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의 수도인 에도성(1719년), 조선국왕의 국서를 전달하기 위한 대규모 외교 사절단이 도착했다. 그런데 조선의 사신들을 놀라게 한 건 일본의 초대형 환영인파, 구경하기 위한 남녀가 구름처럼 몰려 그 숫자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해유록> 1719년 9월27일-구경하는 남녀가 거리를 메웠는데 (중략) 여러 사람의 눈이 빽빽하여 한 치의 빈틈도 없고). 사백년 전 일본 열도에 불어닥친 한류 열풍, 그 중심에 조선 통신사가 있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역사저널 그날 오늘은 뿌듯한 이야기로 시작을 해 봤습니다. 조선 통신사를 보기 위해서 저 많은 인파들이 모여들었다는 얘기잖아요? 기분 좋으네요.
임윤선/변호사: 욘사마를 맞이하러온 공항내 인파 같기도 하고,
원동연/영화 제작사: 한류라고 하면 아무래도 제가 좀 전문가가 아닌가요, 이병헌씨하고 변사마하고 광해의 왕의 남자를 찍었어요. 일본 극장 앞이 인산인해 였습니다.
임윤선: 그럼 대표님 알아보는 일본인이 있었어요?
원동연: 저 알아봅니다. 원상하고 저도 거의 인기가 어마 어마 했습니다.------믿거나 말거나-----
이익주/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먼저 통신사 의미부터 한번 살펴보죠. 통신이라고 하는 것은 통할 通, 믿을 信, 그러니까 신의를 통하는 사신이란 뜻입니다. 요즘은 강약, 강국약국이 있고, 대국소국이 있지만 상국하고 하국은 없잖아요. 그런데 옛날은 국가간 상하관계가 있는게 아주 상식적이었습니다. 그런데 通信使라고 하는 것은 대등한 관계의 국가에서 오가는 사신이라는 특별한 의미가 있어요. 그 당시 조선과 일본이 대등한 나라였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사신단이죠.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최태성/한국사 강사: 通信使는 조선 후기,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이백년 동안 파견된 그 사절단이예요. 열두번 거쳐 가는데 조선통신사의 가장 큰 역할은 뭐냐 하면 조선국왕의 국서를 일본 국왕 역할을 할 수 있는 쇼군, 막부의 장군이죠, 쇼군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건데 규모가 어마어마합니다. 300~500명 이구요 갔다왔다 왕복 거리만 4천 킬로, 서울서 부산까지 몇 킬로예요? 사백 킬로, 한양-문경-영천-부산-쓰시마(대마도)-시모노세키-도모노 우라-우시마도-오사카-교토-시즈오카-에도. 사천 킬로로 어마 어마 하구요.
김문식/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일본에서 새로운 쇼군이 등장하면 축하하는 사절로 가는 건데, 그러니까 일본 사람으로서도 평생에 이걸 한번 볼지 두번 볼지 알 수 없는 아주 드문 행사죠. 그러니까 굉장히 많은 인파들이 몰려 나와서 아예 돗자리 깔고 앉아서 구경하는 그런 광경이죠.
최원정: 그런데 조선 통신사는 연예인이 아니잖아요, 그렇죠? 외교관이잖아요? 이런 외교관이 어떻게 일본인들의 마음을 사로 잡을 수 있었을까요? 조선 통신사의 인기비결은?
추리박스?: 두루 마리의 정체는?
최태성: 이겁니다.
최원정: 한 장의 그림인데요.
최태성: 어떤 힌트가 있을까요?
원동연: 조선 사람들이 상투 틀고 뭔가 좀 다르니까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보니까 인기가 있었던게 아닐까요?
임윤선: 그럴 수도 있고, 저걸 보면 특이하게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빠져 있는게 있어요. 음식이 없어요. 뭔가 잔치 같은 게 벌여져 있어야 되는데 하나도 없잖아요? 조선통신사가 항상 갈 때마다 한국의 맛있는 음식들을 가지고 간 거예요.
최태성: 그래서 인기가 있었다. 이 그림을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우키요에 라고 해요 (우키요에(浮世繪)-일본 에도 시대의 풍속화 미인, 기녀, 광대 등을 중심 소재로 함). 이 우키요에 같은 경우에는 주로 뭘 그리느냐 하면 대중들의 요구 주제에 맞춰가지고 광대라든지, 미인 이라든지, 기생 이런 것들을 그리는데 그러니까 그 인물들이 누구냐 하면 주로 당시의 인기인들, 지금도 있잖아요.
최원정: 저기 저 분들도 다 인기인들이에요? (마상재도/도리이 기요노부 소장-교토 고려미술관).
임윤선: 지금으로 따지면 아이돌 브로마이드? (bromide-배우나 가수, 운동선수 등 인기인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
이익주: 브로마이드 같은 그림이 그 당시 유럽에서 굉장히 히트 상품입니다. (당시 유럽의 히트상품 우키요에). 그래서 이런 그림이 19세기 중반에 유럽에 갔을 때 마침 인상파 화가의 눈에 띄었던 겁니다. 그래서 유명한 고흐의 귀잘린 그림이 초상화 뒤쪽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이 있는데 그게 우키요에예요. (귀에 붕대를 한 자화상/빈센트 반 고흐, 소장-런던 코텍스인스티튜트 미술관).
원동연: 고흐가 따라할 정도라니 진짜, 저는 아주 되게 약간 충격인데, 그런데 아까 우키요에 보니까 말한 사람들은 조선 복장 같은데---,
최원정/임윤선: 어디 말 탄 사람이 있어요?
원동연: 이쪽에 보면 여기 말 탄 사람이 보이잖아요.
임윤선: 거기는 변발을 안했네요.
임동연: 거기는 조선 사람 같아요.
김문식: 그게 아까 우리나라로 치면 풍속화, 기록화 라고 보시면 될텐데요. 조선에서 간 소동, 아이 소동이 말 위에서 재주를 부리는 모습, 馬上才, 말 위에서 재주를 부린다. 그런데 저 馬上才라는 일종의 공연 종목이 일본에서 저 馬上才를 한번 보고나서 같이 왔으면 좋겠다고 초청을 해서 통신사가 갈 때 저 馬上才를 하는 소동도 수행을 하게 됩니다. (인조실록, 인조12년 12월-“왜사 등지승이 (중략) 마상재 수십인을 구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익주: 일본 사람들에게 글을 써주는 조선인의 모습이 또 우키요에에 남아 있습니다.
최태성/이익주: 말 타고 가는 길인데, 사인 한번 해 주세요 라고 그러는 거예요.
임윤선: 가는 길인데 사인해 주세요. 그런데 잠깐만요 왜 댕기머리를 하고 있어요?
이익주/김문식: 아이니까, 결혼 안했으니까 그래요. 아이. (조선통신사 소동도/하나부사 잇초 소장-오사카 역사박물관).
이익주: 저 소동은 정말 무명의 소동이죠. 12살~17살 되는 어린이가 따라가서 시중을 드는 거예요. 저 소동은 춤을 추기도 하고 그런데 또 들은게 있어서 시문도 짓는단 말예요. 조선의 통신사 한테 워낙 시문 받는게 인기고 어렵다 보니까 줄을 막 서는데 받는 시간에 저렇게 소동에게 와서 글 좀 하나 써달라고 하고 이렇게 받아 간 거죠.
최원정: BTS 옆에 매니저 한테 와서 사인 받아간 거지요.
최태성: 이 시문은 가끔 고가로 판매가 되기도 해요.
