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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나벨리 원문보기 글쓴이: 고니
슈만이 첼로 협주곡을 작곡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쿰머, 그뤼츠마허, 그라바우, 롬베르크 등 당대 최고의 첼리스트들과 예술적으로 교류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영향보다는 그 자신이 어려서 첼로를 배운 적이 있었기 때문에 첼로가 지닌 시적, 애가적, 열정적인 기질과 능력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 점은 그의 첼로 소품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잇는데, 슈만은 협주곡을 작곡하기 1년 전에 집중적으로 소품들을 쓰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대형 캔버스를 대하기 전에 소품으로 실험하는 화가들과 흡사했다. 이 곡은 1850년 10월에 뒤셀도르프에서 작곡, 6일 만에 스케치를 끝내고 8일 후 완성했다고 한다. 이렇게 단숨에 작곡이 가능했던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슈만의 병상을 지켜 아내 클라라였다. 그녀에 의하면 슈만은 심한 환각증세에 시달리다 깨어나면 고통을 무릅쓰고 이 작품을 수정하려 안간힘을 쓰곤 했다고 한다. 이는 마치 곡을 수정함 으로서 자신도 환청과 환각에서 풀려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하는 행위 같았다고 했다. 이 협주곡은 1860년 6월 9일 라이프치히 음악원 연주홀에서 열린 슈만의 50회 생일축하 연주회에서 에베르크에 의해 초연 되었다. 초연 당시에는 많은 호응을 얻지 못했지만 슈만이 사망한 직후 포퍼, 코스만, 다비도프 드으이 연주로 모든 첼리스트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협주곡이 되었다. 제 1악장 (Nicht zu schnell) 제 2악장 (Langsam-Etwas lebhafter-Schneller grazioso) 제 3악장 (Sehr lebhaft) 슈만 첼로협주곡 A단조 - 가치와 매력 슈만의 협주곡은 후대 작곡가들에게 독특한 영향을 주었다. 우선 이 곡도 고전주의 협주곡처럼 빠르고-느리고-빠른 3악장으로 구성되었지만, 악장간을 단절하지 않고 순환 형식으로 묶어 리스트의 교향시처럼 낭만적 특성을 갖게 했다. 또한 협주곡의 특성인 투티와 솔로의 이중 제시를 하지 않고 짧은 투티의 서주를 이어 첼로가 직접 제시부를 이루도록 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2악장에서 보여준 것처럼 작곡가의 심리적 이중성을 협주곡의 내용에서 부상시켜 독일 낭만주의의 진수를 투영토록 했다. 끝으로 빠른 악장에서 고전적 소나타 형식에 서정적이고 드라마틱한 성격을 접목하여 표제음악을 예고한다. 낭만시대에 기악협주곡은 두 갈래로 발전되었는데, 하나는 다양한 기교를 전시하기 위한 기능적 협주곡이고, 다른 하나는 독주악기가 감정표현이나 기교보다 교향곡적 형식을 충족시키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교향곡적 협주곡이다. 이 협주곡은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슈만의 위대한 교향곡적 작품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Gregor Piatigorsky(1903-1976) 러시아 태생의 미국 첼리스트. 지금 21세기에,러시안 첼리스트들의 대부와도 같은 존재는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1927-2007) 일것이다. 그러나 30여년전 만해도,로스트로포비치의 자리는 피아티고르스키의 자리나 마찬가지였다. 피아티고르스키는 러시아 에카테리노슬라브(Ekaterinoslav)에서 1903년 4월 17일에 출생하였다. 그는 어린 시절 오케스트라에서 첼로 소리를 듣고 첼리스트가 되기로 결심하기 전까지는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배웠으며,첼로가 없을때 그는 두개의 막대기로 첼로 연주하는것을 흉내내기를 즐겼다. 길고 짧은 두개의 막대기로 긴것으로는 첼로의 역할을,짧은것으로는 활의 역할을 하였다. 그가 일곱살이 되었을때 그는 진짜 첼로를 받게 된다. 그리고 그의 빛나는 첼리스트로써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이름을 날리던 첼리스트 율리우스 클렝겔(Julius Klengel,1895-1933,유명한 첼로교본 '클렝겔' 의 저자이기도 하다.)의 제자 중 한명이 피아티고르스키에게 너는 어떤 재능도 없으니 첼로를 포기하라고 하였지만 피아티고르스키는 그 환영받지 못할 충고를 가볍게 무시하였다. 당연한것이...그 클렝겔이 제자가 후년에 위대한 첼리스트가 된 피아티고르스키를 보고 어떤생각을 했을까? 그후 피아티고르스키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장학생으로 공부하게 된다. 그곳에서는 글렌 폰 구바리오프(Glehn von Gubariov:Davidov의 제자)와 브란도우코프(Brandoukov)에게 사사하였는데,모스크바 음악원 재학 시절 그는 지역 카페에서 틈틈히 공연을 하여 그의 가족을 부양하였다. 그가 13살이었을때 러시아의 10월혁명이 발발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 직후 니콜라이 레닌의 이름을 따 'Lenin Quartet' 이라 불렸던 현악 4중주단을 구성하여 연주를 시작하게된다. 그리고 15세때 그는 모스크바 볼쇼이(Bolshoi)극장의 수석 첼리스트가 되었다.(볼쇼이 발레로 한국인에게도 친숙한 이름!) 그의 첼리스트로써의 성공에도 불구하고,혹은 어쩌면 그 '성공' 때문에,러시아 정부는 그에게 해외로의 유학이나 연주활동을 금지시키려 하였다. 끝내 피아티고르스키는 국경으로 향하는 가축 수송 기차에 몸을 숨겨서 폴란드로 망명하게된다. 그 와중에도 그의 첼로만은 잊지 않은채 첼로를 들고 국경을 넘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첼로만은 국경을 넘지 못하게된다. 