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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나라 남겨진 흔적
음집벌국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형님의 죽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그에게 칼을 휘두른 자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왜 도망쳐야만 하는가? 떠나라는 김 형의 다급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아프게 때린다. 내 품을 적신 달비의 뜨거운 눈물이 아직도 내 가슴골에서 슬프게 흐르는 듯하다. 구름에 가려진 별들은 빛을 잃었고, 달빛마저 희미한 어둠 속에서 나는 허둥지둥 산을 오르다, 그만 멈추곤 주저앉았다. 이제야 땀범벅을 느낄 수 있었다. 거머리처럼 몸에 달라붙은 속옷이 따끔했고 거슬렸다. 산바람이 가닥 없이 사늘하게 오가고, 무성한 풀들이 가볍게 흔들리는 소리는 냉기를 뿜어댔다. 무수한 벌레들이 찌르듯 내는 소리가 휘몰아치다, 차가운 바람을 타고 짙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어둠을 뚫을 수는 없었다. 다만 먹이를 찾는 부엉이의 간절한 울음만이 암흑을 뚫고 나를 찌른다. 새벽 어스름까지는 잠자코 기다리자. 아무리 짙은 어둠이라도 때가 되면 걷힌다던 어머니 말씀이 불현듯 떠올랐다. 여덟 번 여름을 거슬러 지난 늦은 봄이었다. 아버지는 큰 나라로 가는 것이니 배움의 기회로 삼으라고 하셨으나, 그 가는 목적이 내게 있지 않았다. 난 볼모였다. 우리 부족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책무라고 정신을 가다듬었지만, 두려운 마음마저 다잡을 수는 없었다. 야윈 손으로 내 얼굴에 드리운 어둠을 닦아내듯 쓰다듬으며, 어머니는 공수 전하듯 나를 위로하셨다. 어머니, 아무래도 어둠이 나를 삼킬 것만 같아요. 느닷없이 사무친 무언가가 가슴 속에서 울렁거렸고, 난 그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들아, 네가 알지 못하는 것까지 말하지 말거라. 이 집을 보라, 파사 왕이 주신 것이다. 계림에 이보다 큰 집이 몇 채나 있겠느냐? 이 큰 집을 둘러싼 담을 보라, 수로 왕이 주신 것이다. 계림에 이보다 높은 담벼락은 궁을 감싸고 있을 뿐이다. 저들이 경쟁하듯 나와 좋게 지내려는데, 도대체 너는 누구를 피해서 도망하였느냐?”
“아버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되었다! 지율은 들으라. 당장 계림에 사람을 보내어 내 말을 전하라. 나의 아들 탐하가 죄 없이 음집벌로 왔다. 귀국의 왕이 죄를 묻지 않는다면 다시 돌아갈 것이다.”
지율은 수심이 가득한 낯빛으로 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자리를 떴다. 그가 이곳으로 왔을 때, 나이가 고작 스무 살이었다. 아버지는 그를 낙랑에서 온 마한인이라고 했다. 그가 어떻게 왔는지 왜 이곳인지, 어린 나는 궁금하지 않았다. 우리 마을로 오고 가는 사람들은 흔했다. 더구나 나는 막 사냥을 배우던 터라, 나의 관심은 오로지 산에 있었다. 열 살이면 글도 배워야 한다는 아버지 칸의 명에 따라, 그와 나는 사제지간이 되었다.
“탐하야, 네 몰골로는 어미의 근심만 더할 뿐이다. 우선 몸을 깨끗이 하고 새옷으로 단장하거라.”
어머니가 편찮으신지 꽤 오래라고 하였다. 나는 그 소식을 전해주지 않았던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지만, 비록 알았다 한들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내겐 계림을 벗어날 자유가 없었다. 어머니는 큰산 정령을 모시는 신녀였다. 지율은 신녀가 마한에서 하늘신을 모시는 천군과 다를 바 없다고 하였다. 저 먼 하늘에도 정령이 있다고? 무엇이든 믿을 수 있었던 어린 나에게도 와닿지 않았지만, 굳이 되묻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산에서 내려와 벌에서 지내야 하는 삶을 탐탁지 않아 하셨다. 나는 모를 수가 없었다. 해마다 겨울이 지날 무렵과 올 무렵 달포 정도 큰산에 다녀오셨을 때, 어머니 얼굴에는 생기로 충만하였다. 언젠가 정령을 보셨는지 어머니께 여쭤봤다. ‘아니, 느낀단다. 달이 차오르듯, 온몸에 정령의 기운이 차오른단다.’ 어머니의 품에서 나도 정령을 느꼈을까? 나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나는 침상에 누워계신 어머니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눈물이 와락 솟구쳤다. 사그라진 달처럼 야윈 어머니 몸은 낯설었다. 등을 쓰다듬던 어머니 손길이 얼굴에 닿았다. 주름 사이로 유난히 크게 보이는 눈, 그 온화한 눈길은 갈피 잃은 나를 포근히 안았다. 이제야 내가 고향에 있음을 실감했다. 아기가 어미의 행동을 따라 하듯, 나는 미소를 지으며 어머니 얼굴을 지긋이 바라봤다.
“탐하야, 네 눈물이 복잡하구나. 돌아왔으니 되었다.”
