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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발제문입니다. 1년 전 대구민중행동에서 발표한 글을 제목 바꾸고 수정보완했습니다. 논점은 그대로입니다.
제국주의 시대
−[제국주의론]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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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론](1916)이 나온 지 100년 이상이 흘렀다. 그간의 세계사적 변화, 특히 현실사회주의체제의 성장과 몰락, 그리고 자본주의의 폭주 앞에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레닌의 근본적 비판은 시대착오로 치부되기 쉽다. 레닌이 [제국주의론]으로 독점자본주의에 대한 완벽한 이론체계를 만들려고 한 것도 아니고 우리의 당면 문제들을 위해 모든 해답을 마련해 놓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제국주의론]은 오늘날의 변혁운동이 처한 난관들을 이해하고 그 타개방안을 마련하는 데에 필요한 통찰들을 몇 가지 제공한다고 여겨진다. 그가 밝히는 제국주의의 주요 문제들이 그대로 살아남아 해결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아직 제국주의 시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오늘과 내일의 실천을 위해 의미 있는 사고를 촉발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레닌의 주요 논지들에 근거해 우리 시대의 당면 문제 몇 가지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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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은 제국주의를 독점적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최고단계’이자 ‘사회주의 혁명의 전야’라고 규정하며, 나아가 ‘이행기의 자본주의’ 혹은 ‘사멸해 가는 자본주의’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또 그는 제국주의의 기본적 특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1) 생산과 자본의 집적이 고도의 단계에 달해, 경제생활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는 독점체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2) 은행자본이 산업자본과 융합하여 ‘금융자본’을 이루고, 이를 기초로 하여 금융과두제가 형성된다. (3) 상품수출과는 구별되는 자본수출이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4) 국제적 독점자본가단체가 형성되어 세계를 분할한다. (5) 자본주의 거대열강에 의한 전세계의 영토적 분할이 완료된다.”(제국122) 이를 하나로 묶어 레닌은 제국주의를 “독점체와 금융자본의 지배가 확립되어 있고, 자본수출이 현저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으며, 국제 트러스트들 간의 세계분할이 시작되고, 자본주의 거대열강에 의한 지구상의 모든 영토분할이 완료된 발전단계에 있는 자본주의”라고 정의한다.(제국122)
이러한 정의는 레닌의 자의적 구성물이 아니라 당대의 경제적 정치적 현실을 실증적으로 파악한 결과다. 그것은 특히 카우츠키의 제국주의론에 대한 비판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닌다. 레닌의 비판에 따르면, 카우츠키는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특정한 ‘단계’가 아니라 금융자본이 ‘즐겨 사용하는’ ‘정책’이라고 보는데, 이는 제국주의 정치를 제국주의 경제와 분리하여 최근 자본주의의 모순을 파헤치지 않고 은폐함으로써 제국주의와의 화해를 교묘히 옹호한다.(제국123,126) 또 카우츠키는 제국주의의 본질이 ‘농업지역을 지배하거나 병합하려는 산업자본주의 민족의 노력’에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제국주의의 특징은 산업자본이 아니라 금융자본이며, ‘경쟁자를 약화시키고 그 헤게모니를 잠식하기 위해’ ‘농업지역뿐만 아니라 고도로 공업화된 지역까지도 병합’하고자 하는 데에 있다.(제국124-125) 무엇보다 카우츠키는 국제적인 카르텔 등을 근거로 ‘자본주의 하에서 전쟁이 종식’되고 ‘국제적으로 연합한 금융자본에 의한 세계의 공동착취’가 일어나는 국면인 ‘초제국주의’의 가능성을 표명한다.(제국127) 그러나 레닌은 금융자본과 트러스트가 세계경제 각 부분 간의 성장률 차이를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증대시키는 것으로 파악한다.