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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효 선생님 오늘 발제문입니다.
평등사회를 위한 교육정책: 포스트코로나 시대, 인류가 사는 법
안현효
트리거
코로나19는 거대한 전환의 격발기(trigger)다. 모든 사건에는 패턴이 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이를 예고하는 좀 더 작은 사건들이 일어난다. 좀 더 작은 사건들은 따로 떨어져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건이 일어난 다음 비로소 이들이 한 연결고리 속에 있었다는 것이 보인다. 이런 패턴은 상대적이다. 그러니까 작은 사건이 이어지다 사건이 되고, 사건이 쌓이다 큰 사건이 되며, 큰 사건이 반복되면 ‘전환’이라고 부를 만한 일까지 터진다.
칼 폴라니(Karl Polanyi, 1886-1964)는 1940년대에 ‘거대한 전환(great transformation)’이 일어났다고 했다. 전환은 앞과 뒤가 크게 달라졌다는 뜻이다. 1940년대의 앞은 자유방임자본주의 시대였고, 1940년대의 뒤는 자유방임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적 방어(social protection)의 시대였다. 전환의 원인은 자유방임자본주의의 파괴적인 속성이었고, 1940년대 거대한 전환을 예고했던 큰 사건들은 1차 대전(1914-1918), 러시아 혁명(1917), 대공황(1929)이었다. 마지막으로 전환의 결정적 계기는 나치즘(1932-1945)과 2차 대전(1939-1945)이었다.
‘민족주의’라고 쓴 깃발을 들고 전쟁터로 행진했지만, 1차 대전은 자유방임자본주의가 비자본주의 영역에서 벌인 전쟁이었다. 존 앳킨슨 홉슨(John Atkinson Hobson, 1858-1940)은 자유방임자본주의에는 ‘너무 많이 생산하고 너무 적게 소비하는 문제’가 있다고 했다. 문제의 원인은 자본주의에 원래부터 장착된 ‘무계획적 생산’에 있었지만, 사람들은 비자본주의적 방법인 ‘땅’에서 해결책을 찾았다. 덜 생산하거나, 좀더 많이 소비시키거나, 생산과 소비를 계획하는 대신 새로운 시장인 식민지, 즉 땅을 넓혀 해결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자본은 무한하게 늘어날 수 있지만, 점령할 수 있는 땅은 우주로 나가지 않는다면 정해져 있다. 결국 땅을 놓고 벌이는 국가적 싸움인 ‘전쟁’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1차 대전이었다. 1940년대에 일어난 거대한 전환이 자유방임자본주의 자체의 문제 때문이었다면, 1차 대전은 전조가 되는 큰 사건이었다.
황제가 다스리던 러시아도 1차 대전에 휩싸였다. 당시 러시아는 유럽 나라들에 비하면 자본주의가 덜 발달한 편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은 자본주의가 발달한 국가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러시아 혁명이 성공할 것이라 예상한 사람도 많지 않았고 레닌(Влади́мир Ильи́ч Ле́нин, 1870-1924)도 오랫동안 비슷한 입장이었다. 그런데 1차 대전이 자유방임자본주의 자체의 문제로 생긴 전환의 전조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자유방임자본주의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증거라면 자본주의가 무너지는 전조이니 사회주의 혁명을 할 수 있는 때였다. 1917년 10월, 핀란드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레닌은 러시아로 몰래 귀국한다. 그리고 1,000여 명 남짓의 무장세력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을 시도한다. 레닌의 시도는 러시아의 농민, 노동자, 하급 군인 등이 지지를 받으며 성공했다. 1940년대에 일어난 거대한 전환이 자유방임자본주의의 한계를 많은 사람들이 알아차린 덕분에 일어날 수 있었다면, 러시아 혁명은 전조가 되는 큰 사건이었다.
1929년 10월 24일 미국에서는 ‘검은 목요일(Black Thursday)’라는 주식시장의 폭락이 발발했다. 동시에 부동산시장도 붕괴했다. 자본주의에서 종종 나타나는 전형적인 금융공황이었다. 그런데 이 금융공황은 실물 생산에까지 치명적 영향을 주어 발발한지 3년 만에 공업생산량이 60% 떨어뜨렸고, 무역도 1/3로 줄었으며, 실업률은 25%로 치솟았다. 이후 10년간 세계 무역은 50% 폭락했고, 실업자가 수천 만 명이 되었다. 생산수준은 이전의 절반으로 줄었다.
대공황(Great depression)이라고 불리는 이 상황의 원인을 두고 이후 학자들은 통화량 공급을 충분하게 하지 못한 통화정책의 실패인지, 아니면 과잉생산된 상품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수요의 부족이 원인인지로 논쟁을 벌였다. 홉슨, 레닌, 케인스 같은 당시 지식인들은 자본주의의 과잉생산이라는 구조적 원인이 가장 기본에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1883-1946)는 1차 대전 후의 전후 처리, 대공황의 발발, 2차 대전의 발발을 보면서 자유방임자본주의는 과잉생산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1차 대전이 끝나고 독일 제국과 연합국은 베르사유 조약(1919)을 맺었다. 베르사유 조약의 핵심은 독일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킬 수 없도록 옭아매는 것이었다.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 등 승전국에 약 1,300억 독일 마르크를 배상해야 했다. 이는 당시 독일의 몇 년 치 국내총생산과 비슷한 규모였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베르사유 조약을 만든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했다. 1차대전 승전국 영국 대표 가운데 한 명 자격이었다. 케인스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평화의 경제적 결과(The 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라는 책을 쓴다. 책의 핵심은 ‘독일이 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지는 것은 마땅하나, 지나치게 무리한 책임을 지우면 다시 사고를 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독일은 전쟁배상금을 갚을 수가 없었고, 이때마다 연합군이 독일의 공업 지역인 루르 지역을 수시로 점령하는 등 갈등이 깊어졌다. 독일은 전쟁배상금을 갚기 위해 마르크화를 마구 찍어내면서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혼란스러운 경제와 정치 정세는 전후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을 위기에 빠트렸다.
케인스가 예언했던 대로 독일에서는 사고가 터졌다. 1929년 대공황 이전에 치러진 총선에서 히틀러는 12명의 국회의원을 당선시켰다. 그런데 1932년에 치러진 다음 총선에서 전체 의석의 1/3을 차지했고, 1933년에는 국회를 해산한 다음 정권을 잡았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의 집권이었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은 편하게 부르기에는 이름이 너무 길다. 간편하게 나치(Nazi)당이라고 부르다보니 ‘나치’라는 말에 특별한 뜻이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국가사회주의(nationalsozialistische)를 줄였을 뿐이다.
독일은 히틀러 치하에서 역설적이게도 케인스의 이론을 실천한다. 케인스와 친했던 독일 제국은행 총재 샤하트(Hjalmar Shacht)는 히틀러 시기에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고, 각종 채권을 발행하는 등 적극적인 개입정책을 펼쳤다. 전쟁 준비를 위한 군비지출로 군수품과 전쟁장비에 대한 수요를 강제로 만들어내 경제 위기를 탈출하였다. 그러나 이 끝은 2차 대전이었다. 2차 대전 동안 군인 약 2,500만 명, 민간인 약 3,000만 명이 사라졌다.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2차 대전이 끝나면서 비로소 ‘거대한 전환’은 본격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단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에 등장했던 여러 ‘반 시장적 개입주의 실험’ 가운데 나치와 같은 극우적 처방은 배제되었다. 2차 대전에서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국이 승리했기 때문이다.
