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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랑
2015. 1. 11(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6:13-14
서바이블 오디션 프로그램인 슈퍼스타K라는 방송이 있다. 매년 1만 5천명이 참여하고 우승자에게는 음반제작비를 포함하여 5억의 상금이 걸려있는 아주 큰 대회이다. 슈퍼스타K에서 우승을 하면 5억이라는 돈도 벌수 있지만, 우승의 명예와 함께 가수로 데뷔하여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기도 하기 때문에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최선을 다하여 노래를 부른다.
작년 연말에 진행한 슈퍼스타K6에서 우승을 한 사람은 싱어송라이트 곽진언씨이다. 굵은 베이스톤으로 노래를 부르면 진솔함이 느껴지는 곽진언씨가 후회라는 노래를 부를 때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경쟁자를 다 재치고 탑2에 올라 부른 노래가 자작곡인 자랑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곽진언씨가 자랑을 작곡한 때이다. 곽진언씨는 슈퍼스타K가 진행되는 가운데 이 노래를 작곡한 것이다. 서바이블 오디션 경쟁에서 누군가가 떨어져 눈물을 흘리며 떠나갔고, 그 경쟁에서 떨어지면 안된다는 생각에 모든 경쟁자들이 긴장하며 목이 쉬도록 노래연습을 할 때 곽진언씨는 이 노래를 작사한 것이다. 그 가사를 들어보기 바란다.
이젠 내가 겁이 많아진 것도 자꾸만 의기소침해지는 것도
나보다 따뜻한 사람을 만나서 기대는 법을 알기 때문이야
또 말이 많아 것도, 그러다 금세 우울해지는 것도
나보다 행복한 사람을 만나서 나의 슬픔을 알기 때문이야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나의 품이 포근하게 위로가 될 수 있도록
사랑을 나눠줄 만큼 행복한 사람이 되면
그대에게 제일 먼저 자랑할 거예요
제일 먼저 그댈 먼저 안아줄 거예요
곽진언씨는 꿈의 무대에서 탈락하여 눈물 흘리며 떠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니 그 꿈의 무대에서 우승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연습하는 경쟁자들을 보면서 자신의 자랑은 슈퍼스타K에서 우승하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곽진언씨의 자랑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되어서 자신의 품이 포근하게 위로가 되어질 수 있다면 그때 사랑하는 사람에게 제일 먼저 그 따뜻함을 자랑하고 싶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곽진언씨의 노래를 들으면서 모두 그 아름다운 마음에 감동을 받은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을 살면서 무엇을 자랑하고 있는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된 징표인 할례를 자랑하였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을 무시하고, 또 자신을 따르는 사람이 많은 것을 자랑하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바울은 그러한 유대인들을 향하여 나는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를 자랑할 때 유대인들은 조롱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고통의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캔서스대학 해부학 교수 매츠키박사는 십자가형의 고통을 이렇게 말하였다.
십자가형은 온 몸의 체중이 두 손바닥에 박힌 못에 매달려지기 때문에 피부와 살이 찢겨 많은 피가 흐르고 통증이 심하다. 또한 가슴으로부터 팔에 이르는 근육들이 극도로 팽창하여 호흡 장애를 가져온다. 숨을 내쉴 수가 없어 근육에 산소 공급이 안된다. 그래서 심한 경련을 일으킨다. 이런 증세를 조금이라도 참으려고 죄수는 몸을 위로 치켜올리려고 하는데 이때마다 체중은 발등에 꽂힌 못에 의지하므로 그 고통은 가중된다.
십자가의 처형만큼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형벌은 없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 그만큼 무섭고 고통스러운 형벌이 십자가인 것이다.
