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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jZR_-aE4Wgs?si=yY5sRL-853EUHsh0
나는 오래된 한국 영화를 볼 때, 그 영화에 등장한 배우들 중에 특별히 유명한 자가 있는지 꼭 궁금해진다. 누구누구 유명한지 아는 것이 한국 영화의 역사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으니까 그렇다. 그런데 1984년도의 <바보사냥>의 경우엔, 영화 한 백 편에 등장한 김인문 배우가 이 영화에서 친절한 탄광 반장의 역할을 맡는데, 그분을 빼고는 이 영화에서 주된 역할을 맡은 배우들 나머지는 아예 별로 많은 영화에 등장하지 않았다.
이 영화를 제작한 김기영 감독이 1984년까지 꽤 유명해졌을 것 같더니 이것은 나한테는 뜻밖의 일이었는데, ‘홍익’ 역할을 맡은 김병학 배우는 영화 일곱 편에만 등장했고, ‘강식’ 역할을 맡은 배규민 배우와 ‘석호’ 역할을 맡은 엄심정 배우 각자는 영화 두 편에만 등장했다. 사진 두세 장을 빼고는 인터넷에서는 그분들 각자에 대한 정보는 거의 찾기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유명한 윤여정 배우가 1971년에 김기영 감독이 제작한 <화녀> 영화에서 첫 번째의 영화 역할을 받았더니, 김기영 감독이 주된 역할을 맡길 배우를 찾는 데 무명의 배우를 선호했는지 궁금하다.
이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인기가 있는 것이었는지 알 수 없는데, 내용이 좀 별다른 것 같다 보니까, 나는 이 영화를 봐서 어리둥절해지던 시청자가 적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영화의 내용이 이렇듯이 별다르니까, 분석해보기 전에 줄거리를 시작부터 끝까지 묘사하는 것이 적당한 것 같다. 그래서 여러분들께서 영화를 봐서 자신을 위해 뭐 뭐가 일어나는지 알아내고 싶으시다면, 여기까지만 읽으시면 된다.
어쨌든, 20대 중반인 것 같아 보이는 강식은 어느 날 길가에 걸어가다가 뒤에서 차에 부딪힌다. 그 뒤 1년간 식물인간으로서 병원침대에 누워 있다가 갑자기 일어난 강식은 지구가 인구 증가, 자원 고갈, 자연환경 오염, 핵전쟁 따위로 인해 파괴되리라고 반복적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모든 음식과 음료가 ‘공해 식품’이라고 주장해서 아무것도 안 먹는 강식은 원장 의사로부터 심리적 검진을 받았을 때, 원장 의사는 강식의 편집증 때문에 그를 굶어죽을 것으로 예측한다.
그 다음, 강식은 자살 시도를 벌써 세 번 하던 홍익과 함께 환자실을 나누게 되고, 조금 이따 그 둘은 병원에서 같이 탈출하기에 동의하고, 무인도를 찾아서 저기서 벌치기를 하고 토끼를 기를 계획을 짠다. 강식과 홍익은 벌과 토끼가 물이 없어도 생존할 수 있는 줄 알고 있으니까, 꿀을 먹고 토끼를 길러 먹으면 인류를 천천히 죽이고 있는 오염수의 섭취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병원에서 탈출한 뒤 강식과 홍익은 ‘토끼섬’의 밑천을 벌기 위해 각종 사기를 치는데, 그 사기들에 다 실패하고 만 뒤 탄광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강식과 홍익의 ‘토끼섬’을 설립할 계획을 알아주는 탄광 반장은 강식과 홍익을 식구처럼 여겨주고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해준다. 홍익은 탄광 반장의 딸인 석호의 야릇한 매력에 잡히기 시작하는데, 별난 성격을 가진 석호가 남편을 아예 찾을 수 없지 않을까 걱정하던 석호의 아빠는 이것에 기뻐한다.
그러나 어느 날, 반장이 탄광 안에서 사고로 인해 사망하고, 반장의 사망으로 끝난 사고를 목격한 강식과 홍익은 탄광에 다시 들어가지 안 하기로 한다. 그 다음, 강식과 홍익은 ‘토끼섬’의 꿈을 실현화하러 떠나기로 하고, 석호는 강식과 홍익의 꿈을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도, 고향에서 할 일이 더 이상 아무것도 없으니까 강식과 홍익을 따라간다.
