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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장 박정희 대통령의 눈물
1. 서독 방문길
1964년 12월6일 일요일 낮 12시 30분쯤, 청와대 본관에서 박대통령 부부를 태우고 나온 승용차는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뒤편에 멎었다. 예총회관 낙성식이 준비돼 있었다. 박대통령은 준공 테이프를 끊고 참석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준 뒤 다시 차에 올랐다. 차가 세종로로 나오면서 차량 행렬은 달라졌다.
기동경찰대의 모터 사이클이 여덟 팔자 대형으로 선도하고 대통령 부부가 탄 차량의 좌우로는 경찰의 지붕없는 지프차가 호위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차량 뒤로는 검은 색 세단들이 꼬리를 물었다. 시청앞-덕수궁 모퉁이를 돌아 김포공항에 이르는 주요 도로는 태극기와 독일의 삼색기로 단장되고 공무원과 학생들이 시민들과 어우러져 태극기를 흔들며 박대통령 일행을 배웅했다.
출발 30분 전인 오후 1시10분, 김포공항에 도착한 박대통령은 군악대의 주악이 울려퍼지며 21발의 예포가 터지는 가운데 정일권 국무총리의 안내로 삼군의장대를 사열했다. 박대통령은 각 방송사의 마이크들이 숲을 이루고 서 있는 환송대로 올라갔다. 단상 좌우에는 옥색 치마와 두루마기 위로 은색 밍크 목도리를 두른 육영수와 정일권 국무총리가 섰다.
박대통령의 뒤로는 독일 루프트한자 항공사의 보잉 707기가 대기중이었다. 이 비행기는 루프트한자 항공사의 본-도쿄 상용노선에 취항중인 여객기였다. 서독 정부가 1등석과 2등석 절반을 비우게 하고 중간에 커튼을 친 다음 한국의 대통령 탑승기로 제공한 것이었다. 2등석 후미에는 동경에서 탑승한 승객들이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창밖에서 진행중인 행사를 지켜보았다. 박정희는 카랑카랑한 육성으로 인삿말을 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나는 오늘 우리와 가장 친밀한 우방의 하나인 독일 연방공화국 뤼브케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독일 방문의 여정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박정희는 다음 대목에서는 특히 힘을 주어 말했다.
"나는 종전후의 그 폐허 위에서, 더구나 공산주의 세력과 대치하면서, 오늘의 위대한 경제 건설과 번영을 이룩한 독일연방공화국의 부흥상을 샅샅이 시찰할 것이며, 아울러 경제적 자립을 위해 분발하는 패기에 찬 한국민의 결의도 소개함과 동시에 양국 공통의 관심사에 관해 상호 이해를 증진시켜 …."
인사말을 마친 박대통령은 이효상 국회의장, 정일권 국무총리, 조진만 대법원장, 주한외교사절단을 대표한 로제 상바르 프랑스 대사의 인사를 받고 환송식을 마쳤다.
박대통령 부부는 공항에 나와 태극기를 흔들던 약 1천여명의 환송객들에게 손을 흔들며 비행기로 이어진 1백여m 길이의 붉은 양탄자길을 걸었다. 수행원 24명이 대통령의 뒤를 따라 비행기에 올랐다. 공식 수행원으로는 영부인 육영수를 비롯, 장기영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 이동원 외무부장관, 박충훈 상공부 장관, 김동환 국회 외무위원장, 김성진 공화당의원, 조윤형 민정당 의원,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 최 덕신 주독대사, 김종오 합참의장,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 정도순 외무부 의전실장, 조상호 청와대 의전비서관 등 13명이었다.
비공식 수행원으로는 백영훈 중앙대학교 교수(대통령 통역), 노석찬 공보부 차관, 박상길 청와대 대변인, 지홍창 대통령 주치의, 신동관 청와대 경호과장, 이복형·이천배 청와대 경호실 경호관, 나은실· 황경분 영부인 비서, 이정섭·박진석 공보부 사진기사 등 11명. 수행 기자단 10명도 2등석에 올랐다.
박대통령 일행을 태운 루프트한자기는 오후 1시40분에 김포공항을 이륙했다. 상용노선에 취항중이던 관계로 함께 탑승한 민간인 승객들의 중간 기착지를 모두 경유했다. 박정희는 홍콩-방콕(태국)-뉴델리 (인도)-카라치(파키스탄)-카이로(이집트)-로마(이탈리아)- 프랑크푸르 트를 거쳐 본 공항에 도착하는, 28시간이나 걸리는 긴 여행을 시작했다.
박정희는 외국을 방문하는 국가원수로서 외국 여객기에 일반승객과 합승해야 하는 처지에 대해 느끼는 비애가 남달랐을 것이다. 오후 1시40분. 김포공항을 이륙한 대통령 탑승기는 항로를 일본 쿠슈 남단 방향으로 잡고 비행했다. 한국 공군의 F-86 세이버기 1개 편대가 제주도 남단까지 호위했다. 이때 박대통령은 서비스로 제공되던 샴페인을 들었다. 자신 때문에 동경에서 홍콩으로 직항하지 못한 채 서울까지 들러야 했던 2등석 가림막 뒤의 일반 승객에게도 샴페인 한 잔씩을 돌렸다.
쿠슈 남단 상공에 도착한 특별기는 정기항공노선에 올라 1차 경유지인 홍콩으로 향했다. 일본 상공에서 기내식이 제공되었다. 박대통령은 육영수와 대화를 나누기도 했지만 주로 창 밖을 내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 당시 조선일보 정치부에서 수행기자단에 참가했던 이자헌(전 민자당 원내총무·현 한나라당 평택을 지구당 위원장)기자의 회고-.
"이등석에 앉았던 우리들은 가림막 뒤의 일반 승객들이 사용하던 화장실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화장실에 가 보니 이상하게 생긴 물건이 거울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한 번씩 화장실을 다녀온 기자들이 모여 이것이 무슨 용도로 쓰이는 것인지 논의를 했습니다. 그때 여기자로 유일하게 수행기자단에 포함됐던 한국일보의 정광모기자가 물비누라고 설명해 줘 모두 실소를 금치 못했지요. 그때는 기자들도 국제적 촌놈들이었고 대통령 일행도 참 초라한 행차를 하고 있었습니다. 박대통령의 표정이 밝지 못했습니다."
2. 기내 수업
1964년 12월6일, 박대통령 일행을 태운 서독 루프트한자기는 예정보다 10분 늦은 오후 4시25분(한국시간 오후5시25분) 홍콩의 카이탁 공항에 도착했다. 진필식 홍콩 영사 부부가 마중나와 대통령 부부를 탑승기 밖으로 안내했다. 백여 명의 교포들이 태극기를 들고 환영했다. 박대통령 부부는 홍콩 총독 데이빗 트렌치 경의 환영인사를 받고 공항 귀빈실로 직행했다. 얼마 전까지 주한독일대사로 박대통령의 방독준비를 도왔던 칼 뷩거 대사가 홍콩주재 총영사로 전임해와 박대통령을 마중 나왔다.
오후5시5분(한국시간 오후6시5분) 홍콩을 떠날 때 박대통령은 기분이 비로소 좋아지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홍콩을 이륙하자 김성진 공화당의원을 옆자리로 불러 환담했다. 루프트한자기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상공을 통과했다. 창밖으로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방콕 도무앙 공항에 도착한 때는 예정보다 17분 늦은 오후 6시52분(한국시간 오후8시52분). 장성환 대사와 태국 의전장이 기상까지 올라와 대통령을 영접했다. 트랩을 내려선 박대통령을 살비타른 태국 국왕 대리와 타놈 태국 수상 등 10여명의 고관· 장성 및 50여명의 교포들이 환영해주었다.
박정희는 전날이 태국 국왕의 생일이었음을 축하하자 타놈 수상은 생일 케이크를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박정희는 환영나온 교포 자녀들을 일일이 어루만져 준 뒤 귀빈실로 향했다.
길고 밋밋한 '초크' 의자에 타놈 수상과 나란히 앉은 박정희 대통령은 타놈 수상이 권하는 음료수를 마시고 담배를 꺼내 타놈 수상에게 권했다. 박대통령은 시종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으며 담배를 피웠다. 무척 즐거운 표정으로 타놈 수상과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오후 7시 38분, 방콕을 떠난 특별기는 뉴델리로 향했다. 박정희는 가는 곳마다 자신에 대해 국가원수로서의 예우를 해 주는 데 무척 기분이 좋았다. 방콕을 이륙한 직후 박정희는 샴페인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내를 돌아다니며 일행들과 잡담을 나누다가 맨 뒤에서 셋째 줄에 앉아 있던 대통령 통역관 백영훈 교수의 옆자리에 앉았다.
백교수가 "정치하시니 힘드시죠"라고 하자 박정희는 "정치라는 건…"하며 말문을 열더니 의자에 접혀진 테이블을 펼쳤다. 박정희는 성냥을 꺼내더니 그 중 하나를 집어들며 "정치라는 것은, 파워 (Power)하고…" 성냥개비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이어서 또다른 성냥개피 하나를 들더니 "마니(Money)!"라고 하면서 먼저 놓았던 성냥개비 옆에 나란히 놓았다.
"정치란 이 두 개가 평행하게 가도록 하는 기술입니다. 국가라는 기차가 달리는 레루(레일의 일본식 발음)지요. 레루의 한쪽은 권력이고 다른 한쪽은 재벌입니다. 한 나라의 경제가 발전하고 안보가 튼튼해지려면 재벌과 권력이 평행선을 그려야 합니다. 힘이 너무 커서도 안되고, 재벌이 너무 커서도 안됩니다. 균형을 잃으면 스파크가 납니다. 정치는 돈과 힘(권력)의 균형을 만드는 작업이지요."
이어서 박정희는 자신이 혁명 초기에 재벌총수들을 잡아들였다가 풀어준 이야기를 했다. 박정희는 백영훈 교수에게 재벌에 대한 욕을 한참 늘어 놓더니 "그렇지만 나라가 크려면 이 사람들을 잘 이용해야 합니다"라며 이야기를 맺었다.
이어서 박정희는 백교수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독일 경제 이야기를 좀 해주시오. 거, 독일 경제가 성공한 것을 두고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데 그 원동력이 뭡니까." "지금 수상이신 에르하르트의 경제전략이 맞아 떨어진 겁니다."
서독 부흥기에 서독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백영훈 교수는 상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조그만 수첩을 꺼내더니 메모를 해 갔다. 질문은 서너 차례 계속됐다.
"사회적 시장경제가 뭡니까." "서독의 기간산업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기내에서 백영훈교수로부터 경제학 공부를 하던 박정희대통령은 백교수에게 "앞으로 제 경제고문이 좀 되어 주십시오"라고 했다. 박정희는 서독 방문 후 경부고속도로 추진과정에서 백영훈 교수를 대통령 경제고문으로 활용한다.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이동원(현 국민회의 국회의원)은 기자에게 이런 회고담을 들려주었다.
"서독 방문이 결정된 다음이었습니다. 유럽에서는 뭐니 뭐니해도 영국과 프랑스가 중심국입니다. 그래서 '각하, 기왕 유럽에 가시는 길인데 이번 기회에 영국과 프랑스도 한번 들러 구경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제가 한 번 주선해 볼까요'라고 권했지요. 그런데 이 양반은 '지금 우리나라가 급한데 관광할 시간이 어딨소. 일하기 위해 배우러 가는데…'라며 거절하시는 겁니다."
백교수와 이야기를 끝낸 박정희는 자리를 옮기지 않은 채 이후락 비서실장과 박상길 공보비서관을 불러 본 공항에 도착해서 가질 기자회견문에 대해 의논했다. 문구를 조정할 때엔 독일어에 능통한 백영훈 교수에게 "너무 강한 어감이 아닐까?"하며 묻기도 했다.
3. 통역관 백영훈 이야기
박정희는 혁명 직후 미국보다 서독으로부터 신세를 많이 졌다. 1961년 5·16 혁명 직후 미국은 군사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경제 원조를 압력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었고, 외화 부족에 직면했던 군사정부로서는 미국의 경제압력이 고통스러웠다. 군사정부는 1961년11월말 정래혁 상공부장관을 주축으로 한 '차관 교섭 사절단'을 구성해 전후 경제부흥에 성공했던 서독으로 보냈다.
신응균 서독 대사의 안내로 정래혁장관은 서독의 에르하르트 경제상(뒤에 서독 수상)등과 만나 교섭을 벌였다. 에르하르트 경제상은 분단과 전쟁으로 피폐해진 한국에 대해 깊은 공감을 갖게 되고 약 3천7백만 달러에 해당하는 마르크화 차관을 한국정부에 제공해주었다. 한국이 5·16이후 유치한 최초의 차관이었다.
이 차관을 얻게 된 배경에서 한 흥미있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정래혁 상공부 장관의 특별 보좌관이던 백영훈(69·대통령 경제 고문, 생산성본부연구소장, 9·10대 국회의원 역임, 현 한국산업개발연구원 원장)이등병. 그의 전직은 중앙대학교 경제학 교수였다.
백영훈은 고려대학교 상과대학에 재학중 6·25를 만났다. 한강 다리가 끊겨 서울시내를 배회하다 인민군에 끌려가 의용군이 된 백영훈은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미 공군의 B-29 폭격 와중에 탈출했다.
1950년 9·28 서울 수복으로 학교에 재입학했으나 영장이 나와 1930년생에게 처음 적용되었던 징병 제1기로 입대했다. 신병 교육을 마치고 백마고지에 투입돼 두 달간 전투를 벌이던 중 영어를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일부 사단장과 연대장이 비공식적으로 운용하던 노무단 관리장교가 되었다. 육군 중위라는 계급도 중대장이 현장에서 자의적으로 붙여 준 것이었다. 1년여 통역 임무를 수행하다 휴전 후 전역한 그는 어느날 병무청에서 자신의 군근무기록이 아예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병무기록이 없어 군 미필자가 된 그는 1954년 서독 유학시험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응시, 합격했다. 그는 1958년 서독 에르랑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아 대한민국 경제학 박사 제1호가 되었지만 귀국여비가 없어 손원일 당시 주독 대사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손대사는 이승만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함으로써 이대통령이 여비를 부쳐주어 귀국할 수 있었다. 그는 중앙대학교에서 경제학 교수로 1년 5개월 동안 강의하다가 1961년 5·16 을 만났다.
백영훈 교수는 혁명정부의 병역기피자 소탕작전에 걸려 1961년 7월1일자로 논산 훈련소에 입대했고, 신병훈련을 받던 중 '지프차가 와서 데려갔다'고 한다.
당시 상공부 장관이었던 정래혁의 회고에 따르면 "혁명정부는 경제에 밝은 보좌관을 물색중이었는데 함인영박사 등 많은 사람들이 백영훈씨를 추천하여 찾아 보니까 논산 훈련소에 있었다"는 것이다.
