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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차례>
1. 민주노동당 평가ㅡ 문제는 ‘의회주의’
2. 러시아의 성공 사례ㅡ 노동자신문과 의회전술의 결합
3. 현장에 기반 한 당 건설이어야 한다
4. ‘당 건설’은 주요모순의 해결 과정
5. 제2 정치세력화, 노동자계급 대단결의 계기 제공해야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는 노동자계급의 정당 건설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후자는 전자의 본질적인 부분이자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노동자계급 정당이 아직 부재한 한국적 상황에선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건설할 당은 어떠한 당이며, 우리는 이러한 당을 어떻게 건설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하여 우선 지난 시기 민주노동당에 대한 평가로부터 논의를 시작하기로 한다.
1. 민주노동당 평가ㅡ 문제는 ‘의회주의’
: 패권주의와 의회주의
대체로 민주노동당을 평가할 때 사람들은 ‘패권주의’ 문제를 많이 거론한다. 그것 때문에 민주노동당이 ‘분열’되었으며 결국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패권주의’란 연합정당 내에서 다양한 참여세력 간의 구동존이(求同存異), 즉 상호 존중과 배려하는 정신에 입각하지 않고 다수파가 힘으로 밀어붙이는 식으로 당의 의사결정과 당직을 독단하고 독식하는 현상을 말한다. 그 결과 연합세력 간에 앙금이 깊어지고, 결국 내부 조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갈등이 심화되어 ‘연합’이 붕괴되고 만다.
민주노동당이 분당될 시점에 이 같은 패권주의 문제는 실제로 매우 심각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때론 파벌간의 대립이 불거지기도 하였지만, 민주노동당에 참여하는 제 정파들은 당의 ‘연합체’적 성격을 잘 의식하고 있었으며, 그 때문에 어느 특정 정파나 집단의 독주로 인해 당이 깨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예컨대 당직 개편 후 출범한 1기 지도부(2004년6월~2005년11월) 때까지만 하더라도, 당시 최고위원회의 다수를 차지한 자주파는 평등파와 협의해 대표를 추대하고 정책위의장을 평등파에 양보하는 등 서로를 배려하면서 일종의 ‘계파 안배’에 신경을 썼던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소수파에 대한 이 같은 배려에 대해 다수파는 “거추장스럽고 불만스럽게” 여기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당내 다수파는 1기 지도부 선거 때와는 달리 2기 지도부 선거 때에는 당3역을 모두 장악하는 전략을 추진했으며, 비록 무산되기는 하였지만 나중에는 대표가 사무총장과 정책위의장을 임면할 수 있게 하는 당헌 개정까지 추진했다.
이처럼 민주노동당 내에서 한쪽의 일방적 독주에 의한 ‘패권주의’ 현상이 전면에 돌출하게 된 것은 ‘특정 시점’ 부터라 할 수 있다. 이는 잠재되어 있던 정파들 간의 모순이 어떤 계기에 의해 격발된 후, 더 이상 화해할 수 없는 지경으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과정을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당내 파벌 갈등을 격화시킨 요인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외부에는 2005년과 2006년 사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 선언과 1차 핵실험 성공 발표로 ‘북핵문제’가 첨예한 쟁점이 되고, 이후 민주노동당 내 일부 당직자가 북한에 보고서를 작성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당내 양대 정파 간 대립이 첨예해진 것으로 알고 있다. 민주노동당 전체가 이로 인해 보수세력과 여론에 의해 ‘친북단체’로 집중 공격당하면서 곤경에 처하고, ‘종북세력’과 결렬해야 한다는 얘기도 이즈음을 전후로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정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은 이와는 다른 해석을 한다. 그것은 당시 비주류로 몰렸던 PD정파 내 일부 집단이 당내 주도권을 탈환하기 위한 하나의 명분에 불과하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처럼 ‘노선대립’이 격화한 것조차 일종의 ‘결과’이며 분당의 진정한 원인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PD진영 내 일부 세력이 당내 NL진영의 약진과 자신들의 지역 정치기반이 침식당해 공천이 어려워지고 지구당의 당권을 빼앗기게 된 상황에서 NL과의 분당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북핵문제나 북한과의 연계(소위 ‘종북세력’) 문제는 그를 위한 빌미가 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파벌문제를 연구했던 인하대 정영태 교수에 따르면 민주노동당 내 파벌 갈등은 2004년 총선과 2007년 대선을 기점으로 다음 3단계를 경과한 것으로 나타난다.
“첫 번째 시기는 2000년 창당부터 2004년 총선까지다. 이 시기는 건수도 많지 않고, 대부분이 지역 수준에서 당규 위반으로 발생했으며, 광역시‧도당이나 중앙당에서 당규나 정치적 리더십으로 무난히 해결됐다. 두 번째 시기는 2004년 총선부터 2007년 대선까지다. 발생 건수도 많아지고, 당규 위반보다는 제도 개선 방안이나 이념‧노선을 둘러싸고 지역보다는 중앙당에서 많이 발생했으며, 대부분 중앙위원회나 당 대회의 표결로 처리하면서 소수파의 소외감과 불만이 누적됐다. 세 번째 시기는 2007년 대선이 끝난 직후부터 2008년 2월 3일 임시 당 대회까지다. 불과 한 달 반 정도 기간에 거의 매일같이 논란과 대립이 나타났고, 두 번째 시기와 마찬가지로 이념과 노선, 특히 다수파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친북 노선을 둘러싸고 중앙당 수준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했지만 주로 외부 언론을 통해 논박이 진행됐다. 두 번째 시기처럼 조정자 또는 중재자로서 권위 있는 정치적 리더십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파벌 지도자가 전면에서 싸우는 양상이 돼버렸다. 더구나 다수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인 친북 노선과 패권주의가 대립의 초점이 되면서 전형적인 제로섬 게임, 특히 치킨게임으로 발전해 결국 분당으로 귀결됐다.”
