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나이 또래라면 어린 시절 한번 쯤 흥얼 거렸을 이 노래 4절 가사중에 "지증왕 십삼년 섬나라 우산국" 이란 지증왕 즉위 13년에 장군 이사부를 보내어 우산국, 즉 오늘날의 울릉도를 정복한 일을 말 합니다. 지증왕은 신라에서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국교로 하여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의 기틀을 세웠다고 평가받는 법흥왕의 아버지 입니다. 법흥왕이 이러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부분도 그의 아버지 지증왕때 부터 이어져 온 신라의 기틀을 잡는 업적들의 연장선으로 볼수 있습니다.
신라 금관 , 이미지
지증왕의 본명은 성은 김, 이름은 지대로(智大路)이며, 지도로(智度路)나 지철로(智哲老)라고도 합니다. 선대인 소지 마립간이 후사 없이 죽자 내물 마립간의 증손이라는 계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지증(智證)은 시호로써 지증왕은 신라의 왕들 중에서 최초로 시호를 사용한 왕 입니다. 지증왕은 "마립간" 이라는 신라 고유의 왕명 대신 504년 부터 중국식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그 후대의 왕들 부터는 왕명은 "왕"으로 통일하여 불리기 시작합니다. 그의 선대 왕은 소지 마립간, 그 선대는 내물 마립간(내물왕)과 같이 불리었습니다.
그의 선대왕인 소지 마립간은 사금갑 설화로 유명한 왕 입니다. 잠시 옛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설화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임금이 그럴듯하게 여겨 뜯어보니 편지 속에, “거문고 상자를 쏘아라.”고 쓰여 있었다. 임금이 대궐로 돌아가 거문고 상자를 보고 쏘니, 그 속에는 내전에서 분향하는 승려와 궁주가 몰래 만나 간통하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을 처형하였다.(삼국유사 제1권, 22장 뒤쪽, 기이 2편 사금갑)
488년 정월 대보름에 소지왕이 천천정(天泉亭)으로 행차하였다가 쥐가 사람소리로 까마귀를 따라가라 하여 무사(武士)에게 뒤쫓게 하였다.
무사가 까마귀를 좇아 남쪽 피촌(避村)에 이르자 까마귀는 사라지고 연못에서 한 노인이 나와 봉투를 올렸다. 그 겉봉에는'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라고 씌어 있었다. 왕은 한 사람이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열어보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자 일관(日官)이 두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요, 한 사람은 임금을 뜻한다고 하며 왕에게 봉투를 열어볼 것을 청하였다. 왕이 봉투를 열자, 그 안에는 '거문고갑(琴匣)을 쏘라'는 글이 씌어 있었다. 왕이 활로 거문고갑을 쏘니 그 안에서 궁주(宮主)와 승려가 정을 통하다 나왔다.
왕은 궁주와 승려를 처형하고 매년 정월 상해일(上亥日), 상자일(上子日), 상오일(上午日)에는 모든 일을 삼가고, 정월 보름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까마귀에게 약밥을 지어 공양하였다. 그리고 노인이 나왔던 연못을 서출지라고 불렀다.
그저 부정을 저지른 왕비를 벌하고 목숨을 건진 이야기로 여겨지던 이 설화에 사실은 다른 의미가 있다는 주장들이 많습니다. 신라에서는 내물 마립간 이후로 박, 석, 김 3개의 성씨가 번갈아 왕위를 계승하던 체제가 끝이나고 김씨가 왕위를 독점하고 부계, 장자 계승을 확립하는 등 고대 연합체 성격을 벗어난 중앙집권적 국가 체계의 기틀을 세우려는 시도가 법흥왕 시대까지 이어집니다. 소지왕이 행차하였던 천천정은 신라의 시조 혁거세왕이 내려왔다는 나정과 관련있는 곳이며 소지왕이 새로 세운 신궁터 이기도 합니다. 이 설화는 신라 시조에 대한 제사를 김씨가 독점하려는 시도로 소지왕이 세운 신궁과 이에 대한 반발세력(궁주로 표현된는 왕비의 친가, 토착 귀족 세력), 불교와 같은 종교세력 등이 신궁의 설치를 놓고 첨예한 대립이 있었으며 이 대립한 세력들과의 싸움을 은유한 설화라는 주장도 있습니다.(주1)
지증왕은 이처럼 국가의 기틀을 잡기 위한 중앙집권화와 왕권강화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기존의 세력들의 저항도 있었던 시기의 왕으로 그 역시 중앙집권 강화에 여러가지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업적은 앞서도 말했듯 왕호를 변경한것 외에도 502년에는 고대의 풍습인 순장을 금지하였습니다. 503년에는 국호를 신로(新盧)·사라(斯羅)·서나(徐那)·서야(徐耶)·서라(徐羅)·서벌(徐伐) 와 같이 다양하게 불리던 것에서 “신라(新羅)국" 으로 통일 하였습니다. 군현을 개편하고 각 지방의 군주들에게 영을 내려 농사를 장려케 하였고 소를 길러 농사에 이용하도록 했는데 신라에서 소를 이용한 논, 밭갈이인 우경이 시작된것도 이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장군 이사부를 보내어 우산국(현재의 울릉도)을 정복하게 하였습니다.