백영훈 훈련병은 영문도 모른 채 중앙정보부 김종필부장 앞으로 끌려가게 되었다고 한다.
"서울역 부근 건물로 가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만났습니다. '잘 도와주십시오'라고 하더군요. 잠시 후, 자신을 '국장'이라고 소개하는 중령 계급장을 단 몇 몇 사람들에게 넘겨졌습니다. 그들로부터 한 일주일간 혁명정부의 이념에 대해 세뇌교육을 받고 난 뒤 정래혁 상공부장관의 특별보좌관으로 군복무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백영훈 이등병은 1961년 11월 정래혁 장관이 이끄는 차관 교섭단에 포함되어 서독을 방문했다. 정장관이 서독 각료들과 만나는 동안 백영훈 보좌관은 자신의 은사들을 만나 한국에 차관을 지원하도록 협조해 달라고 부탁했다.
백영훈은 1963년 말 대통령 선거 직후 민정이양이 시작될 무렵 중앙대학교로 복직했다. 1964년 11월 초, 백교수는 청와대 의전비서실에서 나왔다는 지프차에 실려 청와대로 가게 되었다.
"대통령 집무실인 것 같았습니다. 박대통령과 이동원외무장관, 장기영부총리, 이후락비서실장이 앉아 환담중이더군요. 서독 방문 이야기였습니다. 제가 들어서자 박대통령이 일어나 나에게로 오시더니 제 손을 꼭 잡으면서 '통역관 좀 해 주시오'라고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통령 통역관이 된 백영훈이 맨 처음 한 일은 대통령 전용기 마련이었다. 국내에서는 독일까지 장거리 비행을 해 낼 기종이 없었다. 이동원 외무장관과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 백영훈은 주한 서독 대사를 통해 서독 정부로부터 비행기 한 대를 빌리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1964년 12월6일 밤 9시35분(한국시각 12월7일 새벽 1시15분), 대통령의 탑승기는 인도의 뉴델리 공항에 기착했다. 깊은 밤인데도 날씨는 후덥지근했다. 한기봉총영사 부부와 카울 인도 외무성 차관보의 영접을 받은 뒤 한 시간 후에 다음 기착지인 파키스탄의 카라치 공항으로 향했다. 기착지마다 출영나온 인사들을 만나야 하는 박정희는 잠을 길게 잘 수가 없었다. 뉴델리에서 카라치로 향하는 1시간 동안, 즉 데칸 고원 위로 비행하는 도중에 박정희는 잠깐 눈을 붙였다. 카라치에서의 한 시간은 지루하게 보냈다. 서로 국교가 없는 탓에 국빈을 위한 출영도 없었다. 시골 대합실 같은 곳에서 박정희는 무료하게 한 시간 동안 출발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이집트 카이로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0시 35분(한국시각 오전4시35분). 사람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시간에 이집트 탈라트 카이리 청년 장관과 모하메드 아델 모이라드 관방장관, 루프트한자 항공사 발터 지사장 및 강춘희 총영사가 영접을 나왔다.
친북외교노선을 추구하고 있던 낫세르 이집트 대통령은 청년장관을 통해 '박대통령의 장도를 축하하며 성공을 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약 50분간 체류하는 동안 박정희는 카이리 청년장관에게 1967년에 완공되는 이집트 애스원 댐에 대해 이것 저것 물었다. 한국의 전력생산 용량이 1백만 킬로와트도 안되었을 때 이집트의 애스원 댐은 1천2백만 킬로와트의 용량을 자랑하고 있었다.
4. 초라한 행차
1964년 12월7일 월요일 오전 6시35분 이탈리아 로마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북상하며 알프스 산맥 위로 날기 시작했다. 오전 7시경 박정희는 스튜어디스가 갖다 준 모닝 커피를 마시면서 아침 햇살을 받고 아름답게 전개되는 알프스 산맥을 내려다 보았다. 그는 아마도 구미 보통학교에 다닐 무렵 감동깊게 읽었던 나폴레옹 전기의 알프스 원정을 생각해냈을 것이다.
비행기가 서독 상공으로 진입하자 박대통령은 기자들을 포함한 전 수행원들에게 몸가짐에 조심하라고 다시 한번 주의를 주었다. 박대통령은 서울을 떠나기 전부터 수행원들에게 "서독에 가서는 분에 넘치는 쇼핑을 하지 말라"고 여러번 당부했었다.
박대통령을 태운 보잉 707기는 오전 8시19분 서독의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한·독 양국 국기가 크게 걸려 있었고 박대통령보다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페링 주한 서독 대사가 독일 연방공화국 의전장과 함께 출영했다. 박충훈 상공부 장관 일행도 12월4일 한·독 경제회담 참석차 먼저 와 있다가 이날 백 여명의 서독 교포들과 함께 공항에 나와 박대통령의 도착을 환영했다.
귀빈실로 안내된 박대통령 부부는 독일기자들에게 둘러 쌓였다. 라인 공항장은 육영수 여사에게 카네이션을 선물했다. 한국은행 프랑크푸르트 지점에 근무중인 홍세표(전 외환은행장·육영수의 언니 육인순의 장남)부부가 18개월된 딸 소일양을 데리고 나와 대통령 부부에게 인사를 했다. 육영수는 "너를 여기서 보게 되는구나"하며 끌어 안았고, 박대통령은 소일양의 자그마한 손을 잡고 흔들어 주었다.
특별기가 프랑크푸르트 공항을 떠난 것은 오전 8시30분. 라인강을 따라 25분간 비행한 뒤 도착한 곳이 본 공항이었다. 정기항로를 날으는 여객기를 얻어 탄 탓에 박대통령 일행은 서울을 떠난 지 28시간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검은 코트 차림에 중절모를 손에 든 박정희 대통령과 밍크 목도리를 두른 한복차림의 육영수는 독일연방 외무부 의전장의 안내를 받아 트랩을 내려갔다. 박대통령은 하인리히 뤼브케 대통령 내외와 그 뒤로 서 있던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수상, 오이겐 게르슈텐마이어 하원의장 등 3부요인과 인사했다.
마흔 일곱 살의 박정희 대통령과 일흔 살의 뤼브케 대통령은 나란히 의장대의 경례를 받았다. 애국가와 서독 국가가 울려 퍼졌다. 박정희는 뤼브케 대통령의 안내로 3군의장대를 사열했다. 의장대 사열이 끝나자 박대통령은 의장대장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사기왕성한 귀군대를 사열할 수 있게 된 것을 만족스럽게 여깁니다. 덕택으로 독일 착륙 제1보의 인상은 매우 좋았으며 무척 기쁩니다."
장신 거구의 의장대장도 흥분하여 "예, 각하. 저도 오늘 각하께서 처음으로 우리 부대를 인정해 주신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여기는 바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박정희-뤼브케 양국 대통령은 연단으로 올라갔다. 뤼브케 대통령의 환영사가 있었다.
"독일 국민은 충심으로 박대통령의 방독을 환영하며, 국토양단이라는 설움의 공동운명 속에 놓여 있는 한·독 양국은 우리의 공동목표와 공동희망의 완수를 더욱 굳게 약속합니다."
이어 박정희 대통령의 도착성명이 있었다.
"이번 방문을 계기로 귀국이 폐허 위에 이룩한 기적적 건설을 이 눈으로 보고 또한 배워서 양국간의 깊은 이해와 긴밀한 협력에 의해 공동의 목표인 국토통일을 최단시일에, 또한 동서가 때를 같이하여 성취할 것을 염원하며 서약하는 바입니다."
영접 행사가 끝나자 박대통령 부부는 뤼브케 대통령과 리무진에 동승하여 공항을 떠났다. 박충훈 상공부장관을 수행하여 본에 도착해 있던 상공부 공업제1국장 오원철(71·대통령 경제제2수석비서관 역임 ·뒤에 기아경제연구소 상임고문)도 박대통령의 행렬을 현장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오원철 국장은 박장관과 함께 아침식사만 제공되고 목욕을 하면 돈을 따로 지불해야 하는 하루 3달러 짜리 민박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오원철은 훗날 그의 책 '한국형 경제건설(기아경제연구소 펴냄)'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은 초라해 보였고 가엾어 보였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가는데 몇 대의 사이카가 선도하는 게 고작이었다. 길 옆에 스무개 쯤의 태극기가 축 처진 채 걸려 있었다. 숙소인 스위트 룸이라는게 고작 10평도 채 되지 않았다. 당시 임시 수도였던 본은 인구가 3만명 정도의 작은 도시로 정부청사라는게 언제 지은 지도 모르는 낡은 국민학교 건물이었다. 서독 사람 스스로 이렇게 검소하게 지내고 있으니, 한국의 대통령을 홀대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없었다.>
12월7일 오전 10시30분, 숙소인 쾨니히스호프 호텔에 도착하자 뤼브케 대통령이 박대통령을 안내하여 로비로 들어섰다. 박대통령 곁에서 통역을 하려고 바짝 따라 붙었던 백영훈 통역관(현 한국 산업개발연구원 원장)의 증언.
"부동자세로 선 경호원들만 보이는 로비에 왠 서양인이 의자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황당했지요. 그 순간 그는 신문을 천천히 접으며 박대통령을 바라보고 웃더군요. 유태인 거상 아이젠버그였습니다. 순진한 박대통령은 무척 반가워하면서 절 통해서 뤼브케 대통령에게 아이젠버그를 소개해주었습니다. '우리나라를 잘되게 하기 위해 백방으로 도움을 주고 계신 아이젠버그씨입니다'라고 말입니다.
뒤따라오던 박종규 경호실장은 경악하는 표정이었지요. '도대체 어떻게 해서 저 놈이 여기를…'하며 말을 잇지 못하더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이후락 비서실장을 통해 대통령의 숙소며 시찰지 등을 다 알아냈다고 합디다. 그 날 이후 박대통령의 서독 체류기간 내내 아이젠버그는 박대통령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5. 아우토반
1964년 12월7일 낮 박정희 대통령은 서독의 임시 수도 본의 관청가에 자리한 우리 대사관에서 최덕신대사 부부가 마련한 한식오찬에 참석했다. 오찬이 끝나자 박정희는 뤼브케 대통령에게 전달할 선물을 점검했다. 미리 서독에 파견되었던 박충훈 상공부장관으로부터 교섭경과를 보고받고 한·독 공동성명의 한국측 최종안을 검토했다.
오후 5시30분, 박대통령은 대사관에서 호텔로 돌아와 뤼브케 대통령 관저에서 열리는 비공식 소만찬회에 참석했다. 사적인 대화가 오가는 중에 박정희는 뤼브케 대통령의 방한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뤼브케 대통령은 즉석에서 수락했다.
박대통령이 가장 큰 관심을 보인 것은 독일의 자동차전용 고속도로 '아우토반(Autobahn)'이었다. 나치정권하에서 총연장 1만4000km를 목표로 건설하기 시작해 2차대전으로 건설이 중단될 때까지 3860km를 완성시켰던 아우토반은 박대통령이 방문할 무렵엔 '세계에서 자동차가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도로'로 유명했다.
뤼브케 대통령과 환담중에 다음날 일정이 거론되자 박대통령은 "쾰른시를 방문할 예정"이라 말했다. 그러자 뤼브케 대통령은 "쾰른에 가시려면 아우토반을 달리시겠군요. 본-쾰른간의 아우토반은 가장 먼저 개통되었던 구간으로서 우리의 자랑이지요. 아우토반은 독일 경제부흥의 상징이랍니다."
박대통령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박대통령이 도착 첫날 숙소로 돌아 온 시간은 밤10시가 약간 넘어서였다. 박정희 부부는 12월6일 김포공항을 떠난 후 처음으로 제대로 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다음날(1964년12월8일) 박대통령은 쾨니히스호프 호텔 대통령실 침대에서 피곤이 채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박정희는 육영수와 아침식사를 마친 뒤 오전 10시40분에 뤼브케 대통령 관저로 출발했다.
오전 11시. 뤼브케 대통령 관저에서 정상회담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장기영부총리, 박충훈상공부 장관, 김동환국회외무위원장, 이후락청와대 비서실장 등이 참석했고 독일측에서는 뤼브케 대통령과 슈뢰더 외무장관, 페링 주한 독일 대사, 최덕신 대사 등이 참석했다.
공식 행사가 끝날 무렵 박대통령은 뤼브케 대통령과 부인에게 대한민국 최고훈장인 무궁화대훈장을 수여했다. 순금으로 제작된 이 훈장은 '국가원수에게 수여되며 우방 국가원수에게도 수여될 수 있다'는 우리나라 상훈법에 따라 준비된 것으로 외국원수로서는 뤼브케 대통령이 처음으로 받게 되었다.
순금 훈장을 두른 뤼브케 대통령 부부는 '분더바아르! 분더바아르! (원더풀)'를 연발했다. 뤼브케 대통령도 박대통령 부부에게 독일 연방공화국 최고훈장인 특등십자대 공로훈장을 수여했다.
이번 방문에서 우리측은 약 40여개의 훈장을 서독 정부의 고관들에게 수여했지만 서독측은 그들의 헌법상 '외국 원수가 방문하여 수여하는 훈장의 3분의 1을 서독 정부가 수여할 수 있다'는 조항에 따라 우리측에게 10여개의 훈장을 수여했다.
양국의 훈장수여가 끝나자 박·뤼브케 대통령은 별실로 자리를 옮겨 상호 선물 교환을 했다. 박대통령은 이상범 화백의 풍경화로 제작된 열두 폭 병풍, 국산 비단 한 필, 족자 등을 선사했고 뤼브케 대통령은 망원경이 달린 사냥 엽총 한 정과 실탄 한 상자 및 어린이 선물용 카메라 2대와 장난감 기차 등을 선사했다.
이어서 본 시청을 방문 한 뒤 한국 대사관으로 와서 한식으로 점심을 든 박대통령 일행은 라인강 북쪽에 위치한 쾰른시로 향했다. 이날 박정희는 본-쾰른간의 고속도로를 시속 160km로 달렸다. 박대통령은 가는 길과 오는 길에 두 차례 고속도로상에서 차를 멈추게 한 다음 차에서 내려 2-3분간씩 노면과 중앙분리대·교차로 시설 등을 주의깊에 살폈다. 도로 앞뒤를 전망하느라 까치발로 서서 멀리까지 내다보기도 했다. 다시 차에 올라탄 박대통령은 안내를 맡은 뤼브케 대통령 의전실장에게 고속도로에 관해 소상하게 물었다.
"고속도로의 건설은 어떻게 합니까." "관리는 어떻게 합니까." "건설비는 얼마나 듭니까." "그 돈은 어떻게 마련한 겁니까."
박대통령의 질문은 본-쾰른간을 왕복하는 차중에서 계속됐다. 다행히 의전실장은 고속도로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고속도로망을 소개할 때는 서독의 지도를 펴 놓고 박대통령에게 설명했다. 박대통령은 열심히 수첩에 메모하고 있었다.