정교수의 민주노동당 내 파벌갈등에 관한 서술이 어느 정도 객관적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면, 북핵문제와 같은 NL과 PD진영의 정체성과 관련된 본질적 노선갈등은 양진영 대립의 막바지 단계에서나 전면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첫 번째 시기에도 이러한 이념과 관련된 갈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당명을 ‘민주노동당’으로 할 것인가 ‘통일민주진보당’으로 할 것인가, 강령에서 ‘사회주의’인가 아니면 ‘진보적 사회주의’인가, ‘북한 체제의 성격과 통일방향’과 같은 당의 이념과 노선을 둘러싼 논쟁이 존재하였다. 하지만 갈등의 해결 방식을 보면, 당시에는 이러한 중앙당 차원의 갈등이 파벌 간 타협이 어려운 이념이나 노선과 관련된 문제였음에도, 공식 회의에서 토론과 표결로 처리하고 소수파도 결과를 수용하면서 무난히 해결되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시기 갈등의 주요한 진원지는 지구당이었다. 지구당 차원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은 대체로 당직 선거권을 포함한 당권의 행사 조건(당비 대납, 주소지 이동 등), 공직 선거후보 선출과 선거운동, 재정 운영(예, 회계 부정) 같은 당권의 획득이나 행사 또는 선거운동과 관련된 문제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문제들은 지구당 운영위원회나 시‧도당 지부의 선거관리위원회 또는 당기위원회가 당규에 따라 처리했으며(서울 노원도봉지부 사건, 인천 남동갑 지구당 사건 등), 지역에서 해결하지 못할 경우 중앙당이 개입해서 해결했다(2000년 총선 시기 울산 북구 사태 등). 그리고 중앙당의 기관이 당규에 의거해서 해결하지 못할 경우에는 당대표단이 공식‧비공식 통로를 통해 갈등 당사자 간의 타협을 유도해 해결했다. 한 마디로 첫 번째 시기 양진영의 갈등은 당내의 강령과 규약과 같은 ‘제도적 틀’ 내에서 무난히 수습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시기(2004년 총선~2007년 대선)에 들어선 후부터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앞서 인용문에서 지적한 것처럼 파벌갈등이 지구당보다 중앙당 차원에서 많이 발생하였으며, 그 성격도 지엽적인 ‘당규 위반’보다도 제도 개선 방안이나 이념‧노선을 둘러싼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가까웠다. 해결 방식에 있어서도 사전 조율이나 지도자의 리더십에 의존해서보다 대부분 중앙위원회나 당 대회의 단순 표결로 처리하였으며, 이에 따라 소수파의 소외감과 불만이 누적되어 갔다. 심지어는 내부적 해결이 불가능함에 따라 외부세력인 검찰에 고발하는 사건까지도 발생하였다.
마지막 세 번째 시기는 두 번째 시기의 연장이자, 막바지 최종적인 파국으로의 치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이 단계에 들어서서는 당내 파벌갈등은 수습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으며, 탈당파들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설정한 수순을 밟아 나갔다.
이렇게 볼 때 관건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시기 사이에 당내 파벌 갈등의 성격 변화를 결정 지었던 원인에 대한 해명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여기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시기를 가르는 중요한 변화가 있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민주노동당이 17대 총선에서 지역구 2석을 포함한 총 10석을 획득함으로써 국회 진출에 성공한 것이다. 이에 따라 민주노동당의 지지율도 한 때 20%에 육박하게 되었다. 이처럼 민주노동당이 외형적인 성공을 거둠에 따라 당내 파벌 갈등은 더욱 커졌는데,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 일까? 다음 글을 한 번 보도록 하자.
“(2기 선거 때는 평등파와 협의해 추대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주파가 독자적으로 투표방침을 결정한 것은)……1기를 해보니까 대표와 정책위의장 등 다른 주요 당직을 다른 진영에서 하니까 정책은 정책대로 안됐죠, (또 그 사람들이) 대충대충 하죠. ……(그래서)이제는 다수 이쪽에서 해야 되는 거 아니냐 한 거였어요.”
당시 다수파였던 자주파 인사의 말이다. 위 인용문에는 파벌 갈등 심화와 관련한 중요한 열쇠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여 진다. 참고로 여기서 1기는 2004년 17대 총선 이후 정책위의장 직선과 최고위원제를 도입한 이후를 말한다.(2004년6월6일 ~ 2005년10월31일)
사실 민주노동당 1기에는 각 계파 간 균형에 신경을 쓰는 바람에 그 대가로 당의 집행력에 문제가 생겼다. 당 대표로 자주파의 지지를 받은 김혜경, 사무총장은 자주파계열(울산연합) 김창현, 정책위의장은 평등파계열(자율과 연대) 주대환이 당선되었다. 이리하여 사업 집행에 있어 위의 자주파 인사가 지적하듯이 당 3역간 ‘엇박자’가 발생하였다. 그 때문에 다수파는 최소한 당 3역은 자파가 모두 차지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자주파의 고민은 원래 17대 총선 전부터 이미 표출된 민주노동당 전체 집행체계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2003년 후반 당원이 증가하고 당세가 확장되자 지도 집행체계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민주노동당은 여러 가지 제도를 개선했다. 기존의 다원적이고 복잡한 집행 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13인의 최고위원회’ 제도가 새로 도입되었다. ‘13인의 최고위원’ 중 의원단 대표를 제외한 12인의 최고위원은 당원의 직선으로 선발되었다. 하지만 애초 취지와는 달리 이 제도 역시 당의 집행력을 강화시키지는 못했으며, 오히려 다수파에 유리한 ‘세팅투표제’로 말미암아 승자승 독식이 강화되었으며 ‘패권주의’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한편에선 연합정당의 성격 상 계파간의 균형이 요구되고, 다른 한편에선 당 전체의 사업체계 강화가 필요한 이 같은 딜레마적 상황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이 문제는 보다 심도 깊은 연구와 토론이 필요하기에 아직 본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만한 사안은 아니다. 여기선 다만 문제의 해결 방향으로 정파 간의 동질성이 높아지는 길 밖에 없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많은 실천과 토론 속에서 어떤 노선이 정확한지 실천적으로 검증될 수 있고 제 정파 간 상호침투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하여 조직을 이끌 수 있는 ‘안정적 다수’, 그리고 ‘권위 있는 지도부’가 창출됨으로써 비로소 이 같은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당시 민주노동당은 아직 창당 초기로써 그럴만한 조건을 갖추지 않았다는데 있다. 따라서 우리는 왜 그토록 빨리 민주노동당에 ‘과부하’가 걸리게 되었는지를 주목해야만 한다.
2004년 총선을 거친 후 민주노동당은 그 위상이 높아졌다. 이대로 가면 ‘집권’도 가능하다는 장밋빛 기대감까지도 갖게 되었다. 참여 정파 간에 여전히 현저한 이질성과 노선차이가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과도한 기대는 민주노동당으로 하여금 조기에 과부하가 걸리게끔 만들었다.
의회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우선 가능한 많은 의원을 당선시켜 국회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목표가 달성되고 나면 다음은 제1 야당이 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 최대 다수당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법 개정을 통해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근본적 개조를 할 수 있게 된다.
