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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박해(己亥迫害)
[배경] 순조(純祖) 재위 초기에 정사를 마음대로 하던 대왕대비(大王大妃) 김씨는 영조의 계비요 순조의 계증조모(繼曾祖母)로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는 바로 천주교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노론(老論)이 벽파(僻派)에 속했었다. 그러나 1802년 안동 김씨로 시파(時派)에 속해 있던 김조순(金祖淳)의 딸이 순조 비[純元王后 ]가 되면서 정권이 바뀌어 이후 36년간은 안동 김씨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러다가 김조순이 1832년 4월(음)에 죽으면서 세도는 그 아들 김유근에게 돌아갔고, 1834년 11월(음) 순조가 승하하면서 그의 손자인 헌종(憲宗)이 8세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에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수렴 청정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의 오라버니인 황산(黃山) 김유근이 판서로서 대비의 정사를 보필하였다. 안동 김씨는 벽파와 달리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관용적이어서 순조 재위 기간과 헌종 초까지도 천주교 문제에 대해 개의치 않으려 하였고, 나이 어린 헌종이 성년이 될 때까지 현상을 유지하려 하였다. 뿐만 아니라 김유근은 본래 천주교에 호의적이었고, 당시 역관이며 천주교 신자인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과 절친하여 1840년 12월 죽기 전에 그에게서 대세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조선 천주교회는 1836년 이후 조선에 입국한 프랑스 신부들을 중심으로 견고하게 될 수 있었고, 신자수는 약 1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풍양 조씨가 세력을 잡으면서 바뀌게 되었다. 풍양 조씨 세력은 그에 앞서 조만영(趙萬永)의 딸이 효명세자(孝明世子) 익종(翼宗, 헌종의 부친)의 비로 간택되고, 1827년 익종이 대리 청정을 하게 된 이후부터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1830년 익종이 사망하고, 1837년 안동 김씨 김조근(金祖根)의 딸이 헌종 비[孝顯王后 ]로 간택 되면서 다시 안동 김씨 세력에 밀리게 되었다.
그러던 중 김유근이 1836년 무렵부터 중풍에 걸려 제대로 정사를 돌보지 못하게 되면서 정권은 우의정인 이지연(李止淵)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그는 풍양 조씨와 손을 잡고 천주교를 박해를 계획하는 동시에 이를 계기로 시파인 안동 김씨의 세도를 빼앗고자 하였다.
[초기 상황]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이미 1838년 말부터 시작되었다. 조정에서 공식적인 체포령이 내려진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의 포졸들에 의해 서울의 일부 지역에서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16일에 권득인(權得仁, 베드로)이 체포되었으며, 1월 말에는 강원도 서지 땅에 살던 최해성(崔海成, 요한)이 체포되어 원주 감옥에 투옥되었고, 2월에는 한강변에 살던 박아기(朴阿只, 안나)가, 3월 21일에는 경기도 광주의 구산(龜山,현 광주군 동부면 망원리)에서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의 두 아우가 체포되었다. 이때 김신우는 피신해 있던 덕택에 다행히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또 4월 7일에는 서울의 회장 남명혁(南明赫, 다미아노), 이광헌(李光獻, 아우구스티노)과 그의 가족들이 모두 체포되었으며, 이매임(李梅任, 데레사)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던 허계임(許季任, 막달레나)과 두 딸인 김성임(金成任, 마르타), 김누시아(金累時阿, 루시아) 등이 남 다미아노와 이 두 아우구스티노 자녀들의 용기를 본받고자 포졸들에게 자수하였다.
뿐만 아니라 4월 12일에는 최 야고보 가족들이, 4월 15일에는 궁중 나인 전경협(全敬俠, 아가다)과 박희순(朴喜順, 루시아)이 체포되었다. 이에 앞서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는 갓등이(현 경기도 화성군 왕림리) 공소에 숙소를 정하고, 서울 남명혁의 집에서 성사를 주고 다시 갓등이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처럼 각지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면서 감옥은 이미 그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당시의 형조 판서 조병현(趙秉鉉)은 가능한 신자들의 목숨을 구해 주려고 배교를 권하였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고, 사정을 우의정 이지연에게 보고해야만 하였다.