“사내의 눈물이 아니라서 그렇소! 계림 사내들이 여인네를 닮아가더니, 탐하가 계림 사내가 되었구려.”
뒤에서 쯧쯧대던 아버지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나와 어머니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탐하는 곧 다시 돌아갈 것이오.”
약간의 오해가 있어 잠간 왔을 뿐이라며, 아버지는 내가 겪은 일을 짧은 문장으로 정리하였다. 나는 어제 벌어졌던 일들이 그 말 속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무엇인지 모를 묵직한 덩어리가 가슴을 짓눌렀다. 말이 앞서는 족속이라고 비아냥거리던 여인네 닮은 사내들이 떠올랐다. 내 앞에서 그들은 당당했고 거침없었다. 괘념치 말라고 나를 위로하던 보제 형님은 이제 없다.
“당신은 산사람들의 칸이시니, 하신 말의 주인은 당신이지요. 하지만 당신의 말이 우리 집을 둘러싼 높은 담벼락에 갇혀 있으니, 어찌 하리오. 이제야 알겠어요! 당신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저 담은 우리를 보호하지 않아요. 마찬가지로 계림의 벽 안에서 우리 탐하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아요. 그러니 탐하가 돌아갈 곳은 계림이 아니에요.”
“신녀로서 하시는 말씀이오? 당신이 그랬잖아요, 몸이 성하지 않으면 마음도 어지럽다고. 당신 몸이 지금 성하지 않으니, 어찌 그 마음에 공수를 담을 수가 있겠소? 탐하야, 어머니는 쉬어야 한다. 그만 나가자.”
하늘이 참 푸르구나. 저 하늘에도 정령이 있다더니, 참 무심하구나. 구름 한 점 없는 허공을 한참 바라보다, 문득 저 가을 하늘이 예전과 다를 바 없지만 다르게 느껴진다는 점이 이상했다. 벌써 달비가 그리웠다. 혹시나 보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리움이 사무쳤다. 푸르고 높은 하늘 아래서 너를 품에 안았었지. 내게서 나왔을까 네게서 온 걸까, 그 두근거림을 나는 온몸으로 느꼈지. 그때 하늘은 깊고 넓은 자유였지. 훨훨 맘껏 나는 새들의 장소였고, 우리 즐거운 상상이 유영하는 곳이었지.
친구 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 거리 어느 지점에 있어야 할, 그 집이 없다. 잊어버린 걸까, 아니면 사라진 걸까. 예전에 없던 저잣거리는 계림의 곳과 닮았다. 사람들이 북적이고, 흥정 소리가 따갑게 오갔다. 심지어 밥과 술을 파는 가게도 있다. 어릴 적이어서 몰랐던 걸까, 그때 이곳에서는 밥과 술을 나누었을 뿐 팔지는 않았다. 계림에서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에 나는 놀라지 않았던가. 물아치도 이런 변화에 적응했을까? 정령에게 바칠 제물도 서슴없이 삼켜버린 녀석이었다. 능청맞게 떡 한 점을 내 손에 쥐어 주고는, 자신은 두 점을 입에 담은 녀석이었다. 어머니의 타이름에 정령께서는 몸이 없으니 배고프지 않을 거라고 우기던 녀석이었다. 함께 사냥을 배우던 친구였다. 배움에 있어서 언제나 나보다 한발 앞섰고, 산오름에서 그를 앞서는 또래들이 없었다. 옛 생각에 얼굴이 저절로 펴졌고, 미소를 머금었다. 참! 저 가게에서는 밥과 술만 내어놓지는 않지. 머물다간 이들의 조각조각 풍문도 엿들을 수가 있어.
“사부님! 대낮에 웬 술입니까?”
“사부는 무슨! 이리로 오시게. 안 그래도 따로 만나고 싶었다.”
지율에게서 글을 배우긴 했지만, 그 배움이 깊지는 않았다. 그가 아는 만큼만 갈 수 있었고, 나는 빠르게 다가섰다. 다만 몇 글자는 그 뜻이 계림에서와 사뭇 달라서, 비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지율은 함박 웃으며, 표주박으로 술을 떠서 내게 건넸다. 뽀얗게 잘 익은 술이다. 그리웠던 맛이다. 열다섯 살이 되던 그날 나는 처음 술을 마셨다. 그 첫술을 따라주었던 이도 지율이었다. 그는 더 이상 사부라고 부르지 말라 했다. 자신은 그 누구의 사부가 될 수 없다며, 형이라 하던지 차라리 이름을 부르라고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나는 윗사람의 말을 잘 따랐다. 나는 내키는 대로 혼용해서 불렀다. 아주 먼 옛일이 아닌데도 아득하기만 한 그 시절 기억이 뽀얗게 떠올랐다.
“형, 얼굴이 우거진 숲속 그늘 같소. 저 때문이라면 걱정 마세요. 제가 저지른 일이 아니란 걸 아는 분들이 여럿 있습니다. 경황이 없어서 도망치듯 왔지만, 다시 돌아가야죠. 아니, 돌아가야 합니다!”
“자네, 혹시 이정치방을 기억하는가?”