민주노동당은 이 같은 의회주의노선에 따라 시간이 흐를수록 ‘선거’를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간주하고 당력을 집중하였다. 당은 점점 더 의회활동과 ‘의원단’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졌으며, 다른 활동들은 모두 이를 위한 보조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그에 따라 민주노동당에 참여하는 각 정파들은 자파 소속 국회의원이나 자치단체장을 얼마나 많이 당선시키느냐를 놓고, 혹은 이러한 공직 진출의 전단계로 간주되는 당3역 내지 광역시‧도당 및 지구당(지역위원회)을 장악하기 위한 ‘내부 투쟁’에 가장 열을 올리게 되었다.
하지만 국회나 지방권력에 진출할 수 있는 공직과 당직은 어차피 한정되기 마련이다. 이처럼 한정된 감투를 놓고 싸우다 보니 정파 간의 갈등은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민주노동당이 애초 성과를 거두지 못했더라면 그토록 큰 기대를 갖지 않았을 터인데, 오히려 가능성이 확인 되는 순간 내부 갈등은 심해졌다.
결국 ‘의회주의’야말로 패권주의의 일차적 원인이다. 민주노동당이 성공을 거둘수록 다수파는 계파균형 보다도 ‘사업적 고려’를 우선시 하였는데, 다수파는 이를 위해 심지어는 연합정당이 붕괴될 위험까지도 감수하는 ‘모험’을 서슴지 않았다. 이렇듯 진짜 문제는 ‘의회사업’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있었다. 이 문제는 북한에 대한 입장 차이와 마찬가지로 ‘기본노선’ 문제에 속하며, 전통적으로 개량주의세력과 변혁세력을 갈랐던 원칙적 성격을 지닌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 문제에 있어서는 양대 진영은 전혀 다르지 않았다. NL이든 PD든 자파가 하나라도 더 많은 의원직과 당직을 차지하길 바랐으며, 서로 조금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본다면 민주노동당의 ‘패권주의’는 노선차이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노선상의 일치 때문에 발생하였다고 할 수 있다. 즉 양자는 민주노동당이 과부하에 걸릴 만큼 의회사업을 중시하였던 것이다.
의회주의 노선에 있어서의 자주파와 평등파의 ‘일치성’은 양 파벌간의 정체성과 관련된 ‘계급모순’ 우위 혹은 ‘민족모순’ 우위와 같은 구체적인 노선 차이를 압도하였다. 당시 (자주파 성향을 가졌지만) 특정 정파 조직에 가입해 있지 않았던 한 중앙당 당직자는 민주노동당 시절의 정파 갈등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일단 철학적 기반이 되는 어떤 가치에 대한 문제나 이런 철학적 기반에 대한 차이들은 조금 조금씩…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이런 견해들이 당내에서 합법적 진보정당 내에서 노선과 정책으로 자리 잡을 때는…별로 차이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평등파 계열의 최대 정파 조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한 인사도 정파 간의 갈등은 이념이나 정책보다는 조직 운영 방식에 대한 인식 또는 조직 문화의 차이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는 비슷한 지적을 하였다.
겉으로 들어나는 양자의 모습이 엇비슷하게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목표와 방식이 큰 틀에서 일치하게 되면 나머지는 사소한 차이로 밖에 보이지 않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가정해 볼 수 있다. 만약 민주노동당이 대중투쟁에 복무하는 것을 진정으로 당 활동의 목표로 삼았다면, 그 참여 정파들이 그렇게까지 당직과 공직에 연연해 할 필요가 있었을까? 물론 의석수가 많으면 좋긴 하지만, 그것은 변혁운동의 관점에서 볼 때 절대적 필요조건은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대중의 정치적 각성이자 그 물질적 표현인 조직이기 때문이다.
2. 러시아의 성공 사례ㅡ 노동자신문과 의회전술의 결합
이하에선 노동자신문, 국회의원단, 공장투쟁을 유기적으로 결합함으로써 큰 성공을 거둔 사례를 하나 소개토록 한다. 이는 의회활동의 성공조건이 결코 의석수의 다수에 의존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가 ‘울산함성’ 창간을 앞둔 지금 시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1910년 여름부터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러시아는 새로운 노동운동의 고양기를 맞이하였다. 이 시기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당)은 합법 일간지인 [프라우다], 국회 의원단, 당 지하조직 등 합법과 비합법을 포괄하고, 신문사업과 의회전술 및 공장투쟁을 유기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입체적인 당 구조를 갖추었다. 이로써 볼셰비키당은 소수의 음모적인 전위정당이 아닌 광범위한 대중적 영향력을 지닌 ‘대중적 전위정당’으로 발전하였다. [프라우다]와 같은 정치신문이 이러한 제반 사업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프라우다]는 1912년 4월 22일(서기 5월 5일) 페테르부르크에서 창간되었다. 레닌과 볼셰비키 당원의 노력, 그리고 많은 노동자들의 지지 아래 [프라우다]는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했다.
첫째, 프라우다는 당으로 하여금 많은 노동자들과 매일 일상적인 관계를 맺게 하였다. 매호 마다 수십 편의 노동자통신이 실렸는데, 이 통신은 노동자들의 고되고 암담한 생활을 묘사하였으며, 경찰의 폭행과 공장주의 노동자에 대한 학대 사실을 매우 구체적으로 열거했다. 이들 통신 하나하나는 차르와 자본주의제도에 대한 엄숙한 고발장과 같았다. 2년여 동안 17,000여 편의 노동자통신이 [프라우다]에 실렸다. 이들 통신은 [프라우다] 주변에 수많은 노동자들의 통신원 대군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였는데, 그들은 볼셰비키의 구호를 대중 사이에 널리 전파하는 역할을 하였다.
둘째, [프라우다]는 노동자계급의 파업투쟁을 성공적으로 조직하는데 일조했다. 이에 대해 볼셰비키 당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프라우다]는 파업 관련한 통신을 1만 건 정도 발표했다. 매일 파업과 관련한 기사는 모두 노사 간의 투쟁에서 획득한 사실적 정보들이었다. 이 보도들은 노동자들을 더욱 긴밀하게 단결시켰으며, 또 그들의 투쟁을 강화하도록 고무시켰다. [프라우다]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대변했으며, 다른 기업과 도시의 노동자들이 파업노동자를 지원하도록 조직하고, 갈수록 많은 노동계층을 끌어들여 투쟁에 동참토록 했다.”