주목할 점은 대공황은 자유방임자본주의 때문에 생겨났고, 자유방임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것들 가운데 사회주의가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는 점이다. 러시아 혁명 이후의 소비에트가 왼쪽의 사회주의였다면, 나치는 극단적으로 오른쪽으로 기운 사회주의였다. 둘 다 사회주의였기에 ‘개입’에 무게를 두었는데, 이는 자유방임에 대한 문제제기였고 시장을 규제하겠다는 뜻이었다. 자유방임자본주의가 큰 역할을 해서 생겨난 대공황 한 가운데서 탈출한 국가는 모두 ‘시장에 대한 적극적 개입’을 선택했다. 소비에트, 나치, 뉴딜은 ‘국가의 개입’을 러시아어, 독일어, 영어로 번역한 단어였다. 1940년대에 일어난 거대한 전환이 자유방임자본주의 문제를 ‘개입’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덕분에 일어날 수 있었다. 여기에 나치당과 2차 대전은 거대한 전환의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결국 거대한 전환은 이루어졌다. 폴라니가 말한 1940년대의 거대한 전환은, 자유방임자본주의가 일으켰던 문제로부터 ‘사회가 스스로를 보호(self protection of society)’하려는 움직임이다. 1940년대를 지나면서 시장에 개입하지 않는 정부는 찾기 어려워졌다. 소비에트의 사회주의, 영국과 미국의 혼합 자본주의, 유럽 대륙의 복지국가 등은 1940년대의 혼란을 계기로 자리를 잡았다. 자유방임자본주의를 그대로 두었다가는 나치당이나 2차 대전 같은 파멸적인 사태를 다시 맞이할 수 있었다. 사회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시장에 개입하기로 한 것이다.
코로나19
감염병은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큰 인상을 남긴 감염병으로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 SARS), 줄여서 사스가 있다. 사스는 2002년 중국 광동성에서 처음으로 발병했다. 전 세계적으로 8,100명이 사스에 걸렸고 이 가운데 774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스 다음은 신종플루(H1N1 influenza A)였다. 신종플루는 2009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첫 환자가 나왔다. 유럽, 아시아 등으로 퍼져 나갔고 한국에도 환자가 나타났다. 전 세계적으로 62만 명이 감염되어 18,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중동 호흡기증후군(middle east respiratory syndrome coronavirus, MERS-CoV), 메르스는 2015년의 일이다. 그리고 2020년 코로나 19(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 coronavirus 2, SARS-CoV-2) 사태가 발생했다. 2020년 6월을 기준으로 전 세계 188개 나라에서 환자가 나왔는데, 첫 환자가 나온 지 6개월 만에 832만 명이 감염되었고 42만 명이 사망했다.
전 세계적인 충격을 주는 감염병의 주기가 7년, 6년, 5년으로 짧아지고 있다. 감염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점점 더 위험하게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인류가 인간의 영역을 빠르게 대규모로 넓혀가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나는 1940년대 나타났던 거대한 전환을 예고했던 여러 전조들처럼, 새로운 전환을 예고하는 전조라고 생각한다.
감염병이 더 자주, 더 강력하게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사회적 방어가 성공해 자본주의의 덩치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칼 폴라니가 말한 거대한 전환을 거치면서, 사회적 방어에 성공하면서 자본주의는 지속될 수 있었다. 지속을 넘어 너무 빠른 속도로 덩치를 키웠다. 자본주의의 덩치가 커지면서 환경이 파괴되는 속도는 빨라지고, 규모는 거대해졌다. 환경이 파괴되면서, 구체적으로 숲이 사라지면서 살아갈 곳을 잃은 바이러스는 사람을 새 환경을 삼았다. 그리고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사람을 숙주로 삼아 살아가기 아주 적합한 녀석이다.
봉쇄
바이러스의 딜레마는 치명률이다. 숙주(사람)에 침입한 바이러스는 숙주의 자원을 이용해 증식한다. 이 과정에서 숙주의 자원을 너무 많이 쓰면 숙주가 죽는다. 만약 바이러스가 숙주의 자원을 많이 그리고 빨리 써버리면 숙주가 빨리 죽는다. 그런데 이렇게 숙주 안에서만 바이러스가 번창(?)하면 절반만 성공한 것이다. 숙주가 죽어버리면 다음 숙주로 바이러스가 옮아갈 기회를 놓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균형을 잘 잡는 것이 필요한데, 지금까지 밝혀낸 바에 따르면 코로나19 바이러스는 균형을 잘 잡았다고 한다. 숙주의 몸에 오랫동안 잠복할 수 있고, 다른 바이러스가 잠복기에는 전파되지 않는 반면,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잠복기에도 전파가 가능하다고 한다. 증식과 확산을 위한 균형이 잡혀 있는 셈이다.
균형이 잘 잡힌 바이러스를 막으려면, 치료제와 백신이 필요하다. 치료제와 백신이 없다면 물리적인 봉쇄 외에는 답이 없다. 코로나19 환자가 처음으로 나와 빠르게 확산된 중국에서는 환자 발생 지역을 봉쇄했다. 중국 중앙정부의 발병 지역 봉쇄는 강력했다. 전 세계적으로 이를 의아해 하는 눈초리가 있었다. 그러나 채 석 달이 지나지 않아,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코로나19가 발병하자, 대부분의 발병국 정부는 봉쇄를 선택했다.
봉쇄는 경제 시스템을 멈추는 일이다. 치료제나 백신이 나올 때까지 전면적 혹은 부분적 봉쇄는 계속될 것이다. 치료제와 백신이 나온다고 해도 다시 바이러스가 변종을 일으키면 봉쇄는 계속될 것이다. 거대한 전환이 일어났다고는 하나 자본주의는 여전히 무계획적이다. 즉 무엇이 어디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니 봉쇄가 시작되면 어디서 어떤 연결고리가 깨져 문제가 생길지 알 수 없다. 연결고리는 너무 복잡해, 안다고 해도 마땅한 답이 없다. 잘 세팅된 바이러스가 기존의 경제 시스템을 뿌리부터 무너뜨릴 것이다.
위기의 배경
2008년의 경제위기는 전조였다. 2008년의 경제위기를 벗어나려고 썼던 정책은, 일반적인 경제학에서 보면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당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었던 단어가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 QE)’다. 양적완화는 디플레이션 상태에 있던 일본에서 2001년부터 쓰던 정책이기는 했다. 일본이 겪은 장기불황은 심각한 것이어서, ‘잃어버린 20년’이라는 말이 고유명사처럼 사용되었다. 온갖 방법을 써도 장기불황에서 탈출하기 어려웠던 일본은 양적완화 정책을 쓰기로 했다.
양적완화 정책은 기존 경제학에서 보면 이단에 가까운 것이었다. 기존 경제학의 관점으로 보면 불황기에 경기 진작을 위해 확장적 통화정책을 쓸 수 있다. 이는 통화량 조절을 목적으로 하는 단기채권을 민간으로부터 매입해 통화량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통화량이 늘어나면, 이자율을 낮춰 투자가 촉진되며 경기를 진작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인 통화정책은 이자율이 너무 낮으면 작동하지 않는다.
경기 침체가 길어지면서 일본은 이자율을 계속 낮춰 0이 되었다. 확장적 통화정책을 쓸 수 없는 조건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통화를 직접 뿌리기로 했다. 민간 부문은 통화량 확대를 달성하지 못하므로, 정부 부문이 직접 통화를 경제에 공급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중앙은행이 민간이 가진 장기국채를 대량 구입해 통화를 뿌리는 것이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자, 미국 정부는 부동산채권을 매입했다. 통화가 시중에 대량으로 뿌려지면 민간이 위험자산이라 할 수 있는 주식, 채권 등을 구입해서 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였다. 그리고 미국은 위기에서 벗어났다. 양적완화 정책이 기대한 대로 경제를 활성화시켰냐는 것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경제학자 가운데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은행 시스템을 통하지 않고 돈을 더 적극적으로 뿌려야 한다는 긍정론도 있다. 직접적인 화폐의 공급, 헬리콥터 머니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기존 경제학에서 이단이라고 여겼던 양적완화 정책이 빠르게 확산한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 영역에서도 전에 볼 수 없었던 일들이 벌어진다. 좌파와 우파라는 익숙한 구도를 파괴하는 이상한(?) 사람들이 대중적 지지를 받기 시작하는 것이다. 필리핀의 두테르테,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미국의 트럼프 등은 기성 정치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성격의 정치인들이다. 이들을 우파로 분류한다고 했을 때 우파만 낯선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의 오성운동이나 스페인의 포데모스를 좌파로 분류한다고 했을 때, 이들도 기존 좌파와 맥을 달리하는 부분이 많다.