이지연은 이를 기회로 1839년 4월 18일(음 3월 5일) 천주교 박해를 허가해 주도록 대왕대비 순헌왕후에게 아뢰었고, 대왕대비전에서 이를 재가하여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것이 일명 ‘사학 토치령’(邪學討治令)이다.
이때 이지연이 아뢴 내용을 보면, 천주교인은 무부 무군(無父無君)의 역적 무리이니 좌우 포도청에 하명하여 조사와 기찰을 강화토록 하고, 형조 판서는 신자들 가운데 뉘우치지 않는자를 처형할 것이며, 서울과 지방에 다시 오가 작통(五家作統)의 법을 시행하여 빠져나가는 사람이 없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대왕대비전에서 내린 토치령은 이보다 더욱 엄하였다. 그러므로 이미 투옥되어 있던 신자들은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월 3일(음 3월 20일)까지 새로 체포된 신자는 한 명도 없었는데, 이날 사헌부 집의(執義) 정기화(鄭琦和)는 ‘만일 원흉을 잡지 못하면 천주교 근절을 기할 수 없다’는 요지의 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같은 날 경기도 고양이 용머리[龍頭里]에서 김효임(金孝任, 골롬바)·효주(孝珠, 아네스) 자매가 체포되었다.
한편 형조 판서의 5월 3일자 보고에 의하면, 포청에서 형조로 이송된 천주교 신자가 도합 43명인데 그간 15명이 배교하여 석방되었다고 하며, 동월 11일자 보고에 의하면, 나머지 28명 중 11명이 배교하여 곧 석방될 예정이라 하였다. 이들 중 5월 24일(음 4월 12일) 사형 선고를 받고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사람들은 남명혁·이광헌·박아기·박희순과 이미 1836년 체포되어 오랫동안 옥중에서 고난을 겪어 오던 이소사(李召史, 아가다), 김업이(金業伊, 막달레나), 한아기(韓阿只, 아가다)등 모두 9명이었다.
앵베르 주교는 3일 뒤 이들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낼 수 있었다. 이 밖에도 5월 26일에는 한강변 서강(西江)에서 살다 체포된 장성집(요셉)이 장사(杖死)로 옥중에서 순교하였고, 다음날에는 14살 된 어린 동정녀 이 바르바라가 포청의 옥에서 굶주림과 열병으로 옥사하였으며, 같은 무렵에 김 바르바라와 정 아가다도 신앙을 지키다가 형조에서 옥사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정에서는 1827년 정해박해(丁亥迫害) 때 체포되어 대구 옥에 갇혔던 박사의(朴士儀, 안드레아), 이재행(李在行, 안드레아), 김사건(金思建, 안드레아)과 전주 옥에 갇혀 있던 신태보(申太甫, 베드로), 이태권(李太權, 베드로), 이일언(李日彦, 욥), 정태봉(鄭太峯, 바오로), 김대권(金大權, 베드로) 등에도 각각 5월 26일과 5월 29일에 참수형을 집행하도록 하였다.
[박해의 확대] 박해는 5월 말부터 일단 누그러져 약 1개월 동안은 평온을 되찾았다. 그 동안 앵베르 주교는 서울을 떠나 손경서(안드레아)가 마련해 놓은 경기도의 피신처(현 화성군 양감면 용소리의 상계 마을)로 갔고, 모방(Maubant, 羅白多祿) 신부와 샤스탕(Chastant, 鄭牙各伯) 신부도 지방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세도가 조만영을 위시한 풍양 조씨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7월 5일(음 5월 25일) 천주교 신자 색출에 노력하라는 대왕대비의 전교가 있게 되면서 다시 상황이 바뀌어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때 배교자인 김순성(金順性. 일명 여상)이 밀고자 역할을 하였다. 그의 제보로 며칠 사이에 샤스탕 신부의 복사로 있던 현석문(玄錫文, 가롤로), 조선 교회의 지도자요 밀사 역할을 하던 조신철(趙信喆, 가롤로),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역관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이 체포되었다. 이때 정하상은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호교론서인 <상제상서>(上帝相書)를 지어 품안에 품고 있었는데, 그의 예상대로 이 글은 체포된 후 조정에 보고되었다.
