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면 청원리는 근재공의 五子인 판관공(휘 瑽) 후손이 사봉면에 살았는데 후손인 행정(杏亭) 휘 重光공이 이곳으로 자리잡은후 진주지역의 주 세거지역이 되었으며 이곳은 영해의 갈암선생(諱 玄逸)께서 광양에 유배한후 이곳에 잠시 머무렀는데 그 때가 1700년인데 우리 선조분들이 갈암선생의 영향으로 유학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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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정중수기(杏亭重修記) 만력(萬曆)이 다될무렵에는 국가에 이상(異常)이 많았는데도 선비가 글을 읽고 의(義)를 강론하며 지조와 절개가 있어서 세상의 일에 구애되어 낙심하지 않고서 정려(精勵)하였음을 왕왕이 행적을 통해서 볼 수 있다. 행정(杏亭) 이선생(李先生) 휘 중광(諱 重光)도 이러했는데 정사(丁巳)년에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났을 때는 회위(會圍)에 들어가지 않았으며 정묘(丁卯)년에 오랑캐가 해서(海西)를 유린했을 때는 그 관직이 아직 낮아서 자신의 직권이 평정(平定)을 결심할 수 없어 관직만 헛되이 받는 결과가 됨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벼슬을 치사(致辭)하였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때는 남한산성의 이변이 있었는데 마침 군량(軍糧)을 운반하여 조령(鳥嶺)까지 이르렀을 때 화의가 성립되었다 하므로 인부(印符)를 돌려 바치고 통곡하고서 사귀(辭歸)하였으니 그의 의리에 사는 명철함과 행동을 자제하는 고매(高邁)함이 이와 같았기로 주장에 동조하고 기상(氣象)이 같은이가 있었으니 이석계(李石溪) 김표은(金瓢隱) 홍두곡(洪杜谷) 등 제 선생도 이러하였으니 서로 따르면서 술을 권하고 이제(夷齊) 중연(中連)이 청풍고절(淸風高節)을 논하면서 그 수비산중에서 창화한 시 일편이 있는데 이는 흡사 려말(麗末) 두문동 제선생의 말씀과 뜻을 듣는 듯 하며 여기는 비록 좌해(左海)의 일부이지만 춘추의 절의와 같다. 이에서 작별하고 청원 고리(故里)로 돌아와서 집한칸을 짓고서 이름하여 행정(杏亭)이라 써 붙였으니 지나는 동안 공부자(孔夫子)의 행단(杏壇)에서 취(取)함이니 즉 춘추(春秋)의 의리(義理)를 사모(思慕)함이다. 그뒤 수백년이 지나는 동안 사적(事績)은 꺼져가고 흔적은 희미해져가니 이제는 후손들이 선현의 향기흐름이 다하고 아름다운 이름이 전해지지 못할까? 걱정하여 옛터곁에 다시 집을 지으니 제도(制度)는 4영(楹) 3가(架)로서 정자(亭子)는 아예 옛과 같으나 옛날 행정을 다했으나 볼 수 없겠다. 아! 정자라 하고 수목(樹木)이라 함은 겉으로 나타난 모습이다. 공의 뛰어난 절개며 고매한 행의는 가히 우주의 동량(棟梁)이라 하리니 비록 정자가 없은들 어떠하랴? 항차 수목이란 무성하기도 하고 시들기도 하여 한결같을 수 없음이다. 비록 그렇다 해도 그 머물었던 곳과 그의 사적을 말할 때는 또한 자손이 상응(相應)한 마음씀을 함께 말하리라. 자뭇 곡부(曲阜)의 묵은 둥지에서 새로 돋아나는 줄기를 빌려 정자(亭子)앞에 심고서 구름을 꿰뚫을 만큼 크기를 기다리며 길이 봄을 간직케 하여 그 가운데서 함께 번영할 것을 도모함 직하다. 나에게 공(公)의 10세손 갑종(甲鍾)이 기문을 청하기로 이렇게 기(記)한다. 崇禎五夷子鞠有節 全義 李種杞 撰 숭정오이자국유절 전의 이종기 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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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강서당기(淸岡書堂記) 진양의 동쪽 방어산 아래 청원이란 마을이 있으니 곧 나의 선조 갈암(葛庵)선생께서 도의(道義)를 강론(講論)하시던 곳인데, 푸르게 솟은 여러 봉우리들이 좌우로 펼쳐 서있고, 록수(綠水)와 청류(淸流)가 둘러 있다. 또한 봉우리가 앞에서 감돌아선 것이 마치 누운 용(龍) 같기도 하고 날으는 봉(鳳) 같기도 하다. 깊이 잠긴 동문(洞門)에 구름이 이는 골짜기가 그윽하고도 깊으며 송죽(松竹)이 울창하여 속록(俗록)의 세상과 멀리 떨어졌다. 옛적에 우리 숭정처사(崇禎處士) 행정(杏亭)선생께서 이곳에 은거하시면서 절의를 지키고 스스로 의리(義理)에 마땅히 할 바의 도리를 다하여 충효(忠孝)가 대대로 전하고 문헌이 서로 이어졌으며 자손들이 또한 번성하였으니 곧 우리 이씨(李氏)의 세거지이다. 숙종조(肅宗朝)의 성제(盛際)에 갈암선생은 조정에서 유신(儒臣)을 맞이하여 부르는 분부에 응하여 나아갔을 때 임금이 총애하여 발탁함이 날로 융성하여 지위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까지 이르렀다. 