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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
−자본론으로 21세기 경제를 해설하다
한지원 지음, 한빛비즈 2021
비트코인은 새로운 화폐인가?
보편적 등가물에 대한 이해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 ‘돈’이다. 돈으로 표현되지 않는 것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그런데 이 돈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두고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비트코인Bitcoin으로 대표되는 암호화폐Cryptocurrency가 유행하면서부터다. 미래의 돈이라고 평가받는 비트코인은 2010년 1코인에 100원 정도로 거래되다 2017년 말에는 2,000만 원에 거래됐다. 비트코인을 화폐로 인정한다면 환율이 7년 만에 무려 20만 배 뛴 셈이다.60
비트코인은 블록체인Blockchain 암호기술로 만들어진 일종의 디지털 영수증이다. 디지털 영수증의 목적은 개인 간 거래의 신뢰도를 높이는 것이다. 비트코인 시스템은 이 영수증을 제한된 개수로 발행해 영수증 자체를 희소성 있는 교환수단으로 만든다. 영수증은 참여자가 채굴로 불리는 특정 계산을 완료하면 발행된다. 이런 비트코인이 미래화폐로 주목받는 이유는 중개기관 없이도 교환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60-61
그렇다면 비트코인이 머지않은 미래에 실제 화폐를 대체할 수 있을까? 비트코인이 잠재적인 화폐라면, 비트코인 환율이 이렇게 폭등과 폭락을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번 장에서는 《자본》의 화폐이론을 살펴보며, 비트코인이 화폐가 될 수 있는지 따져보겠다.61
교환수단이 화폐인가?
통화주의 경제학의 대부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은 “화폐는 교환수단일 뿐 실제 상품의 가치에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라며 “어떤 외양이나 환상, 신화든지 그에 대한 사람들의 확고한 믿음이 있다면” 화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교도소 죄수들이 사용했다는 캔 뚜껑, 태평양의 한 섬에서 사용했다는 커다란 석회 돌 등도 화폐의 사례로 제시된다. 우리가 사용하는 한국은행권 지폐도 신사임당, 세종대왕 초상화가 특수 잉크로 인쇄된 종이 쪼가리일 뿐인데, 이것이 화폐가 되는 것은 우리가 모두 그 종이 쪼가리가 교환수단이 된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트코인도 사람들이 믿기만 한다면 화폐로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61
교환수단으로서 화폐는 교환대상에 비해 그 양이 많아지면 상대가치가 하락한다. 즉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교환수단은 상품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니, 양자의 교환비율은 오직 상대적 수량에 의해 결정될 뿐이다. 이것이 경제학의 오래된 교리 중 하나인 화폐수량설이다.62
경제학 교과서들은 화폐수량설의 실증적 사례로 2008년 짐바브웨 사례를 든다. 짐바브웨에서는 2008년 화폐가치가 폭락해 100조 단위 지폐가 발행됐다. 화폐가치 폭락 속도가 너무 빨라, 점심을 먹고 나면 오전보다 음료수 가격이 50퍼센트 올라있을 정도였다. 경제학 교과서 저자로 유명한 그레고리 맨큐는 “짐바브웨는 여러모로 전형적이다. 대규모 재정적자로 통화량이 크게 늘고 높은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고 분석한다.62
그러나 직관적으로 당연해 보이는 화폐수량설은 현실을 절반만 보여주는 결함이 있다. 상품 생산에 필요한 노동의 증감이 화폐로 표현되는 것(물가 상승)과, 화폐가 표현하는 노동의 증감이 상품가격의 변화로 나타나는 것(인플레이션)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로 농산물만 있는 국민경제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기후변화로 농산물 생산에 필요한 노동이 두 배로 늘면 물가는 두 배 상승한다. 농산물 생산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현금만 두 배로 늘면 현금의 가치가 절반으로 하락한다. 전자가 물가 상승, 후자가 인플레이션이다. 상품가격이 두 배로 뛴 현상은 같으나 이 둘은 원인이 전혀 다르다.62