컬럼비아 대학 역사학과 교수 애덤 투즈는 2008년의 경제 위기 이후의 상황을 붕괴(Crashed)라는 책에서 분석했다. 2019년까지 10년간 전 세계적으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유럽 포퓰리즘 정부의 등장,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 강제 합병, 중국의 급격한 부상 등 정치·외교·사회적으로 격변이 이어졌는데, 이는 대부분 글로벌 금융위기 후유증이라고 분석했다.
금융위기 이후 전통적 경제학의 경제정책 처방이 작동하지 않음에 따라 이단적 경제정책이 등장했듯이, 정치적 공간에서도 전통적인 좌우파의 구분이 적용되지 않는 이단적 정치 지도자가 등장하게 되었다.
교실
바이러스는 교육에도 충격을 주었다. 교실에 학생들을 모아놓고, 교단에 선 선생이 말하며 가르치는 시스템은 수천 년 동안 계속되었다. 수천 만 명이 목숨을 잃는 전쟁터에서도, 교실에서 선생이 학생을 가르쳤다. 라디오, TV, 인터넷 등 혁신적인 도구가 나타날 때마다 교육이 달라질 것이라고 했지만 기본적인 구조는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바이러스의 등장은 달랐다. 나는 대학교수이니 대학 교육을 이야기하려 한다. 한국에서 대부분의 대학은 2020년 1학기 전체를 온라인 수업으로 진행했다. 2학기 되면 등교 개강을 할 수도 있겠지만, 집단 감염 사태가 벌어지면 다시 온라인 수업으로 돌아설 것이다.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사람과 사람이 사이’는 교육에서 중요한 조건이다. 교실은 그 조건을 채우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리고 교실의 무게가 워낙 막강하니 온라인은 그 수단을 대체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판단에 이르게 된다. 물론 보완할 것은 있다. 그러나 교실도 보완할 것 투성이였다. 온라인도 보완할 것이 있지만 보완하면 된다. ‘할 수 없다’와 ‘보완하면 된다’는 하늘과 땅 차이다. 바이러스가 강제한 교육 분야 실험에서 얻어낸 결론이다.
질병의 확산과 방역이라는 상황은, 수천 년 동안 교실에서 했던 수업을 온라인에서도 전면적으로 해보는 기회를 주었다. 100% 긍정적이지 않지만, 잘 하면 해볼 만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제 알아버렸다. 온라인 강의의 문제점을 보완하면, 수천 년 동안 유지된 교실과 교사와 학생이라는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교육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모두가 알아버렸다.
쌓여 있던 문제
전 세계적으로 공통된 것이겠지만, 한국은 특히 고등교육 분야에서 재정 문제가 크다. 한국 고등교육에서 사립대학의 비율은 80% 정도다. 사립대학 경상 운영비는 거의 100% 등록금에 기댄다. 그런데 인구 구조의 변화로 대학에 입학할 사람의 숫자 자체가 줄어들고 있다.
계층화된 한국 대학의 구조상 지방 사립대부터 충격이 오고 있다. 고등교육에 정부 재정을 투입하는 문제도 쉽지 않다. 경상 운영비의 대부분을 등록금에 기대고 있다는 것은, 연구나 교육에서 새로운 시도나 실험을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시설을 유지하고 교수와 직원 고용에 따른 인건비 대는 것도 급급하다. 연구나 교육에서 도전과 혁신과 성과가 없는데, 세금을 넣기란 쉽지 않다. 반값등록금 나아가 고등교육 무상화 논의가 힘을 받지 못하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있다. 학생 개인에게 등록금은 큰 문제일 수 있으나, 고등교육 자체의 사회적 효용이 낮다면 공적 자원을 투여하는 것에 충분히 반대할 수 있다. 물론 한국이 정도가 심할 뿐이지, 고등교육이 보편화되어가는 경로에 있는 나라에서는 비슷하게 벌어지는 문제다.
바이러스로 인해 시도해본 고등교육의 전면적인 온라인화는, 적어도 재정 문제에 있어서 대책이 될 수 있다. 캠퍼스라는 거대한 물리적 공간을 유지하지 않아도 된다. 현장 강의를 위주로 구성된 캠퍼스는 온라인 강의를 위한 설비와 그동안 부족했던 연구를 위한 공간으로 다시 구성할 수 있다. 비용을 줄일 수 있는 것이다.
교수와 직원의 인적 자원 활용도 다시 짤 수 있다. 교실이 수천 년 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데에는, ‘모든 강의는 휘발된다’는 조건도 역할을 했다. 한 번 했던 강의는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으니, 수천 년 동안 학생은 교실로 와야 했다. 그런데 온라인은 휘발되지 않는다. 저장할 수 있고 반복할 수 있으니, 교수는 매번 강의할 필요가 없고 직원도 매번 지원할 필요가 없다. 대신 남는 시간에 지역 사회에 필요한 연구를 수행하는 방식의 재구조할 수 있다. 비용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비용을 줄이고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만으로 고등교육을 바꿀 수는 없다. 학생이 만족해야 하고, 교육이 잘 될 것인지에 대한 평가도 필요하다. 그런데 이것도 바이러스가 강제한 실험에서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준비 안 된 온라인 수업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여론도 들어봐야 한다. 신입생들의 비판 여론은 온라인 교육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입시를 끝내고 기대했던 캠퍼스 생활을 누릴 수 없는 데에서 비롯하는 것이 크다. 원래부터 교실에서도 문제가 있었던 강의는 온라인으로 넘어가도 마찬가지다. 책을 읽어주거나, 책을 칠판에 적어주거나, 과제와 팀플로 수업 시간을 때우거나 하는 일은 원래 있던 교실에서도 흔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교실에서 문제가 많았던 교육은 온라인에서도 문제를 일으키지만, 원래부터 있던 문제였다.
반대로 통학 부담이 줄어들었다거나, 온라인 교육을 위해 오히려 준비가 철저해지는 교육도 있었으며, 교실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교수와 학생 사이의 묻고 답하고 토론이 온라인 채팅창에서는 가능해 만족도가 높아졌다는 평가도 있다. 실습처럼 오프라인에서 진행해야만 하는 교육이나, 실습이 아니더라도 교육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오프라인 교실을 활용해야 하는 때가 있는 등에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지만, 고등교육에서 온라인을 전면적으로 도입하는 문제는 해볼 수 있는 영역으로 움직였다. 바이러스가 증명해준 것이다.
예를 들면 강의와 설명이 필요한 것은 동영상을 학교 LMS(Learning Management System: 온라인 수강 및 출결관리 시스템)를 효과적으로 만드는 문제로 해결한다. 학생별 수준 차이에 따른 맞춤형 교육은 학생들의 질문을 실시간으로 해소해주고, 상황을 계속 체크해갈 필요가 있다. 이는 다양한 SNS를 활용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미 개발이 많이 진행된 실시간원격강의 도구는 인터넷 망에 실릴 수 있다. 수십 명의 학생과 화상채팅 형식으로 강의도 가능하다. 인터넷 상 칠판에 판서를 하면서 설명할 수도 있고, 학생들은 실시간으로 질문하고 선생들의 질문에 답할 수 있다. 교실에서 일어나던 수업과도 거의 차이가 없다. 어쩌면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본질적인 문제
교육의 실패는 당장 눈앞에서 충격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미성년자를 포함해 20~30대 남성이 주축이 되어 성 착취물을 생산하고 소비한 ‘n번방’ 사건을 보자. 어떤 식으로 이 사건을 분석하든 교육의 실패다. 초기에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를 바이러스를 창궐하게 만든 ‘신천지’ 사태도 마찬가지다. 비합리적인 강요를 스스로 받아들인 대학생 등 청년들이 신천지라는 집단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이 또한 교육의 실패다. 적게는 수만에서 많게는 수십 만 명에 이르는 젊은이들의 이와 같은 행동은, 교육이 실패했음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교육이 실패했을 때 사회가 입을 손실의 양과 질은 계산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는 것도 가늠하게 해주었다.