글을 배우는 첫날, 지율은 내게 글자가 빼곡히 적힌 죽간을 건넸다. 덕과 도를 노래하던 사람들의 글이라고 했다. 글을 처음 본 내겐 그것이 굵고 얇은 선들로 이뤄진 그림이었다. 나는 그림 같은 글자들의 음과 뜻을 외웠다. 당시 내게 그 뜻은 글자에 머물고 문장까지 닿지 않았다. 하지만 지율이 읊조리듯 풀어가는 세계가 낯설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정령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그 속에 있었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오롯이 이해하기엔 난 너무 어렸다.
“그럼요! 하하하, 말도 마세요. 정의 뜻을 우두머리라고 했다가 망신만 당했습니다. 기본 중에서도 쉬운 글자조차 모른다고 어찌나 놀리던지,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그 글자가 바를 정이라고 하더이다.”
지율은 한바탕 웃더니, 표주박에 가득한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그는 계림이 모래알처럼 보일 정도로 세상이 넓고, 들에 핀 풀보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간다고 한다. 몇 달 걸음에도 닿지 않는 곳에 나라가 있다고 들은 적이 있지만, 그의 말은 과장이 심하다. 그는 한 사람이 만든 글자가 아니니, 그 뜻이 여럿이고 한 뜻에도 글자가 여럿이라고 한다. 계림에서 글을 좀 익혔다는 자가 선현이 글자의 뜻을 밝혔고 배움은 그 뜻을 마음에 담는 것일진대, 어찌 그 뜻이 제각각일 수 있느냐며 나를 타박한 적이 있었다. 당시 주눅 든 나를 김 형이 지율과 비슷한 말로 위로하였다. 김 형은 문자가 사람의 마음을 모두 담을 수가 없으니, 배움에 있어서 그 뜻을 담아도 그 뜻에 갇히지는 말라고 했다.
“한 삼 년이었나? 어찌 보면 짧은 기간이었지. 그때 자네는 글 외우기를 잘했어. 그걸 잊지 않고 계림까지 갔었다니, 놀라워. 하하하. 좀 더 붙들고 가르칠 걸 그랬나? 아냐, 그때 자네는 이 나무 저 나무 옮겨 다니며 재잘거리는 작은 새였어. 난 그런 자네가 좋았고, 자네가 있어서 이곳이 내게 희망이었다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이 주저하듯, 지율은 천천히 술을 들이켰다. 미소마저 조금씩 삼켰다. 술과 미소를 다 담아야 토해질 말인가 보다. 나는 묵묵히 기다렸다. 그때 갑자기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어린 여자가 가게에 딸린 골방에서 뛰쳐나왔다. 뒤따라 장정 서넛이 나오면서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주인아주머니가 황망히 여자의 몸을 감싸 안고서는 사내들을 노려봤다. 어미 품에서 목 놓아 우는 아이처럼 여자는 눈물을 쏟았다.
“저런 망할 계집! 내가 너희를 지켜주는 계림 병사인 줄 모르느냐! 감히 내 얼굴을 할퀴다니!”
울그락불그락 사내가 벌거벗은 채로 소리치며 여자들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이라 나는 멍하니 지켜볼 뿐이었다. 이런 광경을 이곳 음집벌에서 볼 줄이야, 상상 너머의 일이었다. 재빨리 막아선 지율이 아니었다면, 큰 사달이 났을 것이다. 사내들은 지율과 아는 사이인 듯, 잠시 머뭇거리다 바닥에 침을 퉤퉤 뱉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주인아주머니는 지율에게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반복된 일상인 듯, 익숙한 저들의 행동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찢어진 옷 틈으로 드러난 여자의 속살이 가여웠다.
“놀랐는가? 어때? 계림도 이러한가?”
연이은 물음에 나는 무엇부터 어떻게 말할지 몰랐다. 슬프다고 중얼댔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였다. 보제 형님이 떠올랐다. 칼을 들었을 때보다 칼을 놓았을 때 지킬 수 있는 것이 크다던 그 입찬말이 아직 생생한데, 이제 그는 더 이상 누구도 지킬 수가 없게 되었다. 형님, 그래도 칼을 다룰 수는 있었어야죠! 귀족들은 저마다 귀한 칼을 허리에 차기 위해 큰 재물조차 아끼지 않던데, 왜 그러셨소. 제 한 몸 지켜낼 수가 없는데, 크든 작든 뭘 지킬 수가 있단 말이오.
“자네,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가? 자, 술 한 잔 받으시게.”
“아, 참! 그나저나 물아치가 있는 곳을 아십니까? 분명 그 친구 집이 이 근처 어디였는데,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물아치, 그 버릇없는 녀석! 이곳이 그 녀석 집터였지.”
물아치는 산사람이 되었다. 흐뭇한 미소가 다시금 지율의 얼굴에 그려졌다. 물아치에겐 그런 힘이 있었다. 그와 함께하는 그 순간에는 조만한 걱정거리마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이 자리에 없는 물아치지만 우리를 추억으로 가볍게 끌어당겼다. 나야 칸의 명에 따라 지율을 사부로 모시고 글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물아치는 그렇지 않았다. 물론 그 지점에서 나와 지율의 기억이 사뭇 달랐지만, 누구의 기억이 옳은지는 따지지 않았다. 몸으로는 뒤처지지만 글 익힘에는 자신이 있었던 나는 순전히 한번 이겨보겠다고, 물아치를 꾀었다. 글자의 음과 뜻을 놓고 헛갈린 그에게 점잖게 다가가 따갑게 가르치는 맛이 묘하게 좋았다.