짐바브웨는 1990년대 후반부터 산업 기반이 무너지며 2000년대 내내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였다. 토지개혁에 실패해 식량 생산이 절반으로 줄었고, 제조업 가동률도 20퍼센트 미만으로 하락했다. 실업률은 80퍼센트가 넘었다. 광물 수출로 얻은 외환을 식량 수입에 사용해 가까스로 경제를 유지했지만, 2000년대 중반부터 광물 수출이 인프라 파괴로 감소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8년 세계금융위기로 광물 가격마저 폭락하자 결국 경제가 붕괴하고 말았다. 외화 부족으로 식량을 수입하지 못해 식량 가격이 폭등했고, 이에 연관된 다른 상품들의 가격도 함께 상승했다. 정부는 식량을 비롯한 공공 물품을 사기 위해 중앙은행에 국채를 넘기고 화폐를 받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유통되는 화폐량이 폭증했다. 화폐 발행을 남발해 통화가치가 폭락한 것이 아니라, 상품가치의 폭등에 대응해 화폐량이 같이 폭증했다는 것이다. 즉, 화폐량은 짐바브웨 사태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다.63
통화수량설의 역사적 증거로 자주 인용되는 1920년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혼란도 마찬가지다. 경제학 교과서들은 물가 지수와 통화량 지수가 비슷한 추이로 1조 배 증가하는 그래프를 그려놓고, 이를 화폐수량설의 직접적 증거라고 설명한다. 교환수단인 통화가 마구 발행되어 통화가치가 폭락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인과관계가 뒤집어진 것이다.63
제1차 세계대전 때 패전국이었던 독일은 갚을 수 없을 만큼 큰 전쟁배상금을 금으로 지불해야 했다. 승전국들은 배상금으로 자기 나라의 전정 적자를 해결하려고 했다. 독일 정부는 금을 얻기 위해 수출을 늘려야 했지만, 생산시설 상당 부분이 전쟁으로 파괴돼 생산량은 국내 수요조차 충족하지 못했다. 휴전 직후 독일은 금 준비금을 비롯해 철도, 차량, 선박 같은 장비들을 모두 승전국에 빼앗겼고, 심지어 석탄도 무상으로 송출해야 했다. 승전국 국민의 정서는 “독일놈들이 대가를 치러야 한다!”였다. 1921년 3월 독일이 승전국들의 예비 요구사항 일부를 준수하지 못하자, 연합국 군대는 뒤셀도르프, 뒤스브루크 등의 라인강 동쪽 도시들을 즉각 점령했다. 1923년에는 루르 탄광지역도 점령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상품 부족으로 물가가 치솟았고, 정부는 공공물품 구매와 배상금으로 쓸 금을 확보하기 위해 화폐 발행을 늘렸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에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야기했다. 독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 역시 화폐량의 증가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다는 것이다.63-64
화폐수량설은 상품가격이 오르는 원인을 항상 화폐수량이 증가한 데서만 찾는다. 이렇다 보니 화폐수량설을 강령으로 삼은 통화주의 경제학자들은 화폐긴축을 인플레이션에 대한 만병통치약처럼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짐바브웨나 바이마르 독일 시기의 혼란에서 본 것처럼, 상품가격 상승의 원인을 화폐수량 변화에서만 찾는 것은 절반의 진실 그리고 절반의 거짓이다. 짐바브웨에서 화폐를 발행하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생필품 부족과 중앙은행 자산의 부실로 화폐 시스템이 붕괴했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독일 경제는 1925년 즈음 어느 정도 안정화되었는데, 이는 긴축이 아니라 1924년 미국의 도즈 계획Dawes Plan에 따라 배상금 징수 정책이 완화됐고, 미국이 독일에 막대한 차관을 제공한 덕분이었다.64-65