교육이 실패했을 때의 파괴력을 확인했다면, 이를 거울삼아 교육이 성공했을 때의 생겨날 사회적 혜택의 크기도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실패를 막으려고 또는 성공을 거두려고 모든 국가의 정부는 교육에 대한 권한을 가지려 한다. 한국도 보통교육에 대한 정부의 장악력은 대단한데, 보통교육과 관련된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관료적으로 통제한다. 한국의 예를 들어보자.
한국에서 보통 교육의 교육과정은 국민교육과정으로, 정부가 정한다. 결정과정은 전문가 그룹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절차를 밟아 진행하지만, 교육부의 관리감독 아래서 이루어진다. 국민교육과정이 결정되면 이것에 맞춰 교과서를 만든다. 여기까지는 의무교육 기간을 두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비슷하게 진행되지만, 교과서로 활용하는 교실교육으로 오면 한국의 상황은 기계적으로 진행된다. 교사에 대한 평가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운용된 평가체제를 따른다. 이 당시 평가의 핵심은 ‘교과서 진도에 대한 이수’였다. 교실에 어떤 학생이 앉아 있건, 교과서의 진도를 정해진 기간 동안 마치는 것이 평가의 기준이었다. 교실에서 교사의 자율적 결정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하며, 이로 인해 교육과정에 대한 관료적 통제가 완성되었다.
정부의 교육 통제에서 유일한 예외가 대학이다. 교육제도에서 대학만큼은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한국에는 입시라는 강력한 규칙이 있기는 하지만, 입시를 뺀 나머지는 거의 대부분 대학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이는 ‘연구’라는 과업 때문이다.
연구의 특징은 전문성과 첨단성이다. 해당 분야의 연구자가 아니라면 간섭이 어렵다. 중앙부처 고위 공무원은 엘리트지만, 본격적인 연구 분야로 들어오면 엘리트가 아니다. 따라서 대학에 연구와 관련된 부분에 자율성을 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연구는 자유롭게 풀어주고, 교육은 통제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도 쉽지 않다. 연구와 교육은 떼어내기 어렵다. 보통교육에서 학생은 학생일 뿐이지만, 고등교육에서 학생은 학생이면서 연구자다. 학생은 자기가 무엇을 공부할지 고를 수 있다. 보편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첨단 연구에 참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어야 하기 때문이 학생의 선택권이 보장된다. 고등교육에서는 교수가 학생에게 지식을 전달하면 학생은 해당 분야 동료 연구자가 되다. 심지어 교수도 학생이 되어야 하는 상황이 온다. 연구를 하다가 새로운 영역을 융합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교수는 다른 연구자에게 교육을 받아야 한다. 고등교육은 자율성을 부여하지 않으면 굴러가지 않는, 연구자들끼리 알아서 해야 하는 구조다.
그런데 이런 전통적인 구조가 바뀌고 있다. 보편적이지 않았던 고등교육이 보편화되어 가고 있다. 고등교육의 범위를 다시 정하고, 이에 따른 교육과 연구의 구조도 바꿔야 한다. 전에는 고등교육을 받았고 연구에서 참여했던 사람이 수행하는 대표적인 직업이 기술자, 즉 엔지니어였다. 엔지니어는 기계를 돌리고, 망가지면 고치고, 새로운 기계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엔지니어가 하는 일을 더 나은 기계, AI에게 시키려는 압력이 늘어나고 있다. 대학에서 배우고 연구할 지식이 빠르게 AI로 넘어가면, 무엇을 가르치고 어떻게 연구할 것인지에 대해 대학은 새로 고민해야 한다.
장기 전망 하나. 비극
변화 한가운데서 하는 전망은 유토피아적인 것과 디스토피아적인 것 둘로 나뉜다. 현실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사이 어딘가에 있지만, 현실을 딱 맞추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모두 전망하면,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미래의 현실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디스토피아다.
지금 대학교육은 황폐화되고 있다. 인구가 줄어들고, 대학에 입학할 사람의 수 자체가 줄어드는데, 경상비는 거의 대부분 등록금에 기대어 있다. 대학교육의 미래는 어둡다. 전략적으로 외국인 유학생을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위기에서 벗어나 한숨 돌리나 싶었지만, 바이러스 감염병의 전 세계적 유행은 이것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재정위기를 맞이한 대학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줄일 수 있는 것들을 줄이고, 팔 수 있는 것은 팔 것이다. 교수와 직원을 줄이거나 급여를 깎을 것이다. 물론 연구비도 줄인다. 단 한계가 있다. 어쨌건 교수와 직원이 있어야 학생을 받을 수 있으니 줄일 수 있는 한계가 있다. 대학이 팔 수 있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땅이나 건물, 교육과 연구용 기자재 등을 팔려고 하겠지만 그도 쉽지 않다. 대학이 가지고 있는 땅이나 건물은 상업적으로 입지가 좋은 곳에 위치하지 않는다. 제 값은커녕 파는 것 자체가 어려울 수도 있다. 교육과 연구용 기자재도 기업들이 자체 연구소에서 쓰는 것들에 비하면 뒤처진 것들이 많다. 현재로서는 학생을 외국에서 수입하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지만, 이것도 코로나 이후의 세상에서는 얼마나 가능할지 알 수 없다. 고등교육의 온라인화로 유학 비용을 지불하지 못하던 외국 학생들도 비용을 지불하고 대학의 교육을 구입할 수 있겠지만, 한국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온라인 고등교육도 커다란 도전일 것인데, 외국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온라인 고등교육은 넘어야 할 산이 높고 험할 것이다.
재정위기를 맞이한 대학은 ‘사람을 파는 것’으로 위기를 돌파하려 할 것이다. 지금의 대학은 경쟁력이 없어 보인다. 기업에 비해 기민함이나 역동성이 떨어져 보인다. 그러나 대학을 구성하는 인력은 비교적 고급 인력이다. 만약 대학이 마음을 먹고 돈이 되는 무언가를 만들려고 한다면, 대학 내 고급 인력을 활용해 영리적인 사업을 펼칠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면 대학 가운데 탁월한 영리 학원과 영리 연구소가 된 대학만 살아남을 것이다. 기초연구와 교육적 역할이 사라진 고등교육은 황폐해질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고등교육의 온라인화는 중요한 경쟁점이 될 것이다. 빠르고 효과적으로 받아들이는 대학은 대기업에 버금가는 교육기업이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한 대학은 서서히 도태될 것이다. 대학의 기업화와 고등교육의 상품화도 굳어질 수 있다.
진짜 디스토피아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 대학의 기업화, 교육의 상품화가 빠르고 넓게 진행되지만 사기업이 상품으로 경쟁하는 보통 시장과 대학은 성격이 다르다. 보통 시장에서는 정말 혁신적인 기업과 상품이 시장을 순식간에 뒤집고 새로운 판을 까는 것이 가능하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들고 나와 프리젠테이션을 한 것은 2007년, 한국에서 아이폰 판매가 가능해지면서 스마트폰 시장이 열린 것이 2009년이다. 꼭 10년이 지난 지금, 스마트폰이 아닌 전화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완전히 새로운 판을 펼친 것이다.
고등교육도 10년이 지난 후 완벽하게 달라져 있을까? 전면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면 오히려 다행일 것이다. 아마 10년 후에도 여전히 어찌할 바를 모르며 당황한 채, 계속 나빠지는 상황 속에서 연명해가는 대학이 있을 것이다. 물론 해당 대학의 교수, 학생, 직원은 나쁜 교육와 연구 환경 속에 놓여야 할 것이며, 교육으로 인한 불평등이 더 심해질 수 있다.