“그랬었나? 하하하. 자네가 덕도경의 글자를 다 익히고 난 뒤에도, 물아치는 가끔 왔었다네. 자네가 계림으로 떠난 뒤에는 자주 왔었지. 자네에게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도 물아치에게 많이 해줬지.”
“설마 물아치가 스스로 글을 배우려고 했다고요? 그럴 리가요! 혹시 남몰래 숨겨둔 맛난 음식이라도 내어 주었나요? 하하하. 그나저나 왜 물아치가 버릇없는 녀석이라고 성을 내셨죠?”
“내가 그랬나? 예전 서역에서 온 어떤 상인이 그러더라,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또 하나가 된다고. 물아치가 내게 그래. 하지만 내가 그와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청출어람을 말하는 건가?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내뱉고는, 지율은 취했다. 언제 밝혔는지 모를 횃불이 흔들거리고, 어둠이 취한 듯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나는 주인이 건넨 횃대를 들고, 일어섰다.
“물아치가 계림에서 자네를 찾지 못했나 보네, 자넬 구해서 함께 산으로 간다고 했거든. 떠나던 그날 녀석이 나를 꾸짖더군, 회피는 저항이 아닌 그저 도망치는 거라고. 허, 참. 거부도 저항의 하나라고 그렇게 일렀거늘. 자넨 어쩔 건가?”
했던 말을 재차 중얼거리며, 앞서 걷던 지율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내 부축을 마다하고 무릎 꿇은 채로, 그는 어린 사슴을 어루만지듯 흙바닥을 쓰다듬으며 흐느꼈다. 물아치가 계림에 왔다면, 나를 만났을 텐데. 아니, 그 성정이라면 분명 계림에 와서 나를 봤을 거야. 왜 우리는 만나지 못했을까? 북녘 하늘로 별똥별이 떨어졌다. 저 빛이 닿는 그곳에 물아치가 있을까? 사늘한 기운이 땅에도 스며들었다. 잠잠해진 지율을 부축해서 일으켰다. 지율은 들릴 듯 말 듯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떠날 거란다, 분명 그렇게 들었다. 남쪽인지 서쪽인지 어딘가에 있는 불미국으로, 아마 그렇게 말했다. 그리곤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한 노래를 읊조리듯 부르고 또 불렀다.
우두머리는 권력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권력에 의해서 사람들조차 전장의 도구가 되어버리네. 결국 인간들은 조화를 잊어버리고, 다투어 자연만물을 소유하려 드네. 이런 어이없는 현실을 보아하니, 이 세상이 어찌 될지 나는 저절로 알겠네. 대저 천하에 권력자들 도시가 많아질수록 인간들은 더더욱 권력을 지향하게 되리. 권력의 도구들이 넘쳐나고 인간들 마음은 더욱더 흐려지리. 괴이한 물건과 살생의 도구가 더욱더 많아지고, 살아있는 것조차 값어치가 매겨진 재물 되어 넘쳐나리. 아! 가엾고 슬픈 인간들이여.
계림의 왕 파사가 말하니, 음집벌국의 타추는 들으라. 오랫동안 음집벌국과 실직곡국의 경계가 분명치 않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는 금관국 수로와 상의하였고, 그의 고견에 기꺼이 따랐다. 물론 음집벌국을 특별히 생각하는 이 마음 또한 수로와 다르지 않았다. 실국곡국이 이미 바다의 경계를 차지하였으니, 우리는 뭍의 경계를 귀국에게 주었다. 나는 이를 6부 귀족들에게 알리고, 그들은 수로에게 연회로 화답하였다. 하지만 누군가 수로에게 망령을 씌워, 수로는 우리 화답에 피를 뿌렸다. 참담하게도 6부의 중심이 되는 한기부 장자가 죽었다. 드러난 바 한기부의 종 탐하리가 수로의 명에 따라 그 주인 보제를 해하고 귀국으로 도피하였다. 이에 타추는 그를 즉시 계림으로 돌려 보내어, 이 사건의 전모를 명명백백 밝히는데 일조하라.
“정녕 파사가 그리 전하라 하더냐!”
아버지 얼굴은 복잡한 얼룩으로 울렁거렸다. 목소리의 당당함과는 괴리하였다. 전언한 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틀림없음을 고했다. 회장에 모인 자들 십여 명의 침묵이 삽시간에 널찍한 공간을 빈틈없이 채웠다. 과음 탓인지 실낱같던 기대마저 뒤엉킨 탓인지, 계림에서 먹었던 기름진 음식마저 목구멍으로 차오른 것 같았다. 식은 땀을 손으로 훔치고, 주위를 둘러봤다. 세 분의 장로들은 내 눈길을 피하며, 헛기침한다. 참 좋은 분들이었는데, 어릴 적 나를 얼마나 좋아하셨나, 계림으로 떠나는 나를 얼마나 걱정하셨나. 전날 나는 그들을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그토록 야위셨는데, 아재들이 그 살을 붙이셨소? 예전과 다를 바 없는 농에 그들은 겸연쩍이 웃었다. 그 웃음과 이 헛기침은 형을 달리하나 의미는 닿아 있었다.