물론 화폐수량적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 말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한다며 당백전을 무분별하게 발행해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야기했다. 그런데 당백전은 금속으로서 가치도 업었고, 현대적 의미의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화폐와는 더욱 거리가 멀었다. 그냥 흥선대원군이 백성을 상대로 사기 친 것에 가까웠다. 현대적 경제 제도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서유럽에서도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현대적 경제 제도가 갖춰진 이후에도 정부가 마구잡이로 화폐를 찍어내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경우는 사례를 찾기 어렵다.65
본질은 보편적 등가물
노동가치론의 논리 전개에 따르면 화폐의 본질은 상품에 대한 ‘보편적 등가물general equivalent’이다. 보편적 등가물이란 어떤 상품에 대해서든 그것과 같은 가치를 표현할 수 있는 상품이라는 의미이다. 예로 길이의 보편적 등가물은 빛의 속도다. 과학자들은 빛이 진공에서 2억 9,979만 2,458분의 1초 동안 가는 거리를 1미터라고 정의한다. 상품 세계에서 빛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화폐다. 100원짜리 상품은 1원의 100배에 해당하는 노동이 생산에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모든 상품은 보편적 등가물인 화폐로 자신을 표현해야 시장에서 비로소 거래될 수 있다. 화폐가 보편적 등가물이 되는 것은 상품 생산에 필요한 인간 노력이 시장에서 화폐와 교환되어야 사회적 노동이 되기 때문이다. 화폐는 인간 노력을 사회적인 노동 한 단위로 양자화 한다.65-66
원리적으로 어떤 노동생산물이든 등가물이 될 수는 있다. 예로 조선시대에는 쌀의 무게로 상품 교환의 기준을 정했고, 전쟁 시기에는 기름이나 통조림 같은 생산물이 교환의 등가물 역할을 하기도 한다.66
하지만 이런 등가물들은 특수한 상황에서만 교환수단이 될 뿐이다. 사회 전체의 인간 노력을 추상화하고 수량화하는 역할을 하지는 못한다. 보편적 등가물은 인간 노력의 시작과 끝을 모두 자신으로 표현할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참고로,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보편적 등가물로 역할해 온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 금, 은 같은 귀금속 노동생산물들이었다. 금화나 은화는 태생적으로 보편적 등가물이 될 운명을 타고났는데, 보편적 등가물이 필요로 하는 균질성, 가분성, 내구성, 편리성 등을 두루 갖췄기 때문이다.66
현재는 금화나 은화 같은 금속화폐가 사용되지는 않는다. 중앙은행권을 화폐로 사용한다. 그런데 노동생산물인 금화와 달리 중앙은행이 발행한 현금은 생산하는 데 노동이 크게 필요치 않다. 예로 오만원권 지폐를 생산하는 데에는 그 가치의 0.4퍼센트인 200원도 들지 않는다. 지폐가 표현하는 노동은 그 생산에 필요한 노동과 관련이 없다. 그래서 오늘날의 화폐는 금속화폐처럼 생산에 필요한 노동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등가물 역할을 할 수는 없다.66-67
그렇다면 현대의 화폐는 어떻게 보편적 등가물이 될 수 있을까? 먼저 현대 화폐가 발행되고 유통되는 메커니즘부터 살펴보자.67
오늘날의 화폐는 한국은행, 미연방준비은행FRB 같은 중앙은행에서 발행한다. 발행의 시작점은 정부가 발행한 국채를 중앙은행권, 즉 현금과 교환하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10조 원 국채를 한국은행에 주고, 한국은행이 10조 원 현금을 정부에 주면, 정부가 그 현금을 지출하면서 화폐가 유통된다. 한국은행은 자신의 대차대조표에 국채를 자산으로, 현금을 부채로 기록하는데, 이는 자산의 가치와 현금의 가치가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67
