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stock principle of Warren Buffett (원렌 버핏의 3가지 주식 원칙 )
1, Never lose money (절대로 돈을 잃지마라 )
2, Never forget Rule No 1 (첫번째 규칙을 잊지마라 )
3, Open your eyes and stock up .(눈깔 똑바로 뜨고 주식해라 )
워렌 에드워드 버핏은 미국의 기업인이자 투자가입니다.
뛰어난 투자실력과 기부활동으로 인해 흔히 오마하의 현인이라고 불립니다.
2010년 기준으로, 포브스 지는 버핏 회장을 세계에서 3번째 부자로 선정하였습니다
2020년 기준으로 버핏은 29억 달러(약 3조 5,000억 원) 상당의
버크셔 해서웨이 주식을 자선단체에 기부하며 자산이 감소했습니다.
버핏은 총자산 규모 692억 달러(약 83조 1,100억 원)로 세계 10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1958년 당시 3만 1500달러를 주고 산 집에서 아직도 살고 있고,
매일 아침은 3달러가 조금 넘는 맥도널드 아침 메뉴로 해결합니다.
검소한 삶을 살지만 자선재단을 설립해 막대한 돈을 기부하고 있고,
소득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부자증세를 주장합니다.
워렌은 적절한 기업에 투자해서 오랫동안 주식을 갖고 있는 복리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워렌은 인터뷰에서 "나는 오랫동안 므두셀라 기법을 권해왔고,
그 모델이 투자에 가장 적절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므두셀라는 구약성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속 인물로 969년을 살았다고 알려집니다.
워렌이 말하는 므두셀라 기법이란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인물로 알려진
므두셀라처럼 오래도록 안정적인 기업에 긴 시간 투자해 수익을 얻는 투자 방식입니다.
워랜은 "10살 때 1000달러도 수익률 10%에 복리를 적용하면
10년 뒤엔 2600달러, 50년 뒤면 11만 7400달러가 된다는 걸 깨달았다"라며
"돈을 이렇게 버는 거구나 하고 혼자 감탄했다"라고 말했습니다.
2006년에는 본격적인 기부를 시작합니다.
버크셔 주가가 10만 달러를 돌파하고, 버핏의 개인 자산 평가액이 400억 달러를
찍은 이해에 버핏은 자신의 재산 가운데 85%를 자선재단에 기부하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MS) 공동창업자인 빌 게이츠 회장이 세운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에 재산 대부분을 기부하기로 한 것입니다.
2010년에는 게이츠 회장과 함께 기부약속캠페인을 시작합니다.
동료 억만장자들을 기부의 세계로 끌어들였고,
2019년에 200여 명이 5000억 달러 이상의 기부 약속을 했습니다.
어린 시절
워렌 버핏은 1930년 8월 30일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사업가이자
정치인인 하워드 버핏과 라일라 부부의 삼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하워드는 버핏이 여섯 살 때 주식 통장을 선물해 돈에 눈뜨게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숫자, 계산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습니다.
워런은 어릴 적부터 돈에 관심이 많았고, 할아버지의
슈퍼마켓에서 코카콜라나 껌을 사 팔았습니다.
또 버핏은 7살 때 오마하 공립 도서관에서 빌려온 One Thousand Ways to
Make $1000(1000달러를 버는 1000가지 방법)이라는 책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버핏은 로즈 힐 초등학교에서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1941년 아버지 하워드와 같은 사무실을 쓰는 해리스의 팜 주식 중개회사에서
시세판에 주가 적는 일, 차트 작성하는 일 등을 했습니다.
그리고 누나 도리스와 함께 생애 첫 주식으로 시티즈 서비스 우선주
6주를 주당 38달러에 구입합니다. 주가가 27달러로 떨어졌다가
다시 40달러로 오르자 주식을 팔아 순수익 5달러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시티즈 서비스 주가는 200달러까지 치솟았고,
이 일로 버핏은 장기투자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1942년 워렌은 할아버지의 식품점에서 일을 했는데 놀랍게도
이때 워렌의 파트너 찰리 잉거 역시 다른 요일에 이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1943년 아버지 하워드 버핏이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면서
버핏 가족은 워싱턴으로 이주합니다.
버핏은 자신이 30세가 될 때까지 백만장자가 되지 못하면 오마하의
가장 높은 빌딩에서 뛰어내리겠다고 말했습니다.
1945년 신문배달 사업으로 2,000달러까지 저축한 버핏은
1,200달러를 투자하여 네브래스카 농지를 사들였고
소작농을 두어 매달 돈을 벌어들입니다.
워렌은 고등학생 친구와 함께 핀볼 게임기를 샀습니다.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둘은 이 게임기를 이발소에 설치했고,
더 많은 게임기들을 살 수 있는 충분한 돈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추가로 마련한 게임기들은 다른 상점들에 설치했습니다.
버핏과 그의 친구는 훗날 1200달러 이윤을 남기고 게임기들을 모두 팔아치웠습니다.
그들은 그 사업체를 참전 용사에게 팔았다고 합니다.
1947년 우드로윌슨 고등학교를 졸업합니다.
이때 워렌은 신문배달과 핀볼기 대여사업, 네브래스카 소작농을 통해
5,000달러 이상을 모은다. 버핏은 대학에 진학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강요로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와튼 금융 산업 학교에 진학합니다.
버핏은 교수님보다 자신이 더 많이 안다고 불평했다고 합니다.
사교클럽의 회원이던 리처드 켄들은 "버핏은 와튼스쿨에서 배울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제대로 된 판단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워런은 학교 잡지인 모범적인 미식축구팬으로 선정돼
<펜픽스 Penn Pics>의 표지모델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네브래스카대로 학교를 편입한 버핏은 하버드 대학원에 낙방한
뒤 뒤에 자신의 평생 멘토가 된 벤저민 그레이엄이 교수로 있던
뉴욕의 컬럼비아대 경영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했습니다.