“헌데, 지율은 어디 있느냐!”
“먼저 알려야 할 듯하여 그 집에 들렀지만, 계시지 않았습니다. 가솔들에 따르면 어스름이 가시기 전에 봇짐 하나 매고선 어디론가 가셨다고 합니다.”
가벼운 차림새라 멀지 않은 곳으로 갔을 거라고, 전령은 가솔들의 말을 전하였다. 다시는 지율을 볼 수 없을 거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도망치듯 그 무거운 방에서 뛰쳐나왔다. 방향 잃은 내 눈동자를 햇살이 찔렀고, 순간 어지러움에 휘청거렸지만, 내 갈 곳이 정해져 있다는 듯이 한 곳 담벼락을 향해 달렸다. 겨우 한 줌 게우고는 헛구역질했다. 따라온 자는 없었지만 부끄러움에 가슴이 시렸다. 담에 기대어 앉아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참 넓구나, 참 푸르구나, 참 아름답구나. 비슷한 느낌의 바람이 나를 스치고 또 스쳐 지나간다. 아, 왜일까? 계림으로 향했던 볼모의 짐은 그 무게가 줄지 않고, 이제는 더 무겁게 나를 짓누른다. 김 형이라면 지금 나에게 뭐라고 할까? 보제 형님의 소개로 처음 그를 봤을 때, 그에 대한 선입견은 저절로 사라졌다. 파사 왕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분이라고, 계림 땅을 밟기도 전에 귀에 박히도록 들었다.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그 출생에 빗대어 나라 이름까지 바꾸었을까? 하지만 그는 나를 형제처럼 허물없이 대했다. 계림 땅에서 나를 홀대하지 않는 귀족은 보제 형님밖에 없을 줄 알았다. 뭐든 물어보면, 다 알지! 보제 형님의 흔한 농이었지만, 김 형은 정말 모르는 게 없었다. 내겐 그랬다. 떠나라는 말만 하고 입을 다물 분이 아니다. 워낙 다급한 상황이었기에, 그 이유를 미처 꺼낼 수가 없었을 거야. 김 형의 머릿속에 담긴 그 이유, 그것이 어쩌면 내가 내디딜 방향일 거야. 그래! 차분히 기다리는 거야. 김 형이라면 어떻게든 내게 알려줄 거야. 우리에겐 더 이상 서로에게 칼을 겨누지 않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야 하는 사명이 있다. 우리는 죽음과 가까워지기를 피하지 않기로 했다. 그 다짐이 생생한데, 왜 내 몸은 두렵다고만 할까?
삼 일이 지났다. 지율은 돌아오지 않았다. 원래 주인 따윈 없었다는 듯이 그 집은 아무렇지 않게 서 있다. 질박하게 보였다. 낮은 담벼락 너머 가솔들의 가벼운 몸짓에는 지율의 부재가 없었다. 저들이 그 빈자리를 자연스럽게 채웠구나. 즐거운 소리들이 내게 닿았지만, 나는 소리를 문장으로 바꾸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 옛 시간 속에서 뒹굴다, 추억에 취하면 그만이다. 겨우 세 번인데, 익숙해졌다. 왜지? 내 속의 나에게 혼잣말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다. 내 속의 나가 나를 움직인다고 하니, 지금 내 속의 나의 침묵은 당연하다. 그래서인지 지율을 대신하여 장소마다 자리해 보지만, 나는 그저 있는 대상이 된 듯하다. 곳간에 아무렇게 놓인 망태기나 마당 구석으로 밀려난 빈 항아리와 다를 바 없었다. 이렇게 몇 날이 지나면, 나는 무덤을 지키는 비석이 될 것만 같았다. 내 속의 나, 여기서 잠들다. 비문이 그럴듯하다. 내게서 뭔가가 빠져나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공허한 갈증을 채울 수가 없다. 멍하니 걷던 그때 그가 나타났다. 내 등짝을 후려치는 손길은 파도와 같았다.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화들짝 깨어난다. 흩어졌던 정신이 한꺼번에 몰린 듯한 그 찌릿함에 머리카락이 바들거렸다. 언제부턴가 내게 그는 바다와 동의어였다. 하나를 보면 저절로 또 하나가 연상되었다. 바다, 어릴 적 그를 따라서 가 본 그 압도적인 자태에서 나는 큰 정령을 봤다. 숨이 막혀 나도 모르게 입을 크게 벌렸었지. 두려움이라고 하기엔 복잡한 느낌이었다. 훗날 알게 된 글자로 굳이 표현하자면, 경외에 가까운 감정이다. 주저할 틈도 없이 끌려 들어가 본 바다에서 겨우 그 물이 허벅지에 닿았을 뿐인데, 나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겁이 아니라고 외치면서 몸서리쳤다. 그때 파도가 쳤다. 작은 물결이 점점 커지더니 내 알몸을 덮쳤다. 용왕님의 회초리라는 말에, 나는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큰 정령은 끊임없이 회초리를 휘두르냐고 따졌다. 아, 불현듯 그럴듯한 글자가 떠올랐다. 환원 아니 환기라고나 할까? 그와 함께 걷다 보니, 내 속의 나가 내게 말을 걸었다.