이어 7월 20일에는 형조에서 문초를 받아오던 이광렬(李光烈, 요한), 김장금(金長金, 안나), 김노사(金老沙, 로사), 원귀임(元貴任, 마리아) 등과 언제나 신앙을 함께해 오던 이영희·이매임·김성임·김누시아 등 8명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 순교하였다.
당시 앵베르 주교는 상계 마을 피신처에서 신자들로부터 전해지는 모든 소식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는 7월 하순경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를 자신의 거처로 오도록하여 앞으로의 할 일을 의논한 다음 다시 교우촌의 신자들을 찾아보도록 하였다.
같은 시기에 김수성을 앞세운 포졸들은 수리산(현 경기도 안양시 안양4동) 교우촌으로 몰려가 최양업(崔良業, 토마) 신부의 부모인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와 이성례(李聖禮, 마리아), 이 에메렌시아 등 여러 교우들을 체포하였다.
김순성은 이어 간계를 써서 앵베르 주교의 처소를 거의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앵베르 주교는 포졸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자수를 결심하고 홀로 포졸들에게 자현(自現)하였으니 이 때가 8월 10일이었다. 앵베르 주교의 자수는 조정을 매우 놀라게 하였는데, 조정에서는 모방·샤스탕 신부를 체포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8월 22일에는 이들을 잡기 위해 충청도에 오가 작통법을 엄격히 적용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그러자 앵베르 주교는 교우들의 재난을 그치게 하기 위하여 두 신부에게 쪽지를 보내어 자수를 권고하였고, 이에 따라 두 신부는 9월 6일 충청도 홍주에서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에 앞서 그들은 로마의 포교성성(현 인류 복음화성) 장관에게 교세 보고서를 올렸는데, 여기에는 당시의 교세가 ‘신자수 약 1만 명, 영세자 1,200명, 견진자 2,500명, 고해자 4,500명, 영성체자 4,000명, 혼배자 150명, 종부성사 60명, 예비 신자 600’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모방 신부는 샤스탕 신부가 압송되어 오자, 앵베르 주교는 그들과 함께 포청에서 심문을 받은 다음 의금부에서 다시 여러 차례에 걸쳐 심문을 받았다. 그리고 9월 21일(음 8월 14일) 군문효수의 판결을 받고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하였다. 이들의 시신은 그 후 20일쯤 뒤에 신자들에 의해 거두어져 노고산(老姑山, 현 서강대학교 뒷산)에 묻혔다가 박 바오로에 의해 삼성산(三聖山, 현 서울 관악구 신림동)으로 이장되었으며, 1901년 다시 명동 지하 성당 묘지로 이장되었다가 시복에 앞서 1924년에 로마·파리 등지로 보내졌다.
선교사들의 순교에 앞서 8월 말에는 한 안나와 김 바르바라, 김 루시아 등이 포청에서 옥사하였으며, 충청도 홍주에서도 유 바오로가 옥사하였다. 뿐만 아니라 9월 4일에는 이미 순교자를 낸 집안이거나 신앙이 굳기로 유명한 박후재(朴厚載, 요한), 박큰아기(朴大阿只, 마리아), 권희(權喜, 바르바라), 이정희, 이연희(李連熙, 마리아), 김효주 등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선교사들을 처형한 뒤 조정에서는 나머지 신자들의 처형을 서둘렀다. 그 결과 2개월여를 갇혀 있던 정하상·유길진 등이 9월 22일에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고, 9월 26일에는 조신철이 다른 8명의 신자들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순교한 사람들은 교회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남이관(南履灌, 세바스티아노), 김대건 신부의 부친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 김유리대(金琉璃代, 율리에타), 전경협(全敬俠, 아가다), 박봉손(朴鳳孫, 막달레나), 홍금주(洪今珠, 베르베뚜아), 허계임, 김효임 등이었다.
당시 선교사들은 신문을 받는 자리에서 국적과 입국 목적을 명백히 밝힌 다음, 입국시 의주로부터 조신철과 정하상의 인도를 받았고, 서울에서 정하상의 집에 거처했다는 사실만을 자백하고, 그 밖의 신문에는 입을 열지 않았다.