그런데 왜 바울은 십자가를 자랑하고 있는가? 구세군을 창설한 윌리엄부스는 청년 때도 예수를 믿었지만 온전히 변화된 삶을 살지는 못하였다. 하루는 꿈을 꾸는데, 갈보리 언덕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려 신음하는 것을 보았다. 그때 한 청년이 다가오더니 십자가에 사닥다리를 놓고 올라가 못박힌 예수님의 손과 발에 다시 큰 못을 박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윌리엄부스는 야, 이놈아! 왜 예수님께 또 못을 박는 것이야? 이 나쁜 놈아! 그만 두지 못해! 어서 내려 와! 하고 고함을 쳤다. 그 때 그 청년이 망치질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 청년이 바로 자기자신이었던 것이다. 너무 놀라 잠에서 깬 윌리엄부스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2번, 3번 못을 박는 삶을 살았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후 윌리엄부스는 삶이 바뀌었습니다. 윌리엄 부스는 십자가가 앞에서 자신을 보았을 때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선데이 크리스챤이었던 윌리엄 부스가 한평생 주를 위하여 사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이다. 십자가의 능력은 사람을 변화시키며 새로운 삶을 살 수있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십자가의 능력으로 인하여 윌리엄 부스가 변화된 것처럼 사도바울도 변화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인가? 제가 주일학교 사역을 할 때였다. 여름캠프나 겨울경건수련회를 하면 아이들이 땀을 흘리며 찬양을 한다. 그리고 설교 후에 기도하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면 저는 물론이고 모든 선생님들이 다 감동을 받는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까지이다. 그렇게 눈물흘리며 기도했으면 그 다음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는 기대를 하지만, 그 기대치대로 사는 아이들은 거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스스로에게 눈물에 속지 말라는 소리를 종종한다.
그런데 이것은 자여교회 사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교회의 특징 중에 하나는 눈물이다. 예배시간에 말씀을 들으면서, 또 설교 후 찬송을 드릴 때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성도들이 있다. 그러면 저는 2가지 생각을 한다. 먼저 하나는 내가 설교를 잘 하고 있구나!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저렇게 눈물 흘리며 예배드리는 성도는 분명히 변화된 삶을 살 거야! 하는 기대이다. 그런데 두가지 다 틀렸다. 예배시간에 눈물을 흘리는 것은 제가 설교를 잘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도 아니었고, 또 눈물을 흘린 성도의 삶에 변화는 거의 없다. 대부분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면 굳건하게 어제와 동일한 삶을 사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설교와 찬양을 통하여 이성과 감성에 자극을 받아 눈물은 흘렸지만, 그것이 삶을 변화시키는 힘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의 능력은 사람의 생각을 바꾸고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런 십자가의 강력한 능력을 경험했는가? 사도행전 18장에는 겐그레아에서 에베소로 온 바울의 사역이 나온다.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한 바울은 유대인들과 변론을 하게 되었고, 그때 사람들은 바울에게 더 오래있기를 청하였지만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버렸다. 그 후 바울은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갈라디아와 브루기아에서 성도들은 견고케 한 후에 다시 에베소로 올라와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행 19:8-9)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9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바울은 자신을 청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에베소로 올라온 것이다. 그리고 회당에서 3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였다. 그런데 그 결과는 그렇게 강론을 들은 사람이 무리 앞에서 바울이 전한 도를 비방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얼마나 충격적인 이야기 인가? 제가 교회에서 3개월 동안 오직 제자훈련에만 집중하여 사역하였다. 그런데 훈련을 받은 사람이 복음을 거부하고 오히려 제가 가르친 내용을 비방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마 저는 힘들어서 목회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될 것이다.
내가 잘못 가르쳐서 저 사람이 복음을 거절한 것이야! 아니 내가 아니라, 다른 목사님이 가르쳤으면 달라졌을텐데 역시 나는 안돼!
저는 신대원 다닐 때 공부를 잘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사역하는데 이모저모 부족한 부분이 많이 있기 때문에 집중적으로 제자훈련을 했는데 오히려 말씀에 대하여 비방을 하면 나의 부족함이 드러나는 것같아서 괴로움에 빠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바울은 저와 입장이 다르다. 바울은 학문에 능통한 사람이었고, 또 그는 다메섹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한 사람이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그는 3천층을 보고 그 감동을 가진 사람이다. 이러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완전한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왜 복음을 비방하고 있는가? 중년부부가 부부싸움을 하였다. 화가 난 남편이 한마디를 하면 아내는 열마디를 하니 도무지 그 싸움에서 남편이 이길 수가 없었다. 그때 남편은 아내에게 비장의 무기를 꺼내었다. 나는 남편이야! 남편은 하늘이고, 아내는 땅이다는 말도 당신은 몰라 어디 말대꾸야! 그렇게 고함을 친 남편은 이번 부부싸움은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회심의 미소를 머금고 있는 남편에게 아내의 폭탄같은 큰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세상을 모르는 사람이 있나? 요즘은 땅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어요. 이거 왜 이러세요. 그 말에 부부싸움은 끝나버렸다.
