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하면 그냥 옷을 좀 적셔도 괜찮다.
비가 심하게 내릴 경우에만 직접 우산을 들고 참배하면 된다.
여성은 화장이 지워지면 곤란하므로 우산을 받쳐도 '무례'라 나무라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022년 6월 6일 아침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제67회 현충일 추념식에 참석했다. 추도사는 남달랐지만, 의식은 이전 정부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필 그 시간에 비까지 오는 바람에 완전 ‘상갓집 분위기’ 추념식이 되고 말았다.
▲ 현충일 추념식에 참석해 충혼탑에 헌화와 분향하는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
이번에도 헌화는 또 흰 꽃이었다. 흰 꽃은 순결함의 의미가 있지만 동시에 체념이나 항복의 의미도 있어 ‘현충(顯忠)’의 꽃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전몰 용사들이 흘린 피를 기억한다는 의미에서 ‘붉은 꽃’을 바치는 것이 글로벌 정격 매너이다. 단 일반 민간인 장례나 추도식에서는 흰 꽃을 바쳐도 무방하다.
흰 위생장갑을 끼는 것도 넌센스다. 자칫 검역관이나 법의학자로 오인받을 소지가 크다. 향을 맨손으로 집기가 거북하면 옆에 작은 숟가락을 두고 떠 넣으면 된다.
일제 시절에 생긴 ‘추모 리본’도 제발 그만 달았으면 한다. 추념식은 장례식이 아니다. 반드시 검정 정장에 검정 넥타이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 짙고 어두운색 정장에 화려하지 않은 색의 넥타이라면 괜찮다. 또 글씨에 자신 없으면 굳이 방명록에 휘호를 남기지 않아도 무례가 아니다. 그냥 사인만 남겨도 된다.
그리고 묵념을 할 때는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고개만 살짝 숙여 눈을 감고 기도하면 된다. 전 세계에서 한국인과 일본인만 상체를 앞으로 굽히는 바람에 묵념을 하는 건지 절을 하는 건지 구분이 안 된다. 두 손을 양 옆에 똑바로 뻗으면 무신론자로 오인받을 수도 있다.
전 세계 유일의 ‘추모 도우미’는 없애야 한다. 정장을 한 남녀가 대통령이나 귀빈 좌우에 나란히 서서 같이 묵념하는 사진을 본 외국인이라면 그들이 부통령이나 부총리 혹은 국방장관 쯤 되는 인물인 줄 안다. 특히나 김건희 여사가 없었더라면 대통령 오른쪽 여성도우미를 영부인으로 인식할 소지가 다분하다. 왜냐하면 대통령 오른쪽에는 영부인만 설 수 있기 때문이다. ‘묵념 도우미’가 필요하면 의전대장이 군복을 입고 안내할 일이다.
추념하는 중 비나 눈이 올 때도 있다. 그렇다고 이번처럼 헌화하고 묵념하는 대통령까지 ‘하얀 우의’를 입는 것은 격 떨어지는 매너다. 웬만하면 그냥 옷을 좀 적셔도 괜찮다. 비가 심하게 내릴 경우에만 직접 우산을 들고 참배하면 된다. 여성은 화장이 지워지면 곤란하므로 우산을 받쳐도 무례라 나무라지 않는다.
이 나라에서는 총리나 장관, 청장, 당대표 등 무슨 감투나 벼슬 하나 얻거나 대권 후보만 되어도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참배하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저 잘난 출세가 현충원과 무슨 상관인가. 그런 건 제 조상 무덤 앞에 엎드려 고하고 자랑할 일이 아닌가? 대통령이나 총리, 국방장관 외의 정치인은 현충일 행사 외에는 현충원 충혼탑에 공적으로 참배할 이유가 없다.
더 가관인 것은 그럴 때 절대 혼자가 아니고 졸개들을 우르르 거느리고 위풍당당하게 점령군이나 개선장군처럼 현충원을 찾는 것이다. 제발이지 왁자지껄 떼지어 몰려가지 말고 꽃 한 다발 사들고 혼자 조용히 다녀가라. 자신의 정치적 각오를 다지고 세 과시하려거든 딴 데 가서 해라.
대통령은 군통수권자이니 취임식 날 현충원에 참배하고 헌화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매해 정초와 현충일 외에는 공식적으로 현충원을 찾을 일이 없다. 그때도 총리나 국방장관 중 한 명만 대동해서 참배하면 된다. 영부인은 대동해도 되지만 안 해도 무방하다. 국민의 대표로서 대통령이 참배하면 다른 관료들은 각자 자기 위치에서 제 할 일을 하는 게 정상이다.
이번 현충일 추념식에서 보듯 대통령이 충혼탑에 헌화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충문 앞에 많은 사람들을 앉혀놓고 가설된 무대에서 추념 연설을 하고 국가유공자 증서수여를 하는가 하면 한국전쟁 생존자나 유가족 등을 초청해 위문하는 등의 행사를 치렀다.
바로 이런 점이 아직 우리가 후진적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충원은 묘지이다. 그곳에서는 최대한 간결하고 조용하고 엄숙하게 추념만 하고, 다른 부대행사는 현충원 내 현충관이나 전쟁기념관, 아니면 세종문화회관, 광화문광장 등 현충원이 아닌 다른 곳에서 치를 일이다.
그저 사람들 많이 동원하고 왁자지껄 요란해야 행사를 잘 치른 것으로 여기는 한국인들에겐 무척 불쾌한 지적이지만 이렇게라도 익숙한 것들과 결별해야 새로운 것이 보인다.
- 2022.6.7, 최보식의 언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