(제국130) 또 그는 불균등 발전으로 인한 생산력 발전과 자본축적 간의 불균형, 식민지 분할과 금융자본 세력권 간의 불균형을 극복하는 방법으로서, ‘자본주의하에서 전쟁 이외에 어떠한 것’도 있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제국132) 결론적으로 레닌은 카우츠키의 제국주의론이 제국주의의 뿌리 깊은 모순을 흐려 놓고 제국주의에 대한 미화로 귀결된다고 본다.(제국158) 또한 레닌은 카우츠키가 제국주의 전쟁을 ‘조국방위 전쟁’으로 미화하는 사회배외주의자들과의 협조를 정당화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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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인터내셔널에 만연했던 사회배외주의의 경제적 토대를 레닌은 제국주의의 특징인 ‘자본주의의 기생성과 부후화’에서 찾는다. 그의 비판에 따르면, 제국주의단계의 독점자본주의는 예외적으로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들을 탄생시켰는데, 그들은 자본수출을 통해 전세계를 약탈한다. 이때의 초과이윤 중 일부로 노동자 지도부와 노동귀족 상층부를 매수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선진’국 자본가들은 ‘직접⋅간접으로, 또 공개⋅비공개로 이들을 매수’한다. 이로써 부르주아화한 ‘노동귀족’층은 ‘매우 속물적인 생활양식, 소득규모,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제2인터내셔널의 주요 지주이자 부르주아지의 주요한 사회적 지주’이다. 그들은 부르주아지의 실질적인 하수인이자 자본가계급의 노동관리인이며, 개량주의와 배외주의의 실질적 전달자인 것이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내전에서 필연적으로, 그리고 적지 않은 수가 부르주아지의 편에 가세한다.(제국38-39)
사회배외주의에 대한 레닌의 비판은 오늘의 노동운동과도 무관하지 않다. 물론 한국 자본주의가 레닌 시대의 영국⋅프랑스⋅독일⋅미국 등과 같은 수준의 제국주의단계에 들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예컨대 자본수출에 해당하는 본원소득수지는 한국의 경우 2018년 기준 약 42억 달러(5조원)인 데에 비해 상품⋅서비스수지는 764억 달러(92조원)이다. 반면에 일본의 경우 본원소득수지는 1899억 달러(229조원)으로 총 경상수지 1747억 달러를 능가하며, 한국 자본수출 소득의 45배에 달한다. 단편적 자료만으로 쉽게 결론지을 수는 없지만, 일단 한국의 자본수출이 일본 수준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선진국 진입 여부는 자본수출에 달려 있다”는 구호는 한국 자본주의가 나아가고자 하는 진로를 가리켜 보인다. 실제로 2019년의 경우 해외투자액은 가파른 상승세를 보인다(619억 달러). 이처럼 자본수출이 선진국으로 들어가는 입장권이라는 사고가 투자활동을 지배할 때 산업의 침체로 이어질 수 있다. 이 경우 레닌이 지적하는 제국주의의 기생성과 부후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제국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경제적 토대 가운데 하나인 자본수출은 금리생활자를 생산으로부터 한층 더 완벽하게 분리시키고, 몇몇 해외 나라의 식민지의 노동자를 착취함으로써 먹고 사는 나라 전체에 기생성의 딱지를 붙이는 것이다.”(제국134)
한국자본의 극심한 독점화 경향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자산 집중도를 보면, 삼성그룹의 자산은 2001년 국내총생산 대비 12.32%에서 2014년 27.48%로 치솟았다. 삼성⋅현대⋅엘지⋅SK⋅롯데 등 5대 재벌가문의 자산은 2014년 국내 총생산의 76.77%를 차지하고 있고, 상위 10대 재벌가문의 경제집중도는 87.17%를 기록했다. (…) 2017년 현재 국내 500대 기업의 매출에서 5대 재벌과 20대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이 각각 40%와 60%에 육박하는 등 상위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 현상은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국방예산, 군수산업, 무기수출, 군사력 등은 꾸준히 성장해왔다. 미사일 지침 폐지로 이 성장은 좀 더 가속화되리라 예상된다. 이제 한국 자본주의는 제국주의의 흐름 속에 한 발 깊숙이 들여놓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노동자계급 상층부의 매수와 관련해 한국 자본가들도 레닌 시대의 제국주의자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뜻을 품지는 않는다고 여겨진다. 이 경우 과거 정권 차원에서 당연한 것처럼 자행된 천문학적 뇌물수수와 정경유착 문제를 떠나, 전문직이나 대기업 정규직부터 하청 중소기업 비정규직까지의 극심한 임금 격차 문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기업 정규직의 높은 연봉은 오랜 경제투쟁의 성과물이며 OECD 최장 수준의 노동시간과 최고의 산재사망률과 같은 노동자 희생의 반대급부이다. ‘광주형 일자리’의 경우처럼 이를 다시 저임금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논리는 자본의 이익에 봉사한다. 