박대통령 일행은 오후 4시30분에 숙소로 돌아왔다가 7시로 예정된 뤼브케 대통령 주최 만찬까지 잠시 휴식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동안 박정희 대통령은 로비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장기영 부총리와 이후락 비서실장 등이 배석하고 있었다. 갑자기 박대통령이 "고속도로를 달려보니 기분들이 어떻습니까?"라더니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깊은 생각에 잠겨버렸다.
오후7시에 시작된 뤼브케 대통령 주최 만찬장에서 박대통령은 다음날 회담할 서독 수상 에르하르트와 정치를 떠나 격의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경제학 교수출신의 에르하르트는 숫사자를 연상시키는 풍모를 가졌지만 부드럽고 진지한 태도로 개발도상국의 경제적 과제들을 걱정해 주었다.
6. 에르하르트 수상
1964년 12월8일 오후7시, 뤼브케 대통령 주최 만찬장에서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서독 수상은 낮에 아우토반을 달려 본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다.
"경제 발전에는 도로·항만 등 기간 시설의 정비가 선행되어야 하겠지요. 비록 나치스가 한 일이긴 하나, 아우토반을 건설한 일을 나는 고맙게 생각합니다. 히틀러가 백년 앞을 내다 본 이 거대한 사업은 마땅히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나는 평소 아우토반에 진입할 때, 그리고 인터체인지 램프를 돌아나올 때 마음 속으로 아우토반에게 경례를 합니다. 지난 58년에 한국을 방문했습니다만, 도로사정이 썩 좋지 못한 걸로 압니다. 개발 도상국에서는 고속도로 건설이란 엄두도 못낼 사업이지만, 독일 국민은 한국민이 겪은 그런 시기에 산업동맥 건설을 성취한 자랑을 지니고 있습니다."
박대통령은 진지한 표정으로 경청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하르트 수상은 1948년부터 1963년까지 자신이 경제장관으로 재임했을 때 서독 경제가 부흥한 요인을 몇 가지로 요약했다.
"정부가 기본 공업 투자를 선행했습니다.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했습니다. 시장경제 체제를 빨리 복구시켰습니다. 중소기업 육성에 힘썼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에르하르트는 박대통령의 팔을 잡더니 이런 말도 했다.
"각하, 분단국으로서는 경제번영만이 공산주의를 이기는 길입니다."
박정희는 밤 9시에 만찬장을 나와 베토벤 할레(음악당)로 자리를 옮겨 환영음악회 및 리셉션에 참석해야 했다. 국빈에게는 반드시 교향곡을 연주해 들려 주어야 한다는 서독 정부의 관례에 따른 것이었다. 폴켈 반덴하임의 지휘로 모차르트의 교향곡 38번이 연주되었다.
밤 11시에 숙소로 돌아 온 박정희는 측근들에게 불만을 털어 놓았다.
"이렇게 힘들게 일정을 잡아 놓으니 사람이 살 수가 있나. 너무 빡빡하니까 아직까지 변도 안나온다."
동행했던 당시 조선일보 이자헌 기자는 "그때 박대통령은 빡빡한 일정 때문에 변비로 고생했다. 우리는 '독일인들이 비용을 아끼려고 이렇게 했다'면서 '지독한 사람들'이라고 불평했다"고 회고했다.
1964년 12월9일 오전 9시30분, 방독 3일째를 맞은 박대통령은 전날 밤 음악회가 열렸던 베토벤 할레(음악당)로 나갔다. 유학생·기술훈련생(광부)· 간호원 등 170여명의 교포들이 모인 가운데 박대통령은 15분간 즉석 연설을 했다.
담담하게 연설해 가던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을 소개하는 대목에 이르러 이렇게 말했다.
"본인은 군사혁명을 일으키고 스스로 제시한 공약을 실천함에 실패하였다는 비난이 있음을 잘 알고 있으나, 진정한 재건을 위해서는 국가이익 앞에 사리를 희생시키는 전국민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박대통령의 연설이 끝나자 재독한인회 회장이던 작곡가 윤이상(뒤에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은 "저는 박대통령 각하께서 해 오신 정치의 안정과 경제발전에 감격했고 남북통일문제에 있어서 박대통령 각하의 현명하신 생각에 감명된 바 있으며 이역에 있는 저희들을 격려해 주시는 간곡한 말씀에 감동되었습니다"라고 말한 뒤 서독 대통령으로서 2대 연임했던 데오도르 호이스 교수의 자서전을 선물로 전달했다.
박대통령은 유학온 남학생들에게 파고다 담배 5백갑을, 여학생들에게는 사진집 '여류한국' 60권을 주었다.
박대통령 일행은 독일연방공화국 하원을 방문, 몇 달 전 한국을 방문했던 게르슈텐마이어 하원의장과 네 명의 부의장에게 병풍과 자개 꽃병을 선물한 뒤 에르하르트 수상관저로 출발했다.
12시20분, 에르하르트 수상관저에 도착한 박대통령 일행은 서독측 각료들과 함께 회담에 임했다. 이날 한국측에선 장기영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이동원 외무부 장관, 박충훈 상공부장관,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 최덕신 서독 대사가 참석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백영훈 통역관을 대동하고 에르하르트 수상과 단독회담을 시작했다. 경제학 교수출신의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수상은 1948년 서독 경제장관이 된 후 경제부흥을 이룩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1963년 10월 이후 서독 수상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1958년 10월에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던 67세의 에르하르트 수상은 40분간 예정된 회담에 임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먼저 서두를 꺼냈다. "우리 한국도 서독과 마찬가지로 공산국가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공산국가들을 이기려면 경제가 번영해야 합니다. 내가 혁명을 한 이유는 정권을 탐해서가 아닙니다. 정치가 어지럽고 경제가 피폐해져 이대로는 한국이 소생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 때문입니다. 경제를 재건해서 공산국가들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뿐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돈이 없습니다."
에르하르트 수상은 시가를 피우면서 "야(Yah)! 야!"하며 듣고 있었다. 통역하던 백영훈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에르하르트 수상은 자신에게 하소연하고 있는 스무살 아래의 박대통령을 연민어린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박정희의 '하소연'은 계속됐다.
"사실 우리가 서독을 방문한 목적은 라인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서독의 경제 발전상을 배우기 위한 것도 있지만, 돈을 빌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군인들은 거짓말을 못합니다. 돈을 빌려 주시면 그것으로 국가 재건을 위해 쓰겠습니다."
7. 충고
에르하르트 수상과의 단독회담을 시작하면서 먼저 말문을 연 박정희대통령은 수상에게 기회를 주지 않은 채 같은 내용을 다른 표현으로 둘러가며 반복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100년전 우리 조상들이 강하지 못해 세계를 몰랐고 그래서 기회를 놓쳤습니다. 이제 독일에 와서 라인강의 기적을 배우고 우리도 독일처럼 부강한 나라가 되어 공산국가의 위협에서 자유로운 강국이 되고자 합니다. 제가 어릴 때는 일제시대였지요.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백영훈 통역관의 회고.
"박대통령은 대한민국이 얼마나 기구하게 살아왔는지를 두 번 세 번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5·16 군사혁명을 시작한 배경에서 일제시대 이야기로 갔다가 6·25때 경험담, 자유당 시절의 이야기에서 다시 일제시대로 두서없이 넘어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옆에서 통역하던 제가 민망스러울 정도로 반복되었지만 에르하르트 수상은 시가를 피우면서 끝까지 들어주었습니다. 박대통령의 과거사를 들으며 에르하르트 수상은 감동하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만, 반복되는 내용에 민망해진 저는 흐르는 땀을 훔치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박정희는 예정된 40분을 혼자서 소진해버리고도 모자랐다. 에르하르트 수상은 비서를 통해 회담 시간을 30분 연장하라고 지시했다. 박정희는 최종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다시 한번 서독정부의 경제지원을 부탁했다. 에르하르트 수상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각하, 일본하고 손을 잡으시지요."
박정희는 이 말을 통역해 준 백영훈 교수에게 화를 냈다.
"뭐? 돈 좀 꿔달라는데 일본 얘기는 왜 꺼내?"
에르하르트 수상은 박정희의 표정을 통해 감을 잡은 듯 백교수의 통역이 시작되기도 전에 다시 말문을 열었다.
"각하, 우리 독일과 프랑스는 역사상 마흔두 번이나 전쟁을 했소. 그런데 아데나워 수상이 드골과 만나 악수를 하면서 이웃나라끼리 손을 잡았소. 한국도 일본과 손을 잡으시지요."
박정희 대통령도 지지 않았다. 두 손바닥을 마주치면서 "독일과 프랑스는 서로 대등한 입장에서 싸웠지요"라더니 이번에는 오른 손바닥을 왼 손등 위로 내리치며 "우리는 항상 눌려 지냈습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일본과 대등한 입장에서 싸워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몰래 힘을 키운 일본이 침략했을 뿐입니다. 그래놓고도 지금까지 사과도 한번 하지 않습니다. 이런 나라와 어떻게 손을 잡으란 말입니까."
"그래요? 일본이 사과는 해야지요. 독일은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지만 전쟁에서는 독일이 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웃음). 나의 전임자인 아데나워 수상은 참 훌륭하신 분이었습니다. 독일과 프랑스가 그렇게 사이가 나빴는데 그 분은 드골 프랑스 대통령을 만나 악수를 하고 손을 잡았습니다. 각하, 지도자는 과거나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보고 가야 합니다. 두 나라 사이에 협력관계를 만들어야 공산국가로부터의 위협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일본과 손을 잡으십시오."
박정희는 다시 오른 손바닥을 왼 손등 위로 포개면서 "이렇게 눌려 싸웠는데도 말이오?"라고 되물었다. 에르하르트 수상은 인자한 표정으로 박정희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예, 각하. 눌려 싸운 것이나 대등하게 싸운 것이나 모두가 과거의 일입니다. 일본과 손을 잡고 경제 발전 하세요. 우리가 뒤에서 돕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합심해서 살아갑시다. 우리가 돕겠습니다."
박대통령은 에르하르트 수상의 말에 감격한 표정으로 수상의 손을 마주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담이 시작된 지 한 시간 10분이 지나 있었다. 에르하르트 수상은 회담 후 담보가 필요없는 재정차관 2억5000만 마르크 (약 4770만 달러)를 한국 정부에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1964년 12월9일 오후, 에르하르트 수상과 성공적인 정상회담을 마친 박정희는 서독 방문 후 처음으로 홀가분한 기분이 되어 에르하르트 수상이 주최하는 오찬회에 참석했다.
박정희는 오찬식이 끝나자 에르하르트 수상에게 준비해 간 선물을 증정한 뒤 오후 4시 경 숙소로 돌아왔다. 그 사이에 장기영부총리가 에르하르트 수상과 단독회담을 통해 한·독 경제협력과 관련한 구체적인 내용들을 검토하고 서독 정부측의 확답을 받아냈다. 양측은 1965년부터 1967년까지의 한·독 경제협력 3개년 계획에 합의하고 서독측은 한국 면직물 수입쿼터를 100만 마르크에서 200만 마르크로 증대시켰다.
이날 오후 에르하르트 수상은 약식 기자회견을 가지면서 "서독은 한국에 대해 특별한 원조를 할 용의가 있다"고 발표했다.
이날 밤 8시엔 박정희 대통령이 주최하는 만찬이 열렸다. 뤼브케 대통령 부부와 에르하르트 수상 부부 등 서독 정부의 요인들과 기업인 등 150여명이 초청되었다. 만찬장에서는 실내악단이 재독 작곡가 윤이상의 작품 '로랑'을 은은하게 연주하고 있었다.
에르하르트 수상은 명랑한 표정으로 만찬장 분위기를 주도해갔다. 그는 샴페인 글라스를 들고 좌중을 향해 "제가 수상이 되기 전 경제장관으로 있으면서 한국의 경제고문으로 갈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경제부흥에 참여해 보고 싶었지요"라고 말해 갈채를 받기도 했다. 그는 또 "앞으로 한국 경제재건 문제에 있어서 한국 정부가 저의 개인적인 지식과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요청에 응할 것입니다"고 했다. 에르하르트는 슈베르트의 '보리수'를 부르자고 제의하여 한·독 합창이 흘러나왔다.
8. 대통령의 눈물
1964년 12월10일 아침, 본에서 중요 일정을 모두 마친 박정희 대통령 일행은 뤼브케 대통령의 안내로 우리 광부들이 일하는 루르 지방으로 출발했다. 경찰기동대 사이카들이 선도하는 차량행렬은 라인강을 따라 아우토반을 달렸다.
오전 10시 40분, 박대통령이 탄 차가 루르지방의 함보른 탄광회사 강당에 도착했다. 인근 탄광에서 근무하는 광부 300여명, 뒤스부르크와 에센 간호학교에서 근무하는 간호원 50여명이 태극기를 들고 환영했다. 검은 탄가루에 찌들린 광부들이지만 모두 양복 차림이었고 격무에 시달린 간호원들도 색동 저고리를 곱게 차려입고 박대통령 일행에게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박대통령과 육영수는 서독 실정을 잘 알던 통역관 백영훈교수로부터 서독에 파견된 우리 광부와 간호원들이 초과근무를 자청, 몸이 부서져라 일해서 고향에 송금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차중에서 이미 들었던 터였다.
박대통령과 육영수는 이들에게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벌써 육영수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간호원중에도 조국의 대통령 부부를 보아서인지 더러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박대통령 일행이 강당으로 들어가 대형 태극기가 걸린 단상에 오르자 광부들로 구성된 브라스 밴드가 애국가를 연주했다. 박대통령이 선창하면서 합창이 시작됐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한 소절 한 소절 불러감에 따라 애국가를 부르는 소리가 더 커져갔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이 대목부터 합창소리가 목멘 소리로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광부와 간호원들에게는 떠나온 고향과 조국산천이 눈앞에 스치고 지나갔을 것이다.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젊은이들이 타국에 와 고생하는 현장을 본 박정희의 음성도 변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마침내 마지막 소절인 "대한사람 대한으로…"에서는 더 이상 가사가 들리지 않았다. 모두가 눈물을 쏟아냈다. 밴드의 애국가 연주가 끝나자 박정희 대통령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코를 풀더니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만리타향에서 이렇게 상봉하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남의 나라 땅 밑에서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서독 정부의 초청으로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이곳에 와 일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한국사람들이 제일 잘하고 있다고 칭찬을 받고 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여기 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박대통령은 원고를 보지 않고 즉흥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광원 여러분, 간호원 여러분. 모국의 가족이나 고향 땅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로 생각되지만 개개인이 무엇 때문에 이 먼 이국에 찾아왔던가를 명심하여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합시다.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박대통령의 연설은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울음 소리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감정의 전이로 말미암아 박대통령 자신도 울고 말았다. 육영수도, 수행원도, 심지어 단상옆에 서 있던 뤼브케 서독 대통령까지도 울었다.