셋째, 프라우다의 편집부는 상당 부분 당의 ‘조직 사업’을 맡았다. 그들은 편집부 사무실에서 지방당 세포 대표들을 만나 공장에서의 당 사업을 보고받고, 또 여기서 페테르부르크 당위원회와 중앙위원회의 지시를 전달하였다. [프라우다]는 공장에서 새로운 당 조직을 만드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넷째, [프라우다] 신문, 두마의원단, 당의 지하조직 3자 간에 밀접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예를 들어 1914년 3월 중소도시 리가에 있는 공장 ‘진입로’와 페테르부르크 ‘트라이앵글’ 공장에서 여공들의 집단 중독사건이 발생했을 때, 지하조직인 페테르부르크 당 위원회는 대중에게 항의성 파업에 대한 불법 호소 전단을 뿌렸다. 합법신문인 [프라우다]는 공장주가 여공들에게 줄 물품을 가혹하게 착취하는 것에 대해 대량의 폭로와 기획기사를 연일 게재했다. 볼셰비키 의원단은 국회 두마에서 이와 관련한 의도적인 질문을 했다. 이러한 입체적인 볼셰비키의 활동 결과 12만 명의 노동자들이 여공에 대한 야만적 유린에 항의하는 대규모 파업에 동참했다. 볼셰비키는 교묘하게 [프라우다], 두마 의원단의 활동을 당 조직의 지하활동과 결합시켰던 것이다.
이 같은 활동들은 [프라우다]가 노동자계급 내에서 매우 높은 위신을 갖게 하였다. 노동자들의 이 같은 지지는 [프라우다]의 발행부수와 모금액에서 드러난다. [프라우다]의 발행부수는 4만 부에 육박하였는데, 이는 당시 러시아 일반 노동자들의 소득이나 교육 수준 등을 고려할 때 매우 높은 수치라 할 수 있다.
아래 글은 당시 수많은 노동자들이 어떻게 [프라우다]를 옹호했는지를 실감나게 한다.
“당시 수많은 공장에서 적지 않은 노동자들이 [프라우다] 발행 사업에 참여하였다. 일부 노동자들은 인쇄소에 가서 신문을 받아오는 일을 책임졌다. 그들은 반드시 밤에 가서 기계에서 직접 신문을 가져와야 했다. 어떤 때는 검열기관이 신문을 압수하기도 했지만, 노동자들은 그들이 관련 통보를 하기도 전에 이미 인쇄된 신문을 가져가는 경우가 많았다. 또 다른 일부 노동자는 신문배포를 맡았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일들은 모두 조용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각 작업장마다 신문구독 담당자를 한 명씩 두었는데, 그들의 임무는 가능한 많은 노동자가 신문 정기구독을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구독료는 이들에 의해 공장 내 당 조직 중에서 [프라우다] 편집국과 연락을 책임지는 특별 책임자에게 전달되었다.”
[프라우다]는 두마 국회의원단의 발언과 활동이 노동자계급과 대중들에게 알려지는데 가장 주요한 통로로 작용하였다. 예를 들어 노동자계급의 두마 대표가 만든 8시간 노동제 법안, 사회보험 법안, 민족평등 법안 등 3개 법안은 모두 [프라우다]지에 발표됐다. 카지노 마을의 한 농민은 [프라우다] 편집부에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노동자신문을 통해 국가두마 중의 상황을 알게 되었으며, 6명의 노동자 대표만이 직무를 다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쓰고 있다.
이 점은 각국의 변혁운동이 의회사업에 있어 성과를 내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볼셰비키 의원단은 모두 6명에 불과하였으며, 이는 전체 500명 정원을 가진 두마의회에서는 겨우 1% 남짓 한 수치였다. 즉 의회활동의 성패여부는 본질상 결코 절대적인 의원 수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며, 그보다는 영향력 있는 ‘노동자 독자매체’와의 결합 여부가 더욱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만약 의원 수자에만 연연하다 보면 자꾸 득표에만 신경을 쓰게 되어 결국 중산계층 위주의 ‘선거정당’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는 결국 스스로를 노동자계급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며, 애초 자신의 가장 강력한 지지층인 노동자들의 지지를 잃게 만들어 표도 잃고 변혁성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한국의 경우, 과거 민주노동당이 시간이 흐를수록 ‘원내교섭단체’ 목표에 집착하면서 점차 선거정당으로 전락했던 경험은 그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3. 현장에 기반 한 당 건설이어야 한다
노동자계급의 ‘자기정립’ 즉 정치세력화는 또한 반드시 현장에 기반 한 당, 다시 말해서 조직의 기초가 공장(사업장)에 있는 당 건설 운동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현장이야말로 노동자 대중이 광범하게 존재하는 공간이면서, 또한 일상적으로 노자간의 첨예한 대립이 벌어지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노동해방 즉 사회주의 선전선동이 가장 잘 효과적일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현장에 기반 한 당을 건설할 때라야 지난 87년 7-8월 대파업, 96-97년 노개투, 2009년 77일간의 쌍용차 옥쇄파업, 그리고 얼마 전 ‘화물연대 파업’처럼 자본주의를 직접 타격할 수 있는 공격력을 보유할 수 있으며, 사회적으로는 가장 광범위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급속한 확장성을 획득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의 노동운동 진영은 공장에 뿌리를 둔 당 건설을 완수할 수 있을까?
민주노동당에 대해 우리가 잘 모르는 사실 하나를 소개하기로 한다. 민주노동당은 비록 의회주의노선을 걸었을 지라도,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건설되었던 당이었던 만큼 적지 않은 사업장에 ‘현장분회’를 두고 있었다. 그와 관련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민주노동당은 창당시기부터 읍면동 등에서 당원들의 세포단위인 ‘분회’를 설치 운영하였다. 민주노동당의 분회는 당규상 지역위원회의 기초조직인데, 15인~29인 단위의 당원모임을 기반으로 하였다. ‘지역분회’를 그 기본형식으로 하면서, 지역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필요할 경우 직장분회와 특별분회를 설치할 수 있었다. 2005년 기준으로 볼 때 전국적으로 1018개의 민주노동당 분회가 존재하였으며, 이중 약 92%가 지역분회이고 6%(60여개) 정도는 직장분회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질 부분은 ‘직장분회’이다. 그것은 사업장 내에 건설된 당 조직이기 때문이다.
2008년 민주노동당 경기도당 직장분회장 간담회 자료집에 따르면, 경기도의 경우 기아자동차지부 화성지회 직장분회, 쌍용자동차노동조합 직장분회, 만도지부 평택지회 직장분회, 한라공조 평택지회 직장분회, 에스제이엠지회 직장분회, 서울지하철 지축정비지회 직장분회 등이 조직돼 있었다. 쌍용자동차와 같은 대규모 사업장에서는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분회가 조직되어 운영되었다.