최원정: 조선 통신사의 큰 배 옆에 일본 여인들이 작은 배를 띄워서 접선해서 비밀 부채를 던진데요. 그러면 배에서 그림이나 글을 써서 던져주고 그 정도로 인기몰이를 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원동연: 저건 임진왜란을 겪은 이후의 일이잖아요. 일본 사람들이 우리 무시 안하고 글 하나 받으려고 이러는 게 약간 저는 기분이 좀 묘한데요.
김문식: 시민들한테는 저게 일종의 부적 같은 걸로 알려져 있더라구요. 그러니까 조선 사람의 글을 받아서 집에 가지고 있으면 화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라는 이런 부적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으니까 더 기를 쓰고 받을려고 하죠.
최원정: 어떻든 재미있는 사실이에요. 반대의 경우라면 어디 오랑캐 것을! 아무튼 문화 강국 조선의 면모를 여지없이 보여 주었습니다.
김문식: 조선의 뛰어난 문화를 일본에 전파한다. 그러면서 그 외세로 국방의 안전까지 도모하려는목적이 있는 거죠.
최원정: 저렇게 열광하니 우리에게는 최고의 드림팀을 보내야 된다는 압박을 받았을 것 같아요.
원동연: 통신사로 선발되었다는 것 자체가 조선에서는 다 특출난 인재라는 거예요. 너도 나도 경쟁이 치열했을 것 같애요.
1764년 6월 22일 <해사일기>에 실린 기록입니다. 우리나라는 땅이 좁아 나라 안은 멀어야 수천 리이고, 매년 있는 중국 사행길도 4천리를 넘지 않는다. 여행지 가운데 가장 먼 곳을 논하자면 일본해 통신사가 으뜸이니 왕복 11,300여 리에, 뱃길이 그 5분의 3을 차지한다. 이는 운수와 천명에 관계되는 문제이다. 생명을 운수와 천명에 맡겨야 하다니, 조선 통신사가 인기 관직 맞습니까?
최태성/최원정: 그러네요, 목숨 걸고 가야 되겠네요. 아까 선생님이 말씀 하셨다시피 이게 왕복 1년이 걸린다니까요.
임윤선: 외교관이 되게 선망의 직종인줄 알았는데 저거는 생명 수당이 붙어야 되는,
김문식: 저도 부산에서 배를 타고 두번 가봤거든요. 두번 다 뱃멀미 했어요. 빤히 보이는 대마도 인데도 굉장히 험해요. (부산-쓰시마(대마도)-후쿠오카).
최태성: 숙종 때 여기가 외양이란 곳인데요. 여기를 건너다가 무려 108명이 바다에 빠져 죽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익주: 통신사에 선발이 되면 가긴 가야 되는데 겁이 나잖아요. 가장 먼저 가는데가 어디냐하면 조선소, 배 있는데 가서 배가 안전한가? 그 다음에 뱃머리에다 도깨비를 그려 넣어서 그 힘으로라도 안전을 지킬 수 있게 기원을 하면서 가죠.
최원정: 그렇다면 통신사는 일본을 어떻게 평가했을까요?
<동사록>에 실린 기록입니다. 왜경에서 에도에 이르는 동안 모두 육지였지만 한쪽 옆은 바다였다. 땅의 형세가 평평하고 산천은 험하지 않으며 토지는 비옥했다 (중략) 도로는 평평하면서 곧고 밭 모양은 네모 반듯한데 네 모서리에는 반드시 다초(茶草)를 심었다. 시장에는 물화가 쌓여있고 여염집에는 쌀이 넘쳐난다. 그 백성들의 부유함과 물자의 풍부함에 있어 우리나라는 비교할 바가 못된다.
이미 일본은 이때부터 부유했다니 조선이 왜놈이라고 한 그 나라 맞습니까?
최원정: 부럽네요. 이건 정말 확연히 일본이 우리보다 잘 살았네요.
최태성: 이게 지금 1624년 인조 때예요. 인조때, 세번째 통신사로 파견된 강홍중이 쓴 기록인데 보시면 알겠지만 이미 17세기초에 일본의 경제가 우리보다 훨씬 낫다라는 것을 우리가 스스로 기록하고 있잖아요. (동사록(東槎錄)-1624년(인조2년) 8월부터 7개월간 통신부사 강홍중이 다녀온 사행의 기록).
원동연: 일본을 색안경 끼고 보는 건 아니지만 보통 이렇게 사절단이 가거나 통신사가 갈 때 보여주고 싶은 것을 보여줄 수도 있잖아요?
김문식: 그렇죠. 그러니까 통신사도 다 눈이 있는 사람들이니까 본걸 기록할 수 밖에 없는데 오사카 그 다음에 교토, 그 다음에 에도, 동경이라고 하는 에도 코스, 지금도 일본의 제일 번성한 지역이잖아요. 그러니까 일본의 핵심을 보는 거죠. 그렇죠? 그리고 어디를 가나 잘 정비되어 있고 사람을 구경나온 사람들 차림새를 보면 다 화려하죠. (<해유록> 1719년 9월4일-관광하는 남녀들이 양쪽에 담처럼 늘어섰는데 모두 비단 옷을 입었다. 거리는 방정(方正)하고 여염집은 즐비하며 시장에는 물화가 쌓여 있었다). 그러니까 이 나라는 정말 잘 산다. 그리고 도로정비 잘 되어있고 숲 잘 가꾸어져 있고 이런 게 보이는 거죠. 그래서 이런 표현을 쓰는 거죠.
최원정: 상공업도 발달했고 사는 모습도 되게 세련되고 부유해 보이고 그랬잖아요, 지금?
임윤선: 이미 도로를 조성했다는 거예요.
이익주: 너무 부러운 표정입니다. 사실 그 당시 조선 사람들이 갈 수 있는 외국이 淸과 日本, 그러니까 북경과 에도, 두 군데 잖아요. 그런데 북경을 가게 되면 마음대로 다니지를 못했어요. 게다가 육로로 해서 가기 때문에 중국 청나라의 그 당시 진면목을 보기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일본의 이 구간 오사카에서 에도까지가 여기가 아까 조선 사신들이 볼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변화한 지역 이었을 것입니다.
최원정: 도대체 어떤 모습들을 더 보게 되나요?
최태성: 제가 보여드릴게요. 저 그림은 1747년 11월 열번째 통신사로 파견된 이성린이 그린 사로승구도 라는 그림입니다. (사로승구도(槎路勝區圖) (1747~1748년)-조선통신사를 수행했던 화원 이성린이 통신사 노정을 담은 30폭의 그림). 조선 화원이 그린 전체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는 유일한 그림입니다. 잘 보세요. 자세히 보시면 배를 이어서 다리를 만들었어요. 배다리, 그렇죠. 주교(舟橋)가 지금 보이고 있구요.
김문식: 여기가 에도 가지 직전에 강을 건널 때 배다리 만든 장면입니다. 이게 당시 조선 통신사에게는 굉장히 흥미로운 장면이었어요. 그래서 저기 다른 것 보다는 주교를 직접 그린 것도 배다리 자체가 관심이 있다는 겁니다.
최원정: 배다리 우리 정조 때도 정약용에 의해서 만들었잖아요.
김문식: 그런데 저건 훨씬 전이지요. 본격적으로 조선 후기에 아직 나오기 전이죠. 그 다음에 水車제도는 오사카성을 지나가면서 수차를 돌려가지고 강물을 성 안으로 들이는 거죠. 성이 높잖아요. 수차를 따로 그리게 되는데,
원동연: 그러면 이미 17세기부터 일본이 우리보다 훨씬 기술적으로 앞서 나갔다라는 거네요.