장기 전망 둘. 희망
유토피아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고등교육이 무상화될 수 있다. 한국에서 대학등록금은 한 학기에 400만 원 정도다. 공대나 의대로 가면 800만 원까지 올라간다. 10년 정도 등록금이 동결되어 있지만 이대로라면 한 학기 등록금 1,000만 원까지는 올라갈 것이다. 대충하는 예측은 아니다. 미국을 보면 가장 높은 수준의 교육을 제공하는 대학들의 1년 등록금이 5만 달러로, 우리 돈 6,000만 원 정도다. 괜찮은 수준의 교육을 제공하는 그 다음 레벨의 대학들은 1년 등록금 3만 달러, 우리 돈 3,500만 원 정도다. 결국 비슷한 수준으로 맞춰진다면 한국도 1년 등록금 2,000만 원 지점에 이를 것이다.
등록금이 비싸졌을 때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정부 지원이 어렵다는 점이다. 대학생 한 명을 교육하는 데 1년에 2,000만 원을 대학에 주어야 한다. 적은 돈은 아니지만 대학생이 졸업해 돈을 많이 벌고 세금을 많이 내면 못 줄 것도 없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이 잘 안 되거나, 취직을 해도 비정규직이거나, 이런 상황을 피하려고 대학생들 대부분이 최선을 다해 공무원 시험에 매달린다고 하면 정부가 대학 등록금을 지원을 하는 것이 맞을까? 투입 대비 산출은커녕 본전을 회수할 가능성마저 낮다면? 심지어 이제 대부분의 사람이 대학에 간다. 예전에는 대학에 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몇 안 되는 이 사람들은 지식을 연구하고, 보존하고, 생산하는 등의 사회적 효용을 만들어냈다. 전에는 정부가 돈을 대서 이런 기능을 지원할 명분과 이익이 분명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대학 등록금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그 돈으로 공공병원을 하나 더 짓는 게 낫지 않겠다는 질문 앞에서 쉽게 답하기 어렵다.
그런데 고등교육이 온라인화되면서 비용 자체가 낮아진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고등교육에 들어가는 비용이 크게 낮아진다면, 다시 보통교육의 관점에서 투자할 수 있다는 주장이 힘을 받는다.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보다 교육을 받은 사람이 사회적으로 좋은 효용을 낼 가능성이 높다. 대학은 여전히 지식을 연구·보존·생산하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고, 이런 기능을 하는 기관을 유지하는 것도 타당하다. 그러니 비용을 극적으로 줄인다면 정부 지원은 쉽게 결정될 수 있다. 고등교육 무상화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유토피아가 된다면, 대학은 사회의 일부가 될 것이다. 지금의 대학은 사회와 떨어져 있다. 예전에는 고고한 상아탑이었다면, 지금은 갈라파고스다. 기업은 돈을 버는 교육을 하고, 돈을 벌기 위한 연구를 한다. 그런데 사회에는 돈을 버는 교육과 돈을 버는 연구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장기적으로 결과가 나오는 기초연구나 기초교육을 하는 등의 역할이 대학에 요구되었지만 잘 수행해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는 대학을 굴리는 돈이 어디서 나오는지에 대한 문제다. 교육과 연구를 학생들의 돈으로 하면 학생들이 원하는 교육과 연구를 해야 한다. 취업을 위한 교육과 연구다. 기업의 돈으로 교육과 연구를 하면? 수익이 나는 교육과 연구를 해야 한다. 대학 자신의 돈으로 교육과 연구를 하면? 설립 취지에 따라 다양한 교육과 연구를 할 수 있겠지만, 대학 자신은 돈이 없다. 그럼 정부의 돈으로 교육과 연구를 하면? 그래도 이 모든 것들의 중간 지점 어딘가에 있는 교육과 연구가 가능하겠지만, 고등교육 그것도 사립대학에 예산을 쏟기에는 정치적으로 부담이 되었다.
그런데 온라인화로 비용이 줄어든다면 어떻게 될까? 대학, 학생, 기업이 원하는 어딘가에 목표 지점을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는 대학에 지원을 한다면 무상교육도 가능해진다. 이미 정부는 매년 대학에 0000원을 000 형식으로 지원하고 있는데, 이는 대학 운영비의 00%다. 따라서 비용이 00% 낮아진다면 전액 지원도 가능하며, 전액 지원이 가능하면 그게 무상교육이 된다. 무상교육이 되면, 대학의 정체성을 찾을 것이다.
행복한 설계도를 그려보자. 등록금 부담이 낮아진 학생은 학교를 오래 다닐 수 있다. 취업이든 창업이든 자기계발을 위해 더 많은 교육을 받을 수 있으며, 연구에도 더 많이 참여할 수 있다. 기업은 비정규직을 좋아한다. 기업이 비정규직을 좋아하는 이유는, 기업이 악마라서가 아니다. 기업이 비정규직을 좋아하는 이유는, 지금은 30년 동안 계속할 수 있는 사업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현장은 빠르게 바뀌는데, 그 때마다 직원을 다시 교육시키기 너무 힘들다. 기업은 돈을 버는 조직이지 교육과 연구하는 조직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범죄적인 수준의 비정규직화와 외주화가 있다. 그럼에도 기업은 비정규직과 외주화라는 답을 고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학이 무상교육화된다면 어떻게 될까?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바꾸라는 사회적 압력을 줄여주는 대신, 기업에 세금만 더 내라고 하는 사회적 거래를 시도할 수 있다. 더 걷은 세금에 원래 재정을 더해 고등교육을 무상화한다. 여기에 실업수당을 현실화하면, 개인은 노동자와 학생 사이를 좀더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실직수당으로 생활을 영위하며, 무상화된 대학에서 새로운 준비를 할 수 있다. 급여와 복리후생의 좋고 나쁨을 떠나, 꽤 많은 신입사원들이 이직과 퇴직을 생각하고 준비하고 실행하는 이유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학도 대환영이다. 끊임없이 고민했던 대학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은 취업준비소인가 기업 프로젝트 외주처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다.
길은 두 갈래고, 선택해야 한다. 바이러스는 선택해야 하는 시간을 앞당겨주었다. 10년 후에 그나마 대학다운 대학으로 남아 있을 곳은 많지 많다. 변화를 택해야 하지만, 변화하는 몸은 그리 빨리 만들어지지 않는다. 우연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맞이한 바이러스는 강제적으로 선택할 기회를 주었다.