유진길은 선교사가 천주교에 불가결하므로 조선에 모셔 왔으며, 이것은 교회와 관련되는 일이지 반역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부귀 공명을 위해 천주교를 믿는 것이 아니며 이 모든 것은 교회법을 행하려는 절차였다고 하였다.
정하상도 <상제상서>에서 밝힌 대로, 사람은 만물의 조물주인 천주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으며, 천주는 모든 민족의 기원이라고 대답하였다. 또 그는 외구(外寇)를 불러 본국을 해치는 일 같은 것은 교회법에는 없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선교사의 처형에도 박해는 끝나지 않았다. 밀고자 김순성은 교우들을 고발하는 데 더욱 열을 올렸고, 그러는 사이에 서울의 옥중에서는 이 카타리나, 조 막달레나, 조 바르바라 등이 순교하였다. 그리고 10월 6일에는 원주에서 최해성이 참수되고, 이어 그의 고모인 최 브리지다도 옥중에서 교수되었다. 이것은 조정에서 공적인 처형이 너무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옥중의 신자들은 교수형에 처하도록 지시한 때문이었다. 당시 이지연에 이어 우의정이 된 조인영(趙寅永)도 이러한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이 지시의 최초의 희생자는 유길진의 아들인 유대철(베드로)과 최희득(필립보), 고집종(베드로) 등이었다. 그 중에서도 13세의 유 베드로가 보여준 신앙심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또 이 무렵 충청도 해미에서는 전 베드로가 신앙을 지키다가 옥사하였으며, 전라도 전주에서도 송인원(야고보)등 여러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박해의 종식] 이와 같이 서울과 지역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죽임을 당할 즈음, 조정에서는 11월 23일(음 10월 18일) 척사 윤음(斥邪綸音)을 반포함으로써 천주교가 사학임을 다시 한번 민중들에게 알리는 동시에 이 대대적인 박해를 끝내고자 하였다.
이것이 바로 검교제학(檢校提學) 조인영이 지어 올린 ‘기해 척사 윤음’이다. 당시 조정에서 이를 반포한 이유는 여론이 학살을 중지하자는 쪽으로 기울게 되었고, 신유박해 때와 마찬가지로 이미 대부분의 주동자들이 체포 처형되었으므로 더 이상 박해를 끌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이후 새로운 박해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기존에 체포된 신자들로 인해 순교자는 끊이지 않고 태어났다. 포청에서는 정하상의 모친 유(柳) 세실리아가 옥사하였고, 전라도 나주에서는 이준화(베드로)가, 경기도 양근에서는 장사광(베드로)과 손 막달레나 부부가, 전주에서는 심소사(沈召史, 바르바라)와 김소사(金召史, 아나스타시아)가 옥사하고, 12살쯤 된 아나스타시아가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뿐만 아니라 12월 29일(음 11월 24일)에는 서소문 밖에서 7명이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들 중 최창흡(崔昌洽 ,베드로)은 초기 신자의 한 사람인 최창현(崔昌顯, 요한)의 아우였고, 정정혜(丁情惠, 바르바라)는 정하상의 여동생이자 유 세실리아의 딸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다섯 사람은 순교자 허계임(막달레나)의 딸이자 동정녀인 이영덕(막달레나), 고순이(高順伊,바르바라), 한영이(韓榮伊, 막달레나) 등이었다.