“게 섰거라!”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드니, 무장한 장정들이 길을 달리고 있다. 창과 칼을 든 네댓 명의 사내들은 그 차림새로 보아 가야 병사들이다. 저잣거리 한 곳에서는 병사 십수 명이 엉키고 떨어지기를 거듭했고, 쇠와 쇠가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도 되풀이했다. 노상에 물건을 펼쳐 놓은 장사치들은 거두기에 분주하고, 사람들은 소리치며 우왕좌왕한다. 그들은 어디로 피해야 할지 몰랐다. 몇몇은 피가 배어난 옷을 보며 망연자실 주저앉아 있다. 아픔을 느끼는 얼굴이 아니다. 얼마나 깊은 상처인지 모르는 두려움에 넋이 나간 것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내달렸다.
“꽃님아! 괜찮으냐!”
부서진 싸리문 옆에서 꽃님이는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다가선 나를 보더니, 그녀는 나를 부둥켜안고 흐느꼈다. 가게 안은 아수라장이었고, 주인아주머니는 부엌 앞에서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뒤엉킨 장정들 사이로 피투성이가 된 그놈이 있다. 우리를 지키고 있다는 놈이 이젠 누구도 지키지 못한다. 좋거나 안타까움이 아닌 서글픈 감정이 일었다. 기분이 묘했다. 이젠 가야의 병사들이 우리를 지키려들 것인가. 어느새 몇 개의 창끝이 나를 겨누었다. 그럼 그렇지, 저들이라고 우리를 지키는 방식이 다르겠는가. 나는 두려움보다는 무력감에 아무런 말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때 순식간에 둘이 나가떨어졌다. 해울수였다. 뒤따라온 그가 한 가슴팍엔 발로 한 얼굴엔 주먹으로 그들을 밀어냈다. 쓰러진 자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 순간 시답잖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해울수는 바닷곰이다. 물아치와 나는 그를 그리 칭하며 우러러보았다. 여태 그렇게 큰 덩치의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저들도 그런 듯하다. 주춤거리는 모양새가 우스꽝스러웠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칼을 빼 들고,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찌푸린 미간에는 긴장이 겹겹 지고, 온 힘은 칼자루 쥔 손에 쏠렸다. 벼린 칼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당장 칼과 창을 거두어라! 이분은 이 나라 칸의 아들이다!”
“진즉에 신분을 밝히면 될 일이잖소!”
우두머리는 짐짓 위엄스레 언성을 높였지만, 재빨리 거둔 칼은 안도하듯 칼집으로 숨어들었다. 휘몰아친 파도가 맥없이 멀어지듯, 무리는 서둘러 물러갔다. 꽃님이도 내 품에서 벗어나, 부엌으로 달려갔다. 그녀에겐 주인아주머니가 조왕신과 다름없을 테지.
“괜찮은가?”
나를 일으켜 세우는 해울수 눈빛에는 애처로움이 담겨있었다. 석양에 너울거리는 물결이 담겨있었다. 어둠이 오기 전 아름다움이구나. 나도 모르게 옅은 미소가 내 얼굴에 너울거렸다.
“망설였지만, 자네에게 계림에서 들었던 말을 전해야겠군.”
“형님! 김 형을 만나셨군요! 바로 말해 주시지,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해울수는 고개를 천천히 한번 끄덕이고 또 잠간 뜸들이다, 입을 열었다. 내겐 너무나 충격적인 말이었다. 몸이 저절로 휘청거렸다. 머릿속이 여러 갈래로 흩어져 버렸는지, 제멋대로 떠오르는 형상들이 전혀 이어지지 않은 채 빠르게 사라졌다.
“파사 왕이 실직곡국의 병사들로 음집벌국을 정벌하라고 명하더군.”
해울수는 큰 손으로 내 어깨를 지그시 잡았다. 그는 실직곡국 상단 우두머리이다. 위로는 옥저와 동예, 아래로는 계림까지 긴 바닷길을 수시로 오간다. 과거에는 금관국과도 교역하였다지만, 계림이 막았다. 실직곡국은 긴 해안선을 따라 드문드문 들어선 마을들이 교류하는 정도일 뿐인지라, 한 나라라기엔 국경이 모호하고 주군의 위상도 크지 않다. 해안선이 아닌 산맥이라는 차이일 뿐, 이 나라도 그렇다. 우리 장정들이 무기를 갖추고 모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산적들을 쫓아낼 때뿐이다. 예전에는 산신제를 올리고 난 뒤 각 마을 장정들이 패를 나누어 겨루기도 하였지만, 계림에서 금한 뒤로는 모양새만 갖춘 놀이로 축소되었다. 아마 실직곡국도 그럴 것이다.
“파사 왕이 우리 형편을 모르지 않을 텐데, 왜 그랬을까? 무서운 생각이 스치더군. 재고해달라는 요청조차 할 수가 없었어. 일단 명을 받들어 주군께 고하겠다고 말하곤 궁에서 나왔지. 그리곤 바로 김 공을 찾아간 거야.”