유럽과 미국 대학이 시작된 곳은 유럽이다. 유럽에서 대학은 자연발생적이었다. 어느 도시에 학자의 집이 있었다. 그리고 학자의 조수를 하려고 연구원 한 명이 도시로 이사와 방을 얻었다. 이렇게 한두 명씩 조수가 늘어나 학자의 집이 터지게 생기자, 아예 넉넉한 집을 새로 빌렸다. 공간이 넉넉해지니 강의실과 연구실도 나눌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렇게 도시 전체가 변해가며 대학이 되었다. 미국은 유럽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인위적인 것들이 많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모든 것을 빠르게 새로 만들어야 했다. 대학도 마찬가지여서 유럽처럼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지기를 기다릴 수 없었다. 너른 땅에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교육과 연구에 필요한 시설을 지은 캠퍼스(campus)라는 것을 만들었다. 미국에서 대학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때는 영국의 식민지였을 때다. 상류층 자녀의 엘리트 교육을 위해서 대학을 만들기 시작한, 역사가 긴 사립대학이 많다. 링컨 대통령 이후부터 대형 주립대학을 건설하여 고등교육 제도를 대중화가 시도되었다. 그런데 대형 주립대학도 의도적으로 만든, 캠퍼스 시스템을 적용했다. 한국도 빠르게 대학이라는 것을 만들어야 했기에, 캠퍼스 시스템을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유럽에서 대학은 국유화·공유화된 것들이 많다. 대학은 ‘수익을 남겨야 하는 기업처럼 운영할 수 없으며, 사회 전체의 지식을 보존하고 확산하는 제도’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국공유화된 대학 시스템은 경쟁에서 뒤처지기 쉽다는 단점이 있다. 단 장점도 있다. 국공유화된 시스템은 민영화 시스템보다 이해관계자가 적다. 따라서 큰 규모의 변화를 결정하고 실행하기 쉽다. 장기적인 전망과 분석에서 유력한 사업을 정리하고 신사업에 투자하는 데는, 주주들을 신경 써야 하는 주식회사보다는 오너 기업이 유리할 수 있다. 국공유화된 시스템의 장점은, 정치적 결정이 내려지면 결정된 대로 하면 되는 간편함이다. 따라서 고등교육의 온라인화는 유럽에서 더 빠르고 전면적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
가능성
언제나 어디에나 모순은 있었고, 모순을 해결하려 꿈을 꾸는 사람은 늘 있었다. 다만 그것이 현실로 만드는 동력이나 계기는, 전쟁이나 기근처럼 외부적인 힘에서 비롯한 경우도 많다. 지금 이 모든 상황도 바이러스 때문에 생겼다. 뒤집어 말하면 코로나19 치료제나 백신이 나타나 극적으로 바이러스를 통제할 수 있으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코로나19로 이미 발생한 충격과 손실이 있겠지만, 바이러스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면 충격과 손실은 손익계산서에서 적자 계정으로 돌리면 그만이다. 문제가 있었지만 익숙한 기존 시스템으로 돌아갈 가능성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화보다 안정을 바란다. 고등교육의 온라인화도 모두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감과 어느 정도의 과학으로 직관해보자면, 이미 변화의 긍정적인 면을 빠르게 경험하고 있으며, 적응할 준비도 해나가고 있다. 나는 평소에 모임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매주 평균 3~4개 정도의 연구모임이 있다. 연구사업으로 벌여놓은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어쩔 수 없이 모임을 온라인으로 하거나 취소해야 했다. 오프라인 모임은 70%까지 줄어들었는데, 다양한 연구 프로젝트의 진행에 아직까지 큰 문제는 없다. 바이러스가 삶의 비효율을 확인시켜주고, 덜어낸 셈이다. 경험과 확인이 늘어갈수록, 일상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개인에게는 삶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일 것이고, 조직에게는 비효율을 덜어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비효율이 비용과 연결되어 있다면, 그래서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쉽게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한편 바이러스가 퍼지는 것에 대응하는 모습을 보면, 선진과 후진의 기준도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무슨 일이 터지든 외국 사례를 먼저 찾아보는 습관이 우리 몸에 배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찾아볼 사례가 없다. 오히려 한국이 외국에게 사례로 받아들여진다. 특정 영역에서 특별한 한국인이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성과를 낸 적은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 전체적으로, 즉 민간과 공공을 통틀어 종합적인 성과를 내고 ‘선진’이라는 평가를 객관적으로 받아본 적은 없다. 바이러스의 확산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중이라 섣부를 수는 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그러니 어디에서 누구도 해보지 않은 것이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고등교육의 전면적인 온라인화도 마찬가지다. 한국이 선진적으로 밀고 나가면, 첫 사례가 될 수 있다.
필요한 것 하나. 정치적 리더십
고등교육의 주체 가운데 하나인 대학은 80%가 사립이다. 한국에 4년제 대학교와 2년제 대학이 모두 350개 정도니 사립은 300개 정도다. 이 사립대학 가운데 어떤 상황이 오든 자기 힘으로 헤쳐 나갈 곳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면 전면적인 온라인화와 그에 따른 교육과정 개편 등을 받아들이는 대학부터 정부가 무상교육화를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정책을 넘어서는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해당 대학은 무상교육화에 필요한 지원을 받아들이는 대신, 온라인 중심의 교육과 연구를 위한 대학 시스템의 구조개편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대학의 컨셉을 정하는 것도 필요하다. 대상은 서울과 수도권이 아닌 지방에서 시작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지만, 서울과 수도권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빠르게 참여시킬 수 있다. 대학은 해당 지역에 필요한 직업교육, 평생교육, 연구용역 가운데 자신의 컨셉을 고르게 해야 한다. 단 구조개편에 나서는 대학에 한해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는 정치적 리더십이 없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희망적인 것은 정치적 리더십으로 변화를 맞이했던 경험이 한국에는 많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중요한 변화 가운데 위로부터의 시작된 것도 적지 않다. 그리고 한국은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는 편이다. 하루아침에 좌측통행이 우측통행으로 바뀐다거나, 어느 날 갑자기 도로명주소를 쓰기 시작하지만 빠르게 적응한다. 다른 나라였다면 시도조차 하기 힘든 파격적 변화지만, 한국에서는 빠르게 받아들여진다. 바이러스가 퍼지는 상황에서 한국이 빠르게 탈출할 것으로 보이는 이유도, 새로운 상황에 빠르게 대처하는 능력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빠르게 정보를 받아들여, 빠르게 몸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한국이 대유행 상황에서 벗어난다면 바이러스가 퍼지는 속도보다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속도가 빨랐던 것이 중요한 요인으로 결론날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 리더십이 리드하고, 빠른 적응력으로 따라간다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필요한 것 둘. 상상력
한국 고등교육 시스템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는 대학 입시다. 그리고 입시 뒤에는 학벌이 있고, 학벌 뒤에는 유·무형의 소득격차가 있다. 바이러스의 충격이 크고, 그 충격으로 고등교육의 온라인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목격했지만, 바이러스가 아직 입시, 학벌, 예고된 소득격차까지 충격을 주지는 않았다. 즉 정치적 리더십으로 고등교육 시스템을 바꾼다고 한들, 학생과 학부모가 따르지 않는다면 소용없는 일이다. 이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정부의 고등교육 예산은 1년에 약 3조 원, 여기에 국가장학금 예산이 약 4조 원이다. 합치면 7조 원인데, 7조 원은 대학이 쓰는 비용의 절반 정도는 담당한다. 즉 7조 원을 더 예산으로 잡아 14조 원이 되면, 대학생이 등록금을 한 푼도 내지 않아도 지금 수준의 고등교육은 운영할 수 있다. 작은 돈이 아니지만, 한국 정부의 예산 규모에 비추어 쓸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돈도 아니다. 고등교육의 무상화도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대학의 운영도 자본주의의 논리를 따른다. 돈을 내고 헤게모니는 잡는 게임이다. 지금까지는 학생이 내는 등록금이 헤게모니였다. ‘어차피 대학은 돈을 내는 학생과 학부모가 운영할테니, 정부는 가장 공정한 시험제도만 운영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정부가 돈을 모두 내고 운영권 전부를 얻는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대학의 서열화를 깰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할 수 있다.
물론 정부가 모두 돈을 낸다고 해도 기득권은 남아 있다. 정부 돈을 거절할 것이 분명한 명문 대학들이다. 대학에 가려는 학생 가운데 1~2% 정도가 명문대학에 입학하는데, 명문 대학이 누리는 기득권은 가상현실을 바탕으로 한다. 학부모들은 비합리적인 가설을 세우는데, 자신의 자녀는 명문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는 가설이다. 그리고 꽤 많은 학부모들이 이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경쟁한다. 경쟁의 이득은 명문 대학이 가지는 기득권이다. 기득권 있는 명문 대학까지를 제도로 흡수할 방법은 없다. 물론 당장에 흡수되지 않아도 문제는 없다.