그러나 우의정 조인영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옥중에 있는 신자들을 교수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포청의 옥에서 최 필립보와 동정녀 이 아가다, 순교자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의 딸이요 손연욱(요셉)의 아내인 김 데레사, 이 막달레나, 정 안드레아, 앵베르 주교의 피신처를 마련하는 데 노력을 했던 손경서(안드레아), 민극기(스테파노), 이사영(고스마) 등이 형벌로 순교하게 되었다. 기해박해의 마지막 순교자는 전주와 서울에서 탄생하였다. 기해년이 저물게 되자 조정에서는 옥중에 갇혀 있는 나머지 신자들의 처형을 서둘게 되었는데, 이에 전주에서 오랫동안 함께 신앙을 지켜오던 홍재영(洪梓榮, 프로타시오), 오종례(吳宗禮, 야고보), 이소사(李召史, 막달레나), 최소사(崔召史, 바르바라) 등 4명이 1840년 1월 4일(음 1839년 11월 30일)에 참수되었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1840년 1월 30일(음 12월 27일)과 2월 1일, 당고개(堂峴, 현 서울 용산구 원효로 2가)에서 10명이 참수형을 받았다. 이처럼 처형지가 서소문에서 당고개로 바뀐 이유는 상인들이 그 해 설날 대목장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정에 요청한 때문이었다. 그 결과 이곳에서 첫날 회장 박종원(朴宗源, 아우구스티노)과 홍재영의 아들 홍병주(洪秉周, 베드로), 권진이(權珍伊, 아가다), 이경이(李璟伊, 아가다), 최창협의 아내 손소벽(孫消碧, 막달레나), 동정녀 이인덕(李仁德, 마리아), 최경환의 아내 이성례(李聖禮, 마리아)등이 순교하였고, 이튿날에는 홍병주의 아우 홍영주(洪永周, 바오로), 손소벽의 딸 최영이(崔榮伊, 바르바라), 회장 이문우(李文祐, 요한) 등이 순교하였다. [박해의 의미와 시성] 기해박해는 신유박해에 비해 체포된 신자수는 적었으나 그 대상 지역은 넓었다는 데 특징이 있다.
박해 이전의 신자들이 이미 서울과 경기도는 물론 충청도와 전라도, 그리고 강원도와 경상도 등지에 넓게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 서울과 경기도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가 탄생했지만, 강원도에서도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충청도와 전라도에서는 1백 명 이상의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당시의 기록인 《기해일기》(己亥日記)에 의하면, 참수된 순교자가 54명, 옥사나 장사 또는 병사한 신자수가 60명이나 되며,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서는 참수한 신자가 70명이 넘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체포되었다가 배교하고 석방된 신자들, 자료가 없는 관계로 기록에서 누락된 신자들을 생각하면 그 숫자는 훨씬 더 늘어날 것이다. 더욱이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선교사와 지도자를 잃음으로써 일시 침체에 빠지게 되었고, 신앙 공동체는 이전보다 더 가난한 서민층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정에서는 국경 감시를 강화했고, 살아 남은 신자들은 깊은 산중으로 피신하거나 신자임을 감추고 생활해야 했다.
그 결과 신자들의 현실을 외면하는 경향이 짙어지게 되었고, 신앙 내용은 더 복음적이고 교리 실천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또 교회 서적이 부족하게 되면서 후세나 이웃에게 구전으로 교리를 전수해야만 했으므로 어린이나 예비신자들은 깊은 교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반면에 박해의 여파로, 또는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으로 더 넓은 지역에 천주교가 전파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다음으로 이 박해는 처음 시작과는 달리 박해가 진행되면서 정치적인 갈등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신유박해 때와는 달리 신자들 가운데는 정치적으로 보복을 받을 만한 인물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해가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천주 교인을 처단하라는 상소문이 거의 조정에 올라오지 않았으며, 조정안에서도 박해를 강력히 주장하던 풍양 조씨 외에는 이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거나 앞장서서 이를 주장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 다만, 이 박해가 세도의 변화 즉 기존의 안동 김씨 대신에 풍양 조씨의 세도눈 1949년 현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할 때까지 계속 되었다.
한국 교회에서는 그 후 1857년부터 기해박해와 1846년의 병오박해(丙午迫害) 순교자 중에서 79명을 선택하여 시복(諡福) 운동을 전개하였고, 교황청에서는 즉시 이를 받아들여 가경자(可敬者)로 선포하는 한편 시복에 필요한 사항을 심의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68년이 지난 1925년 5월 10일 교황 어전 회의에서 시복이 확정되고, 7월 5일 이들을 복자품으로 올리는 시복식이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이 중 1839년을 전후하여 순교한 복자는 선교사가 3명, 남자가 24명, 여자가 43명으로 모두 70명이었으며, 이들은 모두 따라서1894년 5월 6일에 시성(諡聖)되어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다. 복음사의 입장에서 볼 때 기해박해의 순교자들은 한국 교회의 또 다른 초석이 되어 왔고, 그들의 죽음으로 인해 복음의 전통이 더 깊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