김문식: 경제적으로 잘 살고 기술적으로 우수한 점이 있다는 걸 알게 돼죠. (조선통신사가 본 일본 1. 경제적인 富 2. 기술발달).
원동연: 그런데 일본에서는 다른 뭐가 어떤 기술이 있었나요? 어떤 앞서 나갔던?
최태성: 예를들면, 오사카의 출판문화, 굉장히 충격이었어요. 유성룡의 징비록 (징비록(1647년)-조선 중기문신 유성룡이 쓴 임진왜란 기록), 간양록 (看羊錄(1656년)-임진왜란 당시 포로로 끌려간 강항이 일본생활을 기록한 책), 이건 사리 조선의 기밀정도가 담겨있는 굉장히 고급문서인데 이게 일본에 그냥 쫙 깔려 있는 거예요.
최원정: 일본에?
최태성: 너무 쉽게 사서 볼 수 있는 거예요.
임윤선: 일본엔 저작권 개념이 없어요? (일동 웃음).
최태성: 누구나 사서 볼 수 있는 거예요. 깜짝 놀랬어요. 징비록 조선의 아픔이 다 있는 이 책이 일본인이 너무 쉽게 보는 거예요. (<해유록> 1719년 11월 4일-두나 사이의 비밀을 기록한 것이 많은 글인데 지금 모두 대판에서 출판되었으니 이것은 적을 정탐한 것을 적에게 고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임윤선: 우리는 일본의 비밀을 몰래 적었는데---,
최태성: 그러니까 얘네들은 그냥 이거 사다 보세요. 이게 얼마나 황당해요.
최원정: 이건 지금 뭐예요, 지금? 그만큼 일본의 지식정보산업이 발달했다는 거죠. 왜 통신사들의 글 솜씨에 열광하고 일본 사람들의 특유의 예의 바름이 있잖아요?
원동연: 혼내가 아닌, 본심이 아닌,
최원정: 거기에 우리가 넘어간 건가, 갑자기? 머리가 띵 한데요.
김문식: 유의를 해야 되는데요. 임진왜란 때 일본인이 와서 조선활자를 가져가서 책을 인쇄했다고 이야기하잖아요. 같은 활자를 가지고 그걸 어떻게 이용하느냐. 활자문화를 보급하기 위한 것인데, 일본의 출판산업은 엄청나죠. (조선과 같은 금속활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엄청난 규모로 성장한 일본의 출판산업). 그리고 조선 후기에 까지만 해도 주로 정부에서 관찬서가 주류를 이루고(조선후기까지 정부발행의 관찬서가 주류를 이룬 조선). 민간 자체에서 책을 만들어 파는 것은 굉장히 규모가 적어요. 18세기 이후에 본격적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는데 (조선이 일본보다 금속활자 기술은 앞섰으나 출판문화는 100년이 뒤진 셈) 그러나 일본은 이때가 전성기예요.
이익주: 출판속도도 굉장히 빨라서 우리 통신사들이 가는 길에 필담을 한단 말예요. 그리고 에도를 돌아오는 길에 거길 들르면 벌써 책이 거기 나와 있는 거예요.
일동: 어머나! 감탄과 탄식!
이익주: 그러니까 이게 출판속도도 빠르고 지식의 전파속도가 그만큼 빠른 거죠.
임윤선: 그게 조선 지식인으로서는 얼마나 충격이었겠어요. 그러면 조선의 지식인이라면 보세요. 저라면 금속활자의 원조 라고 이야기하죠. 그리고 책 읽는 거 좋아해요. 그렇다면 더 더욱 잘 됐다. 이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입을 해서 우리야 말로 진짜 원조임을 만국에 보여 주리라 라고 할 것 같아요.
김문식: 일본이 이처럼 잘 살게 된 것은 국내 상업이 활성화되어 있다. 조선의 상업과 비교를 해 봤을 때 훨씬 더 상가가 발달되어 있다는 걸 볼 수 있죠. 그 다음 또 하나는 외국과 교역을 하기 때문입니다. (일본번성의 비결 1. 국내상업 활성화, 2. 외국과의 교역). 그런 것들이 결국은 일본의 번성함을 가져왔고 중국보다 잘 산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조선보다는 상당히 잘 산다고 평가를 해요. 실제로는 그런데 그것을 도입하자는 이야기는 안나와요.
이익주: 제가 볼 때 조선 사람들의 지식인들은 우리 흔히 하는 말로 이거죠. 부러우면 지는 거다.아마 이런 심정으로 이런 말을 합니다. 각종 시설이나 치장들이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해사일기> 권4 1764년 3월 4일-각종 시설물이나 가옥의 치장들이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쇼군의 거처에서 만난 고관의 인물 됨됨이가 시원치 않으며 칼을 차고 이상한 복식을 한 이 나라가 어째서 오래도록 부국강병을 유지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해유록> 1719년 10월 1일-관백(쇼군)의 거처에서 만난 고관의 인물 됨됨이가 시원찮으며 칼을 차고 이상한 복식을 한 이 나라가 어째서 오래도록 부국강병을 유지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생각을 해요. 그러다 보니까 그 이유를 찾고 그걸 배우려고 하는 생각은 하기가 어려웠겠죠.
원동연: 이게, 감정적인 묘사예요!
임윤선: 그냥 너 싫어!
원동연: 니가 잘 사는거 인정하기도 싫고 알고 싶지도 않아, 다분히 감정적이예요.
이익주: 그때 일본이 싫은 나라였거든요.
최원정: 不俱戴天의 원수의 나라였는데----,
이익주: 맞아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통신사를 파견하면서도 만세불공지수(萬世不共之讐)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원수, 이런 표현을 해요.
임윤선: 아마 간 사람들의 대부분은 두 다리만 건너면 일본군 때문에 죽은 친인척들이 다 있을텐데, 그런 면에서 통신사로 간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최태성: 사실은 조선통신사는 1413년(태종13년) 부터 그 때부터 첫 파견이 시작돼요. 그러다가 임진왜란이 딱 터지면서 국교가 단절되니까 못보내다가 1607년 (선조40년)에 다시 보내게 되는 겁니다.
김문식: 임진왜란 때 쳐들어온 사람, 장본인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잖아요. 이 사람 세력을 완전히밀어내고 새로 집권한 사람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예요. 이 사람이 정권을 장악하고 나서 국교를 재개하자고 요구를 해옵니다. 그러면서 임진왜란 때 자기는 조선에 쳐들어간 적이 없고 또 조선의 원수인 도요토미를 무너뜨리고 자기가 새로 전국을 평정한 사람이라고 해서 조선의 원수를 자기가 갚았다고 얘기를 하죠. 그래서 국교를 재개하자고 요청을 합니다.
임윤선: 오히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논리에 조선이 설득 당한 거네요.
최태성: 그렇긴 해도 명분이라는게 필요 하잖아요. 그래서 두가지 요구사항을 내걸어요. 첫번째 요구사항은 뭐였느냐면 너희 일본이 먼저 조선에 국서를 보내라, 두번째 요구사항은 임진왜란 때 조선 왕릉을 파헤쳤다. 그 범인들을 잡아 보내라 이 두가지 조건을 겁니다. 실제로 범인들이 와요. 범인들이 왔는데 조사하는 과정 속에서 가짜였어요. 그런데 그냥 오케이 저자거리에서 처형시키고, 국교재개를 강행해 버려요. (선조수정실록, 선조 39년 11월-대마도 왜인중 사형에 처할 죄인이었던 마고사구-마다화지 두사람을 범릉왜(犯陵倭)라고 속여 국서와 함께 보내왔다. 이들을 목 베라 명하였다).