결국 연설은 어느 대목에선가 완전히 중단되었고 강당안은 눈물바다가 되어 버렸다. 박대통령은 참석한 광부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파고다 담배 500갑을 전달한 뒤 강당 밖으로 나왔다. 30분 예정으로 들렀던 광산회사에서 박대통령 일행이 강당 밖으로 나오는 데는 거의 한 시간이 걸렸다.
함보른 광산 회사측에서는 박대통령에게 한국인 광부가 지하 3000m에서 캐낸 석탄으로 만든 재떨이를 기념으로 선물했다. 박대통령과 육영수는 울어서 눈이 부어 시선을 바로 두지 못했다.
광부 기숙사를 둘러보고 차로 향하자 어느새 수백 명의 우리 광부들이 운집해 있었다. 몇 몇은 작업복 차림에 갓 막장에서 나와 검은 탄가루를 뒤집어 쓴 채였다. 박대통령 가까이 있던 광부들이 검은 손을 내밀었다.
"각하, 손 한번 쥐게 해 주세요." "우리를 두고 어떻게 그냥 떠나시렵니까?"
경호원들이 몰려드는 광부들을 제치고 박대통령 일행이 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었다. 대통령이 손을 흔들며 차에 오르자 광부들은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만세! 만세! 대한민국 만세! 대통령 각하, 안녕히 가십시오!"
박대통령의 차량은 뒤스부르크의 데마크 철강회사를 향해 아우토반에 올랐다. 박대통령은 차중에서 눈물을 멈추려 애쓰고 있었다. 나란히 앉은 뤼브케 대통령이 그 모습을 바라보더니 자기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칠순 노인인 뤼브케 대통령이 사십대 후반의 젊은 대통령의 눈물을 직접 닦아주었다. 그리고 우정어린 격려를 했다.
"울지 마십시오. 잘사는 나라를 만드십시오. 우리가 돕겠습니다. 분단된 두 나라가 합심해서 경제부흥을 이룩합시다. 공산주의를 이기는 길은 경제 건설뿐입니다."
함께 탔던 백영훈 통역관도 울먹이며 겨우 통역을 마친 뒤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야 했다고 한다.
9. 베를린 장벽 소감
1964년 12월10일 낮, 함보른 광산회사를 떠난 박정희 대통령 일행은 데마크 제철회사를 방문한 뒤 석탄·제철 공업의 중심지인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의 주지사 마이어스 부부가 주최한 오찬에 참석했다.
박대통령은 이날 오후 4시15분 뒤셀도르프 근처의 로오하우젠 비행장에서 팬아메리칸 항공사 소속의 베를린행 여객기를 타고 약 한 시간 반 뒤 북 독일 평원지대에 자리한 서 베를린시 템펠호프 공항에 도착했다.
서베를린은 2차대전 후 소련이 점령한 동독(독일민주공화국)에 둘러싸여 지리적으로 서독(독일연방공화국)과 격리되었다. 동독 주민들은 낮에는 서베를린 지역으로 건너와 일을 하고 저녁이면 동독지역으로 돌아가곤 했다. 빌리 브란트(뒤에 독일 수상 역임)가 서베를린 시장으로 재임중이던 1961년 무렵 동독 당국은 주민들이 서베를린을 통해 탈출하는 일이 잦아 인구 공동현상이 심화됐다. 체제 붕괴의 위험을 느낀 동독 당국은 1961년 8월20일 일방적으로 총연장 50km의 콘크리트 장벽을 세웠다(이 장벽은 1989년 11월9일 밤에 무너졌다). 이때 빌리 브란트 시장이 "내가 저 장벽을 꼭 허물고야 말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공항에서 박대통령은 브란트 시장의 "베를린의 문제점과 업적을 보일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는 환영사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나는 오늘 정신적으로 자유 베를린의 한 시민이 된 기분으로 이곳을 찾아 왔을 뿐입니다. 나는 조금 전에 동독 상공을 지나면서 바다와 같이 캄캄한 동독을 내려다보고 북한에 있는 우리 동포들의 처지를 생각했습니다. 오늘의 베를린은 여러분만의 도시나 또 독일만의 베를린도 아닐 것이며, 온세계 자유애호국민들의 정신적인 도시입니다. 기아와 공포의 공산주의 광야속에서 자유와 부흥의 불꽃이 활활 타고 있는 베를린의 존재는 오늘날 자유승리의 상징이며 공산주의 미신을 깨우치는 복음의 불꽃이 퍼지고 있는 것입니다. 베를린과 판문점의 비극이 끝날 날이 가까워졌습니다. 우리는 비극의 종결만이 인류의 평화와 번영을 영구화할 수 있는 것이며, 끝까지 뭉쳐 전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공항의식이 끝난 뒤 캠핀스키 호텔에서 잠시 휴식을 하고 베를린 시청을 방문했다. 빌리 브란트 시장은 "용감한 국민의 용감한 대통령을 맞아 기쁘다"는 요지의 인사를 했다.
박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그때 국기없는 승리를 했다"고 말했다. 박대통령은 빌리 브란트 시장과의 만찬을 끝으로 베를린에서의 첫 날을 마감했다.
다음날인 12월11일 쌀쌀한 겨울 아침이 시작된 베를린에서 박대통령은 독일 기업인들과의 조찬을 가진 뒤 베를린 장벽을 시찰했다. 박정희는 롤프 슈베들러 베를린시 주택건설부 장관의 안내로 포츠담 광장에서 목제 전망대에 올랐다. 장벽 너머의 동베를린 소련 점령지구는 총을 멘 경비병만 간간이 보일 뿐 2차대전 당시 전화를 입은 흔적이 그대로 남은 건물들만 덩그렇게 서 있었다. 민간인들의 왕래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박대통령은 적막에 쌓인 동독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곁에서 지켜본 통역관 백영훈 교수는 '방독기간중 박대통령의 표정이 가장 심각한 순간'이었다고 기억한다. 박대통령은 동독 지역을 한참 지켜본 뒤 돌아서서 수행기자들에게 소감을 말했다.
"나는 오늘 북한을 보았습니다. 한국에서는 결코 북한을 볼 수 없으나 오늘 동베를린을 통하여 북한을 보았습니다. 이곳은 자유 베를린시가 평화와 자유를 위해 얼마나 수고했던가를 역력히 나타내 주는 곳입니다. 자유 베를린의 이런 노력은 공산주의라는 미신을 타파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그 공은 영원히 빛날 것이며, 승공의 상징이 될 것입니다."
박대통령은, 1962년 8월 서베를린으로 장벽을 넘어오다 동독 인민경찰의 총을 맞고 장벽 아래에서 3시간여 동안 신음하다 숨진 동베를린 건축공 페터 페히터군의 묘 앞에서 헌화했다.
오전 11시. 박대통령은 '자유 베를린 공과대학'을 방문했다. 파울 힐리비 총장은 1천여 명의 학생들이 기다리고 있는 전기 공학부 강의실로 박대통령을 안내했다. 박대통령이 단상에 오를 때 서독 학생들은 박대통령을 환영한다는 표시로 책상을 쾅 쾅 두드리며 우-하는 소리를 질렀다. 순간 박대통령의 표정이 굳어졌다. 국내에서 학생데모로 계엄령까지 펴야 했던 박대통령은 베를린 공대 학생들의 환영의 표시를 저항의 표시로 오해했다. 파울 힐리비 총장의 소개가 있자 서독 대학생들이 다시 한번 책상을 쾅 쾅 치며 환호했다. 야유를 받는다고 생각한 박정희는 불쾌한 표정으로 연설문을 읽기 시작했다.
"… 이와같은 기회를 마련해 주신 학교 당국에 대해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연설 도중 첫 대목이 끝나자 다시 학생들로부터 우레와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책상을 치며 고함지르는 독일 학생들과 눈이 마주친 박정희는 그만 맥이 풀렸다. 박정희는 연설문의 다음 문장을 찾지 못한 채 즉흥 연설을 시작했다. 통역하던 백영훈 교수는 진땀을 흘렸다. 즉흥연설 중 박정희는 독일 학생들이 좋아할 이야기를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은 내가 평소에 기대하고 희원하던 이 나라의 과학문명의 본산입니다."
학생들이 다시한번 책상을 치며 발을 굴렀다. 이 모습을 찬찬히 보던 박대통령은 그제서야 학생들이 자신을 환영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박정희는 연설문 원고를 훑어보더니 중단된 부분을 찾아내 읽기 시작했다. 이날 박정희는 학생들의 환호에 십수번이나 연설을 중단하곤 했다. 연설이 끝난 뒤 단상을 내려오던 박대통령은 백영훈 교수의 팔을 툭 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백교수. 거, 얘기 좀 미리 해주지…"
박정희의 얼굴엔 함박웃음이 터질 듯했다.
10. 대사도 세일즈맨
1964년 12월11일 박대통령 일행은 베를린 공과대학을 방문한 뒤 지멘스 공장, A.E.G(Allemeine Elektrsche Gesellschaft) 전기공장, 독일개발협회를 방문-시찰했다. 이날 박대통령은 철강 산업의 실상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박대통령을 공장으로 안내한 지멘스의 브레마이어 소장은 "각하, 철강이 없으면 근대화가 불가능합니다"라고 말했다. 박정희는 브레마이어에게 "저건 짓는데 얼마나 듭니까" "저건 어떤 용도로 운영됩니까" 등등 상세하게 질문을 했다.
오후 5시경, 박정희는 독일 개발협회 시찰을 마치고 나오다 순간적으로 휘청거렸다. 박종규경호실장이 박대통령을 부축했다. 28시간의 불편한 비행, 그리고 방독 5일째까지 거의 휴식없는 강행군으로 누적된 피로 때문이었다. 숙소로 돌아온 박정희는 이날 밤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주치의 지홍창박사가 절대 안정을 요구했지만 박대통령은 장기영부총리와 박충훈장관을 방으로 불렀다. 박정희는 두 사람에게 "기간산업을 발전시키려면 제철공장 없이는 안되겠더구먼. 우리도 제철공장을 지어야겠소. 돌아가면 제철공장 건설계획을 세워 보고하시오"라고 지시했다.
12월12일, 박정희는 전날의 피로를 회복한 듯 밝은 모습으로 아침을 맞았다. 그는 방독 여정의 최종 기착지 뮌헨으로 가기 위해 베를린 공항으로 나갔다. 오전 10시20분발 예정의 전세기는 기상조건이 악화되어 3시간 뒤에 출발했다.
기내에서 점심을 든 박대통령은 오후 2시30분경 뮌헨 리임 공항에 도착했다. 바이에른 주지사 고펠 부부와 주정부요인들이 영접을 나왔다. 뮌헨의 교포와 유학생 백여명은 '박대통령 환영'이란 플래카드를 들고 나왔다. 그들 옆으로는 한국인 태권도 사범이 이끄는 독일인 제자들이 태극기를 그린 커다란 종이를 펼쳐들고 환영했다. 박대통령은 고펠 지사의 안내로 뮌헨의 비어야레스자이텐 호텔(Hotel Vierjahreszeiten)에 들렀다. 이날 오후 4시부터 호텔에서 유럽- 아프리카 공관장회의가 열렸다. 휴식할 틈도 없이 박대통령은 이 회의에 참석했다.
30대인 이동원외무장관이 주재한 이날 회의 참석 대사들 가운데는 박정희의 군선배들이 많았다. 1964년 여름, 이동원 외무장관이 임명된 직후 국내 언론들은 정부가 직업 외교관이 아닌 장성급 출신의 군인들을 대사로 임명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삼았다. 이장관도 "민간 외교관으로 교체해야 바람직하다"는 취지의 말을 했었다.
이 발언에 격분한 군수뇌 인사들이 이장관을 불러다 놓고 "혁명은 누가 했는데… 군인이 민간 외교관보다 못하다는 이유를 대라"고 다그치기도 했었다. 뮌헨에서 공관장 회의가 열리기 직전에 박대통령은 이동원 장관에게 "거, 좀 잘 될 수 없을까"라면서 걱정했다.
"각하, 양해만 해 주신다면 제가 오늘 몇 말씀 하겠습니다."
박정희가 이장관을 빤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좋소"라고 했다. 이날 공관장 회의에는 주영대사 이형근(육군참모총장 역임), 주불 백선엽 (육군참모총장 역임), 주이 이종찬(육군참모총장 역임), 주 스위스 이한빈, 주 스웨덴 유재흥(연참의장 역임), 주 제네바 정일영, 주 터키 최영희(육군참모총장 역임), 주 모로코 신현준(해병대 사령관 역임), 주 브라질- 콩고 최문경, 주 우간다 김영주, 주 케냐 영사 안광호, 주 카이로 영사 강춘희가 참석했다.
박대통령은 회의 벽두에 '경제외교'란 말을 사용하면서 대사들의 분발을 촉구했다.
"여러분은 외자 도입과 차관 획득과 해외시장을 개척하는 데 사력을 다해야 할 임무를 띠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처지는 외교관이라 하여 형식과 양식과 체면만을 따지고 있을 형편이 못 됩니다. 여러분은 외교관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장사꾼이 된 각오로 경제외교의 사명을 다해주시기 바랍니다."
박대통령은 또 북한의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진출을 저지하는 데 노력을 해 줄 것을 당부했다. 박정희는 유럽-아프리카 공관장들로부터 직접 보고를 받고 자리를 이동원 장관에게 넘긴 채 자신은 방으로 올라갔다. 이때부터 이동원 장관에게 몇몇 대사가 불만을 터뜨렸다.
"대사를 민간 외교관으로 교체할 거라며? 군인들이 뭘 잘못했다고 교체하나?"
이동원 장관은 공세적으로 반론을 펴기 시작했다.
"자꾸만 군사정권이라 하시는 데 그건 5·16때고, 지금은 민간정권입니다. 이 정권은 국민이 선거로 뽑은 정권이지 한강 넘어온 군인들이 세운 정권이 아니잖습니까."
"각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이제부터 저는 여러분들의 성적을 매기고 승진 여부를 결정짓겠습니다. 기준은 세일즈 성과입니다. 돈 빌리는 것도 재주입니다. 빌린 돈도 내 돈입니다. 나라를 위해 돈도 많이 빌려 오십시오. 성적에 포함됩니다."
박정희는 이장관에게 공관장회의를 주재토록 한 뒤 방으로 올라와 책상 앞에 앉았다. 그는 수첩을 꺼내 소감을 적기 시작했다.
11. 결혼기념일의 메모
박정희는 1964년 12월12일 방독을 마무리하면서 뮌헨 호텔 방에서 메모를 쓰고 있었다.
<오늘 유럽-아프리카 공관장들을 통하여 내가 받은 보고들 중에는 심각한 관심을 끌어 마땅할 문제들이 있었다.