선생은 곧 충심(衷心)을 다하여 보답하기를 도모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선(善)에 나가게 하고 그름을 바로잡게 하는 말을 장주(章奏)에 그치지 않았으며 현신(賢臣)을 본받고 간신(奸臣)을 배척하라는 의논을 등대(登對)하여서 여러차례 아뢰었다. 이는 모두 조정의 신하들이 어느 누구도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왕비(王妃)를 보위(保衛)하고자 임금에게 힘써 간쟁(諫爭)한 말이 도리어 빌미가 되어 남북으로 귀양을 다니게 된 것이 무릇 7년이나 되었더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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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기묘년(1699)봄에 완전히 석방을 한다는 분부가 있어 광양(光陽)의 유배지로부터 청원(淸源)에 도착하였는데, 대간(臺諫)의 탄핵이 다시 일어나 앞서의 분부가 중도에 멎어 여기에서 분부를 기다린 것이 또 일년이었다. 선생은 이에 운명을 맡기고 순처(順處)하여 심성을 더욱 가다듬어 굳게 길러서 간절히 사람들을 가르치기에 게을리하지 않고 민연(悶然)히 남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에 마치 미치지 못할 것같이 함에 사방의 학자들이 배우기를 청하고 구름같이 모여들어 도의를 강론하여 유학(儒學)의 교화를 크게 떨쳤는데 산(山)에 운물(雲物)도 또한 그 경광(耿光)을 입었다. 경진(庚辰, 1700)년 봄에 비로소 석방이 되어 금양(錦陽)으로 돌아오시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삼백여년 동안 일구(一區)의 유지(遺址)가 아득히 침체하고 적막하기가 마치 안자(顔子)의 고거(故居)인 누항(陋巷)에 남아있던 폐정(廢井)같으니 그저 이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덧없는 감회가 없지 않은데 하물며 당시 법문(法門)의 후손들에게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정미(丁未) 봄에 마침 행정(杏亭)에 일이 있어서 모였다가 도내의 선비들이 일제히 의논을 펴서 먼저 유계를 조직하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정성을 다하고 일에 힘쓴 이는 방예손(傍裔孫) 보영(寶榮)과 후손 철호(哲浩)였고, 일을 맡아서 주선한 이는 청계공(淸溪公) 휘 세후의 주손인 기환(基煥)이었다. 사오년간의 이식(利殖)을 취한 계금이 얼마간 모이자 이에 기환군이 사림에 의견을 물어 집을 세워서 옛 자취를 나타내려고 하니 선생의 문하에 이르렀던 이들의 후예들도 이를 듣고 후하게 도운이가 또한 매우 많았다. 이와 기와와 재목을 구하여 집터를 살려서 터를 닦고 신해(辛亥)에 공사를 시작하여 임자(壬子) 겨울에 이르러 공사가 거의 끝날 무렵에 기환군이 불행하게도 세상을 떠났으니, 아! 슬프도다. 그 아들 재선(載善)군이 선인의 뜻을 이어 공사를 마치니 집이 모두 여섯칸인데 뒤의 세칸과 중간의 한칸으로 방을 만들고 좌우의 각각 한칸으로 헌람(軒欖)을 만들었으며 문루(門樓)도 또한 삼칸으로 하여 그 용도에 맞도록 하였다. 제도(制度)는 화려하고 아름다우면서도 굳고 간가(間架)는 균형있게 넓으면서 시원스럽게 트였다. 시험삼아 헌람에 기대어 경치를 굽어 살핌에 잠광산영(岑光山影)이 둘러서 기이한 형체를 드러내고 수색천성(水色 川聲)이 맑고 밝은 모습을 나타내니 어렴풋이 위의(威儀)의 위위함을 보는 것 같고 양양(洋洋)히 연원(淵源)의 혼혼(混混)함을 접하는 듯하다. 도(道)가 드러나고 가려지는 것과 땅이 폐허되고 흥기함에도 또한 천지의 리수(理數)가 존재하는 것이 있는가? 고인(古人)이 이르기를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의 먼지를 털어서 쓰고, 새로 몸을 씻은 이는 옷을 털어서 입는다」라고 하였다. 지금부터 이 서당에 올라서 선생의 글을 읽고 선생의 도를 강론함에 갓을 떨고 옷을 털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낙성(落成)을 하기에 이르러 모두들 이르기를 「書堂에 記文이 없을 수 없다」라고 하고 불초에게 이를 적도록 명하였는데 감히 할 수 없다는 것으로 굳이 사양을 했으나, 어쩔 수 없이 참람하고 헤아리지 못하고 삼가 그 시종(始終)을 이같이 쓴다.
歲甲寅正月旣望日 十代孫 長浩 撰 세갑인정월기망일 십대손 장호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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