
내탕은 내(內)와 탕(帑)의 합성어로서 ‘내’는 ‘궁궐 안’이란 의미이고 ‘탕’은 ‘창고’란 의미이다. 즉, 내탕의 원초적인 의미는 ‘궁궐 안의 창고’인데, 궁궐 주인이 역시 ‘궁궐 안의 창고’ 주인도 되므로 내탕은 왕 사유재산의 궁궐 내 비축 공간이라는 의미는 물론 왕의 사유재산이라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조선시대 내탕이 왕 사유재산의 궁궐 내 비축 공간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대표적인 사례로는 상의원(尙衣院)을 들 수 있다. 예컨대 1399년(정종 1) 5월 1일 실록 기사에 의하면 문하부에서 상소하여 시무(時務) 10가지를 진술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상의원은 전하의 내탕이므로 의대(衣襨)·복식(服飾)의 물건을 일체 관장하는데, 다만 간사한 소인의 무리로 하여금 맡게 하여 절도 없이 낭비하는 데에 이르니, 이제부터 공정하고 청렴한 선비를 뽑아서 그 일을 감독하게 하소서.”라는 내용이었다[『정종실록』 1년 5월 1일].
『경국대전』에 의하면 상의원은 정3품아문으로서 왕에게 드리는 의대 및 궐내의 재화·금보(金寶) 등의 물품을 관장하였다. 여기에 언급된 재화는 복식에 수반되는 각종 금은 장신구를 의미하며, 금보는 종묘에 모셔졌던 선왕의 금보를 의미하였다. 의대·재화·금보는 왕의 사유재산이었으므로 이들 물품이 비축된 상의원이 내탕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조선전기 상의원은 호조에서 받은 공납품으로 재원을 마련하였지만 조선후기에는 여기에 더하여 균역청·상평청·진휼청 그리고 선혜청 등에서 받은 공납품으로 재원을 마련하였다. 상의원으로부터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왕은 환관을 통해 승정원에 알리게 하고, 승정원이 상의원에 전달하여 조달하게 하였다.
한편 태조이성계 이래 조선의 역대 왕은 공적인 국가 재정과는 구별되는 사적인 재산을 소유하였는데, 그 사유재산이 내탕이었다. 태조이성계의 경우 왕이 되기 이전에 함경도 지역에 노비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왕이 된 후 고려왕실이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재산까지 획득함으로써 그의 사적 재산은 막대하였다. 태조이성계는 왕이 된 후 자신의 잠저를 본궁이라 하고 그 본궁에서 즉위 이전의 사적 재산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 관행은 정종·태종·세종에게도 이어져 각각 자신들의 잠저를 본궁으로 삼아 사적 재산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는 제왕 가운데 창업한 자는 후계 왕에게는 왕권을 물려주고 나머지 자녀들에게는 잠저 때의 사적 재산을 나누어 주던 고려 이래의 관행이기도 하였다.
세종은 태조·태종 그리고 자신의 본궁 재산을 통합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내수소(內需所)를 설치하였다. 내수소는 궁내의 수용을 담당하던 내수별좌(內需別坐)가 1430년(세종 12) 6월에 개편된 관사였다. 이 내수소가 1466년(세조 12) 1월 15일의 관제개편 때에 내수사가 되었으며 『경국대전』에서는 정5품아문으로 명문화되었다. 이처럼 조선건국 이후 본궁·내수소·내수사에서 관리한 왕의 사유재산이 바로 내탕이었는데, 내탕의 출납은 환관들이 장악함으로써 양반관료들의 간여에서 벗어나 있었다.
변천
조선시대의 상의원은 비록 내탕으로 간주되기는 했지만 공납이라는 공적제도와 직접적인 관련을 갖고 있었기에 소장 물품의 종류와 수량 등이 양반관료들에게 노출되기 쉬웠다. 이에 조선시대 왕은 상의원 이외에 별도로 상고(廂庫)라고 하는 내탕을 운영하였다. 상고는 1405년(태종 5) 10월 19일에 이궁인 창덕궁을 완성하였을 때 상고 3칸도 함께 설치하였다는 기록에서 처음 확인되었다[『태종실록』 5년 10월 19일]. 상의원이 경복궁에 있었으므로 이때의 상고는 이궁을 건립함에 따라 상의원의 출납을 편리하게 하고자 분원 형태로 설치되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창덕궁의 상고는 상의원의 관할에서 벗어나 환관이 관할하게 되었고 그 결과 양반관료들의 관할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상고는 내상고(內廂庫)·내상(內廂)·내고(內庫)·국고(國庫) 등으로 불렸으며, 상의원은 공적 내탕으로 상고는 사적 내탕으로 구분되었다.