그곳에서 벤저민 그레이엄이 개척한 가치 투자 개념을 중심으로 투자철학을 구상했습니다.
생애와 업적
1973년 워렌의 우려대로 활황기의 주식시장이 대폭락,
애널리스트들은 해고당했으며 니프티 피프티마저 무너집니다.
이때 워렌은 마치 상품 진열대에서 물건을 쓸어 담듯 주식을 매수합니다.
그렇게 다시 본격적인 투자를 선언하며 워렌이 어린 시절
배달하던 신문 워싱턴 포스트의 주식을 매입하여 가장 큰 사외 투자자가 됐습니다. 1
977년 블루칩스탬프스 이름으로 이브닝뉴스 주식을 매입,
쿠리어-익스프레스와 신문 전쟁을 벌여 승리합니다.
이 무렵 아내 수전은 자신의 삶을 시작하기 위해 샌프라시스코로 떠나지만
2004년 사망할 때까지 공식적인 아내 역할과 버크셔의 이사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합니다.
그리고 버핏은 부인 수전의 소개로 훗날 두번째
부인이 되는 아스트리드 맨 그스를 만납니다.
1979년 약세 장임에도 버핏 주식의 주가는 상승, 버크셔는 주당 290달러였고
버핏의 재산은 장부상 1억 4,000만 달러가 됐습니다.
하지만 버크셔에서 받는 연봉 5만 달러로만 생활했기 때문에 먹고살기가 빠듯했으며,
그럼에도 버크셔 주식은 단 한 주도 팔지 않았습니다.
1982년 보유재산 2억 5,000만 달러로 포브스 선정, 미국 부호 82위에 오릅니다.
1983년 5.68달러로 사들인 워싱턴 포스트의 주식은 73달러로 치솟고,
버크셔의 주가도 주당 1,310달러까지 오르면서 버핏의 자산은 6억 2,000만 달러가 됐습니다.
버크셔 주식분할 압력을 받지만 파이를 조각낸다고 가치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라며 단호히 거부합니다. 퍼니처 마트를 인수하여
섬유공장 인수의 실수를 만회했습니다. 1985년 ABC와 캐피털 시티즈의
합병을 성사시키고, 월드북으로 유명한 스콧펫어를 매입했습니다.
버크셔 해서웨이는 적은 수익을 이유로 섬유사업에서 철수하게 되는데
이는 버핏이 손실을 경험한 몇 안 되는 거래로 기록됐습니다.
1987년 10월 19일, 이른바 검은 월요일로 불리는 주식 대폭락으로
매도 주문이 시장을 마비시켰습니다.
이해 버핏은 살로 먼 브러더스에 7억 달러를 투자하는데 그때까지
그가 한 투자 중에 가장 큰 금액이었습니다.
1988년 불경기에 대한 우려가 만연했으나 개의치 않고 다시 주식투자에 나섭니다.
버크셔는 10억 2,000만 달러어치, 즉 코카콜라 전체 주식의 7퍼센트를 매입했습니다.
3년 후 코카콜라 지분은 37억 5,000만 달러로 치솟습니다.
1989년 버크셔의 주가가 주당 4,800달러에서 6개월 만에
66퍼센트 상승해 8,000달러에 이릅니다.
이로써 버핏은 39억 달러 가치의 자산을 보유하게 됐습니다.
1990년 보유재산 42억 달러로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부호 2위에 오릅니다.
1992년 살로먼브러더스 불법 채권 거래 사건을 해결하고 회사를 회생시키는 데 온 힘을 쏟습니다.
1993년 보유재산 총 152억 달러로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최고 부자가 됩니다.
2위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였습니다.
1998년 온스당 4.32달러라는 650년 만에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1억 2,970만 온스의 은을 사들였습니다.
2007년에 은 가격은 3배로 뛰었습니다.
2001년 버크셔 해서웨이 보험 사업부는 9.11테러로 약 22억 달러의 손실을 봅니다.
2002년 110억 달러 규모의 통화선물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계약으로
2006년 4월까지 20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렸습니다.
2004년 아내 수전이 구강암 치료 후 뇌졸중으로 사망했습니다.
2005년 포브스 선정 세계의 거부 2위에 오릅니다. 1위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회장. 버크셔 해서웨이 보험 사업부는 카트리나,
리타 등의 허리케인으로 인해 약 25억 달러의 손실을 봅니다.
2006년 버크셔 지분의 85퍼센트(발표 당시 기준 370억 달러)를 5개
자선재단에 순차적으로 기부하겠다고 발표 그중에 6분의 5를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에 기부했습니다.
그리고 버핏은 오랜 동반자였던 아스트리드와 재혼합니다.
2007년 배런스는 버크셔 해서웨이를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으로 선정했습니다.
버핏은 버크셔 해서웨이 보고서를 통해 후계자를 찾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2008년 보유재산 620억 달러로 포브스 선정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됐습니다
. 2위는 멕시코의 통신 재벌인 카를로스 슬림, 3위는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인 빌 게이츠였습니다
.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 미팅 참석자가 처음으로 3만 명을 돌파합니다.
2009 포브스 선정 세계의 억만장자 순위에서 2위를 차지했으며,
1위는 빌 게이츠가 차지했습니다. 버핏은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재산이
가장 많이 줄어든 사람으로 꼽히기도 했습니다.
2019년 포브스 선정 세계 갑부 순위에서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빌 게이츠에 이어 3위를 차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