원동연: 보통 이라면 정치적으로 뒤로 거래가 있거나 그러지 않아요? 있었을법한 냄새가 나네요.
최원정: 청나라 대할 때는 안그러더니 왜 의리나 명분을 중요시 하는 조선에서 이런 결단을 내리죠.
이익주: 첫째는 요즘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문제가 있는데 일본이 다시 쳐들어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그때는 해요. 임진왜란 끝나고 얼마 뒤까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과의 관계를 평화적으로 가져가야 된다는 생각을 조선이 분명하게 하고 있었고 또 한가지는 북쪽에서 후금이 자꾸 커지고 있었거든요. 후금이 커지게 되면 조선이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한 거지요. 그래서 나름대로, 그 당시에 조선이 국제정세의 변동에 적극적으로 대응을 한 겁니다.
김문식: 일본 쪽에서는 필요성이 있었어요. 도쿠가와 막부가 새로 집권한 초기잖아요. 그 사람이 일본 평정을 외형적으로는 했지만 민심까지 다 얻은 건 아니잖아요. 그때 조선국왕이 공식적으로 보내는 사절단이 와서 자기에게 국서를 받치고 또 국서를 받은걸 보여주면 국내지방 영주들, 또 백성들에게 자기 권위를 살려 줄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하죠. 그 다음 또 하나는 조선통신사가 지나가는 코스에 있는 번주들, 즉 영주들에게 막대한 비용을 쓰게 하는 거예요. 아까 말씀 드렸듯이 5백명이 이동을 하는 거니까 그렇게 하면 재정이 많이 축이 나겠죠. 그러면 지방의 영주들이 그 힘을 모아 가지고 다시 중앙정권에 반기를 들기 어려울 것이다. 정치적 목적도 있었죠.
최원정: 힘을 빼놓기 위해서 군요.
임윤선: 일본 막부가 영리하네요.
김문식: 서로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있었죠.
원동연: 그럴려면 왜 20년에 한번씩 불러요, 3년에 한번씩 불르지,
최원정: 우리만 보내요?
이익주: 네, 우리만 보내고, 일본에서 온 사신단은 없죠. 조선 전기에는 우리가 통신사를 보내고, 일본에서도 사신을 보내왔어요. 이걸 기록에는 일본국왕사 라고 표현을 하는데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에 재개하면서는 오는 건 안된다. 왜냐하면 조선 전기에 일본에서 온 사신들이 온 그 길, 그 길이 바로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온 길이 되거든요.
이익주: 그렇죠.
최태성: 임진왜란 끝나고 처음 통신사 파견 하잖아요. 그때도 사실 통신사 라는 이름으로 파견을 안했어요. 회답겸 쇄환사(回答兼 刷還使) 라는 식으로 파견해요. 그러니까 국서를 보냈으니까 그걸 회답을 받는다. 또 쇄환사는 뭐냐 하면 끌려갔던 조선인 포로들 있잖아요. 데려온다 그런 명목으로 간 거예요.
임윤선: 그 정도면 괜찮네요. 포로들을 다시 데리고 온다면, 그 정도의 성과가 있었나요?
김문식: 1617년에 조선측에서 명나라에 보낸 외교문서에 보면 규슈, 규슈는 일본 섬 중에 하나죠. 여기에서만 조선인 포로가 3만여명이 되요. (광해군 일기, 광해군 9년 4월-사쓰마주(큐슈)에 잡혀 있는 자가 3만 7백여명이나 되는데), 공식적으로 쇄환사가 가면서 포로를 데려오는데 처음에 갔는데(1607년) 1418명정도, 그 다음에 갔을 때 (1617년) 321명, 그 다음에 갔을 때(1625년) 146명, 갈수록 줄어들어요.
원동연: 쇄환사 라는 거창한 이름과 명분을 가지고 했던 일인데도 불구하고 성과는 예상보다 미미한데요. 너무 미미한데요.
이익주: 쇄환 실적이 미미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조선에서 이 사람들 쇄환까지 하는데 쇄환해온 이 사람들을 어떻게 정착시키느냐 여기까지 책임지고 정책을 만들어 놓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쇄환이 실적을 내가가 어려운 구조가 돼죠. 제가 굉장히 재밋는 사람을 하나 찾아냈는데요. 이름이 조완벽이에요(完璧). 임진왜란 때 끌려 갔어요. 거기서 그 사람이 명민했나 봐요. (조완벽-정유재란으로 일본의 포로가 되었으나 1607년 조선으로 돌아옴). 그래서 거기 상인들에 어떻게 눈에 들어서 베트남을 세번을 갔다 오고 필리핀도 한번 갔다 와요. 이런 인재가 쇄환이 되서 조선으로 돌아옵니다. 제가 볼 때 이 시기에 세상을 가장 넓게 본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아무 쓰임이 없어요.
원동연: 이거 안타깝네!
최원정: 포로 쇄환성과가 저렇게 저조하면 조선 통신사의 목적을 어떻게 보면 상실하고 있는 건데 흐지부지 되지 않았어요?
최태성: 그게 정상일 것 같죠. 그런데 오히려 1636년 (인조14년) 4차 통신사 때는 아예 통신사라는 명칭까지도 회복이 돼요. 이제 까지는 회답겸 쇄신사로 갔는데 그게 아니고 그냥 통신사로 복귀가 돼요.
임윤선: 조선의 위정자들이 참 착하다 싶어요 순진하다. 통신사 라는 이름을 회복했다 라는 건 통신사는 신뢰를 통한다 라는 거잖아요. 결국 일본이 다시 또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 잊고 그래 그럼 또 우리 같이 수교하면서 문화교류하자 하는 마음은 물론 과거에만 얽매일 수만 없지만 과거를 분명히 인식하고 우리도 너희들이 우리 정탐하러 왔던 것처럼 우리도 정탐할 거야 라는 그 경계는 잊어버린----,
김문식: 그러니까 실정을 보셔야 되는데, 이게 1636년, 1636년이면 병자호란이 일어난 해잖아요. 북쪽에서 여진이 후금이 되고 청으로 가는 이 과정에서 그전에 이미 한번 호란이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북쪽이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죠. 후금과는 계속 전쟁이 있는 상태에서 일본까지도 관계를 안좋게 하면 우리가 굉장히 위기에 빠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통신사 라는 이름으로 회복을 해주는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 이때 통신사가 일본에 갔을 때는 청이 조선에 공격하기 전 이에요. 통신사가 갔다 왔을 때는 항복한 뒤였어요. 부산에서 그 소식을 듣고 그냥 엎드려 있었죠. (조선통신사 파견-1636년 병자호란-조선통신사 귀국).
최원정: 우리가 대청외교를 봤을 때는 답답했었는데 하여튼 일본과의 관계는 조금 실리를 챙긴 것 같아요.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정세 속에서, 뭔가는 우리가 생각은 했구나.
이익주: 명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가 250년 만에 이제 무너지는 거예요. 이런 가운데서 새로운 국제질서가 만들어지는 그 시점에 일본과 조선이 통신사 외교를 재개하게 됐던 것입니다.