울릉도. 이미지
그의 업적들을 유심히 되짚어 보면 모두 고대국가 초기의 특성들을 끊어내고 토착세력을 누르는 중앙집권화의 과정에서의 조치들로 보입니다. 이처럼 지증왕은 신라가 고대국가의 기틀을 잡아 나가는 과정 및 우리 영토의 확정 면에서 매우 의미있는 왕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 왕은 그런 업적보다 다른 의미로 꽤 유명한 왕이기도 합니다.
제가 중학교 시절 국사 선생님은 매우 재미난 분이었습니다. 이분도 당시 다른 선생님들 처럼 당구대를 깍은 지시봉(이라 쓰고 몽둥이라 부른다)을 옆구리에 끼고는 다니셨지만 다른 선생님들처럼 그걸로 실제 체벌을 가한적이 없었습니다. 다소 딱딱할 수 있는 국사를 재미있게 이야기로 많이 설명하고 외워야 할것들도 노래로 만들어 불러주는 등 재미있던 분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인지 국사 수업시간에는 남자 중학교로는 드물게 잠을 자거나 딴짓을 하는 친구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삼국 유사에 나오는 지증왕의 일화를 무척 재미있게 이야기 해주는 바람에 제가 다닌 중학교를 나온 아이들이라면 아마도 다른 역사적인 인물은 잊었어도 지증왕 만큼은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증왕 말이다. 역사적으로도 진짜 지존인 거다. 니들이 많이 존경해야 한다. 따라갈수가 없제, 이분 꼬X가 말이다 겁나게 컸던기라, 니네 30센치 자 있지 그거보다 더 긴거라..." 이렇게 풀어나간 지증왕 설화는 이후 사춘기의 남자 중학생들에게 잊을 수 없는 각인을 심어 주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지증왕이 음경(陰莖)의 길이가 무려 한 자 다섯 치(一尺五寸, 약 45센치)나 되어 배필을 구하기 어려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래서 사자를 보내 배필을 찾게 했는데, 사자가 모량부(牟梁部)에 이르렀을 때 동로수(冬老樹) 아래에서 두 마리의 개가 큰 북(鼓)만큼이나 커다란 똥덩이를 두고 다투는 모습을 목격했다. 마을사람들에게 수소문해 그 똥의 임자를 찾으니 바로 모량부 상공(相公)의 딸로써 그녀를 찾아가자 키가 일곱 자 다섯 치(七尺五寸, 2미터 20센치)나 되었다. 사신이 그 사실을 보고하자 왕은 수레를 보내 그녀를 왕궁으로 불러들여 왕비로 삼았다고 한다.
출처 : 두산백과
신라 토우, 남자. 이미지
신라 토우, 남녀
사실 삼국시대, 특히 신라시대 왕들에게는 성기에 대한 크기와 같은 신체적인 특징이 설화를 많이 다룬 삼국유사에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부분은 고대의 성기숭배 사상과 관련이 있다는 설이 있습니다. 즉 과장된 성기의 기록은 실제의 일이기 보다는 해당 왕의 정치적 사회적인 권력과 힘의 크기를 상징한다는 주장 입니다. 즉 위 해석대로라면 지증왕은 비교적 매우 강한 왕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신라에서 내물왕계 김씨의 왕권 독점과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던 시기의 왕이니 만큼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삼국사기에서도 지증왕은 그 체격이 무척크고 담대하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체격적 사실과 그 권력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합쳐져 만들어진 재미있는 설화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봅니다
첫댓글 우리 만남과 관계가 잘 조화된 사람의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만남에 대한 책임은 하늘에 있고 관계에 대한 책임은 사람에게 있다합니다.
좋은 관계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서로 노력하고 애쓰야 될것입니다.
날씨가 갑자기 기온변화가 왔습니다. 회원님들 감기조심 하십시오.
2018년 8월 18일 토요일
햇살좋고 바람 맑은 가을이네요
알알이 영글어 가는 열매처럼 올 가을엔
멋진 꿈 이루시길 바랍니다.
종친님들!
주말 잘 보내시고
감기조심하세요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