국채는 정부의 빚 증서로, 세출이 세입보다 클 경우 발행된다. 그리고 만기 때 시민의 세금으로 상환된다. 논리적으로 보면 현금이 표현하는 중앙은행 자산인 국채는 정부 세금 수입에 대한 청구권이고, 세금은 시민의 노동 중 일부이기 때문에, 현금은 현재와 미래의 시민 노동과 등가 관계를 맺는다. 물론 시민의 수입에는 임대료나 주식배당 같은 자산수입도 있다. 하지만 자산수입은 다른 누군가의 노동이 이전되는 것에 불과하다. 세금으로 징수되는 수입은 최종적으로 시민의 지출된 노동 중 일부일 수밖에 없다.67
그런데 이 등가 관계는 구조적으로 불안정하다. 예로 한국은행이 만기가 10년 후 돌아오는 국채를 가지고 있다면, 이는 10년 후 시민의 노동으로 상환되어야 한다. 이는 실제 지출된 노동이 아니라 미래에 지출될 것으로 기대되는 노동이다. 만약 10년 내 국민경제에 심각한 침체자 발생하면 그 기대는 실현되지 못할 수도 있다. 국채처럼 미래 노동에 대한 청구권에 가격을 붙여 금융자산으로 만든 것을 가공fictitious자본이라고 부른다. 가공은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불안정하다.68
정부는 민간에 중앙은행권으로 각종 비용을 지급해 중앙은행권을 유통한다. 국민들은 현금으로 불리는 이 중앙은행권을 사용해 상품을 팔고 사며, 빚을 지고 갚는다. 국민들이 중앙은행권을 사용하는 이유는 국가가 강제로 그것을 유통하기 때문이다. 한국은행법 48조는 “한국은행이 발행한 한국은행권은 법화로서 모든 거래에 무제한 통용된다”고 정해놓았다. 판매자, 채권자는 한국은행권으로 상품을 구매하고 채무를 청산하는 것을 거부할 수 없다. 채무자가 현금으로 빚을 갚겠다는데 악덕 채권자가 신체 장기로 빚을 갚으라고 강요할 수 없고, 대기업이 중소기업과 거래할 때 상품 대금을 현금이 아닌 기술특허권으로 내놓으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정부 역시 세금을 징수할 때 별다른 사유가 없는 한 한국은행권으로만 받는다. 이렇게 중앙은행권은 중앙은행이 보유한 자산과 강제통용권을 기반으로 국가 내에서 보편적 등가물 역할을 한다.68
화폐는 하나의 상품이기도 하다. 화폐 상품의 효용은 정부가 보증하는 거래 수단, 지불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케인스는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에서 화폐를 가장 안전한 내구재 상품의 하나로 정의했다. 투자자들은 미래가 불안할 때 가동률이 낮아져 가치가 하락할 수 있는 설비 내구재 상품 대신 가장 안전한 내구재 상품인 화폐 상품을 보유하려고 한다. 이것이 ‘유동성 선호’이론이다. 그런데 《자본》은 케인스와 달리 화폐 상품의 일반적 성격보다 특수한 성격에 더 주목했다. 특수성이란 화폐 상품은 시장에서 생산될 수 없는 상품이라는 점이다. 화페는 시장 내의 기업이 아니라 시장 밖 국가가 생산할 수 있다. 시장경제가 국가를 필요로 하는 이유도 바로 이 특수한 상품의 생산과 관련되어 있다.69
화폐를 보편적 등가물 역할을 하는 특수한 상품으로 이해하면, 분명하게 인플레이션과 물가 상승을 구분할 수 있다.69
인플레이션은 화폐 가치의 하락, 즉 화폐가 표현하는 노동이 감소하는 현상이다. 화폐에 대응하는 중앙은행 자산의 가치가 절반으로 하락하면 화폐가 표현하는 노동 역시 절반으로 감소한다. 이 경우 상품 생산에 필요한 노동을 표현하는 화폐의 수량, 즉 가격은 두 배 상승한다. 이것이 화폐 가치의 하락인 인플레이션이다. 반면 물가 상승은 상품 생산에 필요한 노동의 증가를 뜻한다. 화폐가 표현하는 노동에 변화가 없을 때, 같은 상품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이 두 배로 증가하면 상품의 가격도 두 배 상승한다. 이것이 물가 상승이다. 앞서 본 짐바브웨와 바이마르 독일에서 나타난 경제현상은 생산 붕괴로 인한 물가 폭등이 원인이었다. 화폐가치의 하락인 인플레이션은 물가 폭등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결과였다.70-71
화폐 숭배
화폐를 보편적 등가물이라는 특수한 상품으로 이해하면, 상품 경제에서 개인과 사회가 연결되는 메커니즘도 파악할 수 있다. 상품 경제에서 보편적 등가물인 화폐는 개인과 사회를 연결한다. 개인적 노력은 화폐의 인정으로 사회적 노동이 된다. 화폐와 교환되지 못하는 인간 노력은 개인적으로 쓸모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사회적으로 쓸모를 인정받지는 못한다. 개인은 직장에서 돈을 벌어야 비로소 사회인이 된다. 개인이 돈을 벌지 못하면 경제적으로 빈곤해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회적으로도 고립된다.70