일본의 작은 항구도시 나가사키, 1636년에 건설된 부채 모양의 인공섬 데지마, 서양과의 무역을 위해서였다. 입주한 네델란드 상관엔 일본과의 독점 무역권이 주어졌다. 380여년전 이미 세계로 열려있던 일본의 창, 데지마 상관이다.
최원정: 조선이 개항하기 240년전에 이미 일본은 서양과 무역을 하는 국제도시, 인공섬이 있었다는 얘기예요. 데지마 상관.
임윤선: 저 그림을 봤더니 활발하게 외국인들이 사는 것도 놀랍고,
원동연: 실용주의가 가득한 일본의 모습을 본 것 같아요.
최태성: 또 재미있는 게 뭐냐 하면 놀라운 게 당시 일본이 오픈된게 아니예요. 일본도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었어요. 막부가 기독교를 금지시키고 무역에서 막부가 독점하기 위해서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었고, 국교를 한 나라는 조선과 류큐(오키나와) 밖에 없었어요.
원동연: 류큐가 어느나라예요?
최태성: 지금의 오키나와,
최원정: 그러면 데지마에서만 무역을 하고 조선이 왜관 만들었듯이 그런 거였어요?
김문식: 그런 거지요.
원동연: 그러면 국교를 맺지않은 나라와 무역이 가능할까요? 불가능한 거 아니예요?
김문식: 일본은 그걸 허용을 한 거죠. 실리를 취하는 것인데요. 처음에 포르투갈하고 먼저 교역을 해요. 그런데 기독교가 문제가 되니까 기독교를 금지를 시키고 격리를 시키는 거지요. 그래서 인공섬을 만드는 겁니다. 출도 데지마 라는 것은 육지와 멀지않은 데에 입구만 막으면 들어올 수 없게 격리된 개항장을 만들어놓고 포르투갈을 물러나게 한 후에 네델란드와만 독점적으로 무역을 하게 한 거지요.
최원정: 우리 왜 하멜도 저기 갈려고 하다가 제주에 표류한 거잖아요.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1653년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중 제주도 표착).
김문식: 포르투갈 하고 할 때 카스테라 있잖아요? 카스테라 빵이 이때 들어옵니다. 그리고 하멜이 바로 저기를 갑니다.
최태성: 하멜이 제주에 왔을 때 우리도 제주에 특별무역지구를 만들었어야 되는데---,
최원정: 그러면 얼마나 좋아요, 인공섬.
임윤선: 그런데 막아 놨다 잖아요, 통신사들이 못 갔겠죠. 선택적 쇄국정책이 너무 영리해 보이는데요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보면 쇄국이 아니라 그 쇄국의 國자는 조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조선은 발달된 서양 문물을 직접 못만나고, 우리는 일본의 배타적 쇄국을 만나야하는 생각도 살짝 들어요.
김문식: 임 변호사 말씀이 맞는게 사실 네델란드가 일본까지 왔잖아요. 조선하고 직교를 할려고 그래요. 그런데 일본측에 요청을 하죠. 일본이 막아요. 중개무역을 해야 되니까 그 사람들이 조선을 바로 가는걸 막고 그럼 우리하고 관계를 끊는다 그러니까 조선보다는 일본이 낫다고 생각이 됐기 때문에 그냥 거기서 머물렀죠.
최원정: 중간에서 일본이 딱 블로킹한 거예요.
이익주: 우리 통신사가 갔을 때 마침 일본이 쇄국을 하고 있을 때 라는 것이 조선에 불운이기도 합니다. 네델란드가 쇄국한 일본과 독점적인 교류를 하게 되고 일본의 네델란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네델란드를 우린 화란이라고 하잖아요. 화란에 대한 연구가 이제 학문으로 발달을 하며 난학이라고 하는 일본의 고유한 서양학문이 생기게 돼요. (蘭學-네델란드어로 일본에 전수된 서구의 근대학문). 일본은 네델란드로부터 일본이 필요로 하는 실용적인 과학, 기술, 그리고 군사분야에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죠. (난학의 주요 연구분야-의학, 천문학 자연과학, 측량술, 포술 과학기술).
김문식: 대표적인 책이 있는데요. 1773년에 나온 책인데, 해체신서라는 책이 있어요. (解體新書(1773년)-독일의 인체 해부학 서적인 <<해부도보>>의 네델란드어판을 일본어로 중역한 것). 인체해부학 책이에요. 이걸 원래는 독일사람이 썼는데 네델란드어로 된 책이 나왔던 거지요. 이것을 난학하는 일본 학자가 의사입니다. 39살 된 의사가 이것을 네델란드어를 배워 가지고 번역을 합니다. 의학용어가 굉장히 어렵잖아요? 네델란드어로 되어 있는 인체 해부학 용어를 한자어로 바꾸는 거지요. 그래서 지금도 씁니다. 신경, 연골, 동맥 이런 번역어가 이때 나온 겁니다.
최태성: 그걸 지금도 우리가 쓰고 있는 거잖아요. 이 당시 일본인들 보면 정말 놀랍고요. 더 파격적인 조치가 이루어지는 데요. 1823년 데지마에 파견된 네델란드 상관의 주치의로 프란츠 시볼트 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시볼트가 데지마에 넘나들던 기생, 오타키 라는 기생과 사랑에 빠져서 딸을 낳아요. 그런데 일본이 어떻게 했냐면 원래 데지마 밖으로 벗어날 수 없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이 시볼트에게 나가사키 시내에 들어와서 병원, 의원을 설립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왜 주었냐면 이게 꽤 뛰어나다. 가르쳐라 일본인을 가르치라. 그 의원에서 가르치고 그 가르침이 일본의학발전에 엄청나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원동연: 일본 여자하고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았으니 딱 된 거죠.
최태성: 그러니까, 일본은 배울 수 있으면 뭐든 배우겠다 그게 중요한 거예요.
최원정: 지금 저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게 데지마 상관의 난학 이런 것들이 정말 막 번성하고 삶으로 들어올 때 조선 통신사들이 일본의 한 복판에 갔다 왔는데 그걸 우리는 감지를 못하고 온 거잖아요. 그런데 일본의 변화는 정말 입이 안다물어질 만큼 무서운 변화인데요.
이익주: 맞습니다. 왜 우리도 17세기 후반 조선에 여러가지 산업이 발달하고 그래서 자본주의 맹아가 시작되었다는 게 바로 이 시기예요. 같은 시기에 일본에서도 그런 발전이 있는데 특히 일본에서는 우리보다 더 큰 규모로 도시가 발달하는 아주 독특한 현상이 있습니다. 18세기 초에 에도의 인구가 백만이었다고 그래요. 그런데 그 당시 유럽에 런던과 파리가 약 60만명 정도라고 하거든요. 일본 사람들 자랑하는 게 18세기에 세계 최대의 도시 에도, 이런 얘기를 해요.
원동연: 아니, 그럼 일본에 이렇게 큰 변화가 있는데 이거는 근 일년간 진짜 듣고 보고 했던 통신사들이 일본에서 배울게 없다라고 한다는게, 이거 진짜 돌아와서 장 맞을 일 아닙니까? 이게 말이 됩니까?
임윤선: 한다는 얘기가 인물이 변변치 않다?
최윤정: 직무유기 아니예요? 살피고 왔어야지?
김문식: 통신사의 경로하고 나가사키가 마주치지를 않죠.
원동연: 아니 그래도 듣기로는 할 수 있잖아요?
김문식: 본 사람도 있고 책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듣기는 하지만 직접 볼 수 잇는 사람은 없어요, 상관자체를.
