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동의 유래 장개남 <효자정려각>
효자동의 지명설화가 담긴 비각이다. 이 비각은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정읍 방면으로 100미터 지점에 서 있다. 주변이 공사현장이라 어지럽지만, 전통과 인륜의 무게만은 그대로 드러나 길손을 잡는다. 효자동이란 이름은 효자2동의 중심 마을인 이곳 효자리에서 유래한다. 효자리의 효자는 장개남이다. 효자로도 바로 이 장개남 설화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효행으로 널리 알려진 장개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인조 1627년에 세운 효자비에, 1888년에 추가로 효자정려를 위해 세운 비각이다.
방문일 : 2021.12.26.
위치 :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 국립전주박물관 옆
1. 효행설화와 효자동
전국적으로 지방마다 효자동이란 지명이 대부분 있다. 효자가 나왔던 동네라서 붙은 이름이다. 전주의 효자동은 꽤 넓어 1동에서 4동으로 나누어졌을 정도이다.
서울 종로구에도 있고 춘천에도 있다. 그중 춘천 효자동의 유래담은 널리 알려져. 있다. 위독한 아버지를 위해 산삼을 구해 돌아오다가 길을 잃은 반씨를 호랑이가 안내하여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게 되어 아버지를 살렸다는 반씨효자설화가 그것이다.
특별한 것은 효자동의 장개남은 여러 설화가 전하고, 전주에는 장개남 외에도 많은 효자와 설화가 있어 정려각이 여럿 남아 있다는 것이다. 향교옆의 박진효자비, 효자문이라는 갈비탕집 앞의 효자문도 모두 효자비각이다. 모두 10여기의 효자비가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주에서는 이런 특성을 살려 효문화거리를 조성하자는 움직임도 있고, 아예 전주 외에도 전북에 이런 전통과 유적이 많으니 아예 전북 단위에서 효문화지원센터를 설립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전북노인복지효문화연구원은 2020년에 <효문화보감>을 발간하기도 했다.
효의 도시로 알려진 대표적인 도시는 수원이다.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인 융릉을 화성으로 이전하고, 수원에 줄곧 행차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지은 용문사와 화성행궁은 효의 상징이기도 하다.
수원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침강 효문화라면 전주의 효문화는 조선조의 민간 효문화로 수평문화이다. 수원이나 화성의 효행도시 이미지보다 친숙하게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항상 효행설화를 접하면서 부모는 자식에게 왜 그렇게 어려운 것을 요구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효행이 기본 윤리인 사회에서 겨울에 수박을, 야생조류인 기러기고기를 요구하는 부모는 온당한가. 자식이 목숨을 바쳐 구하다 목숨을 잃으면 그것은 효행인가 불효인가. 불가능한 요구를 하다 자식이 불행하게 되면 부모는 행복할까. 그런 요구를 한 부모의 행위는 선행인가. 단지 이야기 장치라면 자식 효자만들기를 위해 부모 악인만들기는 적절한가.
사실 이미 심청가에서 제기한 효와 불효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당수에 빠져 죽으려 한 심청의 효성은 과연 진정한 효성인가. 심청이 죽어 없어져 딸의 목숨과 바꿔 광명을 찾았다면 심봉사는 진정으로 행복할까. 그렇게 심봉사를 즐겁게 만드는 뺑덕어미의 우스꽝스러운 짓은 과연 악행인가. 그 악행이 사실은 미련한 효성을 비웃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국문학 연구에서 이미 오래 전에 제기된 문제이다.
전주의 효행을 기리자는 움직임은 어떤 가치를 지향할 것인지, 그것이 미래지향적인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2. 전주 효자동 유래담, 효자 장개남설화
장개남(張凱男)은 인조 때 사람으로 현재 국립전주박물관 부근에 살았다. 어려운 가운데도 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모신 효자로 알려져 있다. 장개남의 효행설화는 3~4가지 정도가 전해 온다. 기러기고기를 먹고자하는 부친을 위해 하늘에 빌었더니 기러기가 떨어졌다는 기러기배미설화, 한겨울에 동네 뒷 산에서 부친이 원하는 수박을 구한 수박골 설화, 그리고 머슴살이를 해서 얻은 밥을 어머니께 드리기 위해 세내(삼천)을 건너려다 소나기에 물이 불었으나 무사히 건넜다는 설화 등이다.