첫째, 그들은 자신들에게 할당된 수출실적을 거의 예외없이 올리고 있었으나,
둘째 더 많은 수출을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름아닌 한국 상인들끼리의 경쟁과 무성의 때문에 손해와 기회를 일실하고 있다는 것이며,
셋째, 중근동지역과 아프리카 일대는 우리가 조금만 노력하면 한국 상품의 원가가 저렴하므로 얼마든지 진출할 여지가 있고,
넷째, 불-영-이태리 등 여러나라도 남아 돌아가는 자금을 세계의 어떠한 곳에 투자할 것인가 망설이고 있어, 이런 나라들로부터도 외자도입의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놀라운 사실은 우리와 맞서 있는 북괴는 내가 독일을 방문하고 있는 바로 그때 20여명의 친선사절단을 50여명으로 증강시킨 민속예술단으로 만들어 아프리카 일대를 순회시키면서 외교와 교역을 함께 도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안의 사정을 생각할 때 나는 참으로 한심스러운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우리를 에워싼 모든 국가가 묵묵히 건설과 발전을 위하여 피와 땀을 흘리고 있을 때, 또한 우리의 정면의 적이 세계가 좁다하고 수십 명을 거느리고 아프리카 천지를 행각할 때 우리는 정쟁과 분쟁과 입다툼으로 세월을 보내는 실정에서랴…>(청와대에서 펴낸 '박정희 대통령 방독기'에서 인용)
이날 유학생들이 마련한 '한국의 밤' 행사에는 영부인 육영수만이 참석하고 저녁 늦게 돌아왔다. 육영수는 골똘하게 생각에 잠긴 남편에게 말을 걸었다.
"저, 여보세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음? 무슨 날이오? 오늘이?" "우리 결혼 기념일이에요."
육영수는 손을 입으로 가져가 웃으며 말했다.
이날 오후 육영수 여사 수행원 중 한 사람이 뮌헨 공대 기계공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데마그 제철회사에서 연구원으로 근무중이던 김재관(KIST책임연구원, 국방과학연구소부소장, 중공업 차관보, 한국 표준연구소 소장 역임, 현 인천대 교수)박사의 집으로 전화를 했다. 김박사의 부인이 전화를 받았다.
"육여사께서 오늘 저녁 늦게 호텔로 돌아오실 텐데 호텔 후문으로 중국집 만두 두 접시만 갖다 주세요. 서양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셔서 식사를 잘 못하셔서요."
김재관 박사가 이날 밤 만두를 포장해 호텔 후문으로 날랐다. 수행원은 김박사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다음 올라가더니 두툼한 보따리 하나를 들고 내려 왔다.
"이건 뭡니까?" "이걸 가져가세요. 영부인께서 식사를 통 못하셨는데, 이걸 꼭 갖다 드리래요."
김박사가 집에 와 풀어 보니 붉은 비단에 금박으로 용 두 마리를 수놓은 침대보였다. 방독 선물로 준비한 것들 중 하나를 준 것이었다.
다음날(1964년12월13일) 아침, 박대통령은 80여명의 교포 유학생들을 초청한 조찬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김재관 박사는 자신이 작성한 '한국 강철산업 발전계획시안'을 선물로 들고 나왔다. 김박사는 1962년 독일의 철강회사들이 한국의 울산종합제철소 건설계획에 참여할 무렵 데마그 철강회사 소속원으로 활동했다. 1964년1월에는 장기영부총리 앞으로 종합제철소를 건설할 수 있는 방안들을 적어 보내기도 했었다.
김박사는 박대통령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각하, 철강재는 공업에 가장 많이 들어가는 소재입니다. 자금 때문에 지금은 할 수 없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해야 할 사업입니다. 제 논문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기쁘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돌아가서 꼭 철강회사를 만들 생각입니다. 잘 보겠습니다."
박대통령과 악수를 나눈 김박사는 손이 따뜻하고 부드러웠다는 기억을 갖고 있다.
조찬 모임후 박정희는 독일 알프스의 최고봉 주그스피체에 등정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일기불순으로 취소하고 뮌헨 근교의 뉨펜부르크성과 슐라이스하이머성을 관광했다.
관광을 마친 박대통령 부부는 이날 오후 6시에 바이에른 주지사 고펠 부부를 공식 방문한 뒤 오후 7시에는 쿠빌리에 극장에서 모차르트의 가극 '피가로의 결혼'을 감상했다.
뮌헨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 박대통령은 1964년 12월14일 월요일 아침, 독일 공군이 제공한 군용기편으로 뮌헨의 리임 공항을 떠나 오전 10시에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다. 독일 의전장과 주지사 대표, 교포들의 환송을 받으며 다시 루프트한자 정기 항공기의 1등석에 탑승해 귀국길에 올랐다.
12. 기내의 명상-50명만 치우면?
박대통령은 10일에 걸친 서독방문을 끝내고 귀국하는 루프트한자 기내)에서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들을 내려다보면서 방독여정중 속으로 다짐했던 결의를 곱씹고 있었다.
선우련 서울신문 기자가 옆자리로 오자 대통령은 힘주어 말했다.
"우리도 돌아가면 건설을 해야지. 국민의 피와 땀이 어린 독일의 재건상을 보고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소. 우리도 기적을 바라지 말고 피와 땀으로써 조국을 건설합시다"
서독신문들로부터 '아시아의 프로이센인'이라 불렸던 박대통령은 자신의 말에 스스로 흥분하여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설사 야당과 국회가 반대하더라도, 심지어 공화당안에서 협조하지 않더라도···"라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당시 조선일보 편집국장이던 소설가 선우휘의 동생 선우련은 이런 말을 했다.
"세상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대통령께서 잔정이 너무 많으셔서 무슨 일을 결정하셨다가도 반대 의견을 들으시면 당장 그쪽으로 기울어버린다고요…."
채 말이 끝나기 전에 대통령이 답했다.
"알고 있어요. 날더라 우유부단이라고 하더군요. 정치를 하려니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공화당 안의 어떤 인사를 불러 정책에 관한 이야기를 몇 마디 하면 밖에 나가서는 과장되게 전한단 말이예요. 그러면 의견이 다른 사람은 토라지거든요. 그래서 다음 번엔 그 사람을 불러 타이르면 이 사람도 밖에 나가자마자 얼토당토않게 보태서 떠들어댄단 말이야. 마치 내가 이미 내린 결정을 뒤바꿀 정도로 자신을 신임한다는 듯이. 왜 그렇게 여당 안에 이견들이 많은지…."
잠시 섭섭한 표정을 짓던 박대통령은 억양을 높였다.
"두고보시오. 이번에 돌아가면 단호히 일을 처리할거요. 주류고 비주류고 가릴 것이 없습니다. 옳은 일이라면 누가 뭐래도 전진할 따름입니다. 어느 나라 자본이라고 괜찮습니다. 운영만 잘 하면 탈이 안날 게 아니오. 외국자본을 들여다가 우리 국민들을 살려놓고 봐야겠습니다."
박대통령은 전후 폐허에서 다시 일어난 서독의 경제부흥을 직접 목격하고 돌아오는 여객기 안에서 조국 근대화의 집념을 다짐할수록 우리나라 정치, 특히 여당내의 분열상이 이런 전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생각을 뼈저리게 느꼈다. 박상길 대변인의 회고록('나와 제3,4공화국')에서도 선우련과 비슷한 증언이 실려 있다.
박충훈 상공부장관이 박상길과 한담을 하다가 생각에 잠겨있는 앞자리의 대통령을 향해서 큰 소리로 말하더란 것이다.
"각하, 박대변인이 우리 박씨 종중 이야기를 하는데 각하는 둘째 분의 작은 집이라십니다."
대통령은 싱긋 웃고는 말이 없었다. 대통령은 한참 있다가 박대변인에게 곁으로 오라는 눈짓을 했다. 옆자리에 다가앉은 박대변인을 두고 한동안 창밖을 내다보던 대통령은 고개를 앞으로 묻는 양으로 목소리를 푹 낮추더니 말했다.
"이번에 내가 돌아가면 그 시끄러운 놈들을 몽땅 좀 치워야겠소. 대체 몇 놈이나 치우면 당이 조용해지겠소?" "……" "내 생각으론 한 50명 가량만 치우면 될 듯싶은데…?"
자유당 시절 국회의원을 지낸 박상길은 조심조심 말했다.
"각하, 저와 몇 사람이 4·19 전에 이승만 박사에게 시한부로 한 50명쯤 당장 치우면 사태를 수습할 수 있다고 건의를 하려다가 실패한 일이 있습니다. 그게 쉽겠습니까?" "아니오. 이번엔 꼭 해치워야겠소. 돌아가는 대로 대강 대상을 추려 나에게 알려주시오" "그렇게 해보겠습니다"
무심한 비행기는 그냥 엔진소리만 웅장했고 일행은 화색이 만면한 가운데 정담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자리로 돌아와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저 어른이 이 방독의 여세를 몰아 오랜 기간 자신을 괴롭힌 거치적거리를 몽땅 쓸어버리려 하는 게 분명하다. 될 수 있을까, 해서 좋을까. 그것은 또 하나의 혁명을 말한다. 그렇게 해서 이 나라의 정계를 근본적으로 쇄신하고 새로운 토양 위에 새 시대의 밭을 일굴 수가 있을까. 5·16을 한 분이 한다면 할지도 모른다. 여당은 일단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치자. 야당권은 방법이 없지 않은가. 야당권의 생태가 그대로 있는 한 한국의 정치는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5·16 혁명으로도 실패했던 일이 아닌가>
박대통령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던 한국적 정치생리의 일대개혁을 시도한 것은 그로부터 8년이 흐른 뒤였다.
1964년 12월15일 저녁 7시 루프트한자기는 한국상공에 이르렀다. 어둠이 한동안 계속되더니 도시의 야경이 나타났다. 어느 기자가 "저기 세종로가 보인다"고 소리쳤다. 서울의 야경만은 적어도 이 여객기가 거치고 온 국제도시들에 비해서 뒤지지 않았다.
13. 시장자유화 정책의 태동
1964-65년은 우리나라가 대외개방쪽으로 국가전략의 방향을 확실히 잡은 시기였다. 한일국교정상화, 월남파병, 박정희 대통령의 서독 및 미국방문, 남미이민, 서독광부 및 간호사 파견과 함께 경제정책면에서도 장기영 경제기획원장관 겸 부총리의 지휘하에 개방체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변동환율제의 실시, 수입자유화, 수출주도 정책, 금리현실화, 적극적인 외자도입, 재정안정정책과 물가안정정책.
시장기능을 활성화하는 이런 정책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전과 달리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일국교정상화와 월남파병에 박정희 정부가 미국의 세계전략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대가로서 박정희는 국내정치의 안정을 위한 미국의 협조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정책에 대해서도 많은 협조를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1964년 5월에 입각한 장기영에게 시장자유화 정책을 건의한 사람은 재무부 차관을 지낸 김정렴(뒤에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다. 김씨는 1964년 초 한국일보 사장이던 장기영과 함께 도쿄에 가서 일본으로부터 어업 및 선박 협력 차관을 도입하는 비밀교섭에 참여했다.
한국은행 출신인 두 사람은 자연히 한국 경제의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다. 개발연대의 경제정책에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김정렴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국제금융에 밝은 사람이었다. 그는 미국 뉴욕 연방준비은행에서 연수, 한국은행 뉴욕사무소 개설요원으로 근무한 뒤 클라크대학에서 경제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김씨는 일본통이기도 했다. 일본 오이다고상((대분고상)을 졸업하고 조선은행(한국은행의 전신)에 들어갔다가 구마모도 육군예비사관학교를 나와 히로시마 소재 군관구 사령부에 근무중 원폭투하 때 화상을 입었다.
김정렴은 한국은행 도쿄지점에서 1년간 근무했고 한일회담에도 관계했다. 미-일의 경제사정에 밝은 그는 '한국이 따라야 할 개발모델이 미국식과 일본식 중 어느쪽인가'하는 화두를 품고 다녔다. 그가 내린 결론은 자원이 빈약한 대신 우수한 인력을 가진 일본이 수출입국정책으로 성공한 모델을 한국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수출대체 산업에 안주하지말고 수입대체를 위한 보호적 요소를 자유화해서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수출지향적 공업화에 착수하고 나아가서는 중화학공업,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고도기술산업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요지의 건의서를 만들어 장기영에게 주기도 했다. 장기영은 입각교섭을 받자 김정렴을 불러 주요경제정책에 대한 아이디어를 요약해서 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측과 연차 협의를 할 때마다 수입대체산업에 대한 보호정책의 시정, 즉 환율과 금리의 현실화, 수입의 자유화, 관세율의 인하 등 소위 '시장자유화정책'을 권고하고 있었다. 김정렴은 IMF의 권고사항이 쓴 약이기는 하지만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결국은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시키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메모를 밤새워 작성했다.
환율과 금리를 현실화하면 외국차관과 은행돈을 쓰고 있는 기업은 이자부담이 늘어난다. 수입을 자유화하고 관세를 인하하면 수입규제와 관세장벽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던 기업들이 큰 타격을 받게 된다. 과보호를 받고 있던 기업들은 체질개선을 하지 않으면 도산하게 된다. 우리나라가 IMF관리체제하에서 겪은 것과 비슷한 고통이다.
이런 고통과 자구노력은 결국은 기업체질을 향상시킬 것이지만 정부는 경제계의 반발과 정치권의 압력에 직면할 것이다. 표에 민감한 여당도 시장자유화에 반대할 공산이 크다. 이 정책은 중간에 그만두면 큰 혼란을 불러 안한 것만 못하게 된다. 따라서 대통령의 확실한 이해와 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김정렴은 메모에서 강조했다.
며칠 뒤 장기영 부총리가 김정렴을 불렀다. 장기영은 "정일권 총리도 있는 자리에서 박대통령에게 시장자유화정책을 설명하고 이 정책에 대한 지지를 약속받았다"고 했다. 장부총리는 "대통령께서는 '경제팀은 언제든지 당신이 원하는대로 구성해주겠으니 기필코 시장자유화정책을 성공시켜라'고 말씀하셨다"고 덧붙였다. 장부총리는 한 달 뒤 박충훈 상공부장관과 의논하여 김정렴을 상공차관에 임명했다.
딱딱하게 보이면서도 유연한 발상의 소유자인 박정희는 시장원리에 대한 이해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는 1962년에 쓴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최대한의 자유, 최소한의 계획'을 원칙으로 경제계획을 완수하여 '한강변의 기적'을 이룩해놓는 것이 승공의 길이다. 우리는 진정한 경제발전이 민주주의적인 자유와 창발성 가운데서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경제개발을 어디까지나 시장경제의 원리를 바탕으로 깔고 국가에 의한 계획성을 종으로 놓고 추진한다는 소신인 것이다. 박정희에 의한 국가의 개입은 시장원리를 제한하는 데 그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시장이 제대로 기능하도록 여러 가지 제도와 관행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는 이듬해 나온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는 '민주주의의 신봉을 견지하는 한, 여론의 자유를 막을 수는 없다. 토론의 자유 속에서 혁명의 구심력을 찾아야 하는 혁명이기 때문에 어렵다'고 썼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원칙을 전제로 한 국가주도의 근대화 전략이었다는 점에서 박정희식은 김일성의 전체주의식이나 필리핀과 파키스탄의 기득권층만을 위한 민주주의와는 차원이 달랐다.