임윤선: 여기서 갑자기 든 의문은 일본인들은 이런 낯선 것에 대한 배타성이 왜 우리보다 적었을까요?
김문식: 일본은 기본적으로 모든 관계가 무역관계로 영향을 받아요. 왜구도 무역이 단절되니까 약탈을 하죠. 그리고 실제로 일본은 에도 시기가 되면 동남아시아, 인도네시아까지 무역이 다 연결이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바다가, 그 동남 아시아 바다가 이미 서양배들이 다니기 때문에 낯설지가 않은 거죠.
원동연: 섬에서 일, 이년 살면 되게 지루해 져요. 뭔가 새로운 게 오면 반가워요.
이익주: 이런 환경적인 요인도 있고 제 생각에는 어떤 다양성에 대한 생각이 우리와 좀 다른 것같아요. 우리도 고려시대까지는 그랬는데 조선시대에 오면서 모든 가치의 판단을 성리학을 가지고 하나로 하게 되잖아요. 일본은 그런데 신도나 불교 이런 것들이 계속 뒤섞여 있는 상태가 오랫동안 유지가 되거든요. 그래서 성리학이 한 사회를 완벽하게 이끌어 갔을 때 생기는 부작용의 차이에 대한 이해를 좀 더디게 하는게 아닌가 제가 좀 과감하게 생각을 해봤습니다.
최태성: 18세기에 들어오면서 일본을 방문한 통신사들의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711년 (숙종37년) 8차 조선통신사 부사로 파견됐던 임수간이라는 사람이 네델란드인을 직접 목격을 해요. 일본의 세도내해를 쭉 올라가다 보니까 어! 배에 이상한 깃발이 달려 있는 거예요. 저 배가 뭘까? 하고 고민했겠죠. 그게 바로 네델란드 상선이에요.
임윤선/최원정: 아, 그래요, 그러면 얼른 가서 하이 하고 모셔와야죠! 납치를 해야죠!
이익주: 그 배를 타고 네델란드로 가야죠!
김문식: 사실 제가 생가할 때에 이 시기가 되면 네델란드와 직접 상대를 하고 교역을 하고 정보를 캤으면 좋겠지만 사실 일본을 잘 캐도 되는 시대였어요. 왜냐면 제가 보기에 청나라 보다 일본쪽에 유럽 정보가 더 많은 시기였어요. 그러니까 일본쪽에 있는 서양 정보를 잘 모았어도 훨씬 더 많은 정보를 모우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죠.
최원정: 우리가 아무리 뼈 속까지 무시했던 오랑캐 라고 했지만 잘 사는 것을 봤으면 쟤들 비결이 뭐지 호기심이 있었어야 했는데 그걸 못했다는 거지요. 그게 계속 아쉬워요.
이익주: 그 아쉬움에 제가 아쉬움을 더하는 얘기를 해드리죠. 도자기 얘기인데요. 임진왜란 때 조선 도공이 일본에 끌려갔고 그래서 일본이 비로소 자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건 다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 청화백자를 그 당시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중국, 조선, 일본 딱 세나라 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일본에서는 조선의 이 청화백자를 만들다가 불과 한 두세 세대가 지난 다음에 이 도자기에 채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유럽으로 수출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또 유럽에서 대인기, 특상품이 됐죠 (조선의 청화백자에 채색-유럽으로 수출한 일본). 그래서 우리가 전해줬지만 그 이후의 발달의 과정을 보면 일본 도자기가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명품의 반열에 드는 동안 한국 도자기는 소개도 되지를 못해요. (세계적인 일본 도자기 VS 조선의 도자기는?).
최원정: 정말 울고 싶다!!
원동연: 우리는 너무 폐쇄적으로 있었고 일본은 사실 자기네들한테 진나라지만 조선한테 배울건 배울려고 달려들고 우리는 와서 직접 눈으로 보고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인정안하고 전 진짜 아주 안타깝네요. (일본: 침략한 나라에서도 학습 VS 한국: 침략당했다라는 이유로 외면).
임윤선: 일본이 싫은 건 이해가 가지만 얼마나 싫겠어요. 현재 우리 집안의 대원수일텐데 그래도 일본이 싫어도 일본이 서양문물을 통해서 눈부시게 발달한 것까지 봤잖아요. 그러면 일본은 싫지만 서양문물은 배우리라 고해서 선택적으로 배울 수도 있는데 그냥 통째로 안배운 모습은 안타까울뿐만 아니라 후손 입장에서 화가 나는 거예요.
김문식: 이 시기에 서양문물을 대하는 태도가 차이가 있는데요. 번영이라는 단어에서 보면 일본은 앞서 말씀드린대로 네델란드어를 일본 사람이 배워가지고 제일 어려운 의학서적을 번역을 하잖아요. 그런데 중국은 예나 지금이나 천하중심이 중국이죠. 그러니까 서양 사람이 와서 중국어를 배워가지고 자기들 책은 한문으로 번역을 해주죠. 조선은 어디에 해당 하느냐 중국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 그 다음에 일본 사람이 번역한 것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 번 꺾이는 거죠. 중국의 시각, 일본의 시각에 의해서 해석된 정보를 보는 것이죠.
원동연: 다이렉트로 보는 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을 거쳐서---,
최원정: 일본에서 계속 봐야 되는 것들, 조선통신사가 놓치는 것에 대해서 아쉬움을 계속 얘기하는데 이 아쉬움이 언제까지 계속 이어 지나요? 거기에 대한 답이 추리 박스로 확인됩니다. 무얼까요?
추리 박스?-조선통신사의 다음 행보는? 이것은 고구마,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최원정: 고구마 라는 뜻은, 답답하다? 그거 잖아요?
임윤선: 우리 보고 계속 답답하다 라는 것이냐 언제까지? 쭉~ 답답해라.
원동연: 못생긴 사람들을 속어로, 불량감자, 불량고구마, 이러 거든요? 외형으로만 이 사람들을 무시할려고만 했던 그 마음의 일면을 그 고구마가 표현해 주고 있는게 아닌가? 맛은 있습니다.
최태성: 淸나라가 중원을 평정하면서 한일간에 모습도 안정화가 되거든요. 이렇게 되다보니까 교류의 방식도 많이 바뀌어요. 예전까지는 포로쇄환에서 이제 부터는 문화교류에 촛점을 맞추는 통신사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최원정: 문화와 관련이 있다구요?
최태성: 그렇죠. 고구마의 정체는?
임윤선: 조선 한류가 워낙 유명했으니까 조선의 한류를 보고 고구마를 수출했다.
이익주: 여기 반전이 있는데요. 고구마는 수출한 게 아니라 일본에서 우리가 드려온 것입니다.
원동연: 그렇게 폐쇄적이든 조선 통신사들이 이제 정신 차린 겁니까?
최원정: 고구마 먹어보니까 맛 있거든요. 쪄 먹어도 맛있고 구워 먹어도 맛있고 생으로도 맛있고,
이익주: 1764년(영조40년) 열한번째 통신사 조엄, 조엄이라고 하는 분이 쓰시마에서 고구마를 발견해요. 이게 아주 굉장히 효과적인 救荒植物 (famine food)이거든요. (<해사일기> 1764년 6월 18일-일행 중에서 그것(고구마)을 얻은 자가 있으니 이것들을 과연 다 살려서 우리나라에 널리 퍼뜨리기를 문익점이 목화를 퍼뜨린 듯한다면 어찌 우리 백성에게 큰 도움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걸 가져가면 마치 내가 고려말에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져와서 의복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이걸 드려가면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구나 이런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래서 이걸 빨리 보내야겠다고 해서 내가 에도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가져가면 이미 늦을 테니 여기서 빨리 조선으로 보내야겠다 사람을 시켜서 이 고구마를 조선으로 보내고 자기는 에도로 떠납니다.