다른 한편 극심한 임금격차 구조는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 양산 정책에 맞선 노동계의 투쟁 실패, 하청업체들을 상대로 한 독점 대기업들의 착취구조 고착화, 자본집약을 통해 가능해진 대기업들의 생산력 증대 등의 요인들에 기인하고 있다. 중국, 베트남, 인도 등지에서의 저임금 노동력을 통해 대기업들이 거둬들이는 초과이윤의 편중된 분배도 임금격차에 부분적으로 기여한다고 볼 수 있다. “제국주의는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특권층을 창출하여 이들을 광범한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제국141)
여기서 본질적인 문제는 임금 격차 구조가 20년 이상 고착되면서, 노동운동이 변혁운동과 멀어지게 된 점이다. 노동자들에 대한 자본의 분할지배가 매수 효과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상층부 노동자들은 소시민적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에 익숙해지고, 저소득층은 경제적 위계질서의 사다리 한 단계라도 올라서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가운데 자본권력은 불변의 진리처럼 절대화되고 있다. 고액 연봉과 품위 있는 사회적 지위 따위로 ‘매수’된 상층 노동자들은 자본권력의 대리인이 되어 보수 정치권을 기웃거리다 불러주기만 하면 언제라도 달려갈 태세다. 특히 2019년 일본의 수출규제는 애국주의 내지 배외주의에 불을 붙였고 코로나 사태는 이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이 애국주의 이면에서 ‘삼성 만세’ 소리를 듣는 것은 전혀 환청이 아닐 것이다.
노동운동과 변혁운동의 괴리는, 우리 사회의 압도적 다수를 이루는 노동자 민중의 권익을 대변할 정치세력이 존재감조차 없는 가운데, ‘진보’정당들이 친-자본 보수 정치집단들의 권력투쟁 주변부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에서도 확인된다. 최근 집권 보수당이 그 친재벌 반노동 본질을 드러내고 민심을 잃어도, ‘진보’정치가 대안세력으로서 노동자 민중 속에 파고들 기미는 별로 없다. 이런 상황은 살만큼 산다는 환각과 뒤섞여 ‘관리되는 사회’, ‘일차원적 사회’, ‘좀비’ 따위의 신좌파적 저주를 불러내면서 변혁의 어려움 혹은 불필요성, 심지어 불가능성에 대한 고정관념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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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통념에 맞서는 데에는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 개념에 대한 레닌의 비판을 참조할 수 있다. 사회배외주의와 노동계급 상층부의 매수에 대한 레닌의 비판을 통해 오늘날 변혁운동이 처한 난관의 한 가지 주요 원인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처럼, 초제국주의론에 대한 그의 비판은 변혁운동의 필요성 내지 불가피성에 대한 논거가 될 수 있다. 레닌은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독점자본주의를 제국주의의 경제적 기초라고 보면서도, 독점의 궁극적 형태로 구상된 초제국주의 개념을 비현실적 허구라고 비판한다. ‘국제적으로 연합한 금융자본에 의한 세계의 공동착취’와 ‘전쟁의 종식’을 내세우는 초제국주의론의 허구성은 현실적으로 제국주의전쟁인 일차대전을 통해 이미 입증된 셈이지만, 사후적으로 레닌은 제국주의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근거를 명시한다. 그 요체는 독점이 경쟁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유경쟁으로부터 성장해 나온 독점체는 자유경쟁을 배제하지 않고 그 위에, 그와 나란히 존재하며, 또 그럼으로써 매우 첨예하고 심각한 수많은 대립과 마찰, 갈등을 낳는다.”(제국121)
카우츠키는 국제카르텔을 단초로 초제국주의를 상정했다. 오늘날에도 국제카르텔에 의한 독점자본의 국제화 혹은 다국적 자본의 확대를 통해 국제자본 간의 갈등을 합리적으로 조율하고 이로써 공황과 제국주의 전쟁을 억제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가능하다. 레닌은 이런 생각이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즉 독점은 ‘자본주의적 생산 전체에 고유한 무정부성’을 강화⋅심화하며,(제국56) 국제카르텔은 자본주의적 독점체들의 발전수준과 서로 투쟁하는 목표를 드러낸다는 것이다.(제국106) 그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근본적이고 불가결한 조건’인 ‘발전의 불균등성’으로 인해 국제적 규모의 독점자본 간에도 경쟁과 투쟁이 불가피하다고 본다.(제국94) 이 투쟁에서 국가는 기본 단위로 기능한다.