이러한 민주노동당 현장분회의 사례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사업장 내에서 ‘노동조합’ 만이 아닌 ‘정치조직’을 조직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노동자들은 ‘경제적 이익’과 같은 눈에 보이는 목표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노동해방과 같은 근본적 목표를 위해서도 자신을 조직적으로 규율시킬 자세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노동당의 직장분회가 결국 활성화되지 못하고 실패로 끝나고만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직장분회의 정치활동 수준이 너무 높아서 라기 보다는, 오히려 수준이 너무 낮아서, 즉 선거 때만 가동되는 단순한 ‘투표기계’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노동자들은 직장분회가 자신들이 사업장에서 부딪치는 현실투쟁에 별반 도움이 못 된다고 생각하면서 활동에 소극적이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직장분회가 형식적이 아닌, ‘당적 형식’을 통해서 실제로 현장투쟁에 기여할 수 있는 조직이기를 바랬다. 기존의 노동조합과는 다른 무엇인가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이미 존재하는 노동조합을 두고 이런 조직에 따로 가입할 필요는 없으며, 잔업과 특근으로 바쁘고 고된 생활 속에서 시간을 쪼개어 분회 활동에 참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거 때는 거의 몇 주간씩 자신의 시간을 바쳐야 하고, 평소에도 정기모임 등 한 달에 몇 차례씩 분회활동에 참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아래 인용문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와 결합될 때 얼마나 열성적인 정치활동가로 변신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2000년 총선 때 창원 을에서 민주노동당의 선거전 모습을 묘사한 것인데, 당시 포항제철과의 합병과정에서 해고된 180여명의 삼미특수강 노동자들과 창원 노동자들은 정치활동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골목마다 조를 나누어 권(영길)후보를 홍보했고, 합동유세 때는 2천여 창원 노동자들의 제일 선두에 섰다. …그들은새벽 4시 30분부터 저녁 11시까지 거의 두 달간을 그렇게 강행군을 했다.”, (4월의) “벚꽃이 만발한 10차선 창원대로는 노동자들로 가득 넘쳤다.… 주거단지에서 창원공단으로 출근하려면 반드시 이 대로를 지나야만 했는데, 이 긴 대로를 노동자들이 일렬로 서서 출근유세를 전개한 것이다. 몇 킬로미터의 도로가 노조별로 늘어선 노동자대오로 인해 끝없이 이어졌다. 그야말로 장관이 펼쳐지자 버스와 승용차의 창문을 열고 기호와 후보이름을 외치는 사람이 속출했다. 대로투쟁은 ‘권영길이 이기겠다’는 분위기 확산에 일등 공신이 되었다.”
이렇게 볼 때, 민주노동당의 의회주의노선이 결국 직장분회의 활성화를 가로막았다고 할 수 있다. “지역에서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결합 방향에 대하여 지역구에서 선거지원 중심의 활동에 주력할 것인지, 아니면 현장에서 노동자정치세력화에 주력할 것인지”에 대한 혼란이 정리되지 못했다는 서술은 그 점을 입증해 준다.
이 같은 혼란은 선거에 갇힌 의회주의정당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혼란이다. 만약 민주노동당의 무게 중심이 분명하게 사업장(현장)에 두어졌더라면, 민주노동당은 아마도 ‘투쟁조직’으로 변신하였을 것이다. 현장에서는 매일 같이 노자간의 날카로운 대결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과 정치를 이분법으로 나누는 ‘양 날개론’에 갇힌 민주노동당은 투쟁 정당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왜 현장에 노동조합 외에도 당 조직이 필요한 것일까 하는 점이다.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선 ‘현장 정치활동’의 내용이 무엇인지부터가 분명해져야 한다.
우리가 노동조합 내지 ‘지역 연대조직’과는 다른 당 조직을 현장 내에 별도로 건설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선진 활동가들의 의식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이다. 사람의 실천은 인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변혁운동에 있어 양자관계를 말한다면 “혁명적 이론 없이 혁명적 실천은 없다.”는 말로 압축할 수 있다. 정규직-비정규직 연대, 반재벌투쟁이라는 새로운 실천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존 인식의 전환이 선행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선 주체들의 교육과 ‘학습’이 필요하다.
또한 당은 ‘노동해방’을 목표로 하는 조직인 만큼, 노동조합이나 지역 연대조직보다도 한층 더 높은 수준의 정치의식이 필요하다. 노동해방의 궁극적 목표인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관한 이론, 인류 역사에 관한 유물론적 지식, 세계관과 방법론으로서의 유물변증법 철학, 현대 국제질서 및 한국사회 성격에 관한 정치경제학적 지식, 그리고 노동자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 있도록 이끄는 전략전술에 관한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학습이 요구된다.
둘째, 선진 활동가들의 조직적 단련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당은 노동조합이나 심지어는 지역 연대조직 같은 선진활동가 조직과도 다른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활동가들의 결사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각 성원이 지켜야할 조직 기율과 요구되는 자기희생의 정도가 다르며, 보다 철저하게 ‘당내 생활’ 규칙을 준수할 것이 요구된다. 예컨대 조직 내 토론에 주체적으로 참여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일단 민주적 절차를 거쳐 결정된 사항에 대해선 반드시 그것을 집행해야 한다. 하급은 상급에 복종하고, 소수는 다수에게 복종함으로써 조직 전체는 마치 한 몸처럼 행동하여야 한다. 또 회비만 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 당 조직에 소속되어 조직 생활을 함께 해야 한다.
자신이 참여하는 단위가 만약 3인 이상인 경우는 당의 세포조직인 ‘소조(분회)’를 구성할 수 있다. 이 세포조직은 자체 선전과 조직을 담당하는 책임자 혹은 부서를 설치하여 사업을 스스로 계획하고 집행하며, 이를 통해서 독자사업 능력을 함양하게 된다. 또 신참 당원을 자체 선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게 되며, 이 때문에 성원 각자는 사람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후배 양성에 더욱 신경 쓸 수밖에 없으며, 그리하여 당원 각자는 조직 전체에 대한 책임감이 높아진다. 이상의 민주적 정신의 함양을 포함한 엄격한 훈련과정을 통해 선진 활동가들은 직업적 노동해방 전사로서 자신을 더 한층 단련할 수 있다.
셋째, 전국적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선진 활동가들은 ‘정당’이란 정치적 대오로 결집하여 일사불란한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당은 ‘권력쟁취’를 목표로 삼는 만큼 자기 자신만의 전략과 전술을 지닌다. 매 시기 정치정세에 맞춰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어야 하며, 적의 강한 곳은 피하고 예기치 못한 곳에 대한 ‘허를 찌르는’ 공격에 능숙해야 한다. 선거투쟁과 현장 대중투쟁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키고, 의회연단과 독자적 언론매체를 통해 대규모 선전전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사회 각 영역에 흩어진 노동해방과 반재벌•반외세 역량을 총 동원할 수 있도록 자신의 외연을 끊임없이 넓히고 확장하여야 한다. 그를 위해서도 우선 현장을 기반으로 한 당 조직 골간이 분명하게 세워져야 한다.