국경 수비대 군인이 피아티고르스키와 그의 일행들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총을 발사하고,총성을 듣는 순간 그의 일행이었던 뚱뚱한 오페라 여가수가 피아티고르스키에게 몸을 날려 그를 넘어뜨리는 바람에 그의 첼로는 부숴져버렸다. 하지만 피아티고르스키와 그의 일행 모두 누구도 다치지 않고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그렇게 러시아의 공포정치를 탈출한 피아티고르스키는 18세가 되어 폴란드와 독일을 돌며 공부와 연주를 병행한다. 그는 독일 베를린과 라이프찌히에서 공부했던 짧은 기간동안 휴고 베커(Hugo Becker,1863 - 1941)와 율리우스 클렝겔에게 배웠지만 피아티고르스키는 그들중 누구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여기서 피아티고르스키는 또 한번 중요한 사건을 맞이하게 된다. 그는 종종 베를린에 있는 러시아인 카페에서 삼중주 연주를 하였는데,이 연주를 접한 음악의 황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engler,1886-1954)에 의해 세계 음악의 핵과도 같았던 베를린 필하모닉(Berliner Philharmoniker)의 수석 첼리스트로 기용되게 된다. 그는 베를린필에서 26세가 되던 해인 1929년까지 연주를 계속하였으며 그때에 그는 전 세계를 여행하는 콘서트 첼리스트로써의 커리어를 쌓아가기로 결심한다. 위대한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1864-1949)는 베를린필과 협연한 피아티고르스키의 '돈 키호테'(Don Quixote Op.35)연주를 듣고 그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나는 진정으로 내가 원했던,의도했던 돈 키호테를 듣게 되었습니다."... 돈 키호테는 스테인의 소설가 세르반테스 (1547-1616) 의 소설을 기반하여 돈키호테의 모험과 일대기를 관현악으로 뛰어나게 그려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역작이기도 하다. 또한 그 해에 피아티고르스키는 그의 첫번째 솔리스트 데뷔 무대를 Leopold Stokowski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협연으로 만들어냈다. 또한 빌헬 멩겔베르크(Willem Mengelberg,1871-1951)지휘와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협연으로 또 한번 미국인들의 갈채를 받는다. 그는 미국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사랑하였으며,1942년에 정식으로 시민권을 받아 미국에 안착하게 된다. 그는 미국에 정주하며 같은 미국 망명 연주가들이었던 바이올리니스트 야사 하이페츠(Jascha Heifetz,1901-1987)와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Artur Rubinstein,1887-1982),그리고 비올리스트 윌리엄 프림로즈(William Primrose,1904-1982)와 실내악 연주를 하게된다. 특히 하이페츠,루빈스타인,피아티고르스키의 트리오는 그 이름도 유명한 백만불 트리오인데,셋 다 너무 뛰어난 거장이고 특히 하이페츠의 개인색이 너무 짙어 트리오는 오래 가지 못했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30종 이상의 보석같은 녹음을 남기고,개인적으로는 피아니스트 블라지미르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1904-1989),바이올리니스트 나탄 밀슈타인(Nathan Milstein,1903-1992)와 연주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그의 콘서트에서 청중은 열광하였으며,작곡가들또한 그를 존경하였다. 많은 작곡가들이 피아티고르스키에게 작품을 헌정하였으며,로스트로포비치도 그러했다.프로코피에프(Sergei Sergeevich Prokofiev,1891-1953)의 작품중 하나인 <신포니아 콘체르탄테,Op.125>는 로스트로포비치와 피아티고르스키 둘 다 관련되어있는데(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가 뛰어나지만 최근 음반인 장한나와 안토니오 파파노의 연주도 엄청나다.) 프로코피에프가 1938년에 그를 위해 '발라드'(A Ballade)를 헌정하게된다.이 작품은 보스턴 교향악단과 그 이름도 위대한 세르게이 쿠세비츠키(Sergeri Koussevitsky,1874-1951)의 지휘 아래 초연되었는데,프로코피에프는 다시 그 곡을 수정하여 로스트로포비치에게 헌정하기도 하였다. 또한 피아티고르스키는 스트라빈스키(Igor Fëdorovich Stravinsky,1882-1971)와 공동으로 '풀치넬라 조곡'(Pulchinella Suite) 편곡을 진행하여 지금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Suite Italienne"로 탄생시키는데 공헌을 하였다. 그는 영향력있는 교육자로써 후진양성에도 힘썼다. 1941년부터 1949년까지 필라델피아의 커티스 음악원에서 첼로 수석으로 재직하였으며,탱글우드에서 실내악을 교육하기도 하였다. 1957년부터 1962년까지는 보스턴대학교의 첼로 담당으로 재직하다가 1962년부터 남캘리포니아대학에서 1976년에 영면하기까지 후진양성을 계속하였다.(야사 하이페츠또한 이 대학에서 후진양성을 하였다.) 1962년과 1966년에는 국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심사위원을 지내기도 하였으며 또한1962년에 뉴욕 첼로 소사이어티가 피아티고르스키 상 (Prize)를 창설하면서 매년 뛰어난 젊은 학생에게 상을 수여하고있다. 피아티고르스키는 두 대의 스트라디바리우스 첼로,1714년 'Batta' 와 1725년산 'Baudiot'를 소유하였다. 그는 1976년 8월 6일 암으로 영광된 삶을 마감하였으며,LA근처 Brentwood 묘에 안장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