레닌은 이 투쟁의 본질을 ‘자본과 힘에 비례한 세계분할’이라고 파악한다.(제국107) 레닌 시대에 이미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식민지 영토분할은 대체로 완료되었지만, 힘의 불균등발전은 ‘재분할’을 위한 투쟁을 불가피하게 만든다.(제국109). 이 경우 경제적⋅정치적 힘의 변화에 따라 결정되는 본질적인 문제들에 주목해야 하며, 그 변화가 순전히 경제적이냐 아니면 경제외적⋅군사적인 것이냐 하는 형태상의 문제는 부차적이라고 하는 레닌의 지적도 눈여겨볼 필요 있다. “자본가단체들 간의 투쟁과 협정의 본질문제를 투쟁과 협정의 형태문제(오늘은 평화, 내일은 전쟁, 모레는 다시 전쟁 하는 식으로)로 대체하는 것은 곧 궤변가의 역할로 빠져드는 것이다.”(제국107)이처럼 유연하면서도 본질을 놓치지 않는 관점을 취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직접적 식민지지배 형태가 대부분 자취를 감췄다는 점에서 세계 분할에 관한 레닌 이론의 타당성은 당대의 특수한 조건에 한정된다고 제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토분쟁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을 뿐더러, 시장확대⋅원료확보⋅노동력 착취⋅영향력 확대 등을 위한 재분할 투쟁은 엄연히 진행 중이며, 이 경제적 군사적 강대국들은 재분할 투쟁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핵전쟁까지 준비해왔다. 이 점에서 레닌이 제기하는 제국주의의 주요 특징들은 아직 해소되지 않았다.
독점자본들의 생산력이 불균등하게 발전한다는 점과 관련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의 과학기술이 특정 분야들에서 한국과 중국에 추월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삼성⋅SK⋅LG 등이 첨단기술로 누리는 특별잉여가치 역시 시한부이며 언제라도 중국만 아니라 베트남이나 인도 등으로 넘어갈 수 있다. 이러한 경쟁관계는 생산력 발전을 향한 압력으로 끊임없이 작용하는데, 이를 위한 첨단 과학기술은 일시적으로 새로운 고용 창출 효과를 만들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대량해고로 이어지는 경향이 훨씬 더 거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컨대 한국⋅일본⋅중국 조선업의 운명에서 목격할 수 있듯이 생산의 무정부성으로 인한 과잉중복투자나 일반적 이윤율의 저하 경향으로 인한 성장둔화 내지 자본축적 위기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일상화되고 있다.
국가의 개입을 통해 축적위기를 타개하려는 케인스주의나 신자유주의로도 장기적인 이윤율 저하와 투자과잉의 문제는 해소되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의 근본적 극복을 위해 인류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지양하고 사회주의체제로 이행해갈지는 불확실하다. 그 이전에 인류의 공멸 가능성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이 축적 위기를 노동자 민중에게 전가하려 드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윤의 사유화와 손실의 사회화’는 자본권력과 그 대리자인 국가권력의 기본정신이다. 가계대출금리인상, 물가폭등, 대량해고와 절대빈곤의 양산은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다. 살 만큼 산다는 노동자계급 일부의 감각은 시한부 환각인 것이다. 나아가 경제 전쟁을 통한 위기타개방식이 영토분쟁과 무력충돌로 이어지고 전면전을 통해 인류문명의 공멸을 초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존재하는 한 제국주의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레닌의 주장은(제국32) 시효를 다하지 않았다. 또 후쿠시마 오염수 처리 방식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환경재앙 역시 근본적으로는 자본의 무한증식 본성을 떠나 설명할 수 없다. 이러한 문제들을 직시할 때 변혁운동의 필요성 혹은 불가피성은 초현실적 편집망상의 산물이 아니라, 인류의 명운이 걸린 현실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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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사멸해 가는 필연적 단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제국주의로 인한 인류 문명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체제를 건설함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제국주의론]은 위기극복을 위한 운동의 방향을 명확히 제시한다. 즉 ‘독점은 자본주의로부터 보다 높은 체제로의 이행’이며, 제국주의는 ‘사회주의 혁명의 전야’인 것이다.(제국121) 세계대전의 민족주의적 광기와 망명의 난관 속에서 레닌이 사회주의 혁명의 필연성에 대한 믿음을 고수하는 데에는 무엇보다 자본주의의 본질적 문제에 대한 과학적 비판적 인식이 전제된다고 할 수 있다. 그 핵심은 생산의 사회화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사이의 모순이다.