원동연: 조엄 선생 없었으면 우리는 고구마 못먹었겠네요.
최태성: 조엄 선생은 고구마 뿐만 아니라 이 밖에도 아까 배들 있잖아요? 주교라든지, 물레방아, 건축물 등 이런 걸 정말 꼼꼼이 적어가지고 이런 것들을 기록으로 남기셨어요. 일본문물을 도입하는데 앞장 섰던 분이 조엄이 아닐까.
최원정: 조엄 선생 같은 분은 실학에 입각해 판단하신 거 잖아요. 이런 통신사들이 많아져야 할텐데---,
김문식: 18세기에 들어오면 시대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변하죠. 그래서 국왕들도 외국에 있는 좋은 제도와 문물을 도입하는데 노력을 하는데요. 영조 같은 경우는 그런 게 확연히 나타납니다. 가기 전에 미리 일본에 파견되는 군관들을 불러가지고 현지에 가서 일본의 산천도로, 지도를 파악하고, 그 다음에 인심이나 습속, 사람들의 살림살이나 풍속 같은 것을 잘 관찰해서 돌아오라고 하죠.
이익주: 지금 이 고구마만 해도 조엄이 가기 전에도 많은 통신사들이 고구마를 봤죠. 그런데 그 통신사들은 관심이 없었던 거예요. 조엄이 가는 18세기 후반쯤 되면은 일본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고 뭔가 조선에서도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최원정: 당연한 생각이 인제부터는 더 적극적인 행동으로 옮겨져서 문물이 들어왔겠네요, 이제?
최태성: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원동연: 그랬을 거 같애요.
최원정: 통신사는 언제까지 교류가 이어졌어요?
최태성: 아까 열두번 갔다고 했잖아요. 열두번째 간 건 본토까지는 못가고 대마도까지만 갔어요. 실질적으로 마지막 통신사는 고구마 조엄 선생이었죠. 열한번째 통신사가 마지막 이었다고 보면 됩니다.
이익주: 그때쯤 되면은 일본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많이 바뀌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러시아의 남진입니다. 러시아가 혹카이도 쪽에서 내려오거든요. 그리고 서양의 여러나라들이 일본 주위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해요. 그러니까 일본에서는 서양세력에 대한 경계가 더 중요해지면서 상대적으로 조선통신사의 중요성이 떨어지게 되죠. 그리고 조선 통신사를 영접하기 위해 들인 막대한 비용, 이 비용부담이 문제가 되면서 조선 통신사를 안받을려고 하고 조선에서도 일본에 통신사를 계속 보내야 되나 하는 생각을 이때부터 하는 거예요. 오히려 이제 막 조엄 때부터 변화의 기미가 보였는데 일본에서 소극적으로 나오니까 우리도 뭐 이렇게 되가지고 통신사가 자연스럽게 1811년을 마지막으로 중단이 됩니다.
임윤선: 너무 안타까워요. 이런 식으로 기를 쓰고 우리 돈을 들여서 라도 가서 그래 너희들 어떻게 변했는지, 우리를 침략하지 않을 때 봤어야지요.
최태성: 서양하고 교류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어요. 조선 실학자 이덕무 아시죠? 이덕무가 일본에 관한 정보를 정리해서 편찬한 청령국지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 보면 일본이 무역했던 국가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거기보면 아란타 라는 나라가 나와요.(蜻蛉國志-조선의 실학자가 일본의 역사, 문화, 풍속 등을 정리한 인문지리서). 그 아란타가 바로 네델란드에요(일본의 교역국 아란타=네델란드). 이 아란타의 정보 대부분이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면 일본 서적에서 나와요. 바로 <화한삼재도회>, 일본 서적에서 이덕무가 이런 정보를 얻어서 쓰고 있거든요.
원동연: 이덕무란 분은 조선통신사였나요? 어떻게 일본 서적을 구입할 수 있었죠?
이익주: 친구들이 통신사로 가요. 1764년(영조40년) 제11차 조선통신사 원중거, 성대중 이 두사람이 통신사로 갔다 와서 책을 보여주는데 그때 화한삼재도회 라는 중국 명나라 때 나온 백과사전입니다. (和漢三才圖會(1712년)-명나라의 <삼재도회>를 본뜬 일본의 백과사전). 앞에 和漢, 和가 일본이잖아요? 일본에서 쓴 삼재도회를 이덕무가 얻게 되는데 화한삼재도회는 그 이후에 조선 지식인들에게 굉장히 큰 영향을 미쳐서 정약용, 유두공, 한치응에게 이 책을 굉장히 중요한 책으로 소개를 하죠.
김문식: 그러니까 일본의 학문이 조선에 들어와서 영향을 주기 시작하는 거예요. 고구마도 들어왔지만 학문에 대한 인정도 하고 수용을 하기 시작하는데 문제는 그 다음에 끊어지거든요. 그런 교류가 그러니까 제가 이 시기를 생각해 보면 세계사를 생각해 보면 일본에는 서양과 연결된 고속도로가 연결되어 있어요. 제한된 코스이긴 하지만 고속도로가 놓여있어요. 조선에는 지방국도도 없어요. 이 시기에 일본하고 계속 교류가 됐다면 아마 좀 더 서양세계에 대한 이해가 되어서 우리가 지금 현재 알고 있는 역사의 진전된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을까. 상당히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최원정: 어쩌면 그렇게 결과는 극과 극으로 나뉘었는지? 왜 그랬을까요?
최태성: 일본은 지금 굉장히 새롭게 빠르게 변하고 있는 외국의 문물들을 자기 것으로 채울려고 노력하는데 우리는 여전히 아직도 그 명바라기 하면서 살아가는 모습들이 그런 결과를 낳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익주: 저는 통신사가 일본에 가서 일본의 모습을 제대로 못봤다거나 일본에 들어온 서양문화를 못봤다고 하는게 그 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가요. 왜냐하면 정말 적극적으로 볼려고 하지 않았으면 못보는 거죠. 일본에서 못보게 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병자호란이 전부 외부의 충격으로 생긴 문제잖아요. 그러면 당연히 그 외부에 대해서 시선을 돌렸어야 되는데 이걸 왜 안했을까.
원동연: 이상한 자존심인 거 같애요. 청나라가 명나라를 이겨도 청나라를 오랑캐로 규정하고 일본이 우리보다 잘 산다는 걸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는 그래서 새로운 뭐가 있어도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한 폐쇄적인 자존심이---,
김문식: 일본이 미우나 고우나 이웃이잖아요? 우리가 이사갈 수도 없고 일본이 이사갈 수도 없고 영원한 이웃으로 살 수 밖에 없는데 통신사가 교류하는 시기는 평화의 시기예요. 서로 교류를 하고 상대방에게서 수용할 수 있는 걸 수용하는 시대인데, 이게 끊어진 시대는 바로 전쟁의 시대, 갈등의 시대가 되잖아요. 그런 면에서는 조선통신사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21세기에도 일본과 어떤 관계를 가져 갈 때 무엇이 가장 바람직한 관계일 것인가에 대해서는 통신사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구요. 또 하나 우리가 반성해야 할 것은 親日-反日논쟁은 많이 하는데 知日논쟁은 안해요. 일본을 정말 잘 알고 있는가. 우리가 통신사를 볼 때도 일본을 제대로 보고 있는가 우리가 비판을 해왔는데 그럼 오늘날의 우리는 일본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지일파가 있는가? 그런 면에서 우리가 생각할 때에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최원정: 이 시대 세계를 돌아보면 눈뜨고 전쟁을 치루는 시대였잖아요. 그런데 이제 우리 같은 경우는 문화의 힘으로 不俱戴天의 원수의 나라와 평화의 시대를 오랫동안 유지해 왔다는 것, 바로 그런 가치를 인정받아서 지난해 조선통신사의 기록이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가 됐습니다. 우리가 오늘 아쉬운 부분도 많았지만 朝鮮通信使의 성과에 대해서는 우리가 마음 속에 깊이 새기는 시간이 되었길 바랍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23화, “조선통신사, 일본의 한류였나”에서 정리).