한국에서 이 같은 노동자계급정당의 건설은 정규직-비정규직, 원-하청 연대를 더욱 강화시켜 줄 것이며, 이로부터 결과하는 노동운동의 발전은 다시 역으로 한국 노동자계급정당 건설을 더욱 높은 수준에서 완성하도록 할 것이다.
4. ‘당 건설’은 주요모순의 해결 과정
레닌의 견해에 따르면 당은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의 결합이다. ‘과학적 사회주의’는 노동운동과의 결합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일반적 원리를 구체화하기 위한 ‘이론 구체화’ 과정이 필요하며, 그것은 각 사회의 주요모순을 올바로 파악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결국 당 건설은 바로 이 같은 주요모순의 해결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하에서 중국의 사례를 통해 당 건설이 주요모순의 해결과정과 관련이 있음을 확인해보도록 하자.
러시아 사례와 비교할 때, 중국은 사회의 주요모순이 노동자계급이 아닌 농민계급과 관련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사회성격의 차이는 이 같은 양자의 차이를 발생시켰다. 중국은 자본주의 발전 정도에 있어 러시아와는 많이 달랐는데, 당시 중국사회는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의 성격을 지녔다. 그 때문에 중국은 대도시의 발달과 노동자계급의 형성에 있어 러시아에 비해 많이 뒤처졌다.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집결된 대공장도 별로 없었다.
그 대신 광대한 농촌에는 전체 인구의 90%를 차지하는 농민이 존재하였다. 거기에 1840년 아편전쟁을 계기로 열강들의 중국침략이 본격화함으로써 중국사회는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였다. 중국 각지에는 이들 열강과 결탁한 군벌들이 할거하였으며, 중앙차원의 강력한 통일 정부는 부재한 상태였다. 이 같은 조건하에서 중국사회의 주요모순은 농촌과 농민문제를 중심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중국에서 ‘토지문제’가 전체 사회문제로 부상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리하여 인구의 극소수에 불과한 도시의 노동자계급에게 있어선 이 같은 거대한 농민의 잠재력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가 중국변혁과 관련한 관건적인 문제가 되었다.
군벌들이 곳곳에서 할거 하고 제국주의 열강이 중국을 분할하는 반식민지반봉건 사회에서의 토지개혁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진행될 수는 없다. 지주계급은 스스로 조직한 자경대라는 사적 무장조직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군벌 및 제국주의세력의 보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주로부터 강제로 토지를 몰수하는 것만이 남은 유일한 방법이었는데, 이 때문에 중국의 주요한 투쟁형식은 ‘전쟁’, 즉 군벌과의 국내 전쟁(내전)과 제국주의와의 전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군대’는 중국혁명의 필수적인 조직형식이 되었다.
이렇듯 중국혁명과 당 건설에 있어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군대’에 대해 마오쩌둥은 <전쟁과 전략문제>(1938년)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중국에서 주요한 투쟁형식은 전쟁이고, 주요한 조직형식은 군대이다. 기타 일체, 예컨대 민중조직과 민중투쟁 등은 모두 매우 중요하고 반드시 필요하며 무시할 수는 없지만, 모두 전쟁을 위해서이다.……중국에서는 무장투쟁을 떠나서는 노동자계급과 공산당의 지위는 곧 사라지고 말며, 어떠한 혁명적 임무도 완성할 수 없다.”
“ ‘총구에서 정권이 나온다.’……총(군대ㅡ 역자 주)이 있으면 확실히 당 조직을 건설할 수 있다. 팔로군은 화북에 큰 당 조직을 만들어 냈다. 또한 간부를 양성하고, 학교를 세우며, 문화를 창조하고, 민중운동을 조직해 낼 수 있다. 연안(延安, 당시 해방구의 수도ㅡ 역자 주)의 모든 것은 총구로부터 나온 것이다. 총구로부터 일체의 것들이 나온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이 처음부터 이처럼 군대를 중요시 했던 것은 아니다. 한 차례 쓰라린 역사적 경험이 그렇게 하도록 강제하였다. 예컨대,
“중국에서는 무장투쟁을 떠나서는 노동자계급과 공산당의 지위는 곧 사라지며, 어떠한 혁명적 임무도 완성할 수 없다. 이 점에 있어 우리 당은 1921년 창립 때부터 1926년 북벌전쟁에 참여한 5-6년 기간은 인식이 부족하였다. 그때는 무장투쟁이 중국에서 갖는 극히 중요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전쟁을 준비하고 군대를 조직하는 것에 열심이지 않았고, 군사전략과 전략전술 연구를 중시하지 않았다. 북벌과정에서 군대를 쟁취하는 일을 소홀히 하였으며, 민중운동에만 치우친 결과 국민당이 일단 반동으로 돌아서자 그것들은 모두 무너져 버렸다.”
마오쩌둥이 여기서 지적하듯, 중국공산당은 1차 국공합작 때까지만 하더라도 무장투쟁과 군대가 중국혁명에서 갖는 지극히 중요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전쟁준비와 군대를 조직하는 일에 별반 열심이지 않았으며, 군사전략과 전략전술에 대한 연구도 소홀히 하였다. 이와는 달리, 장개석은 그 기간에 황포군관학교를 세워서 자신의 직계 장교들을 육성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 함께 추진한 북벌과정 내내 군대를 쟁취하는 것보다는 농민회 등 민중운동 활성화에만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장개석이 1927년 4월 12일 상해를 점령하고 반동으로 돌아서는 순간, 중국공산당은 치명적인 일격을 받았다. 그때까지의 민중운동의 성과는 한 순간에 대부분 수포로 돌아갔으며, 6만 명에 달하던 당원은 단 석 달 만에 1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체포되어 즉결 처형되었거나, 조직을 팔아먹는 밀정으로 변신하였다. 더 많은 당원들은 소리도 없이 전선을 이탈했다.
이러한 ‘피의 교훈’은 중국공산당으로 하여금 자체 무력을 가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수차례의 도시폭동과 농촌 추수봉기를 통해서 일차 무장력을 갖춘 중국공산당은 곧 이어 농촌으로 들어갔다. 이때서야 중국공산당은 비로소 토지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을 갖추게 되었으며, 중국변혁을 본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중국공산당이 지휘하는 무장력인 홍군은 지주로부터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여 주었다. 죽기 전에 자기 땅을 한 뼘이라도 갖고 싶어 하던 것이 당시 광범위한 농민들의 소박한 소원이었다. 이제 그 소원을 중국공산당과 홍군이 풀어주었던 것이다.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들은 자신들의 소중한 토지를 지키기 위해 자진해서 홍군에 지원했다. 홍군은 날로 장성해졌으며, 중국공산당도 함께 성장하였다. 홍군은 중국공산당이 건설하고 그 확고한 지도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은 수많은 홍군 전사들 중에서 가장 우수한 분자만을 선발해서 자신의 대오에 편입시켰다.