“자본주의는 제국주의 단계에 이르러 생산의 전면적인 사회화에 바짝 접근한다.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자본가들을 그들의 의지나 의식에 반하여 어떤 새로운 사회질서, 곧 완전한 자유경쟁으로부터 완전한 사회화로의 과도적인 질서로 끌어들이는 것이다.”(제국53) 그러나 제국주의가 ‘완전한 사회화’에 이른 것은 아직 아니다. 생산수단의 소유는 사적인 상태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레닌은 철도건설이 이 근본적 모순을 집약하고 있다고 보았다. 즉 철도 건설은 문명을 보급하는 사업처럼 여겨지지만, 자본주의는 철도 건설을 “(식민지⋅반식민지의) 수억 민중들, 즉 ‘문명’국의 임금노예를 포함하여 종속국에 살고 있는 지구상의 절반 이상의 인구를 억압하는 도구로 전화시켰던 것이다.”(제국32-33) 이 점에서 사회적 생산과 사적 소유 사이의 모순은 절대다수 노동자 민중과 극소수 자본가 사이의 계급모순이자, 식민지 민중들과 제국주의자들 사이의 민족모순이기도 하다.
철도를 예로 들었다고 해서 레닌의 주장이 낡아빠진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문명을 보급하는 가운데 절대다수 노동자 민중들을 노예노동에 묶어놓거나 산업예비군으로 내몰아 빈곤에 빠뜨리는 사업들은 수없이 늘어나고 있지만, 그 본질이 사회적 생산과 사적 소유, 노동과 자본 사이의 적대적 모순이라는 사실은 레닌 시대와 다름없이 그대로다. 그런 한에서 자본권력에 맞서 자본주의를 지양하려는 투쟁에서 변혁적 노동운동은 그 중심적 의의를 지닐 수밖에 없다. 물론 변혁적 노동운동의 중심적 의의를 인정한다고 해서 사회적 억압에 저항하는 다양한 해방운동들이 무의미해지지는 않는다. 특히 제국주의에 맞서는 민족해방운동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
제국주의의 시기 문제와 관련해 레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자연 및 사회에 있어서의 모든 경계는 제한적이며 가변적이다. 따라서 예컨대 제국주의가 ‘결정적’으로 확립된 것이 몇 년 혹은 몇 년대인가에 대해 논쟁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제국123) ‘모든 경계’의 ‘제한적이며 가변적’인 측면을 감안할 때, 경계의 가변성은 시기 문제에 한정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는 레닌이 제시한 제국주의의 다섯 가지 기본특질 모두를 강하게 갖추고 있는가, 아니면 부분적으로만, 또는 약하게 지닐 뿐인가에 따라 제국주의국가들 사이의 차이를 식별할 수 있을 것이다. 레닌은 영국의 ‘식민지 제국주의’와 구별하여 프랑스의 제국주의는 ‘고리대 제국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제국96) 명칭 문제보다는 제국주의적 성격을 띠는 국가들의 동질적 본질과 아울러 상이한 특징들을 명확히 분석하여 그 예상 진로와 문제점을 인식하고 대응방안을 찾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예컨대 한국을 아-제국주의국가로 규정하거나 아직은 제국주의와 거리가 있다고 진단하는 것 이상으로, 한국의 제국주의적 성격 강화 경향과 이에 따르는 해외노동력착취⋅자본수출 증대⋅배외주의⋅군비증강⋅군수산업확대 등의 문제들에 대한 근본대안을 마련하는 일이 더 필요한 것이다.