무전여행을 하고 있는 그들은 밑천을 벌기 위해 다시 사기를 칠 수밖에 없는데, 석호는 자신을 강식과 홍익보다 훨씬 더 영리한 사기꾼으로 보여준다. 석호를 맨 처음부터 의심하던 강식은 시간이 지날수록 석호를 더욱더 의심하고, 동시에 강식의 발언은 점차로 더 편집증적으로 되어간다.
그 세 명이 드디어 바닷가에 이르렀을 때 어느 친절한 어부를 우연히 만나고, 저기 근처의 무인도에서 살림살이할 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그 어부는 강식과 홍익의 계획에 회의적인데도 도와주기에 동의한다. 강식은 어부의 도움을 받아서 작은 어선과 벌통, 토끼 몇 마리를 사들이기에 발 디디는데, 어부의 아내는 사망한 자신의 아들을 닮은 홍익을 봐서 충격을 받는다. 어부의 아내에 따르면, 홍익이 무서운 세상을 피하기 위해 어느 무인도로 떠나고 싶다고 말하는 것까지 아들을 닮았다고 한다.
입덧이 나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석호는 신분이 알기 불가능한 남자로 인해 임신했다고도 말했을 때, 홍익은 석호와 결혼하고 그 아이를 받아들일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무인도로 출발할 날 하룻밤 전에 석호는 잠자고 있는 홍익의 옆에서 갑자기 없어진다. 강식은 이것에 신경을 하나도 안 쓰는데, 홍익은 석호를 찾으러 한밤에 나간다.
그 사이에, 부엌칼을 움켜쥐고 있는 석호는 강식이 잠자고 있는 방에 들어가서는 살인할 것처럼 강식한테 다가간다. 또, 석호는 임신했다는 이야기가 거짓말이었다고 고백하는데, 임신하고 싶어서 그 거짓말을 꾸몄다고 말한다. 석호는 피가 조금 나도록 강식의 가슴을 살짝 찌르지만, 그때까지 서로를 미워하는 것 같던 그 둘은 오히려 성관계를 가지고 만다.
직후에, 그때까지 앓던 편집증이 이제 나아진 것 같은 강식은 자신의 ‘토끼섬’의 꿈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비웃고, 석호와 함께 도망가기에 동의한다. 동시에, 석호는 홍익의 신경증도 고쳐줄 수 없었다고 후회를 드러낸다.
다음날 아침, 홍익은 강식과 석호가 남겨준 어느 편지를 읽었을 때, 자신의 어머니한테서 포기되는 것이 처음으로 초래하던 고독감에 다시 시달려서 자살할 생각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것을 목격하고 있는 어부의 아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는 드디어 홍익한테 아들처럼 같이 살아 나갈 것을 간청한다.
앞에 온 어느 장면에, 무인도의 사태를 조사하러 나갔다온 강식은 저기에 우물이 있음을 알렸더니, 저기서의 살림살이가 가능할 수 있겠다고 생각할 이유는 이제 있다. 마지막 장면에, 어부와 어부의 아내, 홍익은 ‘창덕’이라는 이름이 붙인 어선에 토끼들과 벌통, 각종 생활용품을 다 실어서 새 살림살이를 같이 하러 무인도로 출발한다.
앞바다에 향해 나가는 어선이 점차로 멀어져서 시청자의 눈에 작아지는 중에, 다음의 수수께끼 같은 글이 화면에 크게 나타난다.
“전설에는 이바다에 갈매기가 많이 날았다 지금은 사라졌다 다음 차례는 사람일거다.”
물론, 이 영화에서 분석할 만한 것은 많은데, 첫 번째로 분석해야 할 것은 영화의 주된 악역이 무엇이냐는 질문인 것 같다. 영화의 주된 악역은 영화에 나오는 어느 한 인물이 아닌 것 같으며 그것보다 더 추상적인 일인 것 같다. 간단하게 말하면, 내 생각에는 영화의 주된 악역은 주인공들의 공포감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주인공들의 공포감을 초래하는 것은 예측하기가 불가능하게 바뀌어가는 무서운 세계 또는 사회인 것 같다.
