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육순이 찬한 《춘추집전찬례》를 말한다. 10권이다. 이 책은 육순이 그의 사우인 담조와 조광의 설을 설명한 것이다. 담조의 자는 숙좌로 본래 조주인이었는데 관중으로 옮겼으며, 윤주 단양현 주부를 지냈다. 조광의 자는 백순이며, 하동인이다. 양주자사를 지냈다. 육순의 자는 백충이고 오군인이며, 급사중에 이르렀다. 나중에 헌종의 휘 때문에 질로 개명하였다. 이들의 사적은 모두 《당서》 〈유학전〉에 실려 있다. 담조의 《춘추》 해설은 주로 삼전의 득실, 부회, 누락 등을 찾아내는데 노력한 까닭에 전통적인 해석과는 많이 달랐다. 예를 들어 《춘추좌전》은 구명의 저작이 아니라고 주장하여 《한서》의 “구명이 노인 증신에게 전해 주었고, 신은 오기에게 전했으며, 기로부터 여섯 번 전해져 가의에 이르렀다.”는 설은 모두 부회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심지어는 공양의 이름 고와 곡량의 이름 적도 반드시 확실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또 《춘추》의 문장은 매우 간결하므로 선유들이 각각 한 가지 전을 주장하여 서로 소통하기를 꺼려하고 오직 상대를 공격하니 그 폐단이 매우 심하다고 하면서, 《춘추좌전》은 각국의 여러 가지 점, 꿈, 종횡가, 소설 등을 비판 없이 인용하여 사실의 서술에만 치우치고 경의 본지는 도리어 경시하니 경에 충실한 《춘추공양전》이나 《춘추곡량전》만 못하다고 평하였다. 이런 주장에 대하여 구양수나 조공무 등은 수긍하지 않았지만, 정자는 “제가 중에 뛰어나서 이단을 물리치고 정도를 제시한 공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따라서 본서는 전보다는 경의 중요성을 부각시켜서 송나라 학자들의 선구가 되었으며, 추측과 억단으로 자신의 설을 강변한 잘못은 지적되어야 하지만, 견강부회한 전의 설을 변증한 점은 평가되어야 할 것이라고 《사고전서총목제요》에서 말하였다. 본래 담조가 지은 책의 이름은 《춘추통례》였는데 모두 6권이었다. 그가 죽은 후에 육순이 그의 아들인 담이와 함께 유문을 수집하여 조광의 교열을 거친 후 비로소 《춘추찬례》라고 이름 붙였다. 대력 을묘년(775)에 완성되었는데 모두 40편 10권이다. 제1편부터 제8편까지는 총의 춘추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를 논한 것이고, 제9편은 노나라 십이공의世緒이며, 제36편 이하는 경전문자의 탈류와 인명, 국명, 지명에 관한 것이니 춘추필삭의 사례를 설명한 것은 제10편부터 제35편까지 26편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