한편 조선시대 내수사는 전국에 걸쳐 있는 왕의 사유재산인 내탕을 관리할 뿐만 아니라 크게 증식시키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재산은 주로 토지와 노비였는데 내수사의 관원들은 왕권을 배경으로 토지와 노비를 크게 늘렸다. 예컨대 내수사 소속의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들에게는 다른 곳에 비해 세금을 경감시키거나 소작료를 낮게 책정하는 등의 특혜를 베풀었다. 이에 따라 관리들로부터 온갖 침탈을 당하는 농민들이 서로 내수사 소속의 토지를 경작하고 싶어 했다. 나아가 아예 자신의 토지를 내수사에 헌납하고 그 대신 싼 세금을 내며 관료들의 횡포에서 벗어나려 한 농민들도 적지 않았다.
내수사에서 늘린 재산은 토지뿐만이 아니었다. 내수사에 소속된 수많은 노비들도 다른 노비들에 비해 의무가 가벼웠다. 이에 따라 사노비나 관청에 소속된 공노비들도 내수사 소속의 노비가 되고 싶어 했다. 게다가 내수사에서는 장리(長利) 활동도 하였다. 내수사 소속의 토지에서 산출되는 곡식을 본전으로 하여 곡식 또는 돈을 꾸어 주고 이자를 받아 재산을 증식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종 연간에 내수사 장리가 혁파되면서 왕의 사탕인 내수사의 재산은 크게 줄어들었고 그 결과 내수사 토지 역시 대폭 감소하였다. 그 대안으로 왕비·대비·왕자·왕녀 등에게 궁방전을 분급하였는데, 궁방전 중에서 명례궁·어의궁·용동궁·수진궁 등 이른바 4궁은 내수사와 함께 내탕으로 간주되었다[『현종실록』 2년 6월 3일].
통감부가 설치된 직후 일제는 제실제도정리국(帝室制度整理局)을 설치하여 내수사 및 각 궁의 채무에 관한 조사를 진행하였다. 제실제도정리국은 제도국(制度局)을 거쳐 각궁사무정리소(各宮事務整理所)로 이어졌는데, 이 각궁사무정리소에서 1907년 2월 24일자로 내수사와 4궁을 폐지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부터 대한제국까지 이어지던 왕 사유재산인 내탕은 사라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송수환, 『조선전기 왕실재정연구』, 집문당, 2000.
정현재, 「鮮初 내수사 노비고」, 『경북사학』 3, 경북사학회, 1981.
지승종, 「조선초기 내수사의 성격과 내수사 노비」, 『한국학보』 40, 일지사, 1985.
한은자, 「성종-중종조 내수사 長利에 대하여」, 『崇智苑』, 수도여자사범학교(상명대학교), 1967.
한춘순, 「명종대 왕실의 내수사 운용」, 『인문학연구』 3,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소, 1999.
조영준, 「19세기 왕실재정의 운영실태와 변화양상」,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thesaurus.history.go.kr/.
병신정식(丙申定式)
정의
1776년에 왕실에서 규정 외로 보유하고 있는 궁방전(宮房田)을 조사하여 호조에 출세(出稅)하게 한 조치.
개설
병신정식은 국왕을 비롯한 왕실 구성원에게 지급되던 궁방전의 확대를 막고 국가재정을 확충하기 위한 일환으로 1776년(정조 즉위)에 대대적으로 시행되었다. 정조는 왕실 궁방에서 규정 외로 보유한 면세지를 조사하여 호조의 출세지로 전환시키는 한편, 무토면세전(無土免稅田)에 도장(導掌)이나 궁차(宮差)를 직접 파견하여 세금을 징수하는 방식을 금지하고 수령이 대신 수취하여 지급하는 방식으로 전환시켰다. 병신정식을 통해 2만여 결의 면세결이 호조로 귀속되었으며, 무토면세전에 대한 수취 권한이 수령에게 이관됨으로써 궁방의 사적 토지지배 권한이 크게 제약을 받게 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병신정식은 왕실의 사재정 역시 국가의 공적 자원으로 관리되어야 한다는 궁부일체의 이념하에 단행되었다. 정조는 국왕의 내탕에 해당하는 내수사를 비롯하여 왕실 궁방의 토지와 노비공(奴婢貢)을 이정하여 도안을 작성하는 한편, 내수사의 재원을 장용영으로 이전하여 화성 건설 재원으로 활용하는 등 왕실의 사재정 역시 공적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놓았다.
