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글쓰기 79ㅡ 나의 까타리나 (사소)
삼십여 년 동안, '왜 그럴까?' 그녀가 그리우면서도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토록 희생적이고 착하고 세심하게 친구를 잘 챙기는 아이가, 왜 사람들에게 자주 마음을 다치는지, 그리고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게 됐는지 알고 싶었다. 고등학교 때 나는 희랍인 조르바를 읽고 선경에게 '화까리나'라는 별명을 붙였다고 착각해왔다. 그런데 휴가 때 함께하며 선경이랑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녀에게 붙인 별명은 ' 카타리나'였다.
까탈스럽고 까끌까끌한 면모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별명을 붙였을까? 다소 시니컬하고 비판적이었을 법한 나의 소녀 시절,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녀는 내게만은 극진했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그 시절 그녀에게 내가 희망이었다 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내가 무엇 하나라도 해줄 수 있던 기억이 없다. 다만 선경이를 조금 무서워했던 것이 흐릿히 남아있다. 또한 그시절 나 혼자서 그 무엇으로 몰입했으리라.
고1 때 선명한 기억의 한 자락은, 선경이의 희한한 반란이었다. 남자 영어선생님이 복도 입구에서 지각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선경이는 웬일인지 가방을 복도에 두고 집에 되돌아갔다. 그리고는 교복을 벗어버리고, 소매가 확 파진 나시 사복을 입고 학교에 씩씩하게 다시 등장했다. 사복금지였고 그럴 날씨도 아닌데 말이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수근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만 해도 우리에겐 정말 쇼킹한 뉴스였다. 경주의 밤이 깊어지면서 선경이에게 그때 왜 그랬는지 물었다.
9남매에 여덟째 딸 선경이는, 형편이 어려우니 강진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라는 아빠의 명을 받았다.그러나 강진 아닌 어디라도 탈출해야만 했던 선경은 기어이 엄마의 지원을 받아 험난하고 서러운 광주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막 올라와 언니들과 자취를 하는 첫날 그만 전세 사기를 당해버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기도 수도도 공급이 안되는 집에서 신학기에 연탄가스를 마셔 버렸다. 그후 머리도 자주 아프고 몸의 상태가 매우 안 좋았다. 담임선생님은 그런 사정을 듣고 선경이를 배려해 한 시간 늦은 등교를 허락하셨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실을 전달받지 못한 학주 선생님이 지각 단속을 한다며, 늦게 등장한 선경이를 잡아놓고 회초리로 머리를 탁탁 치신 것이다. 그때만 해도 한 등빨했던 선경이, 사춘기 절정에 연탄가스를 마신 소녀의 반항심은 수위를 조절하기 힘든 상태로 치달았으리라. 자존심이 한껏 상한 선경이는 선생님을 노려보았고, 선생님은 눈을 내리까라하시며 기를 꺾으려고 따귀를 때려버린 것이다. 때리고, 노려보고, 때리고, 노려보고, 무려 아홉 번 따귀를 맞았다 했다. 어린 소녀의 홀로 자신을 지키고자했던 저항! 너무 끔찍한 회고였다.
친구가 그런줄도 몰랐던 나, 참 무심했구나! 그땐 우린 서로에게 침묵하는 우상이었으니까...가까우면서도 멀었던 우리. 그때 나였다면 과연 견뎌 낼 수 있었을까?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은 다소 글래머러스한 그녀가 사복 투쟁으로 '너의 것은 민망함!' 을 확인시키는 것이었다. 그 시절 어린 선경은 얼마나 두렵고, 얼마나 고독했을지, 얼마나 막막하고 두려웠을지 짐작이 됐다. 이제야 상세한 이야기에 귀를 연 나는, 그때 어디에, 내 마음을 무얼 찾아 헤매느라 친구의 아픔을 온전히 느끼지 못했을까? 미안하기만 했다.
재미로 같이해 본 검사 결과, 선경이는 유비적 노벨 형이었다. 감성적이고 관계 지향적이면서도, 비판적이고 이성적인 양면을 다 갖춘, 그러면서도 원리에 대한 고찰을 즐기며 끝까지 파는 아이였다. 극도로 섬세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미시성이 최대 장점인 친구. 그녀의 프레임은 초소형이었던 것이다. 비로소 아! 선경이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극세사 같은 섬세함을 가진 그녀에게 세상은 너무 거칠었으리라. 그래서 선경이가 정성을 들이다가도 돌아서야 했던 무심한, 친구라곤 그녀에겐 돌멩이 같던 녀석들 뿐이었으리라. 정갈하고 순수했던 그녀에게 범인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스님이나 신부님을 가끔 친구로 두었던, 하지만 한동안 누구에게든 두절을 하고 지내야 했던 나의 친구. 혼자라서 편하다고 아예 결혼 생각이 없다는 친구.
이제 본 선경의 어깨는 나보다 좁고 연약해보였다. 내가 바쁠까 봐 톡도 제대로 보내지 못하는 예민한 토끼의 심장을 가진, 나의 카타리나!
* 인간 연구 ㅡ 나와 너를 이해하고 지금을 즐기고 싶다.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쓰도록 하겠습니다. 폭풍 질주도 할 수 있겠습니다.
첫댓글 선경이에게 좀더 시간을 내주세요…. ^^
ㅎ 네. 같이 미술관도 가고 선경이 좋아하는 데도 가고 그러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