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을 말씀: 창세기 3-4장
설교본문: 창세기 4:23-24
창세기 1-2장은 창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온 만물을 창조하셨고,
마지막에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마치 드라마를 보면 카메라가 멀리서 전체를 찍다가
점차 시각을 좁혀서 특정 인물을 크로즈업 하듯이,
성경은 창조이야기를 모든 만물을 보여주다가
마지막에 사람을 향해 집중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사람에게 집중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과 악을 아는 나무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 결과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이제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의 계보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제사를 드렸다가
순교한 아벨은 대를 잇지 못했고,
셋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계보가 이어집니다.
그 계보는 노아와 아브라함을 거쳐서
그리스도 예수에게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3-4장은 거룩한 계보를 위협하는
악한 자들의 계보가 먼저 소개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악한 자들로 인해
핍박 당하시고, 죽임 당하셨듯이
믿는 자는 언제나 의로 인해 고난을 당하게 됨을 보여줍니다.
이 악한 계보는 아담을 따라 가인- 라멕으로 흐릅니다.
그리고 악의 계보는 갈수록 더욱 악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아담의 죄의 모습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후,
자신들이 벌거벗음을 깨닫고 숨어버립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찾았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
이들은 비록 죄를 저질렀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죄를 지적하실 때
비록 아담은 하와 탓을 했고, 하와는 뱀 탓을 했지만
죄를 죄로 여겼습니다.
아직 그 양심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2)가인의 죄의 모습
가인은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자 동생을 죽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며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4:9)고 물으실 때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을 했고, 또한
하나님의 질문이 부당하다고 대드는 모습입니다.
이미 살인이라고 하는 중죄를 저질렀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뻔뻔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만큼 양심이 무디어진 것입니다.
3)라멕의 노래에 담긴 의미
라멕은 아담의 6대손입니다.
그는 두 아내를 취했고, 그 자녀들 중
야발은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요,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의 조상이요,
두발가인은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입니다.
자녀들의 직업만 봐도 라멕의 세력이
꽤 컸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육축은 많은 인력을 필요로 했습니다.
음악은 풍류를 즐기는 여유로운 삶을 보여주고
기계는 전쟁을 통해 정복할 수 있는 힘을 보여줍니다.
라멕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한 마디로 나를 건들기만 하면
다 죽이겠다는 경고의 노래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라멕의 시기는 에녹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다서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는 에녹을 통해 장차 임할
심판에 대해 예언하게 하셨는데(유1:14-16)
이와 같이 아담에서부터 가인-라멕이 이르기까지
죄가 점차 강도를 더해가고, 확장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에 악이 자꾸 확장하는 것을 보면 염려가 됩니다.
사람이 저렇게나 잔인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요새 사건 사고는 참으로 끔찍합니다.
그런데 4장 마지막에 하나님은 희망을 기록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담의 아들 셋의 탄생입니다.
세상에서 악한 자들이 강대해지고,
의인을 박해하고 죽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셋이 탄생했을 때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 어두운 때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더욱 찾을 것이며,
주님의 이름은 더욱 해 같이 빛날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믿음의 혈통입니다.
이 악한 세대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꼭 보호해주신다는 약속을 믿고
우리는 끝까지 주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하는 진정한 예배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