14. 장기영式
장기영 경제기획원장 겸 부총리는 1964년 5월 취임하자마자 김정렴이 권고한 대로 시장자유화정책을 우직하게 밀고나갔다. 그는 긴축재정 정책을 견지할 것을 미국측에 대하여 보장하고 그 대가로 64회계년도중 5200만 달러 규모의 미국 국제개발처(AID)차관을 얻었다. 1965년 3월22일부터는 IMF의 권고를 받아들여 고정환율제를 변동환율제로 바꾸어 실시하면서 환율을 1달러 대 255원(종전은 1달러 대 130원)으로 평가절하하였다.
금리도 현실화하여 1965년 9월30일부터는 1년 만기 정기예금 금리를 연 15%에서 30%로, 일반대출금리를 16%에서 26%로 대폭 인상하였다. 수입개방도 과감하게 실시했다. 1964년도에는 수입허용 품목이 400여 개였으나 다음해에는 1570개로 늘었다.
이런 시장자유화와 가격현실화 조치는 '가격의 매개변수적 기능을 구현하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일련의 조치는 '정부의 대외지향적 개발전략을 구현하기 위한 기반조성이란 점에서 60년대 초에 취한 정책중 획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경제기획원 펴냄. '개발연대의 경제정책').
시장자유화정책의 입안자인 김정렴(당시 상공부차관-재무부 장관) 전 대통령비서실장은 "이 정책의 성공으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행정력에 대한 평가가 높아져 요사이 말로 하면 국가 신인도가 올라갔고 외자유치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때 IMF에서는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바닥나면 SDR(Special Drawing Rights=특별인출권)을 쓸 수 있도록 허용하되 환율-금리-수입자유화를 조건으로 붙였습니다. 장기영 부총리가 이 일을 해내자 IMF에서는 개발도상국으로서는 희귀한 성공사례라면서 회원국가들에게 널리 알렸습니다. 외화유치에도 유리해졌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외환위기를 맞게 되면 IMF와 IMF를 사실상 조종하고 있는 미국이 뒤를 봐줄 것이란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이때 IMF가 우리에게 요구한 개혁은 요사이 그들이 요구한 것과 거의 같았습니다. 시장자유화정책의 성공에는 장기영 부총리의 지도력과 그를 전폭적으로 밀어준 박정희대통령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아이디어가 많은 장기영 부총리의 역금리 발상, 즉 예금금리를 대출금리보다 더 높게 매겨 예금을 많이 유치하는 한편 역금리로 인한 은행의 적자를 메우기 위하여 은행이 보유한 지불준비금에 한국은행이 이자를 붙여 준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금리-환율자유화 문제로 재무장관이 반발하면 장부총리는 설득을 했습니다. 그래도 말을 안들으면 박대통령을 찾아가 해임을 요구, 경제각료들에 대한 자신의 인사권을 관철시켰습니다. 네 명의 재무장관이 그런 식으로 갈렸습니다."
김정렴은 장기영이 한국은행 조사부장으로 있을 때 그 밑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장기영씨는 추진력과 독서력, 문장력, 그리고 발상력이 엄청난 분이었습니다. 조사부장 때 여자 비서를 두 명 데리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전화를 받는 일을 맡았고 다른 비서는 장부장이 책을 읽다가 밑줄 친 부분을 정서하는 일을 했습니다. 정서한 문구를 담화 때 적절히 이용하였습니다."
김정렴은 "이분이야말로 가장 성공적인 은행원이었다"고 했다. 장기영은 부총리로 취임한 뒤 담보를 잡고 돈을 빌려주는 식의 관료적 은행업무는 전당포나 고리대금업과 같다면서 경멸했다. 그는 "유능한 은행원은 유능한 기업인을 발견하여 그를 키워주는 사람이다. 대출은 신용대출이 원칙이다"라고 생각했다. 장기영은 돈을 빌려줄 때 기업인의 인물됨을 가장 중점적으로 관찰, 평가했다고 한다. 기업인들과 술을 마실 때도 행태를 면밀히 관찰하여 융자여부에 반영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시장자유화 정책이 추진되고 있던 1964-65년엔 수출주도 전략의 뼈대도 마련되었다. 수출전략의 설계자로 알려진 당시 상공부 장관 박충훈은 회고록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수출전선의 총사령관'으로 묘사했다.
'대통령이 무엇보다 수출을 중요시하고 강력하게 지원했기 때문에 상공부에서는 수출만이 살 길이다, 수출제일주의다 하는 것을 내세우고 수출하는 게 곧 애국하는 것이며 수출공장에서 바느질하는 여공까지 깡그리 애국자라는 것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가 연간 수출액을 1억달러 이상으로 끌어올린 것은 1964년이 처음. 이해 총수출액은 1억1910만 달러. 1억 달러를 초과한 날인 11월30일을 '수출의 날'로 기념하기로 했다. 혁명정부 시절인 1962년도부터 박대통령은 연간 수출목표 제도를 시행하면서 목표달성을 독려해갔다. 박충훈 장관은 1965-67년 사이의 3년간 총 7억달러어치를 수출하고 67년에는 3억달러의 수출고를 달성하겠다는 야심찬 수출3개년 계획을 세웠다.
1965년에 정부가 마련한 수출진흥종합시책은 수출업체에 대하여 조세, 금융상의 특혜 뿐 아니라 외교와 정보면에서의 지원도 포함시켰다(수출물품에 대한 철도요금의 할인제도도 있었다). 정부의 모든 조직이 수출업체에 대하여 유기적이고 종합적인 지원을 맡고나선 것이다. 수출기업이 무역전선의 전투부대라면 정부는 정보-작전-군수지원을 담당한 셈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1964년에 해외시장개척을 전담하는 대한무역진흥공사를 설립한 데 이어 65년부터는 대통령이 주재하는 청와대 수출진흥확대회의를 매달 한 번씩 열었다.
15. 격식이 싫은 대통령
대통령 주재의 월례 수출진흥확대회의는 한국만이 가진 독특한 협의체로서 외국에서도 모방하려고 했으나 성공한 나라는 별로 없다고 한다. 이 회의에 박정희 대통령은 반드시 참석하여 수출진도를 점검하고 애로사항을 즉석에서 해결해주었다. 주무부서인 상공부가 이 회의에 수출지원책을 내어놓으면 웬만한 것은 대통령 이름으로 받아들여져 즉각 시행되곤 했다.
경제기획원이나 재무부는 하급 부서인 상공부의 뒤치닥거리를 한다고 불평하기도 했으나 국정의 우선순위에서 수출을 항상 윗자리에 놓는 대통령 때문에 기관이기주의가 발붙일 틈이 없었다.
이즈음 어느날 박대통령은 수행원들과 함께 서울 구로공단내의 한 공장을 시찰했다. 박대통령은 10대 소녀 공원이 열심히 손을 놀리고 있는 등뒤로 다가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덥석 소녀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네 소원이 무엇인가?"
소녀는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대통령 수행원들이 "겁내지 말고 소원이 있으면 말해봐"라고 했다. 소녀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저도 제 또래의 아이들처럼 교복을 한번 입어보고 싶습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강직한 외모의 뒤에 다정다감한 내면을 지닌 박대통령은 훗날 산업체의 소년소녀 근로자들을 위한 특별학급을 만들게 된다.
박충훈 장관은 대통령과 함께 한 회식자리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얽힌 일화를 하나 소개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백악관으로 들어갈 때 언론인 출신 한 사람을 식객처럼 데리고 갔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반년이 넘도록 벙어리처럼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말했다.
"이제 당신이 여기 들어온 지도 여섯 달이나 되었으니 무슨 말이든 한 마디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사람은 "예, 알겠습니다"라고 하더니 다음날 종이에다 서너 자 적은 것을 들고 와서 바쳤다. 대통령이 받아서 보니 'WELL'이라 쓰여 있었다.
"미국 대통령의 말 한 마디는 세계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런데 각하께선 너무 쉽게 예스, 노를 말합니다. 앞으로 누가 물으면 먼저 WELL (글쎄요)이라고 말해놓고 생각을 가다듬은 후에 가부간의 대답을 하는 게 낫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박대통령은 "나 보고 들으라고 한 이야기구먼"이라고 했다. 박장관은 술에 약해 김정렴차관을 종종 데리고 다녔다. 박장관은 "여기 김차관은 장관 대신 술 마시는 것을 도맡다 보니까 우리 부에서는 야간장관이라 불립니다"라고 농담을 했다. 박대통령은 "좋아요, 그러면 내가 김차관을 야간장관으로 임명하겠어요"라고 역시 농으로 응수했다.
박대통령은 격식없는 이런 술자리는 좋아했으나 공식적인 만찬이나 파티는 싫어했다. 그런 만찬을 끝낸 어느 날 박대통령은 정치부 기자 출신의 젊은 공화당 의원 이만섭(현재 국민회의 대표)를 따로 부르더니 "우리끼리 한잔 하자"면서 청와대로 데려갔다.
"난 말이야 저런 파티가 싫어. 오늘 이의원도 봤겠지만 정치인과 악수를 하면 괜히 내 귀에다가 입을 대고 속삭이면서 손을 놓아주지 않는 친구들이 있단 말이야. 할 말도 없으면서 여러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려고 그러는데 양치질이나 제대로 하고 그러면 밉지나 않지."
대구의 한 요정에서 있었던 일화. 모 국회의원이 대통령을 담당한 여자 종업원에게 농담을 했다.
"니, 각하하고 여러 번 했제?"
순진한 종업원이 대통령에게 쪼르르 달려가 일러바쳤다. 듣고난 박대통령은 그 국회의원을 향해서 소리쳤다.
"그래 임마, 했다. 그러니 니 형수한테 술 한 잔 올려라!"
이 무렵의 박정희는 1970년대의 그와는 많이 달랐다. 40대 후반의 젊은 대통령은 '선거로 뽑힌 대통령'이란 정당성을 근거로 하여 야당과 언론의 비판에 당당하게 논리적으로 대응했다. 원래 격식을 싫어하는 그는 대통령직이 부여하는 최소한의 의전도 부담스러워했다. 이 무렵 찍은 사진들을 보면 대통령과 합석한 측근 인사들도 대통령의 존재를 별로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담소하고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다.
박대통령은 한일회담이나 월남파병과 같은 중대사를 결정할 때는 충분한 토론을 거치게 했다. 공화당이 3분의 2에 육박하는 압도적인 의석을 갖고 있었으나 박대통령이 야당에게 끌려다닌다는 불만을 털어놓을 정도로 국회 활동은 활발했다. 박대통령의 이런 유연성은 자신감의 반영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미국이 원하는 월남파병과 한일국교 정상화를 정력적으로 추진함으로써 미국의 지지를 확보했다. 이는 반정부 활동을 벌이는 야당과 학생들에 대한 미국의 전통적인 지지가 철회된 것을 의미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 월남전선에서 한국군이 철수하는 것을 계기로 하여 한미간의 그런 고리가 끊어진다. 박대통령의 영구집권을 가능하게 한 유신체제의 선포와 함께 미국 정부는 야당-학생-지식인 사회의 박대통령 비판을 지원하는 형국으로 바뀐다.
16. 일괄타결에서 개별타결로
1965년에 들어서면서 박정희는 한일국교정상화 회담과 월남파병을 동시에 추진했다. 이해 1월14일 밤 박대통령은 청와대 본관 2층 침실에서 며칠 뒤에 있을 연두교서 발표자료를 만들어 가져온 박상길 대변인을 맞았다.
"수고하였소. 저녁은 어떻게 했소?" "네, 이제 나가 먹겠습니다."
"그런데 그 월남파병인가…. 밖에서들 뭐라고 합니까?" "우리 처지에서는 공산군과 싸워 실전을 익힐 수 있는 좋은 기회이고 미국은 한번 도와주어 빚을 갚아볼 좋은 기회이고 경제건설에 필요한 달러를 벌어들일 기회도 되고 5000년에 처음으로 남을 도와 파병한다는 기록도 남기는 게 밑지는 장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박대통령은 다소 상기된 표정을 짓더니 "관계자들을 부르시오"라고 즉석회의를 소집했다. 박대통령은 뤼브케 서독대통령으로부터 선물받은 포도주를 가져오게 하여 대변인과 함께 마시고 있으니 장관들이 놀란 표정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요정에서 달려온 장관, 잠자리에 들었다가 뛰쳐나온 장관도 있었다. 박대통령은 관계장관들이 다 모였는가 하고 둘러보더니 입을 뗐다.
"월남파병을 결행하기로 하였으니 그리들 알고 각자 필요한 작업에 내일부터 착수토록 하시오."
박정희가 이날 밤에 말한 월남파병은 파병이 이미 확정된 비전투부대인 비둘기부대에 이어 전투부대도 보내겠다는 뜻이었다. 미국과 월남정부가 공식적으로 전투부대 파병을 요청하기 전이었다. 박대통령은 그런 공식요청이 언제 오는가 하고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해 7차 한일회담은 아슬아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1964년12월에 급사한 일본측 수석대표 스기미치스케의 후임이 된 다카스키 신이치는 평생을 미쓰비시그룹에서 일해온 재계의 거물이었다. 그는 1965년 1월7일 외무성 출입기자들과 회견하는 자리에서 망언을 했다.
"조선통치에 대하여 한국측은 사죄를 요구하고 있으나 우리로서도 할 말은 있다. 우리는 조선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려고 지배한 것이다. 지금 조선의 산들은 벌거숭이가 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이 일본에서 이탈한 때문이다. 일본이 한 20년간 더 지배했으면 좋았을 뻔했다. 창씨개명은 조선인을 동화시켜 일본인과 같은 대우를 해주려고 한 배려였다."
이런 발언이 일본공산당 기관지 '적기(아카하다)'에 보도되었다. 김동조 주일대사 겸 수석대표는 이 내용이 한국신문에 보도되면 회담이 결렬되고 말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우시바(우장)차석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사건이 확대되면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다. 그러니 다카스키 대표가 한국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 발언을 무조건 부인하도록 하라"고 했다.
우시바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다카스키로 하여금 1월18일 한국기자들과 만나 자연스럽게 자신의 발언을 부인하도록 했다. 다카스키는 이날 본회의 직후 한국언론의 주일특파원들과 대화하면서 태연스럽게 말했다.