혼란스러웠다. 내가 믿는 사람에게서 내가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 내가 아는 김 형이라면 그럴 수가 없는데, 그의 마음이 슬픔보다는 두려움에 있고 그의 생각은 과거에 머물러 현실에도 미치지 않는단다.
“어떤 이유로든 자네가 사람을 해할 수 없다는 걸, 난 알아! 그래서 김 공에게 자넬 구명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자신은 그럴 힘이 없다더라. 자칫 전쟁이 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신은 막을 수가 없다더라.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알지 못한다더라.”
허루 어르신은 아들의 죽음에 넋을 놓고 말았다. 기력이 쇠했던 어르신은 아들의 간곡한 만류로 좋아하던 술을 끊었다. 그래서인지 정신은 온전했는데, 죽은 아들이 그의 곡기만 가져간 것이 아니었다. 달비는 얼마나 힘들까. 그래, 지금은 그들을 보살피기에도 벅차다. 김 형에게 내 안위마저 짊어지게 할 수는 없다.
“김 공에게 장례를 살피라는 것은 호공의 명분일 뿐이야. 내가 볼 때, 허루 어르신의 집을 둘러싼 병졸들이 막는 것은 들어오는 자들이 아니라 나가는 자로 보였다. 김 공은 지금 유폐되었어.”
한동안 십수 명의 사람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회장 안은 어수선했다. 장로들은 내 눈치를 살피고, 나머지 사람들은 아버지 칸의 심기를 살피는 듯했다. 할 말들은 많은 듯하나, 해도 될 말인지 모르는 듯하다.
“그 말인즉슨 가야가 우리를 버리겠다는 말인가!”
“상황이 그렇다는 말이오! 다시 말하지만 이미 흩어진 병들을 지금 다시 모을 수는 없소이다. 이제 곧 추수가 시작되는데, 어느 누가 익어가는 밭을 등지고 창검을 들겠소이까. 수로 왕께서 사사로이 움직이지 말라고 이르셨지만, 그대와의 우애를 생각해서 계림의 병들을 치운 것이오.”
지난 회장에서 본 낯선 자가 가야의 사신이었다. 듣자 하니 그날 아버지의 부탁으로 수로 왕을 만나고 온 것이다. 아버지가 별다른 조치도 없이 태연했던 이유가 뭘까 했었는데, 이제 그 이유가 사라졌다. 십여 명 계림 병졸들은 포박된 채, 넓은 집 마당에서 아무렇게 뒹굴고 있다. 담 안팎으로 백여 명 가야 병졸들도 창검을 놓은 채 널브러져 있다. 저들은 압독에서 이곳으로 왔다고 했으니, 전날 밤부터 내내 걸었을 터. 불과 며칠 전이었지. 밤새 걸었던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가슴이 저렸다. 그날 보제 형님이 얼마나 기뻐했었나. 그는 가야 연맹군이 금관국에 집결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계림 6부의 수장들을 거느리고 수로 왕을 만나러 갔었다. 칼도 차지 않았지만 두려움이라곤 없었다. 상기된 얼굴로 떠나서, 그 얼굴로 돌아왔다. 우리가 꿈꾸던 세상이 곧 펼쳐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기쁨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는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해울수, 마침 잘 왔네! 자네가 말해보게. 파사 왕이 단단히 오해하고 있어!”
“어르신, 한 가지 제가 분명히 말씀드릴 수는 있습니다. 이 사태에 대해서 파사 왕은 어떤 오해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타추 칸, 어찌 실직곡국에서 온 자의 말을 들으려 하십니까? 따지고 보면 이 사달의 처음은 실직곡국과의 국경 문제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냥 파사 왕의 요구대로 아드님을 다시 계림으로 보내시면, 어찌어찌 잘 해결될 일입니다.”
“그대는 장로가 되어서, 이 사태를 너무 안이하게 보는 것 같소! 우리가 실직곡국과 어떠한 다툼이라도 있었소? 설사 내 아들을 계림으로 보낸다 한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보시오? 그대도 보았잖소, 파사에게 우리는 그저 끊어내어야 할 가야의 젖줄 중 하나일 뿐이라고.”
“아니, 어찌 도망간 자가 남긴 글로 계림에 등돌리려 하시오! 당신은 이 나라의 칸이십니다. 사사로운 정에 나라를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소이다.”
아, 지율이 떠나면서 남긴 글이 있었구나. 아버지가 나를 계림으로 돌려보내지 않은 이유가 사부님 때문이었다니. 지율에 대한 아버지의 신뢰가 바위처럼 단단할 줄은 미처 몰랐다. 또한 지율이 주변국 정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줄도 몰랐다. 형님, 그리 떠나실 거면 내가 어찌해야 할지 언질이라도 주시지 그랬소. 그랬다면, 며칠 동안 멍하니 제가 알았던 형님의 그림자만 쫓지 않았을 텐데.
“장로님들! 지율을 모르시오? 내 비록 가끔씩 그를 봤지만, 주변국들의 상황을 상인인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소. 일찍이 파사는 실직곡국이 금관국으로 가는 바닷길을 막았소. 그저 계림이 취할 이익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야 알겠소. 우리도 하나의 젖줄이었소!”