영화 내에서의 세계뿐이라고 해도, 주인공들이 살아 있는 세계는 인간성을 잃게 된 편이다. 강식과 홍익이 입원해 있는 병원에서의 첫 번째의 장면에는 원장 의사는 기자 몇 명이랑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대화는 식물인간 또는 안락사에 관한 것이다.
원장 의사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식물인간들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직접적으로는 말하지 않는데, 기자가 원장 의사가 과거에 드러내던 것 같은 어느 안락사 찬성론을 언급했을 때, 원장 의사는 “...근 십 년 동안에 만 명이 넘는 식물인간이 가족과 병원과 나라를 괴롭히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라고 발언한다.
바로 그 다음, 기자들이 다 볼 수 있도록 강식이 뜻밖에 병원침대에서 일어난다. 조금 이따, 원장 의사는 강식의 심리적 상태를 간단하게 검진해서 강식이 굶어죽겠다는 가설을 빠르게 세운다. 원장 의사가 “조반 먹여”라고 명령했을 때, 병원 종사자 몇 명이 걸쭉한 우유와 같아 보이는 어느 액체가 담겨 있는 피쳐를 가져와서 강식의 목구멍에 거칠게 따른다.
어느 다른 의사와 수간호사는 강식을 데리고, 어두우며 더러워 보이는 지하실에 내려가서 환자실로 안내해준다. 동시에, 의사는 강식한테 “여기선 생각이 같은 동지가 많을 거요. 그러니까 입원 환자는 의사도 돼주기도 하고 또 그의 환자가 돼주기도 합니다,”라고 설명해준다. 좁으며 불편해 보이는 환자실에 이르렀을 때, 의사는 강식을 환자실에서 이미 살고 있는 홍익한테 소개해주고 나서는 떠난다.
음식을 먹을 것을 거부하는 입원 환자란, 비경구영양법 등 환자한테 스트레스를 덜 초래하는 덜 위험한 영양소 공급 방법이 1980년대 전반에도 존재했다 보니까, 강식한테 강제로 먹이는 것의 실제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또, 의사가 “입원 환자는 의사도 돼주기도 하고 또 그의 환자가 돼주기도 합니다,”라고 설명해주며 강식을 무시된 것 같아 보이는 지하 환자실로 안내해주면, 의사의 실제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강식이 굶어죽을 것으로 예측되어 있다 보고 홍익이 자살 시도를 벌써 세 번 했다 보니까, 의사는 마치 강식과 홍익이 눈에 안 보이는 곳에서 그냥 다 죽기를 바라는 것 같다.
물론, 강식은 1년 전에 병원에 도착했을 때부터 그를 방문하러 온 사람이 아무도 없던 것 같고, 홍익은 어머니한테서 포기되었다. 그렇다 보니까, 가족 관계가 없는 것 같은 그 둘은 그냥 죽었으면, 신경을 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다. 또, 의사들은 이런 줄 알고 있을 것 같다. 안락사가 불법이지만, 의사들은 가족이나 친구가 없는 강식과 홍익을 뜻대로 무시해서는 어느 종류의 ‘소극적 안락사’를 실행할 생각이 잠재의식적으로 들고 있을 수 있는가? 무엇이라고 해도, 강식과 홍익에 대해서는 의사와 간호사들의 태도는 무관심한 편인 것 같다.
이렇듯이 강식과 홍익은 적대적 조건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친구 또는 가족 관계 등 그들 각자가 믿을 수 있는 뒷받침이 되어줄 사람이 없으니까, 그들 각자를 괴롭히고 있는 신경증들은 극복하기가 꽤 어려울 것 같다. 결국, 강식과 홍익 각자의 신경증을 치료해낼 것은 인간관계인데, 그것이 병원에 부족하다 보니까, 그들은 병원에서 탈출해야만 생존할 수 있겠다. 병원 탈출의 목적인 ‘토끼섬’의 꿈이 실현화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해도, 강식과 홍익은 적어도 병원 탈출의 필요성을 깨닫는다.