"내가 36년간의 조선통치가 한국측에 유익했다는 발언을 한 것처럼 평양의 노동신문이 보도했는데 터무니 없는 날조이다.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회담을 방해하려고 꾸민 사건이다."
다음날 동아일보는 이런 다카스키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그의 중대실언 내용을 크게 보도했다. 20일 본회의에서 김동조 수석대표는 이 기사를 읽은 다음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회담의 계속 여부도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고 경고했다. 다카스키 수석은 보도내용을 부인하는 문안을 낭독함으로써 이 발언파문은 수습되었다. 이 문안은 김동조 대사가 미리 일본측에 요구하여 작성된 것이었다.
이동원 외무장관은 국내의 반일감정을 순화시키기 위해선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일본정부의 공식 사과를 받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1964년 10월 김동조 대사가 일본에 부임할 때 '요시다 전 수상 같은 거물이 한국에 와서 사과를 하도록 노력해 줄 것'을 당부했었다. 김동조대사는 일본에서 시나외상을 만나 방한을 요청하고 주일 미국대사 라이샤워를 만나서도 측면지원을 당부했다.
한일회담 한국측 수석대표를 겸한 김대사는 종래의 일괄타결 전략을 수정하여 문제별, 위원회별 개별타결방식으로 전환했다. 청구권, 어업, 기본조약, 재일동포 문제가 한일회담의 4대 의제였다. 청구권 문제는 1962년의 김종필-오히라 메모로 그 대강이 결정되었다. 김대사는 기본조약을 마무리하면 2개 문제가 해결되므로 국교정상화를 기정사실로 만들면서 조기타결로 가져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 각 분과위원회별로 실무선에서 합의를 해보고 합의가 되지 않는 것들은 막후교섭 또는 정치회담에서 타결하기로 한 것이다. 일본도 이런 수순에 동의했다.
17. 공식 사과
삼성물산의 이병철 사장은 이 무렵 울산에 지을 한국비료 공장에 대한 차관 교섭을 위해 일본에 와 있었다. 김동조 대사가 어느날 이사장을 찾아와서 물었다.
"지금 대일 청구권은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상업차관 1억달러로 이야기가 되었는데 이중 무상 3억을 6억으로 늘리면 어떨까요."
"무상을 늘리는 것은 일본의 외환사정을 감안하면 어려울 겁니다. 상업차관은 일본이 상품을 팔고 이자까지 받는 것이므로 교섭하기에 따라서는 증액이 가능할 겁니다."
김대사는 "나는 우시바(당시 일본 외무성 심의관, 한일회담 차석 대표)씨에게 부탁을 너무 많이 했으므로 이사장께서 교섭을 좀 해주시지요"라고 했다. 이병철은 김대사, 우시바, 그리고 한국은행 도쿄지점장 김봉은과 함께 복요리로 유명한 후쿠겐이란 음식점에서 만났다. 그런데 골프를 치느라고 일행은 예약시간보다 한 시간이 늦었다. 음식점 현관에 들어서니 주인이 화를 냈다. 복요리는 시간이 맞아야 한다.
예약시간에 맞추어 요리를 해놓았는데 한 시간이나 늦었으니 제맛이 나지 않게 되었다고 주인은 안타까워했다. 일본제일의 복요리사한테서 야단을 맞은 네 사람은 멋적은 표정이 되어 방으로 들어갔다. 주인이 따라 들어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더니 이렇게 사과했다.
"제가 복요리를 하는 것은 돈을 벌자는 목적 이외에 최고의 맛을 손님들에게 서비스하자는 데 있습니다. 시간이 맞지 않아 제맛이 안나는 것이 억울합니다. 네 분이 보통손님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 자리에서 우시바는 이병철 사장의 제안을 듣고 난색을 보였다. 이사장은 "일본으로서는 한국, 인도, 파키스탄 가운데 어느 쪽이 소중하냐"고 물었다. 우시바가 "그야 물론 한국이지요"라고 하자 이사장은 "인도와 파키스탄에 대한 상업차관 공여액이 얼마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우시바는 "조사해보고 내일 알려주겠다"고 했다. 다음날 우시바로부터 이병철에게 연락이 왔다. 인도에 대한 차관공여액은 5억5000만달러라는 것과 대한상업차관 증액문제는 잘 되는 방향으로 추진하겠다고 했다. 이병철은 돌아오는 대로 박대통령, 정일권 총리, 장기영 부총리를 만나 그 전말을 알리고 꼭 실현시켜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정부는 상업차관의 증액보다는 유상자금 2억달러에 대한 이자를 낮추어 달라는 교섭을 하게 되었다. 이병철은 이것이 소탐대실이었다고 회고록에서 개탄했다. 우시바도 이병철에게 "일본 같으면 경제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만 한국에서는 매사를 관리들이 결정한다"고 비판하더란 것이다.
한일양국이 회담의 타결을 향한 돌파구로 생각한 것은 1965년 2월17일로 예정된 시나 외상의 방한이었다. 일본 외상이 공식적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양국은 또 서울에서 있을 양국 외무장관 회담에서 기본조약 부문에 합의, 가서명함으로써 국교정상화의 조기타결을 기정사실로 만드는 극적인 연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국무회의에서는 김포공항에 일본국기를 게양하고 국가를 연주해야 하는 문제에 대해서 갑론을박이 있었다. 국무회의 전에 정일권총리와 김형욱 정보부장이 장관들을 상대로 설득을 했음에도 다수가 반대했다. 장기영부총리, 양찬우 내무, 김성은 국방 정도가 찬성했다. 박대통령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고만 있었다. 이동원 외무장관이 강경하게 발언했다.
"국민감정이 무섭다고 외교 관례를 무시하면 이건 국가라고 할 수 없습니다. 대외적으로도 국민여론에 정부가 끌려간다는 인상을 남기면 외교에도 지장이 생깁니다. 아무리 국민이 그렇다고 해도 국가는 체통을 지켜야 합니다. 일장기를 걸고 기미가요를 연주해야 합니다."
박대통령은 묵시적으로 이동원장관 편을 드는 것 같았다. 이장관은 야당인 민정당에서 낸 시나 방한반대 집회도 허가해주자고 윤치영 서울시장에게 건의했으나 윤시장은 거절했다고 한다.
"이건 정치가 아닌 예절의 문제요. 어떻게 건국 이래 처음으로 찾아오는 일본 요인을 시위대와 부딪치게 할 수 있습니까. 난 절대 허가할 수 없어요."
2월17일 오전 JAL(일본항공)기편으로 김포공항에 내린 67세의 시나 외상은 도착 성명 문안을 잃어버려 호주머니를 뒤진다고 기내에서 3분을 지체했다. 계단을 내려올 때는 구두끈도 매지 않은 상태였다. 그가 읽은 도착성명의 핵심은 다음 대목이었다.
"일한 양국은 예로부터 일의대수의 인국으로 사람의 교류는 물론 문화적이나 경제적으로도 깊은 관련이 있었으나 양국간 오랜 역사중에 불행한 시간이 있었음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로 깊이 반성하는 바입니다."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일제 식민통치에 대해서 사과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시나 외상의 방한 전날 우시로쿠 아주국장은 외무성 출입기자들에게 도착성명문을 돌린 다음 의견을 들어보았다. 기자들의 반응은 "사과를 하려면 보다 확실히 하고 하지 않으려면 한 마디도 하지마라. 이렇게 어중간해선 오히려 역효과가 나겠다"는 것이었다. 선발대로 먼저 서울에 가 있던 외무성의 마에다 조사관도 문안을 읽어보고는 "사과의 뜻을 더 확실히 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해왔다. 우시로쿠 국장은 '깊이 반성하는 바입니다'라는 말을 덧붙인 다음 문안을 시나 외상에게 가져갔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해야지."
시나는 아주 간단하게 받아주었다. 김동조 대사도 막후에서 일본측에 대해 강력한 사과문구를 포함시키도록 설득하느라고 무진 애를 썼었다.
18. 시나 외상의 낮술
일본 외무장관으로서는 최초의 공식방한. 시나 외상을 맞은 1965년 2월17일의 김포 공항에선 이변이 하나 있었다. 67세의 시나가 서른살 가량 아래인 이동원외무장관의 안내를 받으면서 의장대를 사열하는데 기미가요(일본 국가)가 나와야 할 대목에서 아리랑이 흘러나오는게 아닌가. 대통령이 일본 국가의 연주를 허락한 것으로 알고 있었던 이장관은 속으로 '각하가 허락하셨는데… 마음을 바꾸었나'하고 생각했다. 이 일은 별 말썽없이 지나갔고 그날 저녁의 워커힐 만찬장에서는 기미가요가 연주되었다.
이장관과 함께 승용차에 타고 숙소인 조선호텔로 들어오는 차중에서 시나는 말이 없었다. "도쿄에 비해서 서울은 깨끗하고 조용하군요"라고 한 마디 했을 뿐이다. 차가 조선호텔에 거의 당도했을 때 시위군중 속에서 던진 계란이 차체에 맞았다. 이동원은 서툰 일본어로 말했다.
"놀라실 것 없습니다. 이건 환영의 표시입니다. 아마 증오의 표시였다면 총을 쏘았을 겁니다."
시나는 유쾌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독백처럼 "환영 제스처 치고는 좀 지나친데…"라고 말했다.
다음날 박정희대통령은 청와대를 방문한 시나 외상 일행을 맞아 30분간 요담했다. 박대통령은 "일본이 먼저 과거사에 대한 한국민의 감정을 이해하고 손을 내밀어 납득이 갈 만한 성의표시를 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박대통령은 스무살 가량 많은 시나를 앞에 두고 감회가 새로웠을 것이다. 그가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장교양성 기관 만주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있던 생도시절 시나는 만주국의 산업부 국장이었다. 그는 만주국 총무처 차관으로서 괴뢰국을 조종하던 기시 노부스케(안신개·뒤에 일본수상 역임)와 함께 군국주의 일본이 만주에 파견한 대표적 엘리트였다. 그는 전후 '동화와 정치'란 책을 썼는데 이런 대목이 있었다.
<일본이 대만, 조선, 만주를 합방, 경영한 것이 제국주의라고 일컬어진다면 그것은 영광있는 제국주의이다.>
그런 그가 과거를 반성하고 사과하는 사절로 박대통령 앞에 선 것이다. 박대통령은 야망가와 음모가들이 몰려들던 '동양의 서부' 만주에서 질풍노도의 시대를 같이 호흡했던 사람들끼리 갖는 편안한 신뢰감 같은 것을 시나로부터 받았던 것 같다.
박대통령은 시나 일행에게 점심으로 한정식을 대접했다. 시나 외상은 젓가락으로 밥을 맛있게 퍼먹는데 쩝쩝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덕택에 긴장된 분위기가 풀렸다. 시나가 도중에 정색을 하고 말했다.
"각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예, 말씀해 보시지요." "저, 밥이 참 맛있습니다. 한 그릇 더 먹을 수 있겠습니까."
거물 정치인 시나의 소탈한 언동을 계기로 한일 양측 인사들은 속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각하, 한일간 음식 풍속엔 닮은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확실히 가까운 나라임이 틀림없습니다." "인종적으로도 아마 가까울 겁니다."
"일본 정계에서도 사실은 한국계 혈통이 많이 활약하고 있습니다. 기시나 후쿠다는 자신의 조상들이 한국계인 것 같다고 저에게 귀띰한 적도 있습니다. 도조(동조)내각의 도고(동향)대신도 공공연히 자신은 조선인이라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화기애애한 점심이 끝난 후 외무부 회의실에서는 제1차 외무장관 회담이 있었다. 쟁점은 한일간 기본조약에서 규정할 대한민국의 관할권과 구조약의 무효시점 문제였다. 한국측은 한일합방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때와 그 이전 한일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은 무효라고 못박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일합병 자체가 불법이므로 그에 따른 일제의 한국통치도 불법이란 의미를 내포한 문구였다. 이에 대해 일본측은 "일본과 한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의 무효는 일본의 패망을 명문화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기점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제의 식민통치를 사실 그대로 놓아두겠다는 속셈이었다. 이는 일제 통치에 대한 일종의 역사관 논쟁이므로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일본측은 또 대한민국의 관할권 범위를 '휴전선 이남지역으로 본다'는 의미의 문구를 명기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우리는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일본측은 또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유일 합법 정부'란 대목 앞에 '1948년 12월18일 유엔의 한국 관계 결의에 따라서'란 수식어를 넣자고 했다. 일본은 빠지고 유엔의 판단을 소개하는 식의 문구였다. 북한당국을 반국가단체 또는 괴뢰로 보는 우리와 그렇게만 볼 수 없는 일본의 입장 차이가 있었다. 한국의 역사적, 국가적 정체성에 대한 이견이므로 쉽게 좁혀질 수가 없었다.
이동원 장관은 실무자들에게 회담을 맡기고는 시나 장관을 데리고 장관실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잡담을 하면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갔다. 시나가 엉뚱한 제안을 했다.
"저, 부탁이 있는데… 우리 술 한잔 합시다." "예?"
놀란 이장관이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이자 이와세(암뢰)비서관이 재빨리 가방을 들고 들어왔다. 그는 가방을 열더니 나폴레옹 꼬냑 병을 탁자 위에 내어놓았다. '숙달된 조교'의 행동이었다. 회담장을 이탈한 두 나라 외무장관은 낮술을 즐기고 있었다. 직업외교관이 아니란 공통점이 있는 두 사람의 이런 파격성은 한일국교정상화 같은 난관을 돌파하는 데는 모범생들의 상식적인 행동보다 더 효과가 있었다.
19. 청운각 심야 담판
1965년 2월18일 서울에서 있었던 이동원-시나 한일외무장관 회담은 대한민국 정부의 관할권과 구조약 문제를 놓고 팽팽한 입장 차이만 보이고 별 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날 밤 우이동의 요정 선운각에선 양측 대표들 사이에 만찬이 있었다. 시나는 밴드가 한국유행가를 연주하자 가만히 듣고나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중국노래도 들어보았지만 이처럼 가슴에 와 닿지는 않았소. 역시 우리 두 나라는 역사의 밑바닥에 깊은 무엇이 흐르고 있는 게 분명하오."
시나는 만찬을 파하고 헤어지기 전에 이장관에게 "조용한 데서 이야기할 게 있다"고 붙들었다. 별실에서 시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변하더니 "이장관,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이름)는 어떻게 할 작정이오? 사토 수상의 특별지시도 있었어요. 외무성의 증거서류를 보면 다케시마는 분명히 일본영토인데…"라고 했다.
"우리에게도 대마도가 우리 땅이란 역사자료가 있습니다. 그러면 대마도와 독도를 바꾸지요."
대화는 싱겁게 끝나버렸다. 다음날에도 외무장관 회담을 양측 실무자들에게 맡겨놓고 이동원, 시나는 장관실에 앉아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시나가 불쑥 말했다.