식민지 종속 문제와 관련해서도 레닌은 유연한 사고를 요구한다.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정책을 논하는 데 있어서는 금융자본과 그 대외정책−이는 곧 세계의 경제적⋅정치적 분할을 위한 열강의 투쟁이라 할 수 있다−이 국가종속의 수많은 과도적 형태를 만들어낸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식민지 소유국과 식민지국이라는 두 개의 주요 집단뿐만 아니라, 형식적으로는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금융적⋅외교적 종속의 그물에 갇혀 있는 다양한 형태의 종속국들도 이 시대의 전형이다.”(제국118) 다양한 종속형태의 본질은 금융자본을 통해 제국주의국가가 종속국들의 노동자 민중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데에 있다. “제국주의는 금융자본과 독점의 시대로서, 어디에서나 자유가 아닌 지배에 대한 열망을 가져온다. 정치체제가 어떠하든 간에 이들 경향의 결과는 어디에서나 반동이며, 정치영역에서의 대립을 극도로 심화시키는 것이다. 특히 민족적 억압과 병합의 열망, 즉 민족자주의 침해는 더욱 심화된다(병합은 바로 민족자결권의 침해에 다름 아닌 것이다).”(제국158) 20세기 전반기까지와 달리 오늘날에는 식민지 소유국과 식민지국이 아니라 ‘형식적으로는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고 있는 종속국’ 혹은 ‘국가종속의 수많은 과도적 형태’가 일반화되었다. 이런 변화의 진보적 의미를 인정하더라도, 제국주의적 지배와 착취관계는 더욱 교묘하고 복잡해진 가운데 엄존하고 있다는 점도 사실이다. 레닌의 논의는 이러한 변화의 가능성을 예상할 수 있게 하면서도 그 변화 속의 불변적 지배관계를 놓치지 말도록 요구한다.
형식적인 정치적 독립성과 경제 발전의 역동과 규모를 고려할 때 한국을 통째로 식민지라고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금융적⋅외교적 종속의 그물’과 아울러 군사적⋅문화적 종속 문제를 놓고 보면 한국이 식민지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원하지 않은 사드 배치, 대규모 미군 주둔과 거액의 주둔비 부담, 무기 수입, 전시 작전권 미반환, 남북관계에서의 미국 의존 등의 문제에서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의 자본⋅문화⋅기술에 등에 대한 의존성 등에 근거해 한국을 단적으로 식민지라고 규정할 수도 있다. 이러한 규정을 이론적 오류나 과장이라고 전면적으로 거부하기보다, 평등사회를 지향하는 변혁운동이 감당해야 할 주요 당면과제를 강력히 부각하는 문제의식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더 생산적일 것이다. 그렇다고 대미 종속 문제를 절대화하여 그것을 해결하지 않고는 어떤 변혁운동도 불가능하다는 논리에 빠져서는 안 되고, 현재의 조건 속에서 자본독재 극복을 위해 가능한 최적의 실천방법들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때 반-자본독재 투쟁과 반-제국주의 투쟁을 별개의 문제로 분리하거나 대립시키기보다 유기적으로 결합할 필요가 있다. 반-자본독재 투쟁을 통해 새로운 체제를 건설할 경우 제국주의세력들과의 전면전을 피할 수 없을 터인데, 이 경우 제국주의세력의 공격에 대한 방어에서는 국내 노동자 민중의 적극적 지지만 아니라 노동자 국제주의의 성장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이 점에서 노동자 국제주의는 역사 속의 죽은 이념이 아니라 반-자본독재, 반-제국주의 투쟁의 사활이 걸린 당면과제로 삼아야 하며, 그 성장을 위한 적극적 실천이 절실히 필요하다.