해울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칼을 번쩍 들었다가 탁자를 쪼갤 듯이 힘껏 내려놓았다. 웬만한 장정 키만큼 긴 칼이다. 둔탁한 소리는 삽시간에 어수선한 분위기를 삼켰다. 좌중의 모든 눈이 해울수에게로 쏠렸다.
“이 칼은 수로 왕이 준 하사품이오! 선린의 의미로 기쁘게 받았소. 파사 왕도 여러분께 귀한 선물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오. 여러분이 우호 관계라고 여길 때, 계림에서 병사들이 들어왔소. 음집벌국을 지킨다는 계림 병사들이 이곳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했습니까? 저들은 음집벌국을 속국으로 생각하고 있소이다. 대등한 관계란 처음부터 없었소. 이제는 저들이 이 나라를 삼키려 들 것이오! 실직곡국도 다를 바 없소이다. 계림이 나의 길을 막았을 때는 이 칼을 빼지 않았소. 하지만 우리를 삼키려 할 때, 나는 분연히 이 칼을 저들에게 겨눌 것이오!”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해울수는 그대의 나라로 돌아가시오! 타추 칸, 국운을 걸고 무모한 선택을 할 수는 없소이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의탁함은 이치에 한 치 어긋남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가야와 계림 둘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뿐이오. 가야가 이곳에서 나간다면, 계림을 받들 뿐입니다. 칸, 부디 현명한 판단을 해서 음집벌국의 안위를 지키시오.”
하나의 사태는 그대로인데, 바라보는 눈들이 제각각 꽂힌다. 나는 내가 가야 할 바를 알지 못하고, 그 시선들을 쫓고만 있었다. 그때 낮에 본 가야 장수가 회장에 급하게 들어왔다. 계림군이 형산강 아래에 집결하였다. 어림하여 수천 명이란다. 사태는 구르는 눈덩이처럼 부풀고 있었다. 가야 사신은 짐짓 침착하다는 듯이 천천히 일어나서, 느린 움직임으로 좌중을 훑어보고는 말없이 나갔다. 나는 흔들리는 눈빛을 보았다. 그 눈빛은 병을 옮기듯이 다들 이들의 눈에 스며들었다.
“칸,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소! 우리 장로들과 함께 탐하를 데리고 계림군을 맞이하러 갑시다. 우리가 내어 줄 것은 내어 주어야, 지킬 것을 지킬 수가 있소이다!”
“그대는 무엇을 지킨다는 거예요! 이 땅의 아들딸을 내어 주고서, 도대체 이 땅에 지킬 무엇이 남는다는 말이오?”
어느새 어머니가 들어와 계셨다. 산으로 들어갈 때나 입던 검은색 옷차림으로 문 앞에 당당히 서 있다. 어떤 힘일까? 침상에 누워계실 때의 얼굴이 아니다. 빛이 감돈다. 어둠에서 겨우 찾을 수 있는 빛이 아니다. 동트는 아침 빛이 어머니 얼굴에 드리운 듯이 느껴졌다. 모두 일어나서 어머니께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탐하는 저와 큰산으로 갈 거예요! 무엇을 내어 주든 무엇을 지키든 남고자 하는 분들이 알아서 하세요. 탐하야, 이 어미는 준비를 마쳤다. 어여 가자꾸나.”
“이놈들아, 익혀서 오라는 문자는 어디다 두고선 시간을 날로 드시려나? 하하하.”
“사부님, 좀 더 얘기해 주세요. 지금 사부님이 여기 계시니, 결국 계림군은 헛물만 들이키고 돌아갔겠네요?”
“아니다. 저들은 결국 원하는 바를 취했다. 뒤쫓아 온 일단의 무리에게 하마터면 나도 죽임을 당할 뻔했다. 그들이 쏘아대는 화살들을 이 나무들이 막았다.”
“아이, 꽃님 누이 말로는 물아치 아재가 구했다고 하던데요?”
“녀석들! 이 나무를 자세히 보아라. 물아치가 이 나무와 닮았지? 하하하. 자, 이제 그만하자.”
아이들은 산채를 향해 어린 사슴처럼 깡충깡충 뛰어갔다. 산채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나는 매번 그러했듯이 슬며시 나무를 쓰다듬었다. 나는 나무를 있는 그대로 보는가? 이 큰 나무는 큰산과 어울린다. 이 큰 나무는 지난 사람들의 모습을 품고 있다. 기어코 계림을 향해 칼을 들었던 해울수는 어디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계림을 피해 먼 마한 땅으로 간 지율은 그곳에서 잘 지낼까, 아니면 또 회피하며 떠돌고 있을까? 그리고 김 형은 어느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을까?
“오라비!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시오. 반나절이면 물아치 오라버니께서 오신다고 해요. 어여 내려가서 음식 준비에 손을 보태시오!”
“꽃님아, 잔치라도 하려는 거냐? 백제가 버린 마을에 굳이 식량을 나눠주려고 갔던 이들이 뭐가 이쁘다고, 하하하.”
“그럼요! 이번엔 우곡에서 여럿이 따라온다 해요. 굶주린 아이들도 많다 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백제 왕은 너무해요! 어떻게 자기 백성 아니, 어린아이들마저 굶어 죽도록 내버려둘 수 있죠?”
“그러게 말이다. 어여 가자! 내가 손만 보태랴, 이 가난한 입도 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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