물론 중국공산당의 토지혁명과 당 건설을 결합하는 이상의 과정이 모두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다. 가장 큰 난점은 농민출신 병사들을 어떻게 진정한 ‘프롤레타리아계급 전사’로 탈바꿈시킬 수 있느냐에 있었다. 자칫 당 전체가 농민의 ‘소생산자적 의식’에 물들어 쁘띠부르주아정당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이 같은 난관을 정치교육을 통해서 극복하였다. 홍군 병사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맑스주의’에 입각한 정치교육을 실시함으로써 그들을 사상적으로 재무장시켰다. 입당 절차를 엄격히 하였으며, 입당을 원하는 선진분자들은 그들이 진정한 노동자계급 의식을 갖게 된 것을 확인한 연후라야 정식 당원으로 받아들였다.
이처럼 혁명적 의식으로 무장한 병사들은 홍군의 전투력을 가일 층 강화시켜 주었다. 소련군대만 하더라도 당 조직을 연대급 이상에만 두었지만, 중국공산당은 당 조직을 ‘중대’ 단위까지로 넓혔다. 이 같은 조치는 당이 군대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는데 큰 도움을 주었으며, 막상 전투가 벌어질 때는 홍군이 더욱 용맹함을 발휘토록 하였다. 예컨대 전투의 고비 때마다 당원 병사들이 앞장서 전선의 돌파구를 열어주었는데, 결사대를 자원해 적의 진지와 함께 자폭하는 사람도 생겨났으며, 수십 배에 달하는 적군의 포위망 속에서 끝까지 진지를 사수해내는 완강함도 목격할 수 있다. 설령 전투에 패해 군대가 후퇴하더라도, 군벌 군대가 보통 뿔뿔이 흩어져버리는 데 비해, 공산당 조직이 자리 잡은 홍군은 절대로 해산하지 않았다. 신속히 재결집하여 매우 단 시간 내에 전투력을 회복하곤 했다.
이리하여 토지혁명이 진척될수록 홍군 대오는 확대되었으며, 홍군이 강대해질수록 당 조직또한 발전하였다. 1921년 처음 중국공산당이 창당 될 무렵만 해도 57명에 불과하던 당원 수는, 1949년 신중국이 성립될 무렵에는 어느덧 448만 명의 거대 정당으로 변모하였다.
표1 신민주주의혁명 시기 중국공산당의 당원 수 증가 (단위: 명)
시기 | 1921.7 | 1923.6 | 1927.4 | 1927.8 | 1934.9 | 1937.1 | 1945.4 | 1949.10 |
인원수 | 57 | 432 | 5.7만 | 1만 | 30만 | 4만 | 121만 | 448만 |
중국의 당 건설은 이처럼 주요모순인 ‘토지문제’의 해결을 둘러싸고 전쟁, 군대 그리고 당 건설이 유기적 삼위일체를 이루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5. 제2 정치세력화, 노동자계급 대단결의 계기 제공해야
끝으로 한국의 당 건설 과정에 대해 언급하기로 하자.
1) 최근 민주노총은 정치방침에서 ‘노동 중심’의 진보정당 건설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정작 ‘노동중심성’의 의미는 무엇인지가 불명확하다. ‘노동중심성’은 물론 어떤 정당에서 노동자들이 많다는 의미만은 아닐 것이며, 무엇보다도 노동자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당이어야 한다는 뜻일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지금 시기 한국 노동자계급의 가장 시급하고 절박한 요구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비정규직문제이고, 수많은 중소하청 노동자의 문제이다. 결국 오늘날 당 건설 과정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당을 만든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주요모순이기도 하다.
이러한 비정규직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은 다음 2가지 측면에서 한국의 당 건설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첫째, 당의 조직 건설에 영향을 주게 된다. 당은 비정규직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현장에 자신의 당 기반을 구축하여야만 한다. 그곳이야말로 지금 시기 비정규직 문제가 첨예하게 발생하는 장소이다. 당이 공장 및 건설, 택배, 서비스 사업장 등에서 자신의 분회를 건설해야만 당은 비정규직문제, 원-하청 문제를 포함한 현장의 문제를 당 내부에 전면적으로 반영할 수 있다. 또한 당사자인 정규직과 비정규직, 원-하청 노동자들이 당을 가장 가까이서 접촉할 수 있어야만 당의 입장과 정책, 노선 또한 그들에게 가장 용이하게 전달될 수 있다.
둘째, 당원의 주요 성분에 영향을 준다. 현장은 본래 노동자 대중이 광범하게 존재하는 공간이어서 노동해방 즉 사회주의 선전선동이 가장 잘 효과적일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 더해 당이 비정규직 투쟁에 적극 개입하고 정규직-비정규직, 원-하청 연대에 매진할 수록 이들 투쟁이 발전하게 되고 이에 따라 더욱 많은 선진 투사들이 배출된다. 그리고 이들은 당 건설의 주요한 역량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
2) 한국에서 당 건설은 노동자계급의 전략적 단결에 도움돼야
현재 노동자계급은 민주노총 내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할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산별조직인 금속노조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금속노조의 60%는 한국 자동차시장의 80%를 독점하고 있는 현대차그룹의 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현대차그룹의 대표적인 계열사는 현대모비스라 할 수 있는데, 그 정규직들은 현대차지부 현대모비스위원회와, 경남금속노조지역지부 현대모비스창원지회로 편재되어 있다.
이와는 별도로 현대모비스의 비정규직들은 아산, 평택, 화성, 충주, 김천, 천안, 울산, 광주, 경주 등 전국 18곳에 흩어진 채로 해당 금속노조 지역지부 산하 ‘지회’로 편재되어 있다. 지난해 법원에서 현대위아, 현대제철 사내 비정규직들에 대한 불파판정이 잇달으자, 현대차재벌은 모비스 비정규직들을 정규직화 시켜준다는 명목으로 본질상 비정규직의 또 다른 형식에 불과한 ‘자회사’로 재편하는 꼼수를 쓰고 있다.
이렇듯 현대모비스 노동자들은 동일한 현대모비스 생산직·물류직 노동자이고 또한 동일한 상급조직인 금속노조에 소속되어 있음에도, 정규직들로 구성된 현대자동차지부 현대모비스위원회와 현대모비스창원지회, 그리고 비정규직들로 구성된 전국 18곳의 비정규직 지회로 분할된 채 임단투를 포함한 일상적 교류가 거의 없다시피 한다.