소수의 명문 대학을 뺀 나머지 고등교육을 무상화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일단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격차를 해소할 수 있다. 한국 대기업 신입사원의 초봉은 중견기업이나 중소기업과 비교하면 매우 높은 수준이다. 그런데 등록금이 비싼 환경에서는 높은 초봉이 실질적인 효과를 내지 못한다. 학자금 대출 등의 부채가 고액 연봉을 상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자금 대출이 없다면, 중소기업의 임금을 인상해주는 효과가 생긴다.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사기업의 임금에 개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고등교육 무상화로 중소기업 임금을 올려주는 효과를 낼 수 있다. 서열화로 인한 피해를 일부 보전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서열화를 깨는 더 강력한 방법이 있어야 한다. 이는 통합대학 설립으로 가능하다. 한국에는 국립대학이 00개 있다. 이 역시 무상화로 헤게모니를 정부가 쥐었다고 가정하면 좀더 수월하게 학사행정을 운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각 국립대학 현재 정원의 10% 정도를 통합대학으로 뽑는다. 지방에 있는 A국립대학에 다니는 학생 ‘갑’은 통합대학 소속이다. 갑은 A국립대학에서 자기가 전공을 고를 수 있다. 그런데 갑은 다른 지방에 있는 B국립대학의 과목을 수강할 수도 있다. 온라인화가 되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갑은 A국립대학에서는 a라는 전공을, B국립대학에서는 b라는 전공을 할 수도 있다. 지방 국립대학이 특성화된다면 효과는 더욱 있을 것이다.
이렇게 지방 국립대학 네트워크 안에 포함된 갑은 필요한 학점을 이수하고 졸업한다. 갑은 A국립대학 졸업장과 통합대학 졸업장을 받는다. 전공은 a와 b 두 가지다. 이렇게 하면 지방 국립대학을 상향평준화시킬 수 있고, 무상화된 고등교육 시스템 안에서 소수의 기득권 명문대학의 서열과 경쟁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지방 국립대학 100% 학생을 이런 식으로 운영할 수도 있고, 나중에는 지방 사립대들 역시 이런 방식으로 묶을 수 있다. 공동입시라는 제도다. 공동입시를 수용하는 지방 사립대는 추가로 지원이 나갈 것이다. 물론 전제가 있다. 고등교육의 온라인화로 비용을 줄이고, 고등교육의 온라인화로 공동입시와 통합대학이 실질적인 운영이 가능해져야 한다.
고등교육의 무상화로 정부가 100% 헤게모니를 가지려면 더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역차별 문제다. 명문대학과 지방대학의 중간에 있는 수도권 대학들은 역차별을 당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명문대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혼자 힘으로 자신들만의 헤메모니를 유지해갈 것이고, 지방 국립대학과 사립대학은 정책적 지원으로 활로를 찾는다면, 중간에 낀 수도권 대학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고 느낄 가능성이다.
그러나 이것도 선택의 문제다. 이미 수도권 대학들은 정원 통제 등의 페널티가 있다. 정책 안으로 진입했을 때 보상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 셈이다. 게다가 선도적인 특성화 전략도 가능하다. 수도 이전과 같은 극약 처방이 쟁점이 되는 것은,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를 줄이는 데는 극약 처방이 필요한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학은 그렇게 독한 약을 쓸 정도는 아니다. 대학 서열에서 높은 곳에 위치하는 포항공대나 카이스트는 지방에 있다. 수도권에 있는 대학 가운데는 강한 특성화의 목표를 제시할 수도 있다. 물론 그 길로 가기 위해 비용을 줄이고, 교육의 수월성을 확보할 수 있는 고등교육의 온라인화가 함께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내일 해야 할 것 하나. 관료의 변화
고등교육은 잘 아는 사람이 없다. 대학교수는 박사학위를 마치고, 계속 공부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한다. 많이 배운 사람들이지만 교수도 고등교육에 대해 잘 모른다. 대부분의 교수는 자기 연구실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대학 밖에 있는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아무도 모른다면 차리라 사회적 합의를 거쳐 새 원칙을 세우는 것이 어렵지 않아야 정상이다.
그런데 고등교육을 잘 모르지만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정리되지 않은, 어렴풋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결정권을 가진 이들은 고등교육 정책을 결정하는 관료들이다. 이 관료들 대부분은 대학교육을 직업교육의 관점에서 본다. 그리고 이 부분을 손대지 않으면 변화는 어렵다.
직업교육은 현장에서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을 가르치는 일이다. 그런데 현장에서 써먹을 수 있을 정도로 기술을 가르치려면 굉장한 지식이 필요하다. 어떤 경우에도 가장 치열한 곳은 현장이기 때문에 이론과 실제가 균형을 이루어야 하고, 오래된 기본과 가장 최근의 응용을 모두 알아야 한다. 지금 한국의 대학에서 이런 교육을 담당한다는 것은 무리다. 미래의 대학에서도 어려울 것이고, 이게 교육으로 가능한 일인지에 대해서도 장담하기 어렵다. 전달하기 위해 지식을 얻는 과정에서 이미 현장은 진화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잘 가르친 학생을 현장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잘 해나갈 수 있게 학생을 가르쳐야 한다. 이런 이유로 지식교육보다 역량교육에 무게를 두어야 한다.
역량교육의 중요성은 다들 공감한다. 관료들도 여기까지는 생각을 발전시켰다. 문제는 도대체 ‘역량교육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다. 지식교육은 외우거나 연습해서, 시험으로 확인한다. 보통은 기준을 정하는데, 기준점에 이르지 못하면 보수해서 완성할 때까지 반복한다. 이렇게 되면 특정한 상황의 문제를 특정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 특정한 상황에 대한 특정한 역량이라고 할 수 있는데 뭔가 애매하다.
이런 애매한 느낌은 ‘역량’이라는 단어 때문에 생기는 것일 수 있다. 용어를 좀더 정확하게 교정하면, ‘고차 사고력 교육’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현장에서는 특정한 상황만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문제 해결 능력이나 창의성이 필요하다. 도대체 문제 해결 능력이나 창의성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 이런 능력은 ‘읽기’나 ‘쓰기’처럼 000한 교육을 통해 얻을 수 있다. 멋있거나 화려하지 않고, 시간이 오래 걸려 느리게 성장하는 능력이다. 교육정책의 좌우하는 관료들이 보기에 멋있거나 화려하지 않고, 시간은 오래 걸려 느리게 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 고등교육이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내일 해야 할 것 둘. 보충
모든 교육 방법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개인교수다. 교수 한 명이 학생 한 명을 가르친다면, 교수는 전적으로 학생의 상황에 맞춰 교육할 수 있다. 학생이 두 명이 되는 순간, 교수는 결정해야 한다. ‘누구의 수준에 맞출 것인가?’ 학생 수가 늘어날수록 교수가 정한 선에서 멀어지는 학생이 많아질 것이니, 교육이 효과는 떨어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교수를 더 많이 뽑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고등교육의 문제는 교수와 학생의 이분법 구도에서 비롯하는 부분도 무시할 수 없다. 교수는 무엇이든 가르칠 수 있고, 학생은 무조건 배우기만 해야 한다. 즉 교수에게는 무한한 책임이 주어지는 대신 무한한 권한도 주어진다. 교수가 되는 것은 어렵지만, 한 번 교수가 되면 그를 관리하기도 어렵다. 반대로 학생은 시험으로 평가받는 것 말고는 책임질 것이 없지만, 권한도 없다. 학생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데, 수동적인 입장에서 고차사고력을 기를 방법은 없다.
고차사고력을 기르는 교육이 어렵고 가장 좋은 방법이 교육법이 개인교수라면, 그리고 고차사고력 교육이 어렵다면, 교수의 숫자를 늘려 최대한 개인교수에 가까운 구조를 만들어 고차사고력을 기르는 교육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설계도는 이렇다.
우선 기본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가이드 강의를 온라인으로 진행한다. 이는 현재 교수인 사람들이 담당한다. 그리고 현장 교육이 진행된다. 소규모로 진행되는 현장 교육은 학생이 교수가 되는 구조다. 대학교 저학년 학부생을 고학년 학부생이 가르치고, 석사과정 대학원생은 학부 고학년을 가르친다. 대학원 박사과정생은 석사과정을 지도한다. 계단식으로 구조를 짜면 교수 인력을 확보할 수 있다. 온라인화를 통해 줄인 비용을, 학생인 교수에게 지출하면 고질적인 연구인력 인건비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도 있다. ‘라이센스를 딴 사람에게 배운다’가 아니라 ‘아는 사람에 배운다’로 컨셉을 바꾸는 것이다. 온라인 교육에서 인터랙티브가 중요하다면 소규모 학습집단이 유리하다. 온라인 교육에서 뉴미디어에 대한 경험과 이해가 사람들이 직접 교수로 참여하는 것도 효율성을 높여줄 것이다. 수강하는 입장에서도 온라인 수업의 진짜 효과는 소규모 학습 집단에서 자세하게 튜터링을 받을 때 얻을 수 있다. 그리고 현재 개설되어 있는 대학의 과목 가운데 이런 방식으로 진행할 수 있는 과목은 많다.