레닌은 결합운동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강조했다. 그가 보기에 일차대전은 그에 참여한 ‘양 진영 모두에게 제국주의전쟁, 즉 침략적⋅강도적⋅약탈적 전쟁’이었을 뿐이다.(제국32) 그는 어느 진영에도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레닌은 제국주의 시대에는 어떤 정당한 민족해방전쟁도 불가능하다고 보고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족운동을 경시하는 룩셈부르크 등의 입장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힐퍼딩의 글을 끌어들이며 제국주의가 추구하는 병합과 민족적 억압이 피억압민족의 저항을 격화시킨다는 점을 강조한다.(제국159) 레닌은 이러한 저항의 변혁적 힘을 극대화하기 위한 원칙들을 명시한다. 그에 따르면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혁명적 투쟁의 시각에서 모든 민족을 억압민족과 피억압민족으로 분리해야 한다. 그리고 억압민족의 프롤레타리아트는 피억압민족의 민족자결권을 위해 투쟁해야 하고, 반면에 피억압민족의 사회주의자들은 피억압민족의 노동자들과 억압민족의 노동자들의 무조건적 통일을 지지해야 한다. 이때 레닌은 모든 피억압민족의 자유와 민족자결권을 인정하는 것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절박한 문제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레닌이 염두에 두는 것은 “선진국에서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내전과, 발전하지 않은 후진적이며 억압받는 민족들의 민족해방운동을 포함하는 일련의 민주주의적 혁명운동이 결합되는” 형태의 사회혁명이었다. 이는 국제주의에 입각해, 20세기 초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의 수많은 식민지 예속민족들의 민족해방 요구와 그 혁명적 잠재력을 존중하는 현실적 판단이었다. 또 민족국가 단위의 종속과 억압이 엄연히 존재하는 한 아직 살아 있는 전략이다. 특히 제국주의적 요소와 식민지적 요소를 함께 안고 있는 한국의 변혁운동에서 이 전략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반-자본독재 운동과 민족해방 운동은 아직 유기적으로 결합되지 못하고 있다. 결합의 단초를 붙잡기조차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래도 이론 차원에서 최소한의 실마리를 찾자면 모순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의 주요모순을 파악하고 그 해결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마오의 주장은 본래의 전략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 못지않게 운동의 정파적 배타성을 부추기는 데에 일조하기도 했다. 배타성의 극복과 운동의 통일을 위해서는, 주요모순에 대한 마오의 원론을 불변의 철칙으로 받아들여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의 우선성을 놓고 비타협적 노선투쟁을 벌일 것이 아니라, 모순들의 현실적 비중과 관계에 적합한 복합적 해결방안을 찾아 운동의 유기적 결합을 이루어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여겨진다. 마오의 모순론 자체가 어떤 형이상학적 원리라기보다 당면과제를 풀기 위한 전략적 사유의 산물이다. 오늘의 조건에서는 주요모순을 하나로 한정하고 그것의 해결에 집중함으로써 다른 모순들을 일단 억눌러두는 것보다는, 현실적 요구에 근거해 동시적 복합적 해결의 길을 찾을 필요도 있다. 또한 주요모순의 해결을 통해 부차 모순들이 어떻게 효율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지를 밝힘으로써 사회적 억압에 맞서는 다양한 운동들과의 유기적 결합을 이루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운동의 유기적 결합이 모순의 현실적 중요성 차이 및 전략적 요구와 무관하게 위계구조 타파를 절대화하고 모순들을 맹목적으로 평준화하는 논리에 빠져서도 안 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혁명과 민족해방운동의 결합을 중요시하는 레닌의 경우에도 운동의 무게중심은 엄연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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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논의가 지닌 현실성을 감안할 때, 또 자본의 무한증식 원리가 인류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한, 눈앞에 닥쳐온 대량해고의 고통이나 늘어나는 전쟁위기 혹은 가시적 환경재앙들만 아니라, 외형상의 평화와 번영과 질서 속에서도 인류 공멸의 가능성을 감지하고, 그 근본 대안을 찾는 것은 변혁적 노동운동만의 과제로 그칠 수 없다. 운동의 전개 양상에 따라 그것은 이성적 존재 모두의 최대 관심사로 발전할 수 있다. 인류는 자본권력을 절대자로 숭배하면서 극소수를 위한 천국과 절대다수를 위한 지옥을 만들거나 아예 공멸을 향해 폭주하는 것을 무기력하게 구경만 할 것인지, 아니면 자본의 무한증식본성을 범사회적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제어함으로써 모든 사회구성원이 생존권 위협을 받지 않으며 이제까지 인류가 이룩한 무궁무진한 생산력과 문화유산과 자연의 풍요를 함께 누릴 수 있는 사회, 또 누구도 사회구성원들 위에 군림할 수 없는 사회, 곧 풍요로운 평등사회를 건설하고자 노력할 것인지, 매순간 크고 작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후자를 선택할 경우 자본권력과의 전쟁은 불가피하다. 