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아파트에서 문이 열리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는데 아무도 없는 빈 공간에 기분 좋게 하는 상큼한 화장품 냄새가 풍겼다. 누군가 그 공간에 잠시 머물렀다가 방금 전에 떠나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침 시간에 가끔 어떤 직장인이 출근하며 엘리베이터에 남겨 두고 떠나 거기에 머무는 순한 향수 냄새나 화장품 냄새는 짧은 순간이지만 상쾌하다. 하지만 나처럼 호흡기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에게는 때로 콧속과 기관지로 스며드는 강한 향수는 괴로운 자극이어서 엘리베이터에서 잠시 숨을 참고 있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공동주택인 아파트는 늘 이 집 저 집, 이 일 저 일, 이 사람 저 사람, 이것저것의 온갖 종류의 냄새들이 뒤섞여 가가호호 떠돌아다니는 냄새들의 향연이거나 소요 사태이다. 우리는 좋든 싫든 그렇게 뒤섞여 산다.
우리의 오감 중에서 후각에 의한 냄새는 매우 원시적이고 특이한 감각이다. 우선 체계화나 개념화가 되지 않고, 어떤 종류로 분류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단순한 원시인이나 세련된 문명인이나 똑같은 냄새를 똑같이 경험한다. 그에 비해 시각에 의한 색깔은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 등으로 구분되거나, 크레파스에서 16색 32색 64색 등으로 각각 이름이 붙여져 세분되기도 한다. 또한 청각에 의한 소리도 어느 정도 분류되어 기호화된다. 도레미파솔라시의 7음계, 그 중간에 반음들 등이 그것이다. 미각도 우리의 혀에 단맛 쓴맛 신맛 짠맛 등을 느끼는 부분이 각각 구분되어 있다. 그런데 피부의 촉각에 의한 느낌은 좋다 나쁘다 혹은 부드럽다 거칠다 등의 극히 기본적인 가르기가 가능할 뿐이다. 그에 비해서 후각에 의한 냄새는 무수한 종류가 존재하며, 그걸 어떤 묶음으로 묶어서 분류할 수 없기 때문에 그냥 각각 그 사물의 이름을 따를 수밖에 없다. 밥 냄새, 된장 냄새, 김치 냄새, 마늘 냄새가 우리 한국인의 식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난생 처음으로 미국의 공항에 도착했을 때 대합실에서 풍기는 고유한 미국 냄새를, 아마도 여러 해 외국에 머물다가 한국의 공항에 들어설 때 우리 나라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각국의 공항에는 그 나라마다의 고유한 냄새가 퍼져 있다. 5월이면 산들바람에 실려 오는 아카시아꽃 향기, 6월 1일 경이면 어김없이 콧속을 자극하는 비릿한 밤꽃 냄새, 한 다발을 꽃병에 꽂아두면 방안 가득 퍼지는 뇌쇄적인 백합 향기, 새 책을 펼칠 때 호기심을 자극하는 인쇄 냄새, 은행에서 막 나온 신권 돈다발에서 풍기는 부유한 냄새, 여름날 소나기가 내린 뒤에 젖은 땅에서 퍼지는 습기의 냄새, 병원에 들어설 때 단번에 우리의 마음을 심란하게 하는 크레졸과 포름알데히드 소독약 냄새, 여름 풀밭에 누우면 옅게 감도는 풀 냄새, 겨울 헛간에 퍼진 건초 냄새, 바닷가에 다가갈 때 느껴지는 짭짤한 바다 냄새, 며칠 여행을 하고 돌아와서 현관문을 열 때 맨 먼저 나를 반기는 우리 집 냄새, 그녀에게만 은밀하게 느껴지는 그이의 체취 ... 우리는 말 그대로 세상 만물의 만 가지 냄새 속에서 살고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마도 다행인 듯 싶은데, 우리의 후각은 금방 피로해져서 같은 냄새를 오랫동안 느낄 수 없다. 덕분에 늘 새로운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이다.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면서 나는 내가 그 공간에 어떤 냄새를 남겨서 다음 사람에게 어떤 기분을 느끼게 하는지 궁금했다. 굳이 화장품이나 향수가 아니더라도 샴푸나 세숫비누 냄새로라도 다음 사람을 잠시 기분 좋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아니면 단지 나의 체취가 어떤 민감한 후각을 가진 사람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게 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혹은 내 마음과 행동과 말에 어떤 냄새가 있어서, 그것들에 접한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꿈도 야무지다.
첫댓글 호미님의 냄새에 대한 단상에 저도 모르게 빠져드네요.^^ 올 해 ㅎ 저의 목표가 '향기로운 사람이 되자!' 입니다. 사실 숨통을 터주는 '산소같은 사람'이 되고 싶긴 합니다만, 워낙 고난도 목표라 낮춰서 해보려한답니다.
좋은 냄새에 ‘햇볕에 잘 마른 빨래 냄새‘도 추가합니다. ^^
미소짓게 되네요.
언젠가 second rabbit 님이 후각에 대해서 아주 흥미로운 글을 쓰신 것 같던데. 천천히 한번 찾아보고 발견하면 댓글 다시 달께요^^
진한 향수 냄새 저도 싫어하는데, 가끔 정신 없을 때는 제가 그 원흉이 되기도 합니다.