"난 오늘 아침 영자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내가 나를 물러가라고 데모를 벌이고 있었으니…." "예?" "거, 조선호텔 앞 시위 사진 말이오."
야당인 민정당의 당수 윤보선 전 대통령이 시나 외상과 닮은 점을 두고 한 말이었다. 이틀 전 환영만찬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나오자 시나는 "내가 (윤보선 전대통령보다) 한 살 아래이니 동생이군요. 그런데 우리는 같은 조상님을 둔 것이 아닐까요?"라고 해서 웃겼다.
19일의 외무장관 회담도 실무자들 사이에 진전없이 끝났다. 구 조약 폐기의 시기 문제는 의견 접근이 가능해졌다. 한일 양측 사이의 구조약은 '이미 무효'란 의미로 'already(이미)'를 문장에 삽입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양국간 모든 조약의 무효 시점으로 하자는 일본측과 1910년의 한일합병을 기점으로 하자는 한국측의 주장을 절충한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관할권 문제에 있어서는 진전이 없었다. 일본측은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임을 유엔 결의를 빌어 인정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그 관할권은 휴전선 이남에 한정된다는 조항을 넣으려고 했다. 한국측은 이를 전면 거부했다. 다음날이면 시나가 귀국하게 되어 있었다. 사토 수상 등 일본정부 수뇌부도 '무리하게 굳이 합의볼 필요가 없다'는 자세였다고 한다.
이동원 장관은 오후 다섯 시쯤 청와대로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가 보고했다.
"각하, 구조약 문제는 우리가 양보할 수도 있는 사안이지만 관할권 문제는 국기와 관계되는 일이니 만큼 양측이 모두 완강합니다. 그러나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박대통령은 언짢은 표정을 짓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내뱉듯이 말했다.
"마음대로 해. 나는 머리 좀 식히려 진해에 갔다올테니. 내가 임자를 외무장관에 임명할 때 분명이 말한 것이 있잖아. 한일회담은 임자에게 일임하겠다고. 그러니 임자 책임 아래서 최선을 다해봐."
이날 저녁 조선호텔에서는 시나 장관이 주최하는 만찬이 열렸다. 장기영 부총리가 이동원 장관에게 다가오더니 걱정을 해주었다.
"회담이 잘 안되는 모양이지. 야단인데, 그게 잘 되어야 우리 경제도 소생할텐데. 이판사판으로 밀어붙여 봐. 일단 저질러놓고 보는 것 있잖아."
이장관도 이날 밤에 승부를 내기로 결심을 한 터였다. 그는 시나 장관에게 "우리끼리 조용한 데 가서 술 한잔 더 합시다"라고 했다. 이장관, 김동조 주일대사 겸 한일회담 수석대표, 외무부의 연하구 아주국장, 그리고 시나와 우시로쿠 아시아국장이 요정 청운각으로 향했다. 밤 10시를 넘어서였다.
일행이 대청에 올라서는데 "아니, 여긴 웬 일이오?"라고 하면서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육군중장 출신인 김종갑 국회국방위원장이었다. 김위원장을 따라 방에 들어가보니 정복차림의 군수뇌부가 회식중이었다. 이장관은 시나의 양해를 얻어 합석했다. 애주가인 시나는 늘 갖고다니는 나폴레옹 꼬냑을 꺼내 마셨다.
한국말을 모르는 시나는 군인들과 이장관이 뒤엉켜 고성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지금 무슨 일로 싸우는 거요?"라고 묻기도 했다. 장군들은 두 외무장관에게 "두 분이 어떻게 하든지 이번 회담을 성사시켜주십시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절대 안됩니다"라고 부탁하고 있는 중이었다. 시나는 일본으로 돌아가 남긴 회고담에서 '장군들과의 조우는 박대통령이 회담성사에 압력을 넣기 위해서 꾸민 것이었다'고 썼다.
밤 11시가 되어서야 대좌한 두 장관은 배석한 사람들을 내보내고 결판에 들어갔다.
20. 존슨의 방미초청
시나외상은 맞은편의 이동원장관에게 "어떻게 할 수 없을까…"라고 말을 흐렸다.
"이장관, 이번 교섭이 실패하면 일한회담은 또 몇년 늦어질 것입니다. 이장관이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 차례요."
이장관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대신께서는 저의 부친보다도 연장자이십니다. 저같은 어린 나이의 인간도 목숨을 걸고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일본안에만 집착하십니까. 생각을 다시 해봅시다."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데."
이동원 장관은 방을 나서서 연하구국장을 찾았다. 연국장과 우시로쿠국장은 문밖에서 두 장관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직업외교관인 두 국장은 외교경험이 적은 두 장관을 걱정하고 있는 눈치였다.
이장관은 연국장을 향해서 "연구해 보았는가"라고 물었다.
"예, 무리는 좀 있습니다만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갖고 들어오시오."
이장관은 연하구 국장이 가져온 메모를 시나 앞에 내놓았다. 일본측은 '대한민국의 관할권은 휴전선 이남에 한정된다'는 부분을 포기하고 한국측은 '국제연합의 결의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유일합법정부'란 문안에 동의한다는 절충안이었다. 시나는 우시로쿠와 의논하더니 "이 정도라면 본국에 설명이 되는데…"라고 반응했다.
"좋아요. 본국측에 대한 설득은 내가 책임을 질테니 귀하도 한국측을 책임지세요."
시나가 너무 적극적으로 나오자 이동원은 한 발 물러섰다.
"안됩니다. 대통령의 양해를 얻지 못하면 안됩니다."
이렇게 하여 양측은 상부의 재가를 얻은 다음 시나가 귀국하는 이날 오후에 기본조약 가조인식을 갖기로 했다. 당시 한일간의 국제전화는 사정이 좋지 않았다. 일본측은 한국군과 재일미군 사이의 군용전화선을 이용하기로 하고 오전 6시부터 30분 간격으로 총리, 자민당 부총재, 간사장, 외무차관에 연결시켜줄 것을 부탁하고 헤어졌다. 이미 시계는 1965년 2월20일 새벽 2시를 넘고 있었다.
이장관은 청와대로 가서 진해의 박정희 대통령 숙소로 전화를 걸었다. 박 대통령은 자지 않고 이장관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장관에게 합의한 문안을 읽어보라고 했다.
"어떻게 생각해?" "이 정도라면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나 외상은 뭐라고 하던가." "그분도 일본 국회에서 설명할 수 있겠다고 했습니다."
"좋아, 그대로 하게."
이날 아침 시나 외상은 사토 총리에게 합의사항을 보고했다. 사토는 몇 가지 질문을 하더니 재가했다. 1951년에 한일회담이 시작된 이래 14년만에 드디어 국교정상화의 돌파구가 열린 순간이었다. 20일 오후 2시 외무부 회의실에서 연하구와 우시로쿠 국장 사이에 가조인된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은 7조로 되어 있었다. 쟁점이 되었던 2, 3조는 이렇게 확정되었다. 제2조='1910년 8월22일 또는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제3조='대한민국 정부가 국제연합 총회 결의 제195호에 명시된 바와 같이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확인한다'.
한일간 외무장관 회담이 서울에서 열리고 있던 2월19일 사이공에서는 또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 1963년 가을 고딘디엠 대통령이 쿠데타로 무너진 이후 여덟번째의 쿠데타였다. 타오 대령이 주미월남대사 키엠 장군을 업고 일으킨 이 쿠데타 기도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구엔 칸 장군을 지지하는 부대가 사이공을 탈환함으로써 이틀만에 실패로 끝났다.
베트콩의 공세가 강화되고 미군의 월맹폭격이 연일 계속되는 가운데서 2월25일 비둘기 부대 약 2000명이 사이공항에 도착했다. 박대통령은 본격적인 전투부대 파견의 교두보를 만든 것이다. 1965년 1월14일 김형욱 정보부장은 김현철 주미대사와 함께 백악관을 찾아가 국가안보회의 간부 체스터 L. 쿠퍼와 만났다. 김부장은 "박대통령은 (월남문제와 관련하여) 존슨 대통령이 요청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기꺼이 협조할 생각이다"라고 본심을 털어놓았다.
브라운 주한 미국대사는 2월22일 박대통령에게 존슨 대통령의 방미 초청장을 전달했다. 박대통령 부처가 오는 5월17-18일 국빈으로서 워싱턴을 방문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초청의 가장 큰 목적은 한일국교정상화 회담과 관련하여 양국의 관심사를 논의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나중에는 전투부대의 파월이 새로운 의제로 추가된다.
3월4일 김현철 대사는 백악관에서 쿠퍼를 다시 만났다. 그는 시나 방한 후의 한일회담 진전상황에 대한 문서를 전달한 뒤 이렇게 떠보았다.
"한국이 전투병력을 월남에 파병하겠다고 제의한다면 미국은 관심을 가질 것인가."
쿠퍼는 "우리는 아직 제3국의 병력을 사용할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고 답했다.
21. 1개 전투사단 파월 요청
1965년 3월12일 월남전선을 시찰하고 돌아온 미국 육군참모총장 존슨 장군은 '한국군 1개 사단을 포함한 3개 사단의 추가투입'을 상부에 건의했다. 3월16일엔 미국 해병대 2개 대대가 월남의 다낭에 상륙했다. 지상군 전투부대가 최초로 참전함으로써 월남전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3월부터 미국 정부는 막후에서 한국군 전투부대의 파병을 위한 정지작업을 시작한다.
브라운 주한 미 대사와 이동원 외무장관 사이에서 탐색전으로 전개되던 한국군의 전투부대 파월 문제가 공식적으로 논의된 것은 3월15일. 이날 워싱턴을 방문한 이장관은 러스크 국무장관과 3시간에 걸친 오찬회담을 가졌다.
회담을 마치고 나온 이장관은 기자들에게 "러스크 장관에게 월맹과의 협상에 반대한다는 한국측의 입장을 전달했다. 미국과 월남 정부가 한국 전투부대의 원조를 필요로 한다면 그런 요청을 진지하게 고려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 회담에서 러스크 장관은 한-일간의 기본조약 가조인에 만족했으며 국교정상화 회담의 조기 타결을 희망했다. 이동원 장관은 18일엔 존슨 대통령을 만나 30분간 요담했다.
'카우보이 존 웨인'을 연상시키는 거구의 존슨은 인사를 마친 뒤 긴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기지가 많은 이장관은 담배를 한 개비 빼물고 "각하, 불 좀 빌릴 수 있을까요"라고 했다. 존슨은 다리를 내리고 자세를 고쳐잡은 뒤 라이터를 내밀어야 했다고 한다.
이날 주된 화제는 전투부대의 월남파병이었다고 한다. 이장관은 한국군이 월남에 갈 경우 미국이 부담해 주길 바라는 여러 항목을 설명하고 존슨의 언약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회고록 '대통령을 그리며').
4월 들어서 미국정부는 한국 전투부대의 파병을 성사시키기 위해 바쁘게 움직인다. 4월1일 대통령 안보보좌관 맥조지 번디가 존슨 대통령에게 보고한 메모를 읽어보면 워싱턴 당국은 한국군 1개 전투사단의 파월을 전제로 한 월남전 확대전략을 구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메모에서 맥조지 번디는 '국무장관의 의견으로는 한국의 국내사정이 미묘하긴 하지만 한국정부와 조용하게 접촉하여 현재 월남에 주둔하고 있는 한국군 2000명을 보강하는 형식으로 전투부대를 파견하도록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1965년 4월15일 러스크 국무장관은 사이공의 주미대사 테일러에게 '월남정부와 연대규모의 한국군 전투부대를 파견하는 문제를 논의해보고 월남정부가 그런 파병제의를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한국에 하도록 만들라'고 지시했다. 테일러는 이틀 뒤 '대규모 외국군 부대를 투입하는 문제에 대해서 그들의 동의를 얻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월남정부는 한국군의 파병이 자신들을 도우려는 것이라기보다는 미국 정부가 국내여론 무마용으로 만든 것이라는 불신감을 갖고 있었다. 미국정부는 이런 월남정부에 대해서 외국군을 받아들여야 군수지원을 하겠다는 식으로 압박을 가해 한국정부 등에 전투부대의 파견을 요청하도록 만들었다.
월남정부는 비전투 한국군의 파견도 반기지 않았다. 1965년 2월에 파견된 비둘기부대의 선발대장으로 월남에 미리 도착하여 복잡한 행정문제를 처리했던 이훈섭 준장은 '그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 - 베트남 파병 선발대장의 회고'란 책을 썼다. 이장군의 회고에 따르면 한-미-월 합동회의에서 한국군은 월남군의 작전통제하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자 월남최고사령부 작전참모부장인 탕 장군이 일어서더니 이렇게 말하더란 것이다.
"한국이 우리나라를 위해 군대를 파견한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그런 지원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귀국에 대해 원조를 요청하라는 설득을 미국 정부로부터 받았습니다."
한국 전투부대의 파병이 미국정책으로 공식 채택된 것은 1965년 4월20일 호놀룰루의 미 태평양 사령부에서 있었던 고위 전략회의에서였다. 이 회의에는 맥나마라 국방장관을 비롯, 존 T. 맥노턴 국방차관, 윌리엄 번디 국무차관, 합참의장 휠러 대장, 주월 미국대사 맥스웰 테일러, 미 태평양지역 사령관 샤프 제독, 주월 미군사령관 웨스트 모어랜드가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미군 수뇌부는 단기간에 호지명의 월맹과 베트콩이 굴복할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하고 미 공군에 의한 북폭의 계속과 병력의 증강을 존슨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로 했다.
당시 월남에는 3만3500명의 미군과 2000명의 한국군(비둘기 부대)이 주둔하고 있었다. 미군 수뇌부는 미군 8만2000명과 한국, 호주, 뉴질랜드 군 7250명의 증강을 건의하면서 추가적인 증강을 위해서 한국군 1개 전투사단(1만4500명)의 파병을 추진하기로 했다. 한편 브라운 주한미국 대사는 맥조지 번디 보좌관에게 한국정부가 전투병력 파월에 적극적인 점을 지적하고 '이런 움직임에 대해서는 아주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잘못하면 한국정부의 전략에 말려들어 필요 이상의 부담을 미국이 져야 할 것이란 충고이기도 했다.
정상회담 후에 발표될 공동성명서 문안은 상당기간 전부터 검토되는데, 5월1일 주한 미대사관이 작성하여 국무부에 보고한 16일 뒤로 예정된 한미정상회담 성명서 초안에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선물을 많이 준비하고 있었다.
<주한미군의 현수준을 유지한다, 군사원조를 현수준보다 늘린다, 군원이관 (한국군에 대한 군사원조를 삭감하여 한국군의 부담을 늘리는 것)을 재검토한다.>
월남전의 확전을 결심한 미국측은 박정희-존슨 정상회담에서 1개 전투사단의 파월에 대한 박대통령의 확답을 받아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몰리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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