이 전쟁을 실질적⋅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데에는 국가권력의 성격을 바꾸는 일이 결정적으로 중요할 것이다. 국가권력이 자본권력의 대리자로서 혹은 실질적인 총자본으로서 자본증식의 원리에 따라 작동하는 한 자본권력과의 전쟁에서 노동자 민중이 부분적 일시적 양보를 얻는 이상으로 성공을 거둘 가망은 없다. 이 점에서 국가권력 문제를 우회하려는 논리에 우리의 운명을 맡길 수는 없다. 정면돌파가 필요하다. 오늘날 형식적 민주주의 속에서 국가권력에서 배제되어 있는 절대다수 노동자 민중이 실질적으로 주인인 진정한 민주국가, 즉 노동자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결정적인 당면과제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국가 건설의 주요 동력은 자본권력과 적대적 모순관계에 처해 있는 노동자 민중의 변혁운동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현실적인 필요성이나 불가피성이 현실 자체는 아니다. 노동운동이 변혁적 성격을 회복하고 노동자국가와 풍요로운 평등사회 건설의 주요 동력 역할을 발휘하려면 우선적으로 수행해야 할 선결과제들이 있다. 자본권력과 그 대리인들이 부추기는 지배이데올로기들, 배외주의만 아니라 탈-노동중심주의⋅계급화해주의⋅자본절대주의 등의 이데올로기들과 단호히 선을 긋고 노동에 대한 자본의 근본적인 적대적 모순관계를 총체적으로 명확히 의식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지난 총선에서 낯 뜨거운 모습을 보인 ‘진보’정치권처럼 방향을 잃고 친-자본 보수진영들 간의 권력투쟁 언저리에서 기웃거릴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정치세력의 주체로서, 자본독재를 넘어설 설득력 있는 정책대안들을 세부적으로 만들어내고, 이를 노동자 민중이 자신의 것으로 널리 공유해가는 만큼, 또 이 과정에 불가피한 자본권력과의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만큼 노동자국가와 풍요로운 평등사회의 건설은 필요성을 넘어 일상 업무가 될 것이다.
레닌은 자본주의의 모순이 저절로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승리와 사회주의의 실현으로 귀결되리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의 변증법적 실천이론은 객관적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과 주체의 의식적 투쟁을 결합한다. 그는 수시로 ‘주체로부터 독립해 있는 객관적 현실’이라는 표현을 구사해 주체와 객체의 변증법적 관계를 끊어놓는 듯하지만, 그러한 테제 자체가 변증법적 맥락 속에서 구사되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즉 그것은 주관적 관념론자들과 상대주의자들에 대한 정치적 공격이자, 객관적 현실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인식에 대한 책임을 떠안겠다는 주체적 자세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의 변혁이론과 실천에서 변혁주체들의 의식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는 제국주의 전쟁의 결과가 수백 수천만 민중을 ‘빠른 속도로 각성시키고 있다’고 판단한다. 또한 전후의 범세계적 혁명 위기는 “아무리 길고 험난한 도정들을 거칠지라도 결국 프롤레타리아혁명과 그 승리로 종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제국34)
루카치가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이야말로 계급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요인이라고 주장했을 때, 레닌은 이를 ‘극좌메시아주의’라고 칭하고 그 주관주의를 비판했다. 민중의 각성만으로 ‘프롤레타리아혁명과 그 승리’가 도래하리라고 보는 것은 레닌의 현실주의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혁명의 주체들이 겪어내야 할 ‘길고 험난한 도정들’은 결코 공문구가 아닌 것이다. 레닌은 합법과 비합법, 봉건유제와 민주주의,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의식적 전위조직 운동과 자발적 대중운동, 민족해방과 계급해방 등 혁명적 실천과 직접 관련되는 주요 문제들만 아니라 유물론과 관념론, 변증법과 형이상학 등 세계관 및 사유방식에 관한 문제들을 놓고도 치열하게 사상투쟁을 벌이고 동료들과 대중들을 설득하여 혁명적 실천으로 끌어들였다. 그것부터가 길고도 험난한 도정이었다. 현실사회주의 건설과정, 제국주의 세력과의 오랜 전쟁, 그리고 노동자국가와 풍요로운 평등사회 건설을 위해 전 세계 노동자 민중이 겪어왔고 또 앞으로도 감당해야 할 난관들은 그보다 훨씬 더 크고 까다로울 것이다. 그래도 그것은 지옥행 특급의 꼬리 칸에 무기력하게 앉아 있거나 한 칸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영혼을 파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삶의 의미를 만들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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