내일 해야 할 것 셋. 생태계
경쟁으로 몰아가지 않고, 참여자들이 스스로 선택하는 구조로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쟁은 합의하에 죽을 대상을 정하는 게임이다. 고등교육의 온라인화를 설계한다고 했을 때 경쟁 모델로 가면 성과를 심사해야 한다. 물론 심사에서 탈락하면 예산 지원을 받지 못하고, 예산 지원을 받지 못하면 좀비가 되어 버티거나 문을 닫아야 한다. 고등교육의 온라인화는 특별한 계기를 맞아 고등교육을 살리는 것이 목표다. 특별한 계기를 맞아 죽을 대상을 골라내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위기와 기회 앞에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설계해야 한다. 선택한 만큼 예산을 지원하고, 지원받은 만큼 혁신에 몰입할 수 있도록 방임해야 한다. 대신 선택은 분명한 것이어야 한다. 고등교육에서 문제가 된 것은 유·무형의 소득격차로 이어지는 서열화이지 분업화가 아니다. 정치적 리더십은 고등교육의 분업화를 선택할 수 있도록 안내해야 한다.
코로나19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금은, 정치적 리더십이 유리한 상황이다. 평시였다면 서열 피라미드 맨 꼭대기에 있는 대학들이 기득권을 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중간 아래 서열에 있는 대학들은 꼭대기에 있는 대학들이 독식하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서열에 관계없이 모든 대학이 위기에 처했다. 예산 압력이 현실화될 것이고, 서열의 꼭대기에 있는 대학들도 어쩌면 정치적 리더십에 따를 수 있게 만드는 기회가 될 것이다.
서열의 중간 아래에 있는 대학들도 마찬가지다. 바이러스 이전까지는 학생들을 잡아둘 물리적 방도가 있었다. 물리적인 캠퍼스는 독특한 문화를 제공할 수 있었다. 선후배와 동기, 교수와의 인간적인 관계도 제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이러스 이후에는 이 모든 것들을 학생들에게 줄 수 없다. 서열의 사다리를 올라가기 위해 재수나 편입 등은 더 활발하게 일어날 것이고, 중간 기착지 정도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온라인화나 특성화의 길을 선택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문을 닫게 될 것이다.
시나리오
대량 실업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 서비스업 영역에서 항공 산업이나 제조업 영역에서 자동차 산업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 크고 작은 기업을 끼고 있는 산업에 문제가 생기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연쇄적으로 대량 실업이 일어날 것이다. 복지모델이 잘 굴러가던 정부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니, 한국의 복지모델로는 버틸 수 없다.
정부는 오래전부터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하고 있다. 여기에 바이러스가 결정적인 충격을 주었다. 그러니 일자리 늘리기를 목표할 것이 아니라 일자리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에 집중할 때가 되었다. ‘어쩌지 어쩌지’ 하고 있던 차에 바이러스가 결정을 내려준 것이다.
현실적으로 대량 실업 사태를 받을 수 있는 영역은 고등교육 말고는 없다. 실업수당을 장기간으로 늘이거나 전면적인 기본소득 정책으로 생계비를 보전하면서, 온라인화된 고등교육 시스템으로 갑자기 늘어난 실업자를 받아들이는 방법이다.
나는 얼마 전까지 국적 항공사에 다녔지만 바이러스로 비행기가 뜨지 않아 직장을 잃게 되었다. 나는 자동차 조립라인의 비정규직이었고,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비정규직 일을 하고 있었지만, 재미도 의미도 미래도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도 바이러스 때문에 제일 먼저 잘렸다. 이 두 사람에게 정부가 기본소득처럼 기본교육 바우처를 나누어준다. 두 사람은 근처에 있는 대학을 검색한다. 평소에 배우고 싶었던 것이 과목으로 열렸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교육이 섞여 있는 블렌디드 과목이며, 정부에서 받은 기본교육 바우처를 쓸 수 있다. 교육을 받으러 간다.
교수가 나오는 강의 영상을 보고, 몇몇 학생들과 그룹을 짜 대학원생 멘토 교수에게 튜터링을 받는다. 과제를 이수하고 오프라인에서 실습을 진행한다. 나는 성과가 제법 좋다. 다음 학기에는 다른 학생 튜터링 지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에 따른 인건비 보상도 있고, 프로젝트 연구팀에 연구원으로도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프로젝트 연구팀에서 연구한 것이 지역 사회에 유용하게 쓰인다면 팀원들과 작은 창업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창업이 실패한다면? 다시 학교로 돌아와 배우고 가르치고 연구하고 준비하면 된다.
주의사항. 온라인에 대한 맹목
고등교육의 온라인화는 교육 컨텐츠에 영향을 주어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즉 온라인화만 한다고 고등교육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절대 착각해서는 안 되는 지점이다. 지금까지의 교육 컨텐츠는 암기였다. 제일 잘 외우는 학생이 명문 대학에 간다. 그런데 외워야 할 지식들은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거의 대부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검색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기도 했다. 그리고 이 또한 편향으로 작용했다. 검색을 잘한다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바이러스가 확산된다고 공공의료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바이러스의 확산을 계기로 공공의료에 대한 공감대를 두텁게 하고, 기왕에 공공의료 컨셉으로 시스템이 돌아가는 김에 공공의료를 확충하는 계기로 활용하는 것과 같다. 온라인화가 된다면 고등교육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좋은 고등교육에 대한 실험을 전면적으로 할 수 있는 계기로 삼는 것이다.
고등교육의 온라인화, 좀더 넓게 교육의 온라인화를 말하면 극단적인 두 가지 입장과 만나게 된다. 하나는 온라인화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과, 교육은 온라인으로 해결할 수 없는 본질적인 무엇이 있다는 주장이다. 답부터 말하자면, 극단적인 것들이 늘 그렇듯 둘 다 틀렸다.
고등교육이 온라인화된다고 해서 완전히 새로운 교육을 할 수 있을까? 온라인은 교육을 담는 틀이다. 새 틀이 눈길을 끈다면,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다. 시간을 거슬러 고대 그리스로 가보자. 소크라테스는 책을 쓰지 않았다. 그에게 교육의 툴은 외우는 것이었다. 외우지 않고 글로 적으면 지식이 책에만 있고 사람에게 남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은 파피루스에 글을 남겼다. 새 틀을 도입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와 했던 대화라는 컨셉으로 지식을 남겼다. 여전히 외우는 것은 중요한 교육 방식이다.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이라는 새로운 틀을 사용하면 비용이 줄어든다. 교육에 책을 널리 활용하지만, 플라톤이 책에 남긴 지식은 소크라테스로부터 비롯된 것이니, 컨텐츠 자체는 바뀌지 않은 것이다.
반대쪽에는 온라인으로는 교육을 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교실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만들어내는 효용을 강조한다. 온라인으로 교육을 할 경우 몇 개의 인기 강의가 교육 전체를 독식할 것이며, 다양성이 훼손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이 지지받기 어려운 이유는, 이미 교실 시스템은 운영이 되고 있지만 빚어지는 문제들을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육은 시민을 길러내지도 불평등을 해소하지도 못하고 있다. 그나마 교육이 있어 이 정도도 버티고 있다는 반박은 먹히지 않는다. 온라인화로 모든 문제를 풀 수 없듯, 지금의 시스템도 문제를 풀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