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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박씨의 시조(始祖)는 누구일까? 물론 호장공(戶長公) 박응주(朴應珠)이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증명하나? 반남박씨족보(세보)에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그렇다고? 그럼 반남박씨족보는 무엇을 근거로 시조를 朴應珠라고 단언하고 있는가? 반남박씨족보가 그렇다고 하면 그대로 모두 사실(事實)이 되는가? 물론 이러한 의문(질문)은 반남박씨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성씨들의 족보에도 해당된다. 가령, 어느 가문에서 18세기에 처음 족보를 편간(編刊)하면서 구체적 근거 자료도 없이 300년, 400년, 또는 500년 전 조상들의 종횡(縱橫) 계보를 일사불란하게 제시하고 있다면 그것을 그냥 진실로 받아들여야 할까? 선조님들께서 만드신 족보이니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사실로 믿어야 하는 것인가? 족보도 역사다. 역사 연구에 있어서 실증적 접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이수건 2003). 족보의 기록도 족보 외(外)의 증거 자료에 의해 실증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반남박씨 문중에서 처음으로 대동보(大同譜)를 간행한 것은 1642년(조선 인조 20년 임오보壬午譜)인데 그 당시 400여 년 전에 활동한 인물로 추정되는 朴應珠의 실존(實存)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었을까? 朴應珠의 실존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 증빙 기록 문헌은 무엇인가?
여기에 바로 이른바 <밀직공 계축호구>(이하 계축호구)가 등장한다. 계축호구(癸丑戶口)는 1373년(고려 공민왕 22년) 박수(朴秀: 1296~ ?)라는 인물이 당시 관(官)으로부터 발급 받은 준호구(準戶口)이다. 준호구는 관청에 비치된 호적 원본을 근거로 하여 발급한 일종의 사본(寫本)으로 오늘날의 주민등록 등본, 또는 가족관계증명서와 유사한 문서이다. 밀직공(密直公) 박수(朴秀)를 호주(戶主)로 하여 발급된 이 준호구는 후손들에게 전승(傳承)되어 마침내 반남박씨 최초의 대동보인 임오보(1642년)의 출발점이 되었다. 계축호구가 확인해 준 반남박씨 출발의 다섯 세대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계축호구에 기록된 내용 중 본고의 논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부분은 생략함).
1세(朴秀의 증조) | 2세(朴秀의 조) | 3세(朴秀의 부) | 4세(朴秀 호주) | 5세(朴秀의 자녀) |
朴應珠 戶長 | 子宜 及第 | 子允茂 進士良醞令同正 (妻)和順吳氏 | 子秀 奉翊大夫密直副使 上護軍致仕 年七十八 本潘南 (妻)化平郡夫人金氏 籍光州 | 子尙衷 |
女安吉常 |
子尙眞 |
子尙褧 |
女柳伯濡 |
이로써 반남박씨는 1세 박응주, 2세 박의, 3세 박윤무, 4세 박수, 그리고 5세 박상충ㆍ박상진ㆍ박상경 등 7인은 고려 공민왕 22년(1373년) 관(官)에서 발급한 준호구에 의해 그 실존(實存)과 이력(履歷)이 확인된다. 다시 말해서, 박응주 이하 박상충 3형제에 이르는 인물들은 단순히 족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ㆍ공간적 좌표(座標)에 실제로 활동했던 인물들이었음이 족보 외(外)의 다른 실증적 자료에 의해 명백하게 증명된 것이다.
그렇다면 호장공 박응주 이전의 세계(世系)는 어떻게 될까? 안타깝게도 우리는 호장공 이전의 선조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19세기 말(1899년) 박성민(朴性玟) 등에 의해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박씨신라선원세보(朴氏新羅璿源世譜)』는 호장공 박응주를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의 42세손(박씨 43세)으로 자리매김하고 박혁거세로부터 신라 54대 경명왕(景明王: 재위 917~924)을 거쳐 박응주에 이르기까지 모든 직계 인물들의 계보를 제시하고 있지만 도무지 신빙성이 없는 주장에 불과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시 말해서, 박성민 등은 그들이 주장하는 계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믿을 만한 역사적 증빙 자료 없이 그저 글자 그대로 '근거 없는 주장(또는 억측)'을 내세운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반남박씨는 호장공 박응주를 시조(始祖)로 삼고 그 이후의 세계만 인정할 뿐이다. 물론 호장공에게도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고조, . . . . . 등의 선조가 존재했겠지만 현재로서는 알 수 있는 사실이 아무 것도 없다, 다만, 대한민국의 모든 박씨(朴氏)(귀화 성씨 제외)들이 그러하듯, 반남박씨도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의 후손일 것이라 믿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박혁거세와 호장공 박응주 사이의 약 1,200여 년에 이르는 기간을 이어 줄 수 있는 계보(系譜)는 어디에서도 확인할 수 없다. 안타깝지만 현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반남박씨의 출발은 호장공 박응주에서 시작하며, 박응주와 그의 아들ㆍ손자ㆍ증손ㆍ현손(玄孫)에 이르는 총 7인의 반남박씨 인물들은 4세 밀직공 朴秀(박응주의 증손)의 계축호구에 의해 그 실존과 이력이 확인된다. 다만, 현재로서는 호장공과 박씨 시조 박혁거세 사이 1,200여 년 동안의 세계(世系)는 알 수 없으며, 호장공 박응주의 형제ㆍ급제공 박의의 형제ㆍ진사(참의)공 박윤무의 형제ㆍ밀직공 박수의 형제에 대해서도 족보(세보) 외(外)의 다른 구체적 문헌 자료에 의한 확인은 어려워 보인다.
참고자료: 밀직공계축호구(密直公癸丑戶口)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