앞에 벌써 언급했듯이, 강식과 홍익은 자신들의 꿈을 실현화하기 위한 밑천을 벌기 위해서 사기를 치거나 사기에 참여하는데, 더 많은 사기를 칠수록 더 많은 사람의 화를 일으켜서 자신들한테 더 많은 외부 적대성을 초래한다. 다시 말하면, 병원 내의 적대적 조건에서 탈출했는데도, 자신들 각자의 신경증을 치료해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어느 종류의 인간관계에서 더욱더 멀어지고 있다. 또, 더 추상적인 관점에서는 강식과 홍익은 무서운 세계에 대한 공포감을 가지지만, 사기를 쳐서 남을 속이기 위해 에너지를 쓸수록 세계를 무섭게 만드는 부정적 에너지에 힘을 보탠다.
병원에서 탈출한 뒤, 강식과 홍익이 맺어내는 첫 번째의 긍정적인 인간관계는 탄광 반장과의 것이다. 앞에 말했듯이 탄광 반장은 강식과 홍익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해줘서 가족처럼 여겨줄 뿐만 아니라, ‘토끼섬’의 꿈을 비웃지도 않고 그들을 격려하며, 탄광이 20 내지 30년 후에 폐광이 되리라고 말해서 강식과 홍익한테 살림살이를 위해 탄광에 영원히 의지하면 안 된다고 경고하기도 한다.
이렇듯이, 탄광 반장의 태도에는 어느 종류의 상대성이 반영되는 것 같다. 물론, 살고 먹기 위해 신뢰할 만한 수단이란, 사람들 대부분은 아마 탄광이 ‘토끼섬’에 대한 꿈보다 더 신뢰할 만한 것이라고 말할 텐데, 거의 평생 동안 탄광에 의지하던 탄광 반장은 석탄이 언젠가 떨어질 줄 잘 안다. 또, 그 석탄이 떨어지면, 그 탄광 마을이 꼭 사라지겠다. 다시 말하면, ‘토끼섬’과 탄광 중에 어느 것에 미래를 거는 것이 더 좋으냐고 물어봤으면, 탄광 반장은 아마 그리 단단히 대답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물론, 반장은 탄광 안에서 사고로 인해 사망하고 만다.
영화의 끝까지는 강식은 ‘토끼섬’의 꿈을 포기하며 석호와 함께 살아나가기로 하고, 홍익은 어부와 어부의 아내와 함께 무인도로 출발해서 살아나가기로 한다. 강식의 경우에는 구미호 같은 석호와의 살림살이가 실망으로 끝나지 않을지는 알 수 없고 홍익의 경우에는 그와 어부, 어부의 아내가 무인도에서 생존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데, 그 두 개의 경우에 적어도 희망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강식과 홍익이 품던 ‘토끼섬’의 꿈은 토끼 또는 꿀벌이 물이 없어도 생존할 수 있다는 틀린 생각에 뿌리박는데, 이렇듯이 개인이 외부 세계와의 연결선을 다 끊어도 살아나갈 수 있다는 무리한 개념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 상징 또는 주인공들이 겪는 고생을 들면, 영화감독이 시청자한테 드러내도록 노력하던 것 같은 메시지는 세계가 무섭긴 하지만, 그 무서운 세계가 초래하는 공포감을 치료해낼 수 있는 ‘약물’이 다른 인간과의 긍정적 관계, 또는 우리가 그 인간관계에 대해 가지는 희망이라는 것 같다.
그러나 영화의 시작에 강식과 홍익이 마주하는 병원에서의 상황을 다시 고려해보니까, 사랑하는 마음이나 친근한 마음을 같이 나누는 사람 몇 명으로 이루어진 어느 집단 밖의 외부 세계는 무관심하고 냉담해서 꽤 적대적일 수 있기 때문에, 긍정적 인간관계의 혜택이 없이 그 외부 세계에 마주하게 되는 사람한테는 무서울 뿐만 아니라, 위험할 수도 있다.
첫댓글 긍정적인 관계없이 폐쇄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영화로군요.
아주 반가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