기러기를 먹고자 한 사람은 부친이 아닌 모친이라고도 한다. 물이 분 삼천은 장개남이 건너려 하자 갈라졌다고도 하도, 그때 안고 간 것은 밥이 아니라 부친께 달여 드리려는 약이었다고도 한다. 무사히 물을 건넌 것도 물이 갈라져서가 아니라 누군가 앞서 건너는데 물이 무릎 정도밖에 안 차서 안심하고 건넜는데, 건너고 보니 그 사람은 사라졌다고도 한다.
구체적 각편은 다르지만 모두 하늘이 낸 효자임을 말하고 있는 것은 같다. 효행을 위해 불가능한 행위를 한 것이 그 증표이다.
3. 박진 효자비
박진효자비는 교동의 향교 옆에 있다. 효자 박진 이야기를 담은 비석이다. 누각 안에는 '효자군수박진지려'비가 있다.
죽정공 박진(朴晉)이 영암군수로 있었던 태조 3년 부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 교동으로 돌아왔으나 때마침 8월 장마로 남천이 범람하여 건너지 못할 형편인데 급한 마음에 말을 타고 물결 속에 뛰어 들었더니 물 줄기 한복판이 딱 갈라져서 무사히 내를 건넜다고 한다.
엄동설한이 되어 부친의 병환이 차도가 없었다. 부친에게 소원을 물었더니 꽃순이 먹고 싶다 하므로 목욕재계하고 산에 올라가 하늘에 축원한 뒤 눈을 뜨니 눈속에 꽃이 만발해 있었다. 그 꽃순을 따다가 달여 드렸다. 다시 잉어를 원하는 부친을 위하여 방죽을 덮은 얼음장을 깨뜨렸더니 커다란 잉어 한 마리가 뛰어 올랐다고 한다. 또 수박을 원하는 부친을 위하여 눈에 덮인 산골짜기를 헤매었더니 탐스럽게 익은 수박이 달린 수박덩굴을 발견했다고 한다.
꽃을 구하려 해매었던 산을 박과산(朴菓山), 얼음 속에서 잉어가 뛰어 나온 방죽을 잉어쏘, 수박을 얻은 골짜기를 수박동이라고 한다. 마침내 돌아가신 후에는 3년 동안 곡하고 시묘살이를 했는데, 절을 드렸던 곳이 한 자 이상 패였다. (<전북문화 찾아가기> 참조)
4. 수원백씨 효자정려
백규방,백진석 부자와 백행량,백응만 부자의 4대 효성을 기리는 비각이다. 고사동 1가 음식점 '효자문' 앞에 있다. ((완산구 고사동 1가 420-2번지) 식당 이름은 바로 이 비각에서 온 것이다.
백규방은 병으로 신음하는 아버지 백치영(白致永)을 극진하게 간호하여 천수를 누리게 하여 ‘가선대부 호조참판’(嘉義大夫 戶曹參判)을 제수받았다. 그의 아들 백진석은 중병이 든 부친에게 한겨울에 얼음을 깨어 잉어를 잡아다 드리고, 사후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여 종2품 가의대부(嘉義大夫) 중추부사(中樞府事) 내부협변(內部協辨)의 벼슬을 제수 받았다. 백행량, 백응만 부자 역시 지극한 효심으로 부모가 돌아가시자 시묘살이를 하였다.
‘수원백씨 효자비’ 안내문엔 백규방(白奎邦) 효자 정려각은 1872년, 백진석(白晋錫) 효자 정려각은 1908년, 백행량(白行良), 백응만(白應晩) 효자 정려각은 1871년과 1905년에 각각 건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원백씨가 살고 있는 학인당은 한옥마을의 중요 문화유적이다. 다음은 한옥마을의 학인당 소개글이다.
학인당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8호-1976.04.02.]
학인당(본채)은 조선조 성리학자 조광조의 제자인 백낙중선생이 1905년부터 2년 8개월 간 백미 8,000가마의 공사비와 4,280명의 인원을 투입하여 1908년에 완공한 조선말 전통 건축 기술을 잘 보여주는 건물로, 미스터션샤인(2018년) 촬영지로 더욱 유명해졌다. 인재 백낙중선생의 5대 종손 부부가 전통문화체험시설로 직접 운영하며, 우리전통문화를 계승 보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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