오늘날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물신숭배fetishism 현상은 상품경제에서 화폐가 사회성 그 자체로 나타나기 때문에 발생한다. 사회적 생산물은 인간 사이의 관계를 통해 생산되지만, 이런 사회성은 화폐를 통해서만 드러나기 때문에, 인간이 아니라 화폐가 사회적 주체로 등장한다. 사람들이 “돈, 돈, 돈”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단지 그들이 도덕적으로 속물이어서가 아니다. 상품 경제의 필연적 결과다. 화폐로 매개되는 상품 관계에서 인간은 서로를 직접 대면할 수 없다. 종교지도자들은 “돈은 악마의 배설물”이니 “돈보다 사랑”이니 하는 말들로 사회 현상들을 비판하는데, 이런 비판은 현실 앞에서 무기력하다. 물신숭배는 도덕의 문제 이전에 물질적 관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70-71
화폐를 사회성 그 자체이자 부의 근원으로 여기는 관념은 상품 경제를 지속시키는 중요한 힘이기도 하다. 현대 사회는 봉건제처럼 강제로 일을 시키는 사회가 아니다. 개인들이 자신의 의사에 따라 시장에 참여하도록 보장하는 사회다. 개인은 기본적으로 수입을 얻기 위해 시장에 참여하지만, 돈을 충분히 벌었다고 시장에서 철수하지는 않는다. 돈을 버는 것에서 성취감을 얻고, 사회적 인정을 받기 때문이다. 사회성으로서 화폐를 모으는 것이 사회적 인간으로 성숙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물신숭배는 강제를 자발로 바꾸는 현대 사회의 주술이다. 이 주술이 없다면 개인들은 자신의 의사에 따라 적극적으로 그리고 지속해서 시장에 참여하지는 않는다. 상품 경제도 지속하기 어렵다.71
비트코인은 화폐가 될 수 없다
화폐는 교환수단, 지불수단, 세계화폐라는 기능을 가진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돈으로 상품을 사고팔며, 돈으로 빚을 지고 갚고, 돈으로 국가 간 무역거래를 결재한다. 경제학은 화폐의 기능만 분석하는데, 이렇다 보니 비트코인에 대해서도 기술적으로 이런 기능들을 실현할 수 있는지에 주목할 뿐이다.71-72
경제학은 화폐의 본질을 교환수단으로 규정한다. 밀턴 프리드먼은 “사람들의 확고한 믿음”만 있다면 어떤 것이든 화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사람들에게 확고한 믿음을 줄 수 있는 조건과 방법이다. 개별적 노력을 사회적 노동으로 양자화 할 만큼 강력한 힘을 가져야 숭배할 만한 대상이 될 수 있고, 숭배할 만한 대상이 되어야 사람들이 확고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즉 보편적 등가물이어야 숭배대상이 되고, 교환수단도 될 수 있다.72
이런 점에서 비트코인은 교환수단 조차 될 수 없다. 무의미한 연산으로 만들어지는 디지털 영수증에는 어떤 사회적 노동도 없다. 심지어 비트코인은 중앙관리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강제통용력을 가질 수도 없다. 발행기관의 보유자산과 화폐수량 사이 등가 관계가 수립되지 않는다. 비트코인은 기껏 해봐야 물물교환의 영수증 역할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비트코인 상당수가 마약, 뇌물 같은 사법당국의 눈을 피하기 위한 당사자 간 거래에 사용되고 있다는 것도 이를 방증한다.72
지불수단 기능도 살펴보자. 오늘날 경제활동은 시작부터 끝까지 빚을 지고 빚을 갚는 관계로 이뤄진다. 경제활동의 채권·채무 관계를 신용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평상시 사용하는 신용의 대표적 사례는 신용카드다. 우리는 신용카드로 외상거래를 한 뒤 결재일에 그 외상을 청산한다. 자동차나 주택 같은 값비싼 내구재 상품을 살 때도 신용이 유용하다. 수천만 원의 자동차를 할부가 아니라 한번에 현금을 주고 사야 한다면 자동차를 살 수 있는 사람은 지금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 기업들도 투자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상적으로 빚을 이용한다. 공장을 새로 지을 때 자신이 축적한 이윤만 사용해야 한다면 사업을 확장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자금을 차입해 공장을 짓고, 공장을 가동해 얻은 이윤으로 빚을 갚는 것이 은행과 기업 모두에게 이득이다. 이런 신용관계에서 화폐는 빚을 최종적으로 청산하는 역할을 한다.72-73