①조선 시대 조선통신사라는 용어는 1413년(태종13년) 처음 등장하며, 파견은 1428년(세종10년) 정사 박서생(朴瑞生) 사절단의 파견이 시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국교가 단절되어, 못보내다가 1607년(선조40년) 두번째로 다시 보내게 됩니다.
② 조선통신사의 파견목적은 조선의 뛰어난 문화를 일본에 전파하고 그 외세로 국방의 안전까지 도모하려는 것입니다. 조선 통신사는 왕복 11,300여 리에, 뱃길이 그 5분의 3을 차지한다. 이는 운수와 천명에 관계되는 문제다. 왕복 1년이 걸리는 고행이다. 숙종 때는 외양을 건너다가 무려 108명이 바다에 빠져 죽었다.
③ 통신사의 일본에 대한 평가: <동사록>에 실린 기록, 왜경에서 에도에 이르는 동안 모두 육지였지만 한쪽 옆은 바다였다. 땅의 형세가 평평하고 산천은 험하지 않으며 토지는 비옥했다 (중략) 도로는 평평하면서 곧고 밭 모양은 네모 반듯한데 네 모서리에는 반드시 茶草를 심었다. 시장에는 물화가 쌓여있고 여염집에는 쌀이 넘쳐난다. 그 백성들의 부유함과 물자의 풍부함에 있어 조선과는 비교할 바가 못된다.
④ 1624년(인조2년) 세번째 통신사가 8월부터 7개월간 통신부사 강홍중이 다녀와서 쓴 기록인데 이미 17세기초에 일본의 경제가 조선보다 훨씬 낫다라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⑤ 1719년(숙종45년) 아홉번째 조선통신사 기록-관광하는 남녀들이 양쪽에 담처럼 늘어섰는데 모두 비단 옷을 입었다. 거리는 方正하고 여염집은 즐비하며 시장에는 물화가 쌓여 있었다. 그러니까 이 나라는 정말 잘 산다. 그리고 도로정비 잘 되어있고 숲 잘 가꾸어져 있다.
⑥ 1747년 열번째 통신사로 파견된 화원 이성린이 사로승구도(槎路勝區圖)라는 통신사 노정을 담은 30폭의 그림을 그렸다. 조선 화원이 전체 모습을 그린 유일한 그림. 배다리와 舟橋가 있다. 水車를 따로 그렸다. 이미 17세기부터 일본이 우리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잘 살고 기술적으로 우수한 점이 있다는 걸 조선통신사가 봤다.
⑦ 오사카의 출판문화, 굉장히 충격적이다. 유성룡의 징비록(1647년)과 강항의 간양록(1656년)은 조선의 기밀이 담겨있는 고급문서인데 이게 일본서적에 쫙 깔려 있었다. 일본인들은 누구나 너무 쉽게 이런 책들을 사서 볼 수 있는 것에 깜짝 놀랬다. 유성룡의 징비록은 조선의 아픔이 다 담겨있는 책인데 이 책을 일본인이 너무 쉽게 보는 거다.
⑧ 1592년 임진왜란 때 일본인이 조선활자를 가져가서 책을 인쇄했다. 활자문화를 보급하기 위한 것인데, 일본의 출판산업은 엄청났다. 조선과 같은 금속활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엄청난 규모로 성장한 일본의 출판산업. 조선은 정부발행의 관찬서가 주류를 이뤘지만 조선후기까지 민간 자체에서 책을 만들어 파는 것은 굉장히 규모가 적었다. 조선이 일본보다 금속활자 기술은 앞섰으나 출판문화는 100년이 뒤졌다. 일본은 이때가 전성기였다, 일본은 출판속도도 빨라서 조선 통신사들이 가는 길에 필담을 하고, 에도를 돌아오는 길에 거길 들르면 책이 거기 벌써 나와 있었다.
⑨ 일본이 이처럼 잘 살게 된 것은 국내 상업의 활성화에 있다. 조선의 상업과 비교해 봤을 때 훨씬 더 상가가 발달되었다. 또 하나는 외교와 교역을 하였다. 그런 것들이 일본의 번성을 가져왔고 중국보다 잘 산다고 할 수는 없지만 조선보다는 상당히 잘 산다고 평가를 한다. 상황이 이런데도 실제로 조선에서 일본 것을 도입하자는 이야기는 안나왔다.
⑩ 1719년 10월 1일 해유록에서-관백(쇼군)의 거처에서 만난 고관의 인물 됨됨이가 시원찮으며 칼을 차고 이상한 복식을 한 이 나라가 어째서 오래도록 부국강병을 유지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764년 3월 4일 해사일기 권4에서-각종 시설물이나 가옥의 치장들이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이런 생각을 하였다. 그러다 보니까 조선에서는 그 이유를 찾고 그걸 배우려고 하는 생각은 하기가 어려웠다.
⑪ 사실 17세기초 네델란드가 조선하고 직교를 할려고 일본측에 요청했을 때 일본이 막았다. 조선하고 직교하면 관계를 끊겠다. 중개무역을 해야 되니까. 네델란드는 조선보다는 일본이 낫다고 판단해서 그냥 일본에 머물렀다. 조선은 일본에 의해 블로킹 당했다. 조선 통신사가 갔을 때 마침 일본이 쇄국을 하고 있을 때라는 것이 조선에 불운이기도 했다. 이때 일본은 네델란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네델란드 학문을 연구한다. 그걸 일본에서는 난학이라고 한다.
⑫ 조선은 너무 폐쇄적이었고 일본은 자기네에게 진나라지만 조선한테 배울건 배울려고 달려들었고 조선통신사들은 와서 직접 눈으로 보고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일본이 싫어도 일본은 서양문물을 통해서 눈부시게 발달한 것까지 많은 조선 통신사들은 직접 봤다. 그러면 일본은 싫지만 서양문물을 선택적으로 배울 수도 있는데 그냥 통째로 안배운 모습은 후손의 입장에서 화가 났다.
⑬ 조선통신사는 열두번 갔다. 열두번째는 본토까지는 못가고 대마도까지만 갔다. 실질적으로 마지막 통신사는 열한번째 고구마 조엄 선생이 마지막 이었다. 1차 1428년(세종10년), 2차 1607년(선조40년)-회답겸 쇄환사, 3차 1624년(인조2년), 4차 1636년(인조14년-병자호란)-통신사-나가사키 데지마 상관설치, 5차 1643년, 6차 1655년, 7차 1682년(숙종8년), 8차 1711년(숙종37년), 9차 1719년(숙종45년), 10차 1747년-이성린의 사로승구도, 11차 1764년(영조40년)-조엄 고구마, 12차 1811년-대마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