상급단체인 금속노조 또한 이들에 대해 공동교섭이나 공동요구를 내건 투쟁을 감히 생각도 못하고 있다. 오히려 자본에 의해 억지로 분리된 정규직-비정규직 체계를 그대로 인정한 전제 위에서 형식적인 임단투를 지도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자신들이 금속노조 조직원인 만큼 현대모비스 노동자들은 통상임금의 1%에 해당하는 금속노조 조합비를 매달 꼬박꼬박 내야 한다. 그런데도 이들의 가장 절실한 요구인 정규직-비정규직 간의 차별 해소와 관련해 금속노조가 전혀 기여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조합원들 사이에선 "내가 낸 조합비가 도대체 어떻게 쓰이고 있는거냐"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위의 현대모비스는 사례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현대차그룹 내의 다른 계열사인 현대위아, 현대글로비스, 현대트랜시스 등의 사정도 비슷하다. 현대차지부 내에서조차 비정규직 3지회(울산, 아산, 전주)는 금속노조 지역지부인 금속노조(본조), 금속노조충남지부, 금속노조전북지부에 각각 소속되어 해당 조직들이 이들을 따로 관리한다. 그 때문에 현대차지부와는 의미있는 연대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그렇다고 해서 금속노조 본사 차원에서 양자 간 깊이 있는 교류나 공동투쟁을 매개하는 것도 아니다. 현대차 계열사들의 상황이 이러할 진대 2차 밴드, 3차 밴드에 속하는 일반 하청부품사 비정규직들의 상황은 더욱 말할 나위가 없다.
민주노총 산하의 다른 산별 조직들도 사정은 금속노조와 비슷하다. 예컨대 공공운수노조나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의 경우도 정규직과 비정규직들이 서로 별도의 조직체계에 속한 채, 상급조직은 이들의 임단협을 형식적으로 개별 지도한다. 당연히 각자의 요구에만 매몰될뿐, 이들의 근본적 이해를 반영하는 요구를 도출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금속노조나 민주노총이 앞으로 시간이 가면 점차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 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을까? 아래 금속노조의 예를 보면 그런 기대가 난망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금속노조가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전략적 연대를 성사시키는 관건은 ‘기업지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현대-기아차, 현대중공업과 같은 전략사업장의 ‘기업지부’들이 금속노조 중앙교섭에 참여해야만 이 같은 차별의 원인 제공자인 대자본(재벌)을 상대로 직접 교섭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열쇠를 쥐고 있는 ‘기업지부’들은 중앙교섭에 불참함으로써, 원청 대자본(재벌) 또한 산별교섭을 회피할 수 있는 좋은 핑계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의 금속노조 중앙교섭 의제는 기껏해야 하청 중소부품업체 수준에 맞춰질 수밖에 없으며, 금속산업 전체의 임금격차나 신분차별 문제는 애시 당초 제기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이같은 '기업지부 문제'는 지금으로선 좀처럼 해결될 전망이 없다. 지난해 금속노조는 내부적으로 ‘조직혁신토론’을 전개하였는데, 물론 ‘기업지부 해소’ 문제도 안건으로 들어 있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는 ‘역시나’ 하는 실망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 핵심적 문제에 있어 여전히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또다시 해결을 무한정 연기하고 만 것이다. 다음 회의록은 그와 관련된 부분이다.
“기업지부 해소 관련 토론 검토하였으나 11기(현재는 12기 집행부ㅡ주)에 산별교섭이 정상화될 때까지 유예하는 것으로 부칙 14조가 개정되었고, 기업지부가 금속 산별 운동 강화를 위해 복무할 수 있는 방안과 지역지부 강화를 위한 중•단기적 전략 수립을 해야 하나, 아직 마련하지 못한 상태로 장기적 과제로 설정하고 사업과 투쟁을 통해 조건을 마련”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산별교섭 강화를 위한 업종별교섭, 초기업단위교섭 등 사업장교섭을 넘어서는 교섭형태를 (금속노조가)시도하였으나 아직 정형을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있다고 자체 평가했다.
(이상, <금속노조 조직혁신 토론안>, 2022년12월29일)
그렇다면 이 같은 장벽들을 부수고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이, 그리고 나아가 전체 2100만 노동자계급이 정규직-비정규직, 원-하청 노동자 간의 계급적 연대를 실현할 수 있는 계기와 동력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문제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점을 우선 인식할 필요가 있다. 지금은 과거 군부독재 시절처럼 정부나 자본이 노골적인 외압을 가하는 것도 아니고, 법적으로 금지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의 금속노조는 객관적으로 보면 과거 전노협이나 금속연맹(금속노조의 전신)보다 훨씬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다. 소속 사업장조직의 조합비를 본조로 집중시킬 수 있어 과거 금속연맹보다 수십 배 이상의 재정규모를 갖고 있다. 규약 상으로도 산하조직에 대한 ‘조직강제력’을 갖고 있어 사업장조직이 금속노조의 위임 없이는 교섭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속노조가 산별노조로서 제대로된 이름값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근원을 따져보면 결국 조합원들이 단사 차원의 조합주의에 머물러 있는 탓이 크다. 또 여기에는 개량주의에 젖어 있는 활동가들의 책임을 빼놓을 수 없다. 따라서 지금은 이 같은 협소한 단사주의와 조합주의를 뛰어 넘어, 전계급적 차원의 노동자계급의 단합을 추동할 수 있는 계기가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정치조직인 계급정당 혹은 ‘노동 중심성’이 관철되는 ‘진보연합정당’의 건설이 그 한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들은 원래 경제적 이익에만 국한되지 않고 노동해방을 궁극적 목표로 삼으며, 이를 위해서 정치권력의 획득을 자신의 직접적 임무로 설정한다. 따라서 이들 정당은 자신의 당원들(노동자 당원인 경우)을 자연스럽게 단사주의를 초월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며, 이러한 대의를 위해서는 심지어 자신을 희생할 것 조차 요구할 수 있다.
이런 정당의 당원들(노동자 당원인 경우)은 자연스럽게 정규직-비정규직, 원-하청 연대의 필요성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정당은 또한 전국적으로 조직되어 유기적으로 행동하는 결사체이기에 조직적으로도 당연히 단사주의를 뛰어넘게 된다. 이 때문에 이러한 정당은 정규직-비정규직, 원-하청 연대를 추동하는데 있어 일익을 담당하거나, 혹은 이러한 연대를 직접적으로 자기 임무로 설정하는 ‘노동자 연대조직’에 대한 강력한 후견 조직이 될 수 있다.
제2의 정치세력화는 이와 같이 노동자계급의 대단결을 촉진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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