내용
정조는 즉위하던 해에 곧바로 여러 궁방이 함부로 받은 면세결을 호조로 하여금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정조는 호조의 보고를 들은 후, 세대가 다 된 궁방의 것은 다시 세금을 내게 하고, 온빈(溫嬪)·안빈(安嬪)·명선공주(明善公主)·명혜공주(明惠公主)·영빈(寧嬪)·귀인(貴人)·명빈(䄙嬪)·소의(昭儀)·장귀인(張貴人)에 속한 궁방의 전결은 모두 호조에 귀속시키게 하였다.
또 자손이 있는 것 외의 사판(祠版)은 모두 수진궁(壽進宮)으로 들여오고, 혁파한 궁가(宮家)의 노비와 제택도 호조와 내수사로 하여금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한편 대빈(大嬪)방에 있어서는 이미 봉상시(奉常寺)에서 때에 맞춰 향사(享祀)하고 있고 또 차지중관(次知中官)이 있으므로 전결을 일체 환수하도록 하였다. 이 밖에 명례궁, 수진궁, 어의궁, 용동궁의 사궁(四宮)을 비롯하여 여러 궁방에서 불법으로 더 받은 것과 1766년(영조 42) 이후에 아직 지급하지 않은 것과 판부(判付) 없이 받아 간 것에 있어서는 모두 조사하여 다시 세를 내도록 하였다[『정조실록』 즉위년 4월 10일].
같은 해 9월에는 도장이나 궁차가 왕실의 세력을 빙자하여 백성들의 전지에 함부로 세를 징수하지 못하도록 하고, 각 궁방의 전지에 대한 결세는 관할 읍에서 곧바로 호조에 바치면 호조에서는 궁방에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정조실록』 즉위년 9월 1일].
병신정식은 왕실의 사적 재정이 국가의 공적 재원으로 귀속되는 계기가 되었다. 정조는 왕실[宮]과 관부[府]가 하나라는 궁부일체(宮府一體)의 이념에 따라 사적 소유의 성격을 띠는 왕실재정을 개혁하여 국가재정의 공식적인 틀 속에서 운영될 수 있도록 하였다.
변천
임진왜란 이후 궐 밖에서 생활하는 왕실 가족들은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제공하는 토지 외에 개간과 매득을 통해 토지의 양을 늘려갔다. 이 과정에서 백성들의 전지를 부당하게 침탈하여 세를 거두는 절수 행위가 문제시되었다. 1695년(숙종 21) 을해정식(乙亥定式)은 이러한 왕실 궁가의 토지 사유와 민전 침탈을 제한하는 조치에 다름 아니었다.
왕실의 사적 재정이 늘어나는 것을 견제하는 이러한 조치는 정조대 병신정식으로 이어져 왕실 궁방에서 불법을 점유하고 면세지화한 토지를 호조로 대거 귀속시키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병신정식의 효과는 당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19세기 민란을 수습하는 대안으로서도 다시금 환기되었다.
19세기 중반 임술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중앙에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하고 『삼정이정절목(三政釐整節目)』을 반포하였다. 이때 전정(田政)의 모순을 해결하는 대안으로 병신정식이 다시금 거론되었다. 보다 근본적인 개혁을 위해서는 토지조사 사업인 양전을 실시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를 시행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불법적으로 누락시킨 은결(隱結)과 토지대장에 허위로 작성한 토지인 허결(虛結)을 찾아내는 한편, 정조 즉위년 병신정식에 근거하여 궁방의 면세결로 지정된 토지에 대해서 결당 23두 외에 추가 징수하는 관행을 일절 금지하였다.
참고문헌
박준성, 「17·18세기 宮房田의 확대와 所有形態의 변화」, 『韓國史論』11, 서울대학교, 1984.
송양섭, 「임술민란기 부세문제 인식과 三政改革의 방향」, 『韓國史學報』49, 고려사학회, 2012.
송양섭, 「正祖의 왕실재정 개혁과 ‘宮府一體論’」, 『大東文化硏究』76,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