그런데 3개월동안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도 사람들이 변하지 않은 것이 이 부부와 같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바울을 통하여 복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생각과 지식이 더 바르다고 고집하였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 사람들의 상태를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아니하고 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울은 제자들을 따로 세워서 두란노에서 2년동안 말씀을 가르쳤다.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에베소는 신로마라 불리울 만큼 경제적으로 부요하고 화려한 도시였다. 2만 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극장을 비롯하여 화려한 체육관과 음악당을 가지고 있는 도시였다. 또한 거대한 쇼핑상가가 있어서 세계의 부요한 여성들은 꼭 한번 쇼핑을 하고 싶어하는 도시가 바로 에베소였다. 역사가들의 말에 의하면 로마의 집정관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결혼 한 후 수시로 에베소에 와서 보석과 화장품을 구입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에베소를 대표하는 것은 대극장이나 쇼핑몰이 아니라,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라고 불리는 아데미신전이었다. 그래서 에베소는 그 어떤 도시보다 마술적인 기술과 미신숭배를 가르치는 우상숭배의 중심도시가 되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미신이 성행하는 에베소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음을 19절에서 보여주고 있다.
(행 19: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은 5만을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5억이 넘는다고 한다. 그러면 그 양을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5억이 넘는 그 많은 책들을 쌓아놓고 불을 지르면 에베소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불 주위에 있는 마술사들을 보면서 바울이 전한 복음이 진짜였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전한 복음이 에베소에서부터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교회의 탄생이 두란노 서원의 제자훈련 이후에 탄생하게 되었고, 에베소에서 120마일 떨어진 골로새와 라오디게와 히에라폴리까지 제자들은 복음을 들고 나가서 교회를 세우게 된 것이다.
그러면 두란노에서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골로새와 라오디게아로 가면서 그들이 전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들은 바울의 손수건으로 사람을 고친 그 이야기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것이 거짓이었고, 복음이 진짜였구나! 하는 것을 그들은 증거하였을 것이다. 복음의 능력 앞에 자신을 포기하고 진짜인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이 십자가를 자랑할 때 교회가 세워지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복음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변화되었으며, 또 우리의 자랑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회에 가면 제일 불편한 것이 박수이다. 음악을 잘하는 사람들은 끝나는 때를 알기 때문에 힘차게 박수를 치지만 저와 같이 음악에 대하여 무지한 사람은 그 타이밍을 맞추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다.
예를들면 피아노 독주회에 갔는데 피아니스트가 그냥 계속 반주만 하면 좋겠는데, 간혹 피아노를 치다가 잠깐 머무르는 때가 있다. 그러면 음악을 모르는 저와 같은 사람은 박수를 쳐야 하나? 하는 묘한 긴장감에 빠지게 된다.
아마 여러분도 그러한 경험을 해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안다박수라는 것이 있다. 음악에 대하여 잘 모르는 사람이 음악회에 갔는데 모처럼 자신이 아는 연주가 나온 것이다. 그래서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끝나자 곧바로 힘차게 박수를 치는 것이다. 이것이 안다박수이다. 안다박수는 남들이 박수를 치기 전에 내가 먼저 박수를 쳐서 나 이 음악을 알아! 하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제 같이 음악을 모르는 사람은 누군가 박수를 치면 자동적으로 따라서 박수를 치는 것이다.
그런데 음악을 잘 아는 사람은 안다 박수가 나오면 굉장히 짜증을 낸다. 왜냐하면 음악을 아는 사람은 연주가 끝난 후에 10-20초 정도 그 음악의 여운을 즐기는 것이다. 그래서 그 감동을 간직하고 있는데 박수를 치면 그 여운이 다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음악을 아는 사람들은 좋은 연주를 들으면 바로 박수를 하지 않고, 10-20초 정도 기다리고 있다가 박수를 치는 것이다. 그런데 연주회에서 안다박수를 치는 이유는 내가 아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심리를 사람들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복음에 대하여서는 얼마나 자랑하고 있는가?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바울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신의 인생이 바뀐 사람이다. 그리고 바울은 그 십자가를 조롱하고 대적하는 세상을 향하여 십자가를 자랑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를 자랑하는 모습이 어떠한가? 바울은 그 모습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는 말씀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더 이상 바울이 세상과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를 자랑하는 모습이다. 바울은 이제 세상의 풍속을 좇지 않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그 사랑과 감격에 합당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모습이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모습은 세상사람들이 가지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싶어 아등바등거리며 살면서 입술로만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 십자가를 자랑하고 싶으면 변화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은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지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우리는 십자가를 자랑하고 있는가? 이제 입술의 자랑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에 감동하여 변화된 삶으로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하며 또 더욱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