화폐로 빚을 청산할 수 있는 것은 화폐가 보편적 등가물이기 때문이다. 빚을 다른 빚으로 갚을 수도 있겠지만, 빚이 다른 빚으로 이어지는 사슬이 무한히 이어질 수는 없다. 빚의 사슬이 지불의 사슬로 바뀔 때는 화폐가 등장해야만 한다. 만약 화폐가 채권·채무 관계를 청산하지 못하면 채권·채무자가 줄줄이 파산하는 부도의 사슬이 나타난다.73
경제학은 화폐와 신용을 정확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신용관계에서 채권자가 가진 빚 증서를 금융자산이라 부르는데, 경제학은 화폐를 금융자산의 하나로 취급한다. 예로 은행의 빚 증서인 100만 원 적금통장과 현금 100만 원은 경제학에서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그래서 신용과 화폐를 합해 통화currency로 통칭해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금융자산과 화폐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평소에는 신용과 화폐 사이에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경제위기가 닥쳐 채권·채무 관계에 대한 청산이 필요해지면 신용과 화폐가 구별되는 진실의 시간이 온다. 모두가 지불수단으로서 화폐를 찾기 때문이다.73
비트코인이 지불수단이 될 수 없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컴퓨터 연산으로 만들어진 디지털 영수증으로 채권·채무 관계를 청산할 수는 없다. 채권자가 비트코인으로 채무를 청산해 얻을 것이 없어서다. 심지어 비트코인은 제대로 된 금융상품도 아니다. 금융상품은 청구할 대상과 내용이 있어야 하는데, 비트코인은 그 어떤 대응물도 가지고 있지 않다. 비트코인은 일종의 폰지(다단계사기)와 더 비슷하다. 비트코인 가격이 오르는 것은 더 많은 투자금이 유일될 때뿐이다.73-74
마지막으로 세계화폐 기능을 보자. 화폐는 국가 간의 지불, 즉 무역수지를 결제하는 수단이다. 전통적으로 금화 같은 금속화폐가 세계화폐(금본위제로 불린다)로 쓰였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는 금태환 기능을 가진 달러가 세계화폐(브레턴우즈 체제로 불림)로 사용됐고, 1970년대 이후에는 태환 기능이 없는 달러가 세계화폐로 사용되고 있다. 미국 내에서 인정되는 보편적 등가물인 달러가 세계화폐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은 미국이 달러를 세계에 유통할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1970년대 이래 금융과 군사의 세계화를 통해 이런 힘을 꾸준하게 키웠다.74
그렇다면 비트코인이 세계화폐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비트코인 찬양자들은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인터넷 암호화폐의 특징을 강조한다. 하지만 비트코인은 어느 나라에서도 보편적 등가물이 아니다. 더군다나 월스트리트 금융기관이 비트코인으로 금융시장을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미국의 항공모함이 비트코인으로 건조되는 것도 아니다. 달러가 세계화폐가 될 수 있는 조건을 비트코인은 아무것도 갖추지 못했다.74
정리해보자. 비트코인은 화폐가 아니고 될 수도 없다. 청구권 있는 금융자산도 아니다. 비트코인 열풍은 폰지 사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사기가 세계적으로 통하고 있는가? 경제학의 착각 탓이다. 그리고 이런 경제학의 결함 때문에 세상 모두가 돈이 무엇인지 헷갈려 하고 있다. 경제학의 화폐이론은 화폐의 본질을 교환수단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이상에서 봤듯, 화폐의 본질은 노동의 보편적 등가물이다. 다른 기